"지난 5월 22일 수요일 오후 7시, 청담역에 위치한 페미니즘 카페이자 사회적협동조합 '두잉(DOING)'에서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북토크가 열렸습니다.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들녘'출판사가 함께 만들고 있는 청년 백과전서 '룰디스'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후기1) 위험한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기사 바로가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1157)


한때 문학이 세상을 이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다. 문학은 도래할 세상을 예언하는 언어였고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닿고자 했던 사유였다. 물론 오늘날 문학의 객관적 지위는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다. 문자는 수많은 텍스트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문학은 대중적이지도 선도적이지도 않은 다양한 미디어의 하나로 추락했다.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문학의 지위를 변화시킨 큰 요인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한국의 문학계 스스로가 낙후되길 초래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다. 문단 시스템과 ‘문학’이라는 성채는 시대가 불러낸 예언의 목소리들을 장르문학, 여성문학과 같은 부차적 범주로 국한시키며 문학계 스스로의 고립을 자처했다. 과거 문학권력 논쟁, 신경숙 표절 사태, 그리고 오늘날 문단 내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학은 스스로 위기를 자초해왔지만 여전히 문단과 메이저 출판사의 권력은 강고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변방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문단 내 성폭력 폭로와 최영미 시인의 미투 이후, 문학을 말하는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을 말하는 문학이 주목받는다. 최근 출판된 오혜진의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이 그러하며, 얼마 전 열린 한국여성문학학회 학술대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런 흐름에 어딘가에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도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위험한 사람들”

지난 5월 22일 열린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북토크에는 객석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여성의 언어, 여성의 서사에 대한 사회적 갈증을 반영하는 듯했다. 꼼꼼하게 발언을 준비해온 저자들만큼 객석에서의 질문과 발언도 풍부하고 진지했다.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제목에 대하여, 그리고 읽기와 쓰기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여성이 “쓴다는 건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담론에서 다뤄지지 않은 여성들의 일상과 정서를 언어로 만드는 일이며, 그래서 종종 “교과서에서는 다뤄지지 않는 문학”의 지평을 개척하게 된다. 그래서 “글을 읽고 쓰게 되면서 여자들은 모두 위험해진다.” 문학에 미친 여자가 많은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다.


나아가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주장하듯, 읽는 것은 읽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혁명적 과정을 거치는 일이며 읽은 사람들은 다시 읽고 또 읽은 대로 실천하며, 글쓰기로 나아간다. 사실 읽기도 쓰기도 사유 속에서 이뤄지는 일이란 점에서 모두 굉장히 능동적 행위다. 특히 오늘날 SNS를 통해 글쓰기는 일상적인 행위가 됐다. 그래서 읽는 여성은 언제나 쓰는 여성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읽는 자, 쓰는 자 모두가 위험한 존재다. “우리는 모두 위험한 사람들”이다.


“개인에게 뭐라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19세기 영국 고전문학을 다룬 저자 김태형씨는 자신이 좋아했던 소재에서 출발해 당대의 한국사회로 돌아와 끝을 맺는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의 내용을 친절하게 펼쳐내면서 150년 전 지구 반대편의 현실로부터 지금 여기의 탈코르셋 운동으로 도약한다.


그 도약의 근거는 당연히 현실과 19세기 영국 소설 사이의 ‘공통점’이다. 누구나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면서 그 사이 어딘가에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그 균형점이 낭만적 사랑을 성취한 것이든 사랑 없이 남성의 경제력 때문에 결혼한 것이든, 다들 저마다 사회적 조건과의 협상과 타협을 통해 선택을 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그려지는 여성이 결혼을 택하는 건 미진한 결론일지 모른다. 허나 19세기 영국 당대의 맥락을 이해한다면 개인을 쉽게 비난할 순 없다. 탈코르셋 역시 마찬가지다. 탈코르셋에 적극 가담하지 않은 개인을 비난하는 방식은, 실제 문제가 되는 가부장제 구조를 시야에서 지워버리게 된다. 그래서 한 줄 요약하면, “개인에게 뭐라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미치지 않았구나, 세상이 미친 거였구나”

그렇다면 한국의 근대는 여성들에게 어떠했을까? 저자 민혜영씨는 여성작가의 소설에서 나오는 ‘미친 여자’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미친 여자가 곳곳에서 등장하는 건 “근대적 모순의 필연적 결과”라고 말한다. 공식 담론은 평등을 말하지만 현실은 공/사 영역의 분리 하에서 차별이 존재한다. 이런 모순을 대면하고 “주체가 되려는 여성은 시스템에 의해 튕겨나가 미친 여자가 된다.”


객석에선 여성으로서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 너무나 많다. 공감을 크게 했다”는 반응이 나왔다. 결혼과 육아 이후 여성학 대학원을 들어가고 글을 쓰게 된 민혜영씨는 “남성을 기본값으로 한 세계”에선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을 다닐 수 없었고, 미쳐버릴 것 같았음에도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잖아”라는 말을 들으며 고통을 온전히 개인적으로만 감당해야 했다. 이런 개인사의 맥락에서 ‘미친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런 귀결이겠다.


그는 페미니즘이 자신에게 “내가 미치지 않았구나, 세상이 미친 거였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위로와 깨달음을 주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책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같이 얘기하면서 구조를 자각하는 관계와 공간이 있다면, 그런 대안적 공동체가 있다면 여자들은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이 북토크 자리에 모인 많은 이들의 심정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쓰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

근대 문학의 초기에서부터 여성작가들은 ‘미친 여성’을 그려왔다. 말하는 여성, 글쓰는 여성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신문과 잡지가 만들어져 당대 조선의 담론을 이끌어가던 1920~30년대는 근대 문학(장)의 형성기였고, 동시에 ‘여성적 문학’과 여성 작가의 형성기였다.


저자 강남규씨는 당시 ‘여성적 문학’이라는 담론을 만든 것은 남성 작가들이었다고 강조한다. 신문과 잡지에 투고된 글들을 심사하는 것이 남성이었고, 이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남성적 글쓰기’를 하는 여성들을 ‘여성작가’로 인정하면서 ‘여성적 글쓰기’가 묻어나는 글들은 폄하하였다. 당시 신문에는 여성 작가에 대한 남성 작가들의 모욕이 즐비했고, 여성 작가의 글을 비평하는 자리에 글조차 읽지 않고 참석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 여성 작가와 대비되어 ‘여류 문사’라는 비하적 범주도 만들어진다. 문학적 성취보다는 스캔들로 팔리는 여성들, 센티멘탈리즘이라는 ‘여성적’ 특성으로 글을 쓰는 경우는 여류 문사로 불리었다.


오늘날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저자의 여성 서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가운데, 문학 출판사들은 ‘여성 문학’과 ‘여성적 글쓰기’를 홍보하고 있다. 강남규씨는 이 ‘여성 문학’이라는 범주가 여전히 ‘남성 문학’이라는 보편 범주라는 걸 전제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나아가 문단과 문학 출판사의 구조에서 성폭력을 겪어온 여성들의 존재를 상기한다면, 상업적으로 ‘여성 문학’을 홍보하는 건 기만적인 일이다.


“과거와 현재의 로맨스는 다르다”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자.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읽은 문학 중 하나는 로맨스 장르다. 저자 손진원씨는 “로맨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장르”이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해지는 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하는 장르”라고 말한다. 특히 여성 저자와 독자가 많다는 건 여성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로맨스 소설의 주 소비층은 여성인 것일까? 분명 남성들 중에도 로맨스 장르를 찾는 경우가 있지만, 여성들이 더 많이 소비한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 까닭은 “아마 여성이 가장 정치 투쟁을 많이 하는 영역이 연애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섹슈얼리티나 사랑의 서사를 여성들의 입장에서 그려낸다는 것도 로맨스의 매력이다.


하지만 오늘날 낭만적 사랑과 정상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로맨스 소설은 가능할까? 오히려 페미니즘과 배치되는 것은 아닐까? 실제 모든 로맨스 소설의 관습적 문법은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한다. 즉 정상가족의 구성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 한계를 로맨스 작가도 독자도 알고 있기에 오늘날 여러 실험적 작품들이 등장하며 장르 내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가령 최근엔 남자주인공을 ‘조신남’으로 그리기도 하며, 마초적인 인물이나 장면이 나올 경우 비판적인 댓글이 달리기도 한다. 이젠 더 이상 과거 로맨스의 남자주인공을 바라지 않는다. 젠더 감수성이 있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입을 열기 시작한 여자들이 낡은 것들을 집어삼키며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는 시절에, 이 네 명의 저자들은 첫 저서를 내고 처음으로 북토크 자리에 섰다. 이제 이들은 새로운 언어들이 범람하는 당대에, 당대의 가장 첨예한 ‘위험분자’에 속하게 됐다. 위험한 존재가 됐음을 선포한 이상 더는 물리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 위험을 감지한, 수많은 읽고 쓰는 사람들이 마치 작당모의를 하듯 북토크에 함께 모였다.


저자들의 발언 중간중간에 자연스럽게 객석에서도 발언이 나왔다. 특히 민혜영씨와 함께 북토크 참가자 모두가 머리를 맞대며 ‘미친 여자’의 문학적 계보를 헤아리던 순간은 감동적인 한 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위험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과거의 여성 작가를 기억하고, 또 미친 여자가 등장했던 소설들을 서로 공유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민혜영씨가 바라던 ‘대안 공동체’의 단면이 아니었을까? 같이 모여 서로의 언어를 나눌 때, 위험한 여자들은 진정으로 공포스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싸움은 계속된다. 100년 전 식민지 시기에 ‘읽고 쓰는 여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문단과 사회 전역에 몰아친 페미니즘의 성난 파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말들이 계속 일어나 세상을 위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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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2) 읽고 쓰는 행위가 굉장히 위험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쓰기’와 ‘여자’ 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4명의 저자가 모여 책을 썼다. 과거 쓴다는 행위가 오로지 남성들만의 전유물이었다면, 근대를 지나면서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글을 읽을 뿐만 아니라 쓰는 여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여성들도 ‘사유’를 통해 더 이상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닌 하나의 주체적인 인격체가 되는 과정을 겪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읽고 쓰는 행위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는 굉장히 위협을 끼치며 위험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책 4명의 저자는 각각 본인이 공부하고 있는 주제와 일상의 삶을 통해 ‘글 쓰는 여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풀어내고자 했다. 북토크 현장에서 각각의 저자들의 챕터에서 핵심적인 주제가 될 만한 문장들을 함께 음미해보는 시간이 있었다. 그 문장들을 가지고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간략하게 요약해보고자 한다.


‘광기’는 ‘가부장제’라는 역사가 ‘근대’와 만나는 순간, 버려지고 치워져 잊혀져가는 여성들이 발화하는 울부짖음이 아니었을까. (글 쓰는 여자는 위험하다 34쪽) 


저자 민혜영씨는 본인이 아이를 키우고 일도 하는 워킹맘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매일매일 겪는 모순을 직면했다. 훌륭한 커리어우먼과 좋은 엄마, 이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과정 속에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들이 있었다. 본인을 미치게 만드는, ‘맘충’으로 만드는, ‘광녀’로 만드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파헤치고 싶어 직접 학문의 영역으로 뛰어들어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1920년부터 1990년대까지의 한국 문학 작품을 분석하고, 필요하다면 외국 문학 작품들도 살펴보다 보니 많은 ‘광녀들’이 등장함을 발견했다. 이들은 개인적인 비극으로 인해 미친 여자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이들이 미친 여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미친 여자로 몰고 갔던 공통적인 원인이 존재하는가?


1920년대 우리나라에도 소위 근대의 바람이 불면서 여성들도 글을 읽고 쓰기 시작하며 생각할 수 있는,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그려지기 시작했지만 여성이 실질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여전히 가정 내에 속했다. 시대가 지나가면서 점점 상황이 나아지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혼 후 여성은 잘 다니고 있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고 가정 내에 고립되어 ‘미친 여자’가 되어갔다. 민혜영씨의 글은 각각의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광녀들의 존재를 가부장과 근대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면밀히 관찰했다. 

-강남규

여성 문인에 대한 남성들의 견제는 시대의 얼굴을 빌려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성 문인들은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교란시키고, 때로는 협상하면서 남성 중심의 문학이라는 장에 균열을 냈다. (95쪽)


저자 강남규씨는 1920년대 식민지 체제 하에 우리나라에 근대의 물결이 들어왔던 그 특정 시기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다.’ 라는 인식이 생겨나긴 했지만 주류 지식체계를 만들어가던 주체는 남성들임에 틀림없었다. 강남규는 문단 내에서 남성적 글쓰기와 그에 반해 ‘여성적인 것’이 어떻게 철저히 폄하되어 왔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1920년대 이후 근대 문학의 형성시기를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당시 유일한 미디어인 신문, 잡지를 통해 사람들이 글을 발표했는데, 투고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남성적인 글쓰기’ 라는 기준에 맞아야 했다. 남성적인 글쓰기가 아닌 것은 ‘여성적’이며 ‘감상적’이므로 배제되었다. 여성 중에 미디어에 글을 올릴 수 있던 사람은 남성적인 글쓰기라고 평가받던 매우 소수의 여성들 또는 가족이나 지인이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던 사람들뿐이었다. 


문단 (미디어) 권력을 꽉 쥐고 있던 남성 지식인 계층은 글을 쓰는 여성들을 가십거리로 다루기 좋아했다. 여성들의 ‘글’이 아닌 여성의 외모, 행동, 사생활에 관심을 가지며 동등한 문인이 아닌 오락거리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그 영역의 전문가가 아닌 그들의 외모, 얼마나 친절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등 직업 외적인 부분으로 평가하는 오늘날의 미디어, 남성 지식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태형

우리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사람도, 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는 사람도 되지 않기를 바란다. -140쪽


앞의 저자 민혜영, 강남규가 한국 문학 작품, 한국 문단의 형성 시기를 다루었다면 저자 김태형씨는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 있는 19세기 영미 문학으로 무대의 장을 이동시킨다. 유명한 여성 작가인 제인 오스틴과 샬럿 브론테 저작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 인물들을 바라보는 제인 오스틴의 시선을 해석하고자 했다.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영미 문학 작품들이지만 정작 책을 직접 읽은 독자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뿐더러, 등장하는 인물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 김태형씨가 책을 쓴 이유이다. 


흔히 사회를 바꾸고자 운동을 하는 이들은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사회 운동, 사회 변화에 참여하지 못하는 ‘개인’들을 나무라기 쉽다. 19세기 영미 문학들에도 직접 나 자신의 삶을 변혁하며 적극적으로 비혼으로 살고자 했던 인물도 있는 반면, 그 당시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결혼이라는 도구를 통해 생존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도 있다. 김태형씨는 똑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다른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는 개인들을 따뜻하게 바라봤던 제인 오스틴의 시선을 빌려 현재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감자인 페미니즘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다루고자 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수동적, 소극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인들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이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한 개개인의 ‘희생’을 극도로 요구하는 태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진원

나는 사실상 사랑의 가치가 폄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다룬 이야기 역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통속적인’ 것으로 여겨진 것이라 설명 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문단 중심의 문학 장이 배격하던 것, 즉 ‘여성적인 것=감성적·감정적인 것=사적인 것’은 점차 주류가 되지 못하고 서브컬쳐 여성향 콘텐츠의 전유물이 되고 만 것이다. (147-148쪽)


위의 세 작가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학 작품’의 범주에 들어가 있는 작품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저자 손진원씨는 기존에 문학 작품의 장에 끼지 못하고 저 멀리 변두리에 외톨이처럼 존재하던 ‘로맨스’ 라는 장르를 불러온다. 손 작가는 장르 로맨스의 작품 정의를 단순한 사랑 이야기 이상이며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난다고 내렸다. 


손진원씨는 이 시대에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로맨스’ 작품들은 왜 그렇게 폄하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을 쓰게 되었다. 우리는 사랑이 주제인 작품을 대할 때 “왜 드라마는 죄다 사랑 이야기야?” “어후, 또 사랑 이야기네. 지겹다.” 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그 작품들을 폄하하고, 그런 작품들을 쓴 여성 작가들을 제대로 취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손진원씨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보고자 했다. 우리가 관계 속에 서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부단한 과정들이 필요하다. 이 과정은 결코 단기간에 해치워버릴 수 있는 기계적인 문제풀이가 아니다. 손진원씨는 이처럼 사랑 이야기를 전면적으로 다룬 다는 이유로 폄하되고 있는 로맨스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리고 손진원은 그 본인 스스로 로맨스 소설 작가이기도 하다. 


또한 그에 따르면 여성들이 현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고 정치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영역이 연애 관계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자연스레 사랑 이야기 또는 로맨스에 관심을 가지며 쉽게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작가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로맨스 장르의 또 다른 특징은 로맨스가 일반인이 생각하듯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작품을 예로 들면서, 그 작품 안의 주요한 플롯은 사랑이지만 그 과정에 가정폭력, 국제결혼 등등의 매우 묵직한 주제들이 들어있음을 설명했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쉽게 로맨스 장르를 진정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며 폄하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가의 바람이다.

글을 쓴다는 것과 여성이라는 주제로 이처럼 다양하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2시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평일 저녁 시간에 다양한 연령대의 청중들이 참여하여 여러 질문들을 던지며 작가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자녀의 손을 잡고 참석한 어머니들도 있었다. 아마 이런 페미니즘 모임에 가장 큰 공감을 하고, 갈망을 가져온 분들이 아닐까싶다. 


한 청중의 질문과 저자 중 한 명인 민혜영씨의 답변으로 기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질문 : 공지영의 소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속의 광녀들, 그들에게 친구 또는 연대할 수 있는 모임이 있었다면 광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답변 : 그들이 맘충 이야기를 듣고 괴로워 미치기 전에 페미니즘 책을 읽고 누군가와 나눴다면...(중략).. 이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왔구나,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똑같이 고통 받으며 고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많은 사람이 페미니즘 책을 읽고, 그것을 나눌 공간이 있다면 미치지 않을 수 있을 않을까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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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