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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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광장에 페미니스트가 있었음을 기억하라

 

바꿈 활동가 박영민 


인터뷰 전 날, 김금옥 센터장(여성미래센터)을 만났다. 어느 단체의 페미니즘 관련 행사, 그곳에서 촛불과 뉴페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계보가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던 언니들과의 만남이 참으로 즐겁다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오후 다시 만난 김금옥 센터장은 일단 차나 한 잔 마시자며 반겨주었다



집회를 함께 만들어 간, 집회에는 없는 사람들.

“610, 아마 거리에 있었는지, 지금 생각은 잘 안 나요. 아니면 학교에서 지금으로 하면 홍보물, 이거를 밀든지 뭘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6월 항쟁 때가 대학교 4학년 때였기 때문에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전부 다 거리에, 가두시위가 있으면 나가고 하는데 우리는 또 다음날을 준비해야 하잖아요. 메시지 같은 걸. 그래서 아마 가두시위가 아니었으면 총학생회 사무실 어디선가 이벌식 타자기를 두드리고, 수동식 등사기를 밀고 (유인물을 찍고). 어떤 때는 그럴 시간이 없으면 철필로 써서 찍고 다음 날 거리에서 시민들한테 나눠줬거든요.”

인터뷰 연재 초기에 만났던 황인성 이사장(수원민주화계승사업회)의 말들이 생각이 났다. 민주헌법쟁취운동본부(이하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항쟁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전 날부터 미리 나와 있었던 상황, ‘007작전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암호를 전달하는 등의 행동들.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김금옥 센터장도 마찬가지였다. 6월민주항쟁의 주역이라 불렸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1기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 환호하는 광장에 내가 있었나, 6.29때는 분명 있었는데, 환호하고 옆 사람 끌어안고. 610일날은 잘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왜냐면 집회를 준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늘 광장에서 함께 할 수만은 없거든요.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그걸 못 보거든요.

6월민주항쟁 때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전국에 비상상황, 그 때 계엄이 선포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잡혀가면 뭘 하고 옆에서 챙기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비상연락망 짜고 누가 다치면 병원가고, 누가 잡혀가면 변호사 연결해서 무료변론 해줘야 하잖아요. 이런 것들도 역할이 있었으니까 매번 광장에 거기 가서 있지는 못했어요. 우리는 막 그 광장에 가고 싶었죠.”

매일 매일 거리에 있던 삶이었고 그렇기에 그 날, 610일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에 순간 부끄러워졌다. 여전히 투쟁하는 삶을 살고 있는, 지난 30년 간 쉬지 않고 활동해온 그에게 적절치 못한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집회를 준비하느라 집회에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는 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을 30년 전의 활동가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잡히지 않았다면 삼거리에 있는 공중전화박스, 거기에 달려있는 전화번호 책에 표시를 할 것. 그 표시를 확인하면 약속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 면회를 가는 이들에게 질문을 부탁하고 답변을 전달받고. 그저 일상의 대화인 줄 아는 내용, 결국은 암호를 번역하고. 첩보영화 저리가라는 내용을 준비하고 달달 외웠을 이들을 생각하니 마냥 즐겁진 않았겠다고 하는, 철저히 준비할 만큼 무섭고 두려운 느낌도 있었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지역보다 더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김금옥 센터장이 있었던 전라북도는 당시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았던 광주의 기억을 어느 곳보다 절실히 간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웃 광주에서 계엄령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아직 그것을, 피해도 드러내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여전히 군부가 있었던 거예요. 억압했던 사람이 정권을 연장했는데,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나오니까 거의 막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런 소문도 돌았던 거예요, 계엄이 선포 될 거라고.”

이번 촛불에서는 엉뚱한 집단이 계엄을 요구했지만 실제로 계엄의 공포를 느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87년의 성과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꼭 계엄령 때문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집회 속에 없는 집회를 만든 사람들은 존재했다.

여성단체에서 운동할 때도 3.8(세계여성의 날)때 우리 활동가들은 그걸(행사 전체를 ) 못 봐요. 활동가들은 죽어라 자기가 만들었던,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구현된 모습을 자기는 모른단 말이에요. 뭐 일하고 무선하고, 현장에서 뛰어다니느라.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백조의 발들이잖아요. 또 활동가들이 일하는 사진은 아무도 안 찍어, 다 환호하는 사진만 찍잖아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후원의 밤이나 3.8행사 때는 활동가들 일하는 걸 쫓아다니면서 찍어서 보내주기도 했어요.”

아마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저 무대를 세우는 데 얼마가 들었을까, 누가 세웠을까, 곳곳에 있는 스피커는 누가 가져다놨을까. 매주 진행되는 집회에서 식순은 누가 정리했을까, 발언은 누가 수집했을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행사에서 나타나는 질서정연함은 그저 시민의식의 발전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이 질문들의 답은 대부분 퇴진행동의 활동가들에게 있을 듯하다. 촛불이 더 높게, 더 활활 타오르도록 그 밑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활동가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거리에 나가고 싶어 했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지금은 행사 때 마다 활동가들의 사진을 꼭 꼭 찍어준다고 한다. 당신도 분명 이 역사 안에 있었고, 우리가 그것을 기억한다고.



여성의 운동과 여성운동

학생운동을 하는 속에서 여학생들도 사회 진보적 의식화를 했는데 맨날 중요한 결정은 남학생들이 하고. 화염병 던질 때는 우리를 보호한다며 뒤로 빠져라, 돌멩이를 치마에 담아서 와라, 하는 식이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별 분업이 있는 거죠. 집에서 엄마가 하는 일은 여학생들이, 아빠가 하는 일은 남학생들이, 그런 게 아무도 어색하지 않은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쫙 역할 분담이 되는 거야. 그러나 그 중에 그게 불편한 사람들이 있겠죠? 저 같은 사람들?”

열심히 공부를 했다. 노동, 역사, 철학. 동기들과 스터디를 하고 의식화에 함께 뛰어들었다. 그러나 마주한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의 환경들은 사진에 찍히지 않는 활동가처럼 여성을 운동의 주체로 여기지 않고 줌-아웃(Zoom-Out)시키기 일쑤였다. 여성들은 분노했고, 목소리를 찾아 나섰다. 남학생회가 되어버린 총학생회 외에 총여학생회를 출범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도 여학생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남학생회도 있냐, 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희는 총학생회 자체가 남학생회니까 (라고 했어요). 여학생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우리도 여기서 여성들이 주체로서 사회변혁의 학생운동을 참여하겠다, 하면서 여학생회 만드는 걸 한 거지.”

총여학생회를 만들고, 단과대별 여학생회까지 조직했다. 없는곳은 없는 대로, 있는 곳은 있는 대로 '선출범 후인식'으로 일단 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가능한 단과대 별로 여학생회를 만들고 출범에 성공했다. 경쟁자 없는 단선의 선거였지만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떤 여학우는 와서 항의한 적도 있어요. 자기는 여성으로서 곱게 대학 졸업하고, 자기 집은 먹고 살만도 하고, 그냥 시집 잘 가서 자기 편하게 살았으면 되는데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줘서, 여성이 차별받고 살고 있는 걸 알려줘서, 힘들게 살게 하냐고. 왜냐면 그 때는 주체로 선다는 건 그런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어요. 우리(운동권)는 또 달랐지만 그런 사람들, 소위 일반 학우들 생각에는 싫잖아요, 예전에는 편했는데, 이런 걸 직면하고 나서 갑자기 나의 삶이 불행하고. 그렇다고 이 세상이 금방 바뀔 것 같진 않고 너무 힘들어.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 모든 여성에게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 중엔 빨간 약을 먹어버린 네오처럼 더 이상 되돌아갈 출구도 없는 곳으로 들어와 버린 이들도 있었고, 때문에 한탄도 있었다.

그러면 차라리 몰랐던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푸념도 했지만 결국 이미 알아차려버린 걸 어떻게 할 거야,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같이 그런 사람이 모여서 또 활동을 했죠.”

재밌게도 푸념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여학생회는 활기를 띠었고, 5개 단과대로 시작했던 여학생회가 전 단과대에 생길 정도로 발전을 거듭했었다. 물론 여성들의 움직임은 비단 학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876월항쟁을 겪기 전부터 개별 사건마다 여성들은 목소리를 내어왔다.

“85년도에 25세 조기 정년제를 폐지하는 운동을 했어요. 너무 웃기죠, 놀랬죠. 25살 먹었으면 여자는 시집을 갈 나이기 때문에 퇴직하라는 거야. 그 사건으로 그 때 있었던 단체의 여성단위들이 모여서 대책위를 꾸려서 싸움을 했어요. 그러다가 87년도에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고, 그 때 당시에 부정선거가 많으니까 공정선거 감시 운동을 한 거죠. 그래서 여성유권자 감시단, KBS시청거부 같은 것을 여성운동이 했었어요.

선거가 끝나고 그 대책위(25세 조기정년투쟁)가 우리도 여성문제를 여성들이 상시적으로 제기하면서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조직을 만들자, 상설기구를. 그래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을 만들게 되요, 872월에. 그래서 올해로 여연이 30년이 됐어요. 85년도 조기정년투쟁의 그 연대의 경험, 그리고 권인숙 성고문 사건 공동대응, 그리고 여성유권자공정선거감시운동 등의 운동의 경험들이 쌓여서 상설화된 게 여연의 역사에요.”

그는 여연의 역사, 그리고 여성운동을 하는 단체를 만들게 된 이야기를 하던 중 최근 촛불광장의 페미존(Femi-Zone)’의 발생과 조금은 유사한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자신의 생각 혹은 바른 말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구역설정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가 말하는 안전공간이라는 또 다르겠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서, 페미존이라고 해서, 구역을 조성하면서 목소리를 내잖아요. 용기와 바른 말을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니라. 왜냐하면 안전하지 않으니까, 공격당하니까. 그래서 그런 걸 만들어서 그 목소리를 규합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 같아요. 그걸 대비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도 여성단체연합, 여성운동하는 곳, 여학생회 등 어쩌면 우리가 용기를 내서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 같아요. 여성운동조직은 그런 공간인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거리낌이 없었던 거지.”


민주주의는 여성혐오와 함께 갈 수 없다.

더 이상 놀라고 강조하는 것도 무색하리만큼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현재의 뜨거운 키워드다. 그러나 또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운동을 30년 넘게 해온 김금옥 센터장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오랜 시간 페미니스트로 살아온 그의 앞에 신인류가 등장한 것이다.

김 센터장이 경험한 87년의 항쟁, 그 당시의 민주주의와 지금은 분명 다르다. 문제인식은 깊어졌고 사고의 폭은 넓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성숙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고 했던 주체들 중에는 일명 뉴 페미니스트(이하 뉴페미),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메르스 갤러리의 탄생 이후 등장한 2030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촛불 광장에 정권교체가 목표여서 나온 사람도 있고, 정말 이 시대를 바꿔야 된다, 가치를 바꿔야 한다, 세대를 교체해야 된다, 정말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천차만별이 나온 거예요. 어쨌든 정권교체까지는 동의를 하니까 연대를 했고, 그리고 진짜 우리가 이 사회를 새롭게 바꾼다는 것에 대해 동의가 됐어요, 그래서 새로운 민주주의로 내용이 바뀌고 확장해야 된다고, 직접민주주의를 더 확대해야 된다고, 이게 다 맞았어요.

그런데 이 민주주의 내용에서 딱 걸린 거예요. 민주주의 안에는 성평등이라고 하는 것,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그런 평등이 있어야 그게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인데. 이 다양한 정체성과 주체들이 다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니까 이제 불편해진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하자 성평등 문제는, 일단 정권교체가 중요하지. 87년에는 그런 게 통했어요. 왜냐면 독재타도, 민주쟁취 그게 너무 큰 상황이라서 거기에 집중한 거예요. 그 안에 차이라든가, 어떤 다양성을 드러내가지고 그것이 가시화될 상황이 못 됐었어요. 물론 그 안에 그런 마음에 가지고, 그런 주체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게 들어날 수 있는 시대적, 사회 인식적, 주체들의 상황이나 정치적 맥락이 그랬던 것 같고.

그런데 이번 2016, 2017년 안에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나도 거기 갔어, 정권교체 외쳐, 소수자도 왔고 누구도 왔고 나도 깃발 들고 왔어, 나도 정권교체 세력이야.’ 그런데 갑자기 이제 성차별과 이런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니까 옛날 버릇이 나와서 또 지엽적인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또 이게 왜 지엽적이냐,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죠.”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페미존이 넓어지는 만큼 여성운동단체도 활발했다. 촛불광장이라는 것은 시민의 힘으로, 시민이 만든 만큼 누구도 배제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확실히 했다. 집회에서 수화통역을 할 것을 제안한다거나 여성혐오적, 소수자혐오적 발언에 문제제기를 한다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소위 시니어그룹의 페미니스트들 역시 발맞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헌정질서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집회였지만 우습게도 논란은 한 가수의 공연여부에서 비롯되었다.

“(DJ DOC 공연에 대해) ‘여성단체는 반대했다’. 다양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이 노래를 무대에서 공연하지 않으면 안 오겠다는 사람은 없지만 이 노래가 불편해서 오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한다면 그 사람들은 오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을 안 했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했는데. 우리가 어떤 자격으로 그 사람들을 못 오게 하냐 이거예요. 퇴진행동이 그동안 합의 해왔던 것에 비추어서도 이런 상황이면 공연을 진행하기 어려운 거지요. 그런데 '일부여성단체들이 반대해서 공연이 취소 됐다'는 기사들로 인해 난리가 났지. ‘니들이 뭔데 못 하게 하냐도 있고 잘했다도 있고.”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그의 말처럼 그 노래 공연이 없으면 안 오는 사람은 없지만 진행하면 안 오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다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지 않으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는 이 일은 ‘DOC 사건쯤으로 불리며 이번 촛불시위에서 꽤 굵직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여성운동을 하며 공격 받는 일은 흔했다고 한다. 이번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이 덜 비판적으로 산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하는 농담처럼 일베에서 소위 신상 털리기를 당하면 오히려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고. 그러나 이번 공격은 당혹스러웠다. 일베가 아닌 '촛불집회 참가자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이들'이라는 사람들에게 '친박페미'라는 말을 듣는 것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사과를 받기도 했었다.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아주 많았던 것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하는 페미니스트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양립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 되었지만 여전히 함께 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꽤 많았던 이번 촛불이 탄생시킨 대통령은 다름 아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다. 성차별은 없애도록 노력하겠다, 소수자와 함께 하겠다는 선언도 아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

물론 선언만 하면 자동으로 페미니스트 자격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삐걱거림은 잦았다. ‘나중에사건이라든지 동성애 반대 발언이라든지, 왜 굳이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했을까, 그 진정성에 회의를 가질 수 있는 일들도 존재했다.

페미니스트, 그 개념을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모든 차별에 반대하고 그런 차별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내기 위해서 실천을 해야 되잖아요, 실천까지 포함하는 건데. 본인이 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는지, 어떤 의미로 했는지, 대중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또 우리는 계속 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서 그 선언도 고맙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그랬으며 어떻게 할 거야. 그런데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으니까 이렇게 해야 페미니스트야’, 라고 요구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 것은 긍정인 것 같아요.”

인터뷰를 진행했던 날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았을 시기였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여성인사들이 내각구성 후보에 올랐고 그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국가보훈처 처장으로 지목된 피우진 중령이었다. 선거운동 기간의 불협화음과 달리 내각의 성비를 적절히 맞춰나가겠다는 공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금옥 센터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말도 전했다. 피우진 중령이 보훈처장에 지목된 아주 기쁜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군대 내 동성애자 색출 작전이 있었고, 어느 대위에게는 징역 2년이 구형되었으니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상반된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문재인 대통령을 마냥 옹호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과, 촛불광장에서 그랬듯이 계속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야한다는 목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이 정부가 스스로가 촛불정권이라고 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되고, 그 촛불광장에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는 것, ‘87년체제라고 하는 한계를 넘어 더 큰 민주주의, 확장된 민주주의를 열은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들의 목소리를 배제한다거나 후순위로 취급하는 것은 이 정권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각인시키면서 견인하는 책임을 같이 져야 하는 거예요."

김금옥 센터장은 힘의 균형이 깨져 있는 사회에서 결국 우리는 연대를 통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전했다. 페미니스트들과 다른 운동과의 연대, 정부와 시민사회와의 연대, 제대로 된 젠더 거버넌스. 이게 나라냐는 물음에서 , 그러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시대. 그 시대의 서막을 연 촛불광장은 따로, 또 같이를 실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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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호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부터 그 나름의 선택을 한다. 그리고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로 나가는 순간, 앞으로의 결정들이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하기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미친 듯이 엿보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남성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도 같을 것이다. 남성을 결정한 것은 당신이 아니지만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로 한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당신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로 선택한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 글은 나의 소중하고 특별한 계기들로 인해 페미니즘을 접한 그 순간의 이야기이다. 반대로 말하면, 계기 없이는 이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나의 찌질한 이야기이자,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항상 이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친구 두 명이 있었다. 스물의 그들은 몰랐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나타나는 차별들에 점점 숨을 가빠했다. 여성의 역할을 요구했고 여성으로 살아가길 강요받았다. 그들이 느낀 주변의 눈빛은 이마트에 높이 쌓인 예쁘장한 인형들을 고를 때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상자 안에 담겨 비닐 시트지 너머의 자신들을 고르고 있는 행복해 하는 눈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스물의 나에게 ‘너의 눈빛도 똑같다’고 말했다. 나는 듣기 싫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몸서리치게 노력한 스무 해 남짓한 나의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을 삐딱하게도 바라보고 이런 저런 활동들도 해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의 눈빛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얘기해주었다.


모든 것에 지쳤을 때쯤 문득 그들이 나에게 왜 저런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내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해보기로 했다. 그들과 함께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은 그들을 구석구석 훑어본 뒤 나를 쳐다본다. 묻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다니고 있는 나의 자격과 능력을. 그런 시선에 나도 그 사람을 쳐다보면 시선을 피한다. 나의 눈빛은 맞받아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훑어본 그 사람과 같은 눈빛이다.


주변은 나에게 물었다. 그들이 너와 연인 관계인지, 친구 관계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 주변은 그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인형들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을 하나씩,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주변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들을 단지 나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나는 불편했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점점 깨달았다. 주변이 했던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생각하고 했던 말들이었음을. 산더미 같이 쌓인 인형들을 웃으며 고르고 있는, 시트지에 뿌옇게 입김이 서릴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바라보던 사람이 나였음을. 그들은 항상 이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숨을 가빠하며 시트지를 손으로 밀쳐내고 있었다. 묻어난 그 얼룩진 손자국 하나하나에 분노와 슬픔, 그리고 살고자 하는 욕망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입김으로 보이지 않게 덮어버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입김 위에 나의 숨을 포개지 않기로 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로 살기 선택한 순간은 이렇게 축축했다.


선택 이후의 세상은 상자로 가득했다. 집, 학교, 직장에는 모두 켜켜이 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모두 얼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저 얼룩은 아이와 야근에 시달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고, 저 얼룩은 오늘도 무사하길 바라며 막차 시간을 다급하게 확인하는 사람의 것이었고, 저 얼룩은 사람들의 시선에 지쳐 지하철에서 조용히 마스크를 꺼내 쓰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우리가 상자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순간들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상자가 아닌 당신 나름대로의 것으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본 그것의 어딘가에는 아픔과 분노가 묻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가족을 통해, 친구를 통해, 뉴스를 통해, 그 가슴 아픈 순간이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 그 얼룩들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와 같은 생물학적으로 남자, 특히 이성애자라면 우리는 젠더 위계에서 가장 최상위층을 차지하고 있는 권력자이다. 동시에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빨간약을 삼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몸서리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시태그 운동에 참여했는가. 아니면 스스로의 남성성에 괴로워하며 페미니스트의 자격과 의무를 이리저리 따져보았는가. 당신의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데이비드 J. 커헤인(David J. Kahane)은 「남성 여성주의라는 모순 어법」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 하는, 혹은 현재 하고 있는 남성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허식가(the poseur)이다. 그는 페미니즘 이론을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실천하게 되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부장적 환경과 직장 상사나 친구와의 관계 등에서 갈등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성인 것과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며 단지 페미니스트로 인지되길 바랄 뿐이다. 따라서 자아성찰에 따른 고통은 없다.


두 번째는 내부자(the insider)이다. 그는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실천도 하며 책임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잘 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가부장제와 같은 페미니즘이 말하는 해악들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하지만 그가 이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신의 자부심으로 삼기 위함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고민이 자아성찰로 이어지지 않는다. 주변에서도 지지를 한다. 자신의 애인이, 동료가, 친구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변화한다는데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세 번째는 인본주의(humanism)자이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가부장제의 이익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부장제로부터 어떻게 억압을 받는지 잘 알고 있다. 인본주의자들이 집중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제로부터의 억압 부분이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남성이 되길 바라며, 여성적 특성과 더욱 관계 맺기를 바라지만 초점은 남성들 간의 경쟁 약화,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 증가와 같은 남성들의 복지에 있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은 가부장제의 폐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네 번째는 자기 학대자(the self-flagellator)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깊은 지식과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성차별적 충동, 과거에 현재에 대한 죄책감과 끊임없이 싸운다.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런 과도한 자기성찰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발전적일 수 없다. 자기 비하에 몰입하면 할수록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에 머뭇거리게 되고,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자기 학대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본주의자 또는 내부자로 옅어지거나 아예 페미니즘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도 한다.


커헤인이 제시한 이 네 가지 유형이 전부인 것도, 남성 페미니스트가 반드시 이 네 가지 유형 중 하나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분류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자기 성찰과 이론, 실천을 동시에, 적절한 수준으로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두려움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면 할수록 페미니즘이 비판하고 있는, 타파해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개안 직후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한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행동과 언어, 살아온 과정에 대한 재해석이었다. 태어나 처음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끼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책임을 물었다. 나는 자기 학대자였다. 당신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즘, 그 안과 밖의 어려움


나의 경우 이전까지의 나에 대한 재해석과 이로 인한 태생적 한계에 대한 내적 집중은 동시에 외적으로의 어려움을 가져왔다. 나의 주변 환경에서의 어려움은 페미니즘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페미니즘을 모르거나 이에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들, 혹은 모르는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해내는 사람들이다. 나는 여성인 친구가 많은 편인데, 이는 페이스북의 이성애자 연애 관련 페이지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 주제이다. ‘절대 이성 간에는 친구가 될 수 없으니 자신의 애인이 이성 친구와 자주 놀지 않게 관리하라’는 것이다. 나의 남성 친구들도 이 문제에 대해 궁금해 했다. 이것은 ‘이성은 잠재적 연애 대상’이라는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성 페미니스트란 잠재적 연애 대상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습게도 이 관점은 국립국어원도 다르지 않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페미니스트’를 검색해보면, 페미니스트를 “「명사」 「1」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2」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자기성찰의 의도와 그 목적은 여자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현실에서 실제로 여성과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보며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이 사람은 게이가 아닐까’하는 소수자 혐오이다. 남자가 여자와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게이만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인식을 나타낸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소수자 혐오가 결합된 이 무지와 폭력의 끝은 우리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이것이 페미니즘을 모르는 바깥에서의 문제라면 페미니즘 안쪽에서의 문제는 결이 다르지만 더 중요하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해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이다.


가부장제의 폐해에 대하여, 성적 차별에 대하여 아무리 공부를 하더라도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적 구조와 그것의 부분이자 재생하는 주체로서 나는, 이러한 관성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나의 페미니즘 지식과 실천 경험에 빗대어 자신감 있게 내딛은 것이 내가 가진 권력과 결합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또한 나는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을 말할 때 ‘이것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닌 남자에게도 가치 있는 일이다.’, ‘여성이 살기 좋은 세상이 우리도 살기 좋은 세상이다.’ 등과 같이 이것이 남성들을 차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운동이 결국 남성들의 이익과 복지 향상을 위한 것이라면 연대할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내려놓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온다는 것이다. 당신의 페미니스트 공동체와 그 연대는 어떠한가.


남자가 뱉어내는 페미니즘


고민의 연장으로 무엇보다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남성이 무섭다는, 남성혐오에 걸릴 것 같다고 고백하는 여성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슬픈 이유는 이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항해 우리 주변의 남성들이 단순히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죽음과 억울함의 대비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답고자 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죽음


몰래 카메라가 있을까 화장실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여성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에 떠는 여성

테러를 당할까 이별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

아기를 출산하는 순간 해고되어 재취업되지 않는 경력단절 여성

자신의 꿈을 이루려 일과 육아를 모두 떠안다 과로로 떠난 여성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었다고 해고된 여성

허락 받지 못한 가짜 페미니즘을 하는 메갈리아

가임기여서 지도에 표시된 여성

여자라서 죽은 여성


억울함


남자만 군대 가서 억울한 남성

남자만 무거운 것을 들어서 억울한 남성

여자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운전하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자신보다 똑똑한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직장 상사인 것이 싫은 남성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라 싫은 남성

성평등주의가 아닌 여성주의라 싫은 남성

‘나도 여자가 많은 집에서 태어난’ 남성

여성들이 자신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아서 싫은 남성

여성과 남성이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고 1인 시위하는 남성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닌 계급의 문제라며 조개 무덤을 쌓는 남성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억울한 남성


그리고 이 죽음에 대비한 나의 페미니즘 역사는 남자들의 억울함만큼의 보잘 것 없음을 자랑한다. 내가 페미니즘을 하고자 한 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하고자 한 이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유는 그저 ‘살아있고자’ 함이었다. 나는 죽음에 대비해 불편함과 억울함을 뱉어내듯이 ‘인간’을 뱉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더 나은 인간이기 위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기에 그들을 ‘보호’하고자 허겁지겁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권력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그것을 통해 보호하고자 함은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당신이 만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커헤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윤리적으로 불완전하고 복합적인 존재로 기꺼이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둘은 비판에 대해 개방적일 것과 지속적으로 자아 성찰을 하라는 것이다. 셋은 남성 활동가들과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한남’과 ‘유니콘’의 사이, 분노와 용서의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방에 앉아 울고만 있지 말자. 칭찬 받으려 하지 말자. 페미니즘으로 치장하지 말자. 분노와 용서 사이의 그 어딘가를 뚫고 나가자. 내가 만난 페미니즘은 무엇이 가장 옳은 길인지 알려주는 것이 아닌, 무엇이 옳지 않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한계를 넘기 위해 당신이 만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다섯 살, 아니 사실 태어날 때부터 내 존재와 생명을 위협하는 젠더폭력을 숱하게 겪어야 했다. 남존여비 가정에서 태어났고 여아낙태 위험과 부계폭력에 처해 변변찮은 도움구할 곳 하나 없이 버텨왔다. 5살적에는 납치와 강간미수, 8살 때는 바지와 속옷을 벗고 발기된 성기로 쫒아오던 아저씨도 있었다. 당구채로 어떤 날은 듀오백 의자로 흠씬 두들겨 맞으며 아버지의 가부장적 참교육을 버텨내던 날들, 아버지의 자해로 선혈이 낭자하던 내 방 침대. 이별 통보에 염산을 들고 숨어있겠다던 전 남자친구 그리고 한강 투신 협박. 


어둡고 지독한 이야기, 토해내는 처절한 언어,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정적인 경험들로 내 삶의 역사는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스스로를 미친 듯이 분리하고 싶었다. 유쾌하지 않은 ‘비정상적’ 삶에서 탈출하여 유쾌한 나만의 '정상'범주를 꾸리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 피해경험은 사소한 것, 잊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야 나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전까지 나의 피해경험은 내가 지독하게 운이 나빠서 우연하고도 특이하게 겪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오직 개인의 경험으로 덮어버릴 피해와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슷한 경험들, 그로인해 삶을 이어가는 것 조차 힘들어하는 사람들, 혹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 앞에서 나의 착각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나의 역사였지만 오직 개인의 경험으로 덮어버릴 피해와 상처들이 아니었다. 강남역 사건이 터지고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며 두려움과 분노에 눈물을 훔치며 모이는 여성들은 그들 자체로 젠더피해의 산증인들이었다. 그 삶의 경험으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그 심정으로 거리에 나온 것이었다. 나와 같은 상처를 위로하며 곧 자신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발화하기를 막 시작했다. 강남역 사건이 페미니즘 계보에 중요한 지점이 되는 이유는 그것에 있다. 시대 여성들이 발언하기를 시작했다는 것. 그동안 삶에서 겪어온 젠더피해에 대해 우리는 묵인 “당했다.” 가해자는 자연적인 본능을 억눌러야하는 현자가 단순 실수를 저지른 것이 되는데 반해 피해자는 상황에 있어 조금의 흠결도 있어서는 안 되는 완전무결한 순결성을 지녀야만 비로소 시혜적인 피해자로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왜 여성의 피해사실과 그로인한 사회적 약자성을 젠더권력을 가진 남성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가? 왜 이 사회에서 젠더피해를 말하는 것은 유별나고 예민한 것이 되는가? 여성이기 때문에 거쳐야했던 이 지독한 일상이 많은 누군가들에게는 고백이 되고 충격이 되고 새삼스러운 일이 되고 균열이 되고 불쾌함이 된다. 과소산정 된 피해의 통계치는 그 숫자마저 지워지기 일쑤지만 그 단순 산정되는 숫자 너머에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존재한다. 강남역에 모인 여성들은 남성과 공존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쉽게 생각하고 발화할 수 없었던 서로의 젠더폭력 피해경험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피해경험을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피해자에 대한 스스로의 코르셋을 벗고 행동할 수 있었다. 


코르셋에 가둔 ‘약자의 권력’


앞서 말했듯 약자의 권리는 피해경험 자체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젠더사회 억압의 유지를 원하는 남성사회는 여성의 피해경험을 쉽게 부정하거나 무시한다.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피해경험을 무시하고 피해경험을 말하기 이전에 피해의 인지 자체를 못하도록 교란시킨다. 무력하고 나약한 약자의 이미지를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남성성을 자성해야 하는 젠더 가해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한다. 


1. 순결한 피해자 코르셋


‘몸가짐, 조신함’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순결함은 모두 성범죄 피해자에게 “원인제공자”의 낙인을 찍어 폭력의 책임을 전가하는 동시에 성범죄 가해자에게 가해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덜어내는 가해자중심 정서이다. 애초에 젠더권력자들이 정해놓은 완전무결한 기준에 합당하는 피해자는 있을 수 없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순결함은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장치일 뿐이다. (*꽃뱀논리가 대표적인데, 성범죄의 무고죄 판결이 여타의 다른 범죄와 유사한 2% 수준에 그침에도 젠더폭력의 피해자성을 어떻게든 인정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억압기제로 작용한다.)


피해자에게 원인을 귀결하는 정서에 성범죄 피해자는 스스로를 추스르고 폭력의 원인을 자신으로부터 검열하기에 이른다. 목소리를 내어 신고를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의 상황이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 피해자는 사회의 부당한 시선과 프레이밍에 차선의 자기방어라도 하기 위해 피해사실 자체를 묵인한다. 밝혀지지 못한 폭력이 주변 곳곳에 산재해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순결함을 강요하는 사회적 정서는 결국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여성들 스스로 예방하고 방어하라는 것이 된다. 흉흉히 들려오는 범죄소식에 젠더약자들은 서로를 조심하자며 밤늦게 다니지 말자며 다독일 뿐이다. 심지어는 남성 애인들의 “어떤 옷을 입지 말라”, “어떤 화장을 해라”하는 말들. 폭력에는 특정 시간과 장소와 피해자의 옷차림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의 강간의지 그 자체에 있을 뿐이다. 성범죄는 근절해야할 것이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조심하는 것인가? 잠재적 범죄자는 없다는데 왜 잠재적 범죄의 대상화가 되어 범죄의 책무를 발생도 전에 부담하고 있는가. 공공연한 젠더폭력과 피해경험은 가히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잠재적 피해자도 아닌 엄연한 젠더 피해자로 잠재적 범죄의 대상화가 된다. 순결한 피해자 코르셋은 모든 여성의 신체를 성적인 대상임을, 갈취될 수 있는 대상(물건)임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여성들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공론을 어떠한 문제의식 없이 내면화하기 쉽다. 일종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으로 스스로 현실적인 코르셋을 인지하지 못하고 판단력을 잃게 되어 자신을 지배하는 담론에 휘둘리게 된다. 


2. 순결한 모성애 코르셋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딸로 태어나 남성의 아내로 가정의 어머니로 만들어진다. 가부장사회의 생애주기를 거쳐 만들어진 모성애는 여성의 무한한 희생을 요구한다. 미혼 여성은 개인의 꿈, 욕망, 정체성과 상관없이 신체적인 특징을 꼬집혀 ‘가임기 여성’으로 몰살당한다. 


남성사회는 여성이라면 꼭 수행해야 마땅한 역할이라며, 철저히 무시하고 혐오하면서도 돌봄 노동을 강요한다. 여성의 노동을 아주 저렴하게 착취한다. 만들어진 모성애로 세뇌된 우리의 어머니들은 스스로가 착취를 당하는 것을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존재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돌봄 노동은 반드시 필요로 되는 존엄한 노동이다. 근대화의 과실이 자유시장의 범주에 있었던 남성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탄생과 죽음까지에 여성 돌봄 노동의 착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의 분담은 유한한 인간 존재를 위해 서로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도 폭력적인 남성성의 해체를 위해서도 분담되어야 할 의무이다.


주변에도 미혼모는 넘쳐나지만 미혼부는 보기 드문 것이 현실이다. 제대로 된 성교육도, 미혼부모가 되었을 때의 어떤 방침과 제대로 된 지원제도도 없는 사회에서 덜컥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책임은 대부분 여성에게 돌아간다. 미혼부에게 양육비를 요구하는 소송 자체가 많지 않은 것은 아이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을 모성애라는 미명하에 여성이 조용히 떠안기 때문이다. 미혼부에게 양육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모성애의 양심으로 지워버린다. 양육비를 요구해도 대부분의 미혼부가 지급할 경제력이 없는 것이 실상이긴 하나 많은 미혼모가 최저임금의 벌이로 지원 없이 혼자 아이를 키워나간다. 신체적 순결함에 위배된다는 미혼모에 대한 징벌적 시선을 모성애의 부담과 함께 떠안는다.


3. 친절한 페미니스트 코르셋


페미니즘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참으로도 다채로운 혐오와 코르셋이 펼쳐졌다. 페미니즘을 뜨거운 감자로 만든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문제되어 왔던 유리천장이나 성범죄보다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고 믿었던 남성들의 인식을 재확인한 충격이 컸다. 분노하고 좌절한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친절함, 피해경험에 대한 상처를 부정당한 경험들, 세상으로부터의 단절감, 자기혐오가 이어졌다. 젠더폭력의 현실에는 그저 안주하던 자들이 내가 페미니즘을 말하기 시작하자 나의 태도를 뒷짐을 지고 지적하며 나의 생각과 언어를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언젠가 나는 평화를 말했고 또 언젠가 나는 계급 갈등도 지적했다. 그들과 희망을 가지고 공유했던 담론들이 페미니즘 앞에서 모두 무너졌다. 그들도 나의 입장에 어떤 충격과 상처를 받았을 수 있겠지만(사실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 대부분이라 짐작한다) 나로서는 나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참혹한 심정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면서 오랜 친구들과도 결별했다. 지독한 스토킹으로 힘들었던 시절(그 스토킹은 6년째 지속되고 있다) 정신적으로 많이 도와줬던 고마운 친구들인데, 친구들의 혐오발언을 견디지 못해 내가 스스로 뛰쳐나오게 되었다. 인연이 애석하지만 내가 미안할 것이 없듯 그들도 페미니즘을 알지 않고서야 영원히 미안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친구는 내가 정상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페미니즘)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고, 어떤 친구들은 당장의 부계폭력에 처한 내게 무턱대고 그래도 아버지를 미워해선 안 된다고 했다. 약자의 권리를 찾아가자는 이 글도 그들에게는 피해의식에, 망상에 찬 과격한 글이라고 읽힐 것 같다. 그들에게는 없는 피해가 내게는 있으니 구분되는 의식이 내게 투철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의 입맛에 맞는 페미니즘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새로 만나서 기쁘다는 위안은 하지 않겠다. 차별주의자일지라도 내게는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다. 마음 아픈 인간관계의 결별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도 나의 페미니즘은 더욱 필요한 것이다. 


4. 남성성 코르셋 


만들어진 여성성의 코르셋은 아주 정교하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나의 경험과 언어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공부하면서도 나의 무의식적인 코르셋과 남성성에 여전히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나는 자아의 깊은 곳에 트라우마처럼 남성성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성성에 대한 트라우마는 나의 페미니즘 언어를 흐리게 하고 자꾸만 판단을 교란시키려고 한다. 약자의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해체해야 할 나의 마지막 코르셋은 바로 이 공포심일 것이다.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 외쳐야 한다. 


여성은 여느 남성과 같은 인간임에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성으로 규정되고 착취당하며 폭력에 처해 진다. 피해자의 발화를 억압하는 남성중심의 '정상'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은 끝없는 자기검열을 한다. 여성성의 '비정상'을 느끼고 자기혐오를 떨쳐내야 한다. 착취가 공공연하여 정당화되는 구조에서 독자적인 존재인 나를 분리해내는 과정이다. 


‘더럽혀진’, ‘발랑까진’ 피해자는 없다. 젠더피해를 밝히고 마땅히 권리를 찾아야할 약자성에 무력하고 나약한, 완벽한 순결성을 요구하는 시선은 약자성을 젠더권력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시혜적 약자성일 뿐이다. 약자성은 여성의 피해경험 자체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지 가해자인 기득남성이 인정하느냐 마느냐 검증할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다. 시혜적 약자성은 근본적으로 약자성의 지속을 고질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억압이 깃들어 있으며 여성들의 권리 찾기를 교란시킨다. 우리의 피해경험을 지우고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시혜적 약자성에서 떨쳐나 스스로의 권리를, 약자의 권리를 찾아 외쳐야 한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채식주의 일상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24살 평범한 대학생이에요. 저는 집이 부산이라,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보통 하루에 두 번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요. 과일 한 쪽 들고 등교했다가 1,2교시를 마치고 친구들과 밥을 먹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거나 다른 활동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돌아오죠.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에는 늦게까지 뒷풀이를 하기도 해요. 아마 많은 대학생들과 직장인 여러분들이 저와 비슷한 생활패턴으로 살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채식을 하면서 제일 힘든 건 이런 제 생활패턴 때문이었어요. 만약 제가 함께 사는 가족이 있고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먹을 수 있다면, 또 시간적 여유가 있고 밥상의 온기를 나눌 사람들이 있다면 비교적 채식을 하기 쉬웠을 거에요. 그렇지만 밖에서 자주 사 먹는 생활패턴을 유지하면서 매번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찾는 건 정말 힘든 일이더라고요. 메뉴 선택 폭이 굉장히 한정되어있어서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적도 많았죠. 치킨 안 먹고 삼겹살을 안 먹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찾는 건 정말 힘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어떤 인간관계에서는 우리가 메뉴선택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래서 메뉴를 선택할 때는 별 말 없이 있다가, 막상 음식점에 가서 먹지 않는 저에게 질문 포화가 쏟아지기도 했어요.

저는 채식을 시작하기 전에도 원래 고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요. 삽겹살은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먹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채식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일주일만에 그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지 깨달았죠. 많은 음식이 육수로 만들어졌거나 육류 가공품(소시지 등)이었고, 고기를 메인으로 하지 않더라도 소량이나마 들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그 모든 선택지를 제거하고 나면 거의 사 먹을 게 없었죠. 특히 우리나라는 대부분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있는지 밝혀놓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육수를 마셨을 수도 있어요. 참 채식하기 힘든 나라에요.


채식을 하게 된 이유


처음 ‘채식’의 필요성을 깨닫고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는 2008년이에요. 당시 광우병 파동이 일면서, 먹거리 안전에 대한 불안이 극대화되었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국민 건강은 뒷전인 대한민국 CEO 대통령을 규탄하며 촛불을 들었어요. 저는 그 때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급식에 나오는 소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었고 급식 때 고기만 빼고 받았던 기억이 나요. 더 충격이었던 건, ‘PD수첩’이라는 방송에서 본 소들의 모습이었어요. 그 때까지 저는 소들이 목장에서 뛰어노는 걸 상상했던지, 좁은 틀 안에 갇혀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소들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죠. 그 이후 PD수첩은 보도의 사실 여부를 다투는 소송을 여러 차례 겪어야했지만, 그걸 계기로 ‘미국식 공장식 축산’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내가 먹는 고기는 대부분 저렇게 사육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그로부터 2년 후에는 구제역이 터졌어요. 수많은 돼지들이 산 채로 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장면, 그리고 그 돼지들이 마지막까지 살고 싶어 바둥거리며 소리지르는 장면을 봤어요. 그 때 돼지가 ‘고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걸, 생의 의지를 가진 생명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지금도 구글에 들어가서 ‘구제역’을 검색하면 나오는데, 여전히 그 장면은 머리에 선명해요. 정부는 그 이후에 돼지가 모두 사라졌고, 구제역이 해결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냈어요. 그런데 아직도 그 지역에 가보면 침출수와 가스냄새가 난다고 해요. 산 채로 묻힌 그 돼지들이 어디로 갔겠어요? 

2017년 12월 지금,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로 다시 온 나라가 들썩거려요. 수 만마리의 산란닭들이 생매장되고 있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것보다는 달걀을 싼 값에 못 먹는다는 것 때문에 더 짜증나 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열심히 방역을 해도, 제주도에서까지 AI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와요. 이렇게 몇 번이나 대규모 가축 전염병을 겪으면서, 우린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변화시켜왔을까요? 방역을 더 열심히 하고, 우리 지역 가축이 피해를 보지 않으면 되는 걸까요? 이 규칙적인 전염병 파동은 우연일까요?


공장식 축산, 출처 모를 고깃덩어리들


우리는 매일매일 돼지, 소, 닭들을 ‘고기’라는 형태로 만나요. 그런데 이 고기가 한 때 살아있는 생명이었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단지 이것이 어떤 살의 맛인지 어렴풋이 구별할 수 있을 뿐, 이 고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온 생명체였는지 생각하지는 않죠. 광우병 당시에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거졌고 사람들은 실태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실제 축사를 보거나 동물을 도축하는 장면을 본 사람은 극소수에요.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싼 가격에 먹는 걸 당연시 여기는 세상에서 살상에 대한 죄책감은 최대한 빨리 지워버려야 하는 무의미한 생각일 뿐이죠. 그 죄책감은 식용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식문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돼요.

가끔 식탁에 올라온 그을린 살덩어리를 가만히 쳐다보게 될 때가 있어요. 그 때 ‘이 고기가 살아생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을 때 많이 괴로워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떤 생명의 시체를 먹는 행위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런데 대부분 고기를 파는 음식점에 걸린 동물 마스코트들은 모두 하나같이 웃고 있어요.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가 보지 못한 끔직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하고, 고기 먹는 행위를 쉽게 정당화해요. 거기에 더해 갖가지 논리를 덧붙이죠. 인간은 옛날부터 육식을 해온 동물이다, 동물들(적어도 돼지, 닭 등)은 인간만큼 고통을 많이 느끼지 못할 것이다, 고기를 안 먹으면 단백질은 어떻게 섭취할 거냐….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허점 많은 논리들을 허겁지겁 소화하죠.

사육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라고 해요. 공장식 축산시스템 하에서 식용으로 길러지는 동물들은 그야말로 ‘생명’이 아니라 ‘상품’입니다. 동물들이 먹는 것, 움직이는 것, 행동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몸값’, 즉 상품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만 허용되죠. 축산업 관점에서는 가축이 병이 나거나 죽을 정도로 아프다 해도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까지만 약으로 버티며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각종 질병에 대한 ‘땜질’을 위해 항생제와 약물을 엄청나게 투입해요. 고미송, <채식주의를 넘어서>, p.88

닭들은 건강이 아니라 무게에 따라 값이 매겨지기 때문에 그들에게 먹이는 모이 역시 최대한 싼 값에 몸무게를 많이 불릴 수 있도록만 선택돼요. 동물에 대한 학대도 믿기 어려울 수준이지만, 우리가 싼 값에 먹는 고기들이 항생제와 호르몬 덩어리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공장식 축산의 실태가 많은 사람들을 채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 같아요. 공장식 축산시스템 하에서 생산되는 고기가 우리 몸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극심한 고통에 대한 감수성 또한 많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동물 해방>의 저자 피터 싱어는, 동물에게도 ‘쾌고감수능력’이 있다는 점을 들어, 인간이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동물에게 쾌고감수능력이 없다는 점이 소위 ‘과학적으로’ 증명된다면, 동물을 먹어도 되는 걸까요? 안락사를 통해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일 수 있다면 육식은 정당화되는 걸까요?


에코페미니즘을 만나다


제가 위와 같은 물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쯤, 에코페미니즘을 만났어요. 육식을 하는 일이 힘겹게 느껴져서 스스로 이유를 더 찾아야만 했을 시기였어요. 다른 생명을 먹지 않는 일을 위해 별다른 특별한 이유를 찾는다는 게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육식이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그저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 자주 들거든요. 그래서 언제나 저의 윤리적 감각을 깨워 줄, 육식이 자연스러운 세상에서도 꿋꿋이 채식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더 많아지기를 바랐어요. 그 때, 에코페미니즘을 만났어요.

에코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 논리가 사실상 인간 중심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해요. 예전에 남성들은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딱지를 붙이고, 동물과 다르지 않은 하등한 존재라고 여겼어요. 물론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비하 뿐 아니라, 동물에 대한 비하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여성들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더 많은 사회적 권리를 쟁취했고, 주류 남성들이 규정하는 ‘인간’ 범주 안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다면, 그 ‘사회적 경계’라는 것이 어디까지 유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동물이 인간과 다르다>는 논리는, <남성은 여성과 다르다>는 논리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결국 어떤 존재를 존중할 만한 존재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 그 존재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대상을 대할 ‘태도’를 택하고 그것을 설명할 논리와 근거를 찾아내는 것일 뿐, 그 논리와 지식이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랜 시간이 지나, 여성이 영혼이 있는 존재이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보면서 이 점을 더욱 뼈저리게 느낍니다. 피터 싱어처럼 ‘동물이 인간과 같이 동등하게 고통을 느끼는 존재’임을 합리적으로 밝히는 건 인간이 동물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줍니다. 그러나 이 점을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반려견,반려묘를 보면서 이미 이 사실을 알고있어요. 과학적인 근거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걸,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걸요. 다만 육식이 정상성이 되는 시스템은 이러한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라는 패배감에 굴복하도록 만들어요.


채식주의 실천하기


식물도 생명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물론 식물도 동물만큼 고귀하고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먹을 때 도덕적 책임감을 더 많이 느끼는지 솔직히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와 가까운 존재들부터 해방을 시켜나가는 것이 적절한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존중과 해방의 역사는 ‘나’, ‘우리’와 가까운 존재들부터 이루어져왔으니까요. 좁디좁은 우리에 갇힌 돼지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의 꼬리를 잘라먹고, 배터리 케이지 안에 닭들이 제대로 날개 한번 펴지 못하는 현실을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그 사람의 공감능력이 굳게 닫혀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할 거에요. “나 하나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서, 공장식 축산과 동물복지가 해결될까?” 그렇지만 인류가 육류소비를 줄이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이 많은 인구에게 고기를 먹이려면 더 싸고 잔혹한 방식으로 사육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고기 소비량을 줄이는 것은 공장식 축산을 탈피하는 가장 적절하고 빠른 길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동참을 권유한다면 더 효과적인 저항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할 수 있어요. “고기를 하나도 안 먹으면 뭘 먹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물론 쉽지 않지만, 할 수 있어요. 오히려 저는 집에서 반찬을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외식음식을 도전해보면서 채식 이전에는 몰랐던 맛을 더 많이 알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화가 많이 줄어들었고, 마음이 건강해졌어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음, 그 마음이 저를 더 강하고 건강하게 해요.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글쓴이_갱


한 여성이 죽었다. 공무원이었고, 복직한 후 주 7일을 꼬박 출근하며 내내 야근했다. 세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그녀는 집에서도 거의 쉬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말을 아이들과 보내기 위해 일요일 오전 5시에 출근했던 그녀는 지난 15일 비상계단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이 뉴스를 보고나서, 얼마 전 네이버 사장으로 발탁된 한성숙 씨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성들도 프로야구 선수처럼 일에 임했으면 좋겠어요. 더 높은 타율을 낸 타자가 더 많은 연봉을 받는 논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처우를 ‘차별’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어 바라보는 것은 조금 위험한 것 같아요.”  이 두 가지 사건은 여성을 향한 시각과 실제 여성이 살아내는 삶 사이의 괴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는 임신 기간 동안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약 5개월 정도 밤늦게까지 야근과 주말 출근에 매달렸다. 임산부가 일정 시간 이상 야근하는 건 불법이기 때문에, 야근계를 정식으로 올리지 못하고 일해야 했다. 그러니 당연히 야근 수당은 없었다. 프로젝트 동안 함께 고생했던 선배들 역시 후배인 내가 야근 수당을 받지 못하자 그들도 야근계를 올리지 않았다. 정작 리더는 이러한 일에 모르쇠로 일관하며 ‘왜 임산부가 야근을 해? 야근 하지마~' 라며 영혼 없이 말하곤 했다. 우리끼리만 애틋한 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나는 결국 조산 위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아기는 40주 0일까지 끝까지 버티다 나왔다. 이미 열린거나 마찬가지였던 자궁 입구에 힘껏 매달려 준 아기에게 고마웠지만, 아기와 달리 나는 육아휴직 1년조차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나와야 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구조조정이었고, 내용은 육아휴직자 전원 전환 배치였다. 배신감과 자괴감에 퇴사를 선택했다. 5년 남짓 일했던 직장의 소지품을 모두 쓸어 담았는데 상자 하나도 다 채우지 못했다. 반쯤 빈 상자를 허탈한 마음으로 터덜터덜 들고 나왔다. 그리고 아기가 6개월 되던 때, 다른 회사로 복직했다.


복직한 내가 싸워야 했던 건 그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었다. 복직 이후에도 나는 계속 우울에 빠져 있었다. 내가 무능했기 때문에 조직으로부터 내쳐졌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고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라도 더 열심히 일을 하거나 자기계발 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 모든 것이 불가능했다. 업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야근과 밤샘 업무가 많은 남편 직업의 특성 상 아이를 맡길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아기를 돌보아야 하므로 남자인 남편이 야근을 선점하면 나는 야근을 할 수가 없었다. 남자처럼 일하라? 남자가 그렇게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혼자서 잘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신 아내가 아이를 돌보기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4명 중 1명 꼴로 육아휴직 후 일자리를 잃는데 육아휴직 사용자의 비율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높다. 경력단절 여성 비율이 3명 중 1명 꼴로 높은 것 또한 이와 연장선 상의 문제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성들을 향한 비난은 어딜가나 들려온다. 칼퇴하는 엄마들, 야근을 미루는 상사, 카페나 식당에서 ‘발견’되는 맘충들까지. 


애쓰며 살지 않으면 어디론가 쓸려 가 버릴 것 같아 두렵다. 모두 그 자리에 있는데 나만 회사를 떠나야 했던 것처럼,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시 지워질 것 같아 괴롭다. 그렇지만 아내와 엄마라는 자리는 나를 순순히 사무실에 앉혀 두지 않는다. 세 아이의 엄마였던 그녀는 분명 아이들이 자고 난 이후에 잠들었다가, 아이들이 아직 깨기 전인 새벽 서너시부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을 것이다. 고통, 피로, 죄책감.. 그녀의 출근 가운데 스며들었을 감정들이 낱낱이 상상된다.


한성숙 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혼과 육아라는 시기를 거치면서 훅 사라져버린 여성 인재가 너무 많았어요.” 그런 여성을 향해 ‘버티라’고 말하는 그 단순한 논리에서 나는 다시 절망스러운 대한민국을 마주한다. 이 여성의 죽음을 두고 "아이 기르는 엄마에게 10시부터 4시까지 단축 근무"를 말하는 정치인이나, "여성들이 잘 버텨내길" 바란다는 기업인이나 자신들이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몫을 너무 쉽게 타인에게 전가해버린다. 특히 전자는 육아를 '엄마'의 일로 한정 짓고 '엄마'라면 응당 일보다 아이를 택할 것이라는 낡은 가부장적 사고 아래 여성의 노동권을 침해한다. 그 여성들은 왜 사라졌을까? 그녀들 스스로 일 대신 육아를 선택했을까? 조금만 생각해도 답이 나오는 질문이다.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생리는 여성에게 일상이다. 통상적으로 한 달에 한 번 생리주기가 돌아오는데 그렇다고 한 달에 한 번 생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75%가 경험하는 월경전증후군(PMS)은 식욕 증가, 두통, 복통, 가슴통증 등을 발생시키고 심한 경우 신경쇠약으로 인해 자살충동 및 도벽으로 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증상이 발생하는 기간은 생리가 시작하기 약 4-10일 전 정도이다. 즉, 한 달이 30일이면 월경전증후군에 시달리는 10일과 생리기간인 7일을 제외한 13일, 2주도 채 안 되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마저도 주기가 불규칙하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경우 보장받을 수 없고, 언제 생리가 시작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실상이 이러하니, 국민안전처의 '취향존중' 발언보다 '생리대는 메모지, 볼펜, 우의, 손전등과 마찬가지로 활용도가 낮고, 활용연령대도 14~50세로 제한적'이라는 주장이 더 어처구니없이 느껴진다. 생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날보다 받는 날이 더 많은 약 1273만 명(2010년 기준/15~49세)의 여성이 이 땅에 살고 있는데, 국민의 안전을 담당하는 부처는 '낮은 활용도, 제한적인 대상'이라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당황스러운 것이다.


생리에 대해 무지한 사회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참았다 한꺼번에 배출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성인남성들의 이야기는 이제 진부할 정도로 흔하다. 한 달에 한 번, 즉 하루만 하고 끝나는 줄 아는 경우, 배출되는 피의 양을 짐작조차 못하며 생리대 1개로 하루를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 등 모름에서 비롯된 이야기들로 피로감을 느껴왔다.


여타 다른 종의 암컷과 마찬가지로 여성 역시 탄생과 동시에 생리의 숙명을 안고 태어났고 이는 몇 십 만년동안 지속되었지만 함께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온 남성은 이를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 오랜 시간동안 기초상식조차 습득하지 못했다는 것은 '알 필요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알 필요가 없는 일'이라는 말에는 분명 권력관계가 깔려있다. 단순히 모르는 것과 몰라도 되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식 회의 발언에서 생리대라는 단어가 불편하다고 당당하게 이야기 한 구의원이나 재난 시 생리대는 활용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 국민안전처의 존재는 그간 생리와 여성을 몰라도 되는 일로 취급해왔던 과정의 산물이다.


고무적인 것은 저들의 무지가 단순히 배우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찰하고 있는 여성들이 늘어났고, 그 여성들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리대라는 말에 거북함을 느꼈다면 단어가 아닌 거북함을 느낀 사람을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국민안전처의 입장에 반대하는 서명이 잇달았다. 학창시절, '마약거래를 하듯 생리대를 교환했다'는 경험을 딛고 일어나 생리에 대해, 신체에 대해, 또 여성 스스로에 대해 말할 권리를 표출한 것이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발언을 통해 담론의 주체성을 획득하고 그 동안 공식적 역사에서 배제되어왔던 불합리를 탈피했지만 상황적 변화는 크지 않다. 여전히 남성인 상사 혹은 교수는 '오늘 예민해 보이는데 혹시 그날이야?'는 질문을 서슴지 않고, 여성은 남성인 선생, 교수, 상사에게 생리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배움이 필요하다. 몰라서 그랬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무언가에 대해 '그래도 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면 자신의 권력과 그로 인한 억압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경계하지 않은 폭력에 의해 발생한 실수는 모두 스스로의 책임이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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