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복을 입고 재판에 출석할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정에 사복을 입고 선다면, 그건 굳이 이야기하자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동료 변호사들의 덕이다. 이들이 한 일의 혜택을 박 전 대통령이 보게 됐다는 짓궂은 말에 이석태 변호사(전 4.16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는 웃으며 답했다.

"처음 문제를 제기 한 지 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지만, 민변 동료 변호사들이 재소자 인권 문제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것과 연관이 있어요. 서준식 선생이 1991년 발생한 강기훈 사건과 연관되어 다른 혐의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 미결수도 헌법상 무죄 추정이 적용되므로 사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거죠.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그 이후로 법무부에서 교정 규정을 바꾸어 지금처럼 재소자가 원하는 경우 사복 차림으로 공판정에 출석하게 된 거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변은,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옹호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들이 모인 법률가 단체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민변이 30년 전 6월 민주항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문호를 활짝 연 6월항쟁, 그 이듬해인 1988년 5월 창립된 민변은 사법 제도 민주화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 왔다. 민변의 창립 멤버인 이석태 변호사는 사무국장, 회장직을 역임했다. 


이석태 "6월항쟁은 내 삶의 큰 변화" 

때문에 이 변호사에게 6월항쟁은 "삶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온 사건"이다. 6월항쟁 직후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발전을 요구하는 사회적 흐름에 합류해 왔고, 민변과의 인연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2년간의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1985년 변호사가 되었다. 연수원 시절부터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연수원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연수원 생활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에 가 있었어요. 선배 변호사들을 돕고 하다 보니 연수원 수료 후 그 사무실 변호사가 됐죠." 

이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로펌은 당시 국내외 큰 기업이 고객인 곳이었다. 대학생 시절 "학생 운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신문> 기자였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서 놀았"던 이 변호사에게는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 모른다. 

"소송을 하면 대개 대리하는 당사자가 당시의 대기업일 수밖에 없는데, 제가 보기에는 법리적으로 노동자들의 주장이 옳은 경우가 많았어요. 제 생각이 사무실의 방향이랑 좀 어긋나 있던 거죠." 

이런 일 등으로 생각이 많던 때 6월항쟁이 터졌다. "당시 변호사들도 국민운동 본부 등에 직접 참여해 호헌 철폐 등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저는 보통의 변호사로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어요." 6.10 항쟁 당일에도 거리에 있었던 것 같다고 이 변호사는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제가 일하던 법률 사무소가 당시 남산 초입에 있는 도쿄호텔이라고 부르는 높은 건물 내에 있었어요. 그 건물 8층에 법률 사무소가 있었고, 그 사무소 내에 남대문 시장이 보이는 쪽으로 제 방이 있었죠. 거기서 보면 서울시청까지 보여요. 그 부근에서 매일 시위를 하니까 자연히 구경삼아 들락날락거리게 되고, 그러다가 광장으로 나가게 됐죠. 연세대에서 이한열 군 사망 사건이 터졌을 때(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에 피격돼, 7월 9일 사망)도 시위 대열에 합류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넥타이를 거의 안 매고 살지만, 그때는 늘 넥타이에 정장하고 있을 때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넥타이 부대라고…. 아무튼 자주 나갔어요."

기업을 대리하는 로펌이라면 눈치를 주지는 않았을까. "굳이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나가는 거죠. 당시 그 로펌은 엄금까지는 아니지만, 변호사가 근무 시간에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걸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죠. 그래도 변호사는 좀 자유로우니까요." 6월항쟁의 한 복판에 섰던 이 변호사는 그해 가을, 로펌에서 나왔다.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이 변호사는 민변 전신인 청년변호사회(청변)에 우연히 관여하게 됐다. 대학 동기들이 청변과 이 변호사의 연결고리였다. 

그 무렵 태동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대개 비슷했겠지만, 6월항쟁의 끝에 조직된 청변 또한 학생 운동권의 영향을 다소 받았던 것으로 이 변호사는 기억했다. 

"변호사로서 억울한 사람을 돕는다는 보편적인 측면 외에 변호사일 자체를 사회 운동으로 생각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변호사 부문운동이라고나 할까요. 사회 발전 과정에서 변호사가 기여할 바를 정하고, 그런 일을 다른 부문과 연관 지으면서 해 나가는 거죠. 처음에는 스터디 그룹 유사하게 10여 명의 변호사가 소규모로 같이 공부하면서 여러 방면의 논의를 했어요."

제대로 된 조직을 구성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되자, 당시 주요 시국 사건을 변호하는 선배 변호사들이 만든 단체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와 합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청변이 해소되고 민변이 됐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없는 젊은 변호사들이 선배들로부터 배우고, 또 그 열정을 바탕으로 조직에 활력이 생기게 된 거지요." 

그렇게 민변이 탄생했다. 민변이라는 이름은 조영래 변호사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베어스타운에서 창립모임을 가졌는데, 이름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때 50여 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무슨 협회라든가 하는 식으로 의론이 분분했죠. 대체로 좀 딱딱하고 경직된 이름이 많았는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하니까 뜻이 분명하고 부르기 쉽지 않습니까. 나중에 그 이름을 줄여서 민변으로 하게 된 거지요." 

지금 민변은 회원 수가 1000명이 넘지만, 출범 초기에는 51명에 불과했다. "그 중에 젊은 변호사들이 절반쯤 되려나. 당시에 제가 젊은 변호사 축에서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어서 간사 역할을 했는데, 민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서 일이 많았어요. 그 후 차츰 민변 회원 수가 늘어나면서 일을 분담하게 되었지만, 제 사무실 동료들 또한 민변 회원이어서 이래저래 민변 업무와 관련된 일을 계속하게 됐지요. 그러다보니 민변 회장도 했고, 그 전에는 사무국장도 했어요." 그는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고 하면 되겠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운동권들의 혜택을 보고 있다" 

6월항쟁의 결과 탄생한 민변은 법률 전문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된 영역을 꾸준히 넓혀왔다. 민변 변호사가 헌법 소원을 제기했던 미결수의 수의 착용 문제뿐만 아니라,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 역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재판을 다수 할 때라 법정이나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개선을 요구하게 된 거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 점차 여러 조건들이 나아지게 되었는데, 그 혜택을 우리가 변론한 사람들 외에 다른 피의자나 재소자들이 보게 된 거죠. 예를 들면 변호인 접견권의 보장, 텔레비전 시청이라든가 집필의 편이 등 모두 어느 날 거저 생긴 게 아니고, 일정한 투쟁을 통해 획득해 낸 거예요."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배제시키고자 했던 이들, 이른바 '운동권'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끝끝내 지켜낸 헌법적 가치가 오히려 이들을 단죄하려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권에 까지 이르러 이를 지켜내는 상황(헌법재판소는 탄핵 결정문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서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역설에서 6월항쟁 이후 지난 30년 동안 진척된 민주주의를 새삼 목격하게 된다. 

"불과 20년 전에는 피고인들이 재판정 가운데 서서 수갑이나 오랏줄에 묶여 재판을 받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사와 피고인들의 노력으로 피고인들의 손이나 팔에서 수갑과 오랏줄을 풀게 하고, 자리에 앉히고, 그리고 변호사 옆에 앉게 된 거죠. 말하자면 이게 다 역사가 있는 겁니다. 6월항쟁의 성과가 모든 면에 미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잘못된 구태를 지적하여 고치고, 형사소송법이 바뀌고 해서 지금처럼 어느 면에서는 미국 영화에서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 됐습니다."

이 변호사는 "예전에는 수사 기관에서 피의자가 조사를 받을 때 변호사가 참여를 하지 못했어요. 접견 시에도 교도관 등이 옆에서 듣는데 하기도 했죠"라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 변호사의 말에 박 전 대통령이 변호사와 함께 검찰 조사를 받고, 7시간 동안 조서를 검토했다는 뉴스가 곧바로 떠올랐다. 

"이런 잘못된 제도나 관행이 고쳐진지 불과 10년이 되지 않았어요. 조사가 끝난 후에야 변호사를 따로 만났고, 조사 때는 변호사가 입회를 할 수 없었어요. 조서의 도장도 본인이 혼자 내용을 보고 찍었습니다. 지금은 조사 자리에서 변호사가 다 보고 확인하지요."

이 변호사가 언급한 '변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은 지난 2007년 6월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법률에 명시됐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권리가 법률에 보장된 지 만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역시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 법률의 개정을 이끌어낸 대법원 판결(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을 담당한 김형태 변호사도 청변을 거쳐, 민변의 회원이다. 두 변호사는 함께 법무법인 덕수를 이끌고 있다.

"강기훈 사건, 더 나은 변호사가 실무를 담당했더라면…"

이 변호사는 매향리 미공군 사격장 소음 피해 소송, 동성동본 금혼 폐지와 호주제 폐지 헌법소원, 일본군 '위안부' 헌법 소원 사건 등 각종 사회적 관심이 큰 재판에도 참여했다. 6월항쟁이 "사법부의 독립에도 좋은 영향을 줬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라고 이 변호사는 설명했다.  

1987년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시민사회운동과의 결합 또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성과를 이야기하면서 이 변호사는 계속 "좋은 동료들과 해서 얻어낸 결과"라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저희가 6월항쟁 이후에 민변을 만들었어요. 또 중요한 사회적 의미가 있는 소송들은 변호사 혼자 할 수 없어요.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협력해야 하는데 그게 컸죠. 일례를 들면, 호주제 폐지문제는 초기에 변호사들이 기획했지만, 여성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계속 진행 해 나가면서 점점 더 많은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얻어서 된 거예요. 이들 시민사회 단체는 대개 6월항쟁의 산물이었죠." 

하지만 6월항쟁은 군사 독재 세력인 노태우 씨에게 대통령 자리를 또다시 내어 주며 미완의 혁명으로 종료됐다. 그 한계는 여기저기에 상흔으로 남았다. 이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30년의 변호사 활동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묻자, 그는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1991년)을 꼽았다. 6월항쟁 이후에도 교체해내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의 연장, 노태우 정권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강기훈 씨가 누명을 벗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4년. 지난 2015년 열린 재심 공판에서 대법원은 강기훈 씨에게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이 변호사는 20여 년 동안 변호인단의 일부로 강 씨의 변호를 맡았다.  

"글쎄… 결국 본인은 늦게나마 무죄를 받아서 다행이긴 한데요, 비록 노태우 정권 하라고 해도, 제가 조금 더 경험이 있고 주도면밀했더라면 초기 재판 당시 무죄를 받지 않았을까, 강기훈씨의 억울함을 좀 더 일찍 덜어드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제 역할이 당시 변론을 이끈 작고한 김창국 변호사님과 박연철 변호사님을 도와 실무적인 일을 하는데 있었지만요." 

이 변호사와 강기훈 씨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도, 이 사건을 조작해 낸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주임검사였던 신상규 씨와 검사 안종택 씨는 모두 검사장을 지냈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기춘 씨는 국회의원과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당연히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다. 국가와 당시 주임검사 신상규 씨, 강 씨의 필적을 감정한 김형영 씨 등을 대상으로 한 민사 소송만이 진행 중이다. 이 변호사는 "국가 책임, 김형영 씨 본인의 책임은 물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검사들 책임은 어떨지…"라고 말했다. 형사상 책임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묻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거짓을 만들어 내고, 책임지지 않는 김기춘과 같은 권력들은 그렇게 적폐로 쌓였다. 그리고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던 2014년, 세월호에 과적된 적폐는 결국 참사로 이어졌다. 

지난해 9월 박근혜 정부에 의해 강제 종료된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 위원장을 맡았던 이 변호사는 이 대형 비극을 어떻게 봤을까. 이 변호사는 일본에서 중고 배를 수입해온 때부터 해운 관련 규제 완화 그리고 구조 과정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제들을 단계별로 지적했다. 그리고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실 문제를 지적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사 당일 오전에 뭘 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오후에는 머리를 하고, 세월호가 이미 다 가라앉은 뒤인 오후 5시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갔습니다. 총체적으로 재난을 예방하고 참사 발생 시 구조해야 할 국가 재난 관련 기구가 부실한 겁니다.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 거고요."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이 변호사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다행히도 무너진 신뢰가 회복되는 모습이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서였다. "변호사로서 종종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과 협력해서 일을 해온 저는 대규모 집회 때는 사실 좀 걱정이 있어요. 저러다가 혹 폭행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대의에 손상이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보니 촛불집회 초기 시민들이 경찰 버스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서로 자제하고, 오히려 차벽에 꽃이나 재미난 내용이 들어 있는 스티커를 붙여 평화적인 집회를 유도하더니, 나중에는 스티커 등을 떼 말끔하게 하는 등, 저 스스로 이번 촛불 집회는 참여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고 공부가 됐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맨 앞에서 집회를 이끌었지요. 때문에 저는 이번 촛불 집회로 박근혜 정부 4년을 지나면서 어려움에 처했던 우리 사회의 민주적 시민 의식이 커다란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 변호사는 "만약 6월항쟁 같은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현재 진행형인 6월항쟁의 의미를 설명했다. "더 이상 독재로 회귀하거나 국민들의 민주적 바람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죠. 촛불은 보다 발전된 형태에요."

6월항쟁의 미래가 촛불집회로 나타났다면, 2017년 촛불집회는 어떤 모습으로 평가해야 할까. 촛불을 들고 나선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까. 난해한 질문에 이 변호사는 웃었다. 

"우선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을 겪으면서 기초가 손상된 사회 정의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가 하고 있는 일을 민주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해나가야 하겠지요. 그리고 공화국 헌법 1조, 국민 자신이 주권자라는 것을 늘 자각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정부가 잘못할 때에는 자기 스스로 먼저, 그리고 동료들과 연대해서 나서고 외쳐야 할 준비를 위해서 말이지요."

이 변호사의 답변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과 무척 흡사해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대를 강조한 이 변호사와 잘 어울리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의 사무실 입구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故 신영복 선생님께서 써 주신 문구 '함께 하는 삶'이 적혀 있었다.



 >>원문보기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6349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박근혜 전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며

검은 세단안에서 8분 동안 애태웠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은 8일, 800일도 아닌 

1,000일이 넘는 낮과 밤을 애태웠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법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7시간 동안 조서를 꼼꼼히 살피면서


정작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대통령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답이 없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괴감을 느낀다며 거짓 눈물을 흘릴 때

세월호 유가족들은 슬픈 눈물을 흘려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매일 전속 미용사를 불러

머리를 올리고 있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은

매일 노란 리본을 올려야 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송로버섯과 샥스핀을 먹고 있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은 생전에 아이들이 좋아한 음식을

팽목항에 놔둔 채 바라보아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집무실도 안 나오고 관저에 있을 때

세월호 유가족들은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유족충' 이라는 악의적 왜곡에 시달리며 노숙해야 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직후

"반드시 진실은 밝혀진다" 라고 했을 때

정작 세월호는 왜 침몰했고,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이유에 대한

진실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지난 3년간 감감 무소식이던 세월호 인양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되자 마자 올라왔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단 하나,

진실을 끌어올리고 그 책임을 물을 때 입니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은

"도전하는 청년을 응원합니다" 라는 주제로 다음 스토리펀딩을 진행중입니다.

7번째 스토리펀딩은 요즘 핫 한(?) 국회의원이죠.

김진태 의원이 제주도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하는

우도 청년에게까지 소환장을 보낸 이야기입니다.


김진태 의원의 소환장을 받은 청년은

정다운 메니페스토 청년협동조합의 정다운 부대표입니다.

정다운씨는 왜 김진태의원의 소환장을 받게되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6434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국가의 알릴 의무와 세월호

2016.5.26. 경향신문

 

전진한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상임이사


지난 5월18일 롯데물산이 서울시에 제출한 ‘잠실 제2롯데월드 안정성 연구용역결과 보고서’에 관한 정보공개심의회가 열렸다. 이 회의를 위해 정보공개법을 심층적으로 연구한 전문가 5명과 정보공개정책과 관계자, 그리고 용역담당 주무부처 공무원 등이 참여했다. 이 회의에는 속기사도 배석해 회의 전 과정을 속기록으로 남긴다.


이날 회의는 롯데 측의 비공개 요청이 있었기에 더욱 세밀한 토론을 거쳐야 했다. 우선 공개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담당 공무원과 치열한 청문 과정을 거친다. 이후 어떤 결정이 시민들에게 더 유익할 것인지 심층적 토론을 한 후 참석자가 모두 동의하는 가운데 공개결정을 내렸다. 며칠 후 이 과정을 담은 기록은 서울시 정보소통광장에 게재된다.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정보공개심의회는 위에서 언급한 과정을 거쳐 모두 대면회의로 진행했다. 엄청난 업무량과 압박감에 참석자와 준비하는 공무원들 모두 힘들지만, 시민을 위한 의무라고 생각하며 일을 하고 있다. 그 결과 최근 4년간 261건을 심의했고, 이 중 63%를 공개로 결정했다. 이것이 바로 시민의 알권리가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반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참사에 관한 알권리는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은 선원의 과실 이외에도, 선체에 결함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이는 세월호를 인양한 후 직접 실물로 조사해야 침몰 원인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목포해양경찰서는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123정의 폐쇄회로(CC)TV 영상 보유 사실을 부인하다가 뒤늦게 보유하고 있다고 시인했다. 이 CCTV 영상은 생존자 구조 책임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어 철저히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사고 원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정부는 세월호 특조위(이하 특조위)가 6월 말 활동을 종료한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정부에서 예산 등을 지원하지 않으면 특조위는 유지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특조위가 실질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이고, 이후 피해자들이 조사를 요구한 신청사건은 230건이나 된다. 이 사건들은 모두 복잡하게 관련돼 있고 향후 치밀한 조사가 요구됨에도 조사기관 자체가 사라져 영구히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욱 걱정스러운 점은 특조위가 해체되면 기록물관리법 제25조(폐지기관의 기록물관리)에 따라 조사를 위해 생산·수집했던 기록들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할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할 경우, 이를 분류하는 작업에만 몇 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다. 쉽게 말해 수년간 시민들은 세월호 관련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특조위가 해체되면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알권리 및 진상조사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만약 해체가 결정되더라도 일반 시민들이 언제라도 접근할 수 있도록 이 기록들을 세월호 추모시설에 전시하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 


다시 서울시 얘기로 돌아와 보자. 지난 5월20일 전국 최초로 지방영구기록물관리기관인 서울기록원의 첫 삽을 뜨는 기공식 행사를 했다. 서울기록원이 완공되면 각종 기록을 다양하게 수집하고 체계적인 보존·전시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행사에 행정자치부 장관과 차관, 국가기록원 원장이 불참하고 직원 몇 명만 참석시켰다. 


주무관청의 책임자로 이 행사보다 더 중요하고 바쁜 일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답답한 노릇이다. 혹시 시장이 야당 소속이라 불참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국가는 시민들에게 각종 정보를 알릴 의무가 있다. 그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국가는 단 한 명의 알권리를 위해서, 제도 개선과 예산 배정을 해야 하며 그것이 다른 참사를 막는 예방주사가 된다. 알권리가 곧 살 권리이다.



원문 바로가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416인권선언 함께하기




















416인권선언 선언인 동참하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김진 변호사,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세월호 특위, 이번이 끝이 아닙니다"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원고 송부를 차일피일 미루다 더는 밀려날 구석이 없어서, 이제는 정말 써보겠다 마음을 다잡았다. 여전히 자신은 없다. 실은 지난 주말 안에 탈고하겠다고 끙끙 싸매고 앉아 있었다. 세월호 특조위, 세월호 특별법, 세월호 시행령안, 검색어를 바꿔가며 지독하게 시간을 물고 늘어졌지만 겨우겨우 몇 자 쓰다만 것이 다였다. 그 밤, 광화문 광장에서 농민 한 분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캡사이신이 섞인 물거품이 광장을 뒤덮을 때 나는 마른 발을 비벼대며 백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하루를 살면 꼭 하루만큼의 죄가 불어나는 시간이 차마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제가 든 생각은 이걸 내가 못한다고 할 주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못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 제안이 왜 저한테까지 왔나 알아보니 정말 선뜻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나서지 못한) 그 사람들이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사안 자체가 너무 무거우니까요. 이 일이 제게 온 이유가 있겠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석태 위원장님을 만나러 갔죠."

세월호와 광화문을 양쪽에 두고 무력함에 신열을 앓을 때 번뜩 그의 말이 떠올랐다. 야당추천인사로 임명되어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있는 김진 변호사였다. 그는 세월호 특조위 비상임위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 이 일 못 하겠다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주로 맡고 있는 노동문제도 산적해 있고 개인적으로 박사논문도 써야 하는 바쁜 시기였지만 세월호는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월호 특조위가 꾸려질 때 부담감 때문에 다들 고사하는 분위기였는데, 유족분들이 이석태 위원장님께 유족대표를 부탁하시면서 막 우시더래요. 그때 이석태 위원장님이 드신 생각이, 대체 왜 이분들이 미안해하고 울어야 하지? 라는 거였대요. 특조위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이 저랑 비슷한 거죠."

못한다고 할 주제도 아니라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더듬더듬 지금의 글을 쓴다. 김진 변호사의 진심을 따라 쓰기로 했다. 무능을 탓하기 전에 아픔을 보고, 누구나 피하고 싶은 무게를 끌어안은 것, 매일매일 세월호를 본인의 눈앞으로, 사람들의 눈앞으로 불러 오는 것. 어렵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는 애도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뿐,

김진 변호사도 알고 있었다. 특조위를 바라보는 날선 시선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600만 명의 서명으로 지난해 11월 7월 제정된 세월호 특별법과 12월에 꾸려진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국민들의 기대와 성원을 한 몸에 받으며 출발했다. 그러나 법이 제정 된지 일 년이 넘은 상황이고 특조위의 활동도 곧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특조위의 권한을 대폭 축소한 시행령안과 올 7월까지 한 푼도 지급되지 않은 예산(그나마 뒤늦게 책정 된 예산은 특조위가 신청한 예산의 3분의 1수준이다), 주요 보직의 늦은 임명과 정부여당의 비협조, 특조위에 우호적이지 않은 주류 언론들, 세어보자면 손가락이 모자란 걸림돌을 넘어가며 지금까지 왔지만 여전히 넘어서야 할 것들이 많고 그 사이 국민들 사이에 쌓이고 있는 오해를 풀 길도 당장은 막막하다.

"이 법이 정말 피와 눈물로 만든 법인데 위원회가 1년 동안 너무 무력한 모습을 보이니까 유족들의 실망과 원망도 받고 있어요. 정말 면목이 없고 부끄러워요. 정부여당이 방해를 한다는 얘기도 많이 있는데, 그건 주어진 조건이니까 거기서 사실은 위원들이 많은 일을 했어야 했죠...지난 1년 동안 위원회를 쥐고 흔들었던 절차적이고 의무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업무는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는 특조위가 갖고 있는 환경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특조위는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유족추천, 야당추천 위원)과, 이들과는 달리 정부여당과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위원(여당추천 위원)이 함께 모여 있다. 모두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모이거나 그 반대의 비율로 구성되었던 대개의 상황들과 사뭇 다른 것이다.

"다수의 위원들이 야당추천, 유족추천 인사들이다 보니 위원회 내부를 보면 저희가 다수인 것 같아 보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예산도 안 줘, 직원도 못 뽑아, 자료도 안 보여줘, 이런 식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다수인 당신들이 뭐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위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에는 무력한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지요. 정말 황당한 상황이 있는데, 위원회에 진상규명국장이라는 자리가 있어요. 별정직 중에서는 제일 높은 직급이고 제일 중요한 직급인데 아직까지 청와대에서 인사검증을 안 해줘서 채용을 못했어요. 정부여당의 계산대로 따지자면 올 1월 1일부터 위원들의 임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12월 31일로 법적인 1차 활동기간이 끝나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제일 중요한 국장자리를 임명을 안 해줘요."

이런 상황에서 오는 12월 14일부터 16일에는 세월호 참사 특조위의 첫 번째 청문회가 예정되어 있다. 그가 처음 특조위 활동에 뛰어들었을 때, 해경청장, 사회지방청장까지는 책임을 묻겠다, 적어도 진실에 한 발짝이라도 다가설 것이라는 낙관이 있었다고 했다. '멍청한 낙관' 이었다고 그가 말했다. 정작 위원회에 들어와 보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벽은 견고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진실을 찾아 들어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많은 분들이 물어보세요. 세월호 청문회에서 무엇을 밝힐 수 있겠냐고. 소박하지만 큰 목표가 있는데, 2014년 4월 16일, 그때 과연 우리 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큰 그림을 그려 내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책임 질 사람이 있으면 책임을 물어야 될 것이고 밝혀져야 될 의혹이 있다면 밝혀야 할 것이고, 만약 밝히지 못한 게 있다면 왜, 무엇 때문에 밝히지 못했는가 까지 남기는 것, 그리고 진상규명국장을 임용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다 남기는 것이 위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만약 그것이 저의 임기나 또 이 정부 안에서 해결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의지가 있는 정부가 탄생했을 때 반드시 2기 위원회를 해야 한다는 것까지 남기는 것이 위원회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제가 유가족 분들께도 말씀드리는 것은, 이번 위원회가 끝이 아니다, 이번 청문회도 정말 중요하지만 계속 이어질 전체 청문회 그림 속에서 봐 달라고 하고 있어요."

세금도둑으로 몰리는 모욕과 활동제약 속에서도 김진 변호사는 늘 약속된 특조위 회의에 나가 싸우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 고개를 숙인다. 한심스럽다는 손가락질을 받아 내더라도 위원회를 지키고 위원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진척 없는 특조위 활동을 그만두라는 주변 권유도 있었지만, 위원회에서 유가족들의 외로움을 만날수록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만 든단다. 

특조위 활동을 하며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지난한 싸움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얼굴에 날 생채기가 두렵고 수족의 안녕을 바랐다면 아마 이 자리에 그가 서있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그가 바라는 날은 그의 몸이 꺾어지고 분질러져, 세월호가 품은 진실의 꽃병에 꽂아지는 날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그는 바스러지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이나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김진 변호사 덕분이다.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난 진작 포기하고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졸작의 원고는 여기서 끝나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특조위의 역할도 계속 될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을 기억하며, 진실에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끝내지 않겠다는 그에게, 마침표가 없는 시 한편을 응원과 신뢰의 마음을 대신해 전한다.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꽃 아 다 오 



덧) 
김진 변호사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며칠 후 진상규명국장이 1년 만에 내정되었다는 보도(한겨레, 11월 14일자)가 있었다. 원고에 인용된 시는 최승자의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에서 부분 발췌하였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인권활동가 정욜님은 현재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서 청년입문서 프로젝트의 청년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 반듯한 사람

KBS 조우석 이사가 "더러운 좌파"로 호명한 인권활동가 정욜에 대하여

성소수자 HIV감염인 박래군 등 가장 낮은 곳의 사람과 사람을 잇는 연결고리

한겨레21 제1083호 레드기획


박승화 기자


“콜록콜록.”


오명으로 호명당한 사람이 아팠다. 누군가의 모진 소리를 들어서는 아니다. 너무 열심히 일하다보니 몸이 신호를 보낸다. 매주 월화수목은 인권재단 사람에서 일하고, 금요일은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 나가고, 시시때때로 ‘한국 HIV/AIDS 감염인 연합회 KNP+’ 일을 한다. 살다가 살다가 너무 열심히 살다가 찍혔다. 공영방송 KBS 이사인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이 지난 10월8일 바른사회시민회의 등이 주최한 ‘동성애·동성혼 문제, 어떻게 봐야 하나’ 토론회에서 정욜(37)씨를 동성애와 좌파의 연결고리로 지목했다. “더러운 좌파” 운운한 발제는 옮기기도 민망해 원문을 인용하진 않는다. 다만 “바빠서 분노도 밀어내야 할 판”이라는 정욜씨의 감상을 전한다.


점차 개인을 향하는 혐오


“얼마나 자극적이에요. 통진당(통합진보당)에 동성애에 심지어 에이즈 환자와 살았어. 열심히 해서 그렇게 됐다기보다는 그들의 의도에 적합해서 간택받은 거죠.” 그렇게 그는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다. 통합진보당·동성애·에이즈. 독재정권 시절이라면 빨간 줄이 세 개고, 나치 수용소라면 분홍별 세 개는 달았을 운명이다. 지난 10월8일 토론회에 잠입 취재한 게이 후배가 사실을 알렸을 때, 그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혐오가 점점 개인을 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해서 ‘괜찮다’고 했지만 속으로 많이 끓었어요.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거나 영화로 찍은 건, 사회와 소통하는 각색의 주체가 저였기 때문에 전혀 다르죠.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되는 게 놀라워요.” 침묵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을 침묵으로 남겨둘 자유가 점점 위협받고 있다. “기사가 났던 날, 밤 10시에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어요. 주무실 시간인데, ‘혹시 안 거 아냐?’ 싶었죠. 한참 망설이다 신호음이 끝날 때쯤 전화를 받았는데, 너무 밝은 목소리로 ‘고구마를 캐왔는데 맛있으니 가져가’란 거예요. 가슴을 쓸어내렸죠. 제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데, 그 기사만 보면 행복한 게 아니잖아요.”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이런 소리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빵을 배워서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대학에선 일어일문과를 다녔고, 4학년 때 학원을 다니며 제빵 기술을 배웠다. 2003년의 일이다. 그가 “현석이”라고 부르는 청소년 동성애자 육우당이 유서를 남기고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사무실 안 문고리에 목을 매어 숨졌다. “아, 나는 안 되나보다.” 당시 동인련 대표였던 정욜씨는 맡겨진 소임에서 달아나지 못했다. “저는 빚을 청산하고 있는 거예요.” 육우당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지난 10여 년 동안 청소년 성소수자 이슈를 열심히 챙겼다. 운명처럼 지난해 한국 최초로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 ‘띵동’을 활동가들과 같이 만들었다.


가브리엘은 ‘행동하는 성소수자인권연대’로 이름을 바꾼 동인련에서 가장 친했던 형이다. 이태원에 클럽이 오픈하면 좋아하는 보세옷을 입고 함께 갔다. 물론 인권모임도 함께했다. 그랬던 형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우리 형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일 때문에 바쁜가” 궁금했다. 그러다 병원에서 가브리엘을 다시 만났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가브리엘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2002년 무렵이었다.


“그때는 빨리 수업을 마치고 병원에 형이 먹고 싶은 음식을 사가서 함께 먹고 오는 게 일과였죠.” 그렇게 HIV 감염인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2004년 만들어진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에 참여했다. 나누리+ 초기 모임은 육우당 사망을 계기로 마련한 동인련 사무실에서 자주 열렸다. 에이즈 인권운동을 하면서 한때 감염인 애인을 만나기도 했다.


내 동생, 육우당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청소년 동성애자 '육우당'이 남긴 유품이 2013년 10주기 추모제에 맞춰 정리됐다. 동성애자인권연대 제공


성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인 청소년과 감염인, 그의 마음이 향하는 이들이다. 그에게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라고 하자 “가장 인권적인 분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성소수자 인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청소년과 감염인 인권이고, 그것이 풀려야 다른 문제도 풀린다”고 말했다. 급진적이든 인권적이든 실은 소소하고, 답답한 과정의 연속이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암담한 상황에 한없이 귀기울여야 하고, 감염인들과 이것이 왜 인권의 문제인지 끝없이 대화해야 한다. 거리에서 거창한 캠페인을 하기보다는 병원을 끝없이 들락거리며 싸워야 하는 일이다. 힘없는 자들이 힘을 갖게 되는 자력화, 그가 하고 싶었고 해온 일이다. “답답한 과정을 어떻게 버티냐”는 질문에 그는 KNP+가 하는 ‘감염인 사랑방’ 모금 캠페인을 예로 들었다.


“모금에 대해서 토론하면 별로 말씀하시는 (감염인) 분이 없어요. 잘 모르는 분야니까요. 그런데 후원의 밤에 어떤 음식을 할까를 놓고는 30분 넘게 토론해요. 갈비냐 탕수육이냐를 놓고. 저는 그게 좋아요. 비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이분들이 아는 정보를 가지고 열심히 토론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가장 완벽한 7가지 종류의 뷔페를 만들기로 스스로 결정한 거예요. 지금은 음식이지만 나중엔 인권 문제로 이렇게 토론할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가장 소외된 곳으로 간 덕분에 가장 진실한 얘기를 들었다. 귀하디귀한 ‘사람책’을 읽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성소수자운동을 통해 성장했다. 지난 10여 년 성소수자운동은 한국에서 예외적으로 성장하는 운동이었다. 성소수자운동에서 시작한 그가 동성애와 좌파의 연결고리가 된 과정은 이렇다. 1997년 우연히 대학에서 대자보를 보았다. 동인련의 전신인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대동인) 전화번호로 연락했다. 인권운동은 신세계였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을 만나고 인권단체연석회의에 참여하며 시야를 넓혔다. 2002~2012년 동인련 대표를 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집회에 나갔다. “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가 우리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느껴 함께하면서 정보인권 활동가들을 알게 되고,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을 하면 평화운동가들과 만나고, 동인련 회원 중에 병역거부자가 나오면 ‘전쟁 없는 세상’ 활동가들을 소개했죠. 이렇게 계기가 계속 있었죠.”


없던 것을 만드는 “창업가 기질”


2008년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가브리엘의 치료에 절실한 '푸제온'을 국내에 출시하라고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육우당과 가브리엘은 정욜씨를 청소년과 감염인 인권운동으로 이끌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양복 입은 정욜을 기억하는 이가 적잖다. 그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회사에 다니며 동인련 대표를 했다. 회사가 끝나면 자주 집회에 왔고, 때로 휴가를 내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집회와 회의에 자주 나타나 그를 직업적 활동가로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그랬던 그가 2011년 3월 인권재단 사람에서 상근을 시작했다.


“인권활동가들에게 오는 메일링 리스트에서 채용공고를 봤어요. 인권센터를 짓는데 모금을 담당할 활동가를 채용한단 거예요. 박래군씨한테 장문의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요. 전화를 했더니 ‘미안하다’고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인권센터라는 도전해볼 만한 공간에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 좋았어요. 영리기업에서 익힌 업무도 활용하고 싶었고요.” 그렇게 ‘좌파와 동성애의 연결고리’가 완성됐다. 따지고 보면 청소년 쉼터도, 감염인 모임도, 인권센터도,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다. 그에게 “은근히 창업가 기질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렇네요” 하며 웃었다.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환대하는 운동을 했으나 자신은 정작 환대받지 못하는 세상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생존자”라고 불렀다. “생존자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나를 설명하기 위해 쓰게 되죠.” 1998년 입대한 그는 성정체성이 드러나 군 정신병원에 입원당했다. “정신병자임을 인정하면 제대시켜준다”는 말도 들었다. 한 달 넘게 독방에서 뭔지도 모를 약을 먹어야 했다. 그의 상식으로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었다. 힘든 시기를 거쳤지만, 다행히 부대에 복귀해 군 생활을 마쳤다.


올해도 하필이면 ‘띵동’이 있는 서울 성북구에서 일이 터졌다.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사업으로 선정된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예산이 성북구 보수 개신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쓰지도 못하고 ‘불용 처리’돼버렸다. 하필이면 서울시민인권헌장 무산 사태와 겹쳤고, 그는 성북에서 고군분투했다. 조우석씨는 발제문에서 성소수자 서울시청 점거농성에 대해 “3일 동안 이뤄졌던 이 점거농성 끝에 정욜과 박원순 둘이 직접 면담을 진행했으며, 직후 농성을 철회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밀약이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고 썼다. 그러나 정작 정욜씨는 “바빠서 서울시청 농성장에 자주 가보지도 못했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10월에도 심란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 그와 ‘희망을 만드는 법’ 류민희 변호사가 참고인으로 출석하게 돼 있었다. 여야 합의로 의원들이 신청한 참고인을 모두 부르기로 했지만, 막판에 그와 류 변호사 등만 출석을 못하게 됐다. 성소수자 단체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인 유승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해명을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다. 이렇게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보수 개신교의 압력에 야당 정치인도 굴복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하필이면 유승희 의원은 띵동이 있는 동네의 지역구 의원이다.


정욜씨는 “다음 총선에서 보수 개신교 세력은 후보들에게 동성애에 대해 질의하는 것을 넘어 직접 찾아가 묻고 따지는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운동이 새로운 법을 만들고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있는 것을 지켜내는 더욱 힘든 싸움이 될 것”이란 얘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은 참 반듯한 사람, 정욜에게 자꾸만 싸움을 건다.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을 환대하는 운동가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과 그에게 연결고리가 있긴 있다. ‘잊지 못하는 동생’이다. 박래군 소장의 동생 고 박래전씨는 1988년 독재정권에 저항해 분신했고, 정욜씨의 동생 같은 육우당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상을 비관해 2003년 자살했다. 서너 해 전 망원시장에서 정욜씨를 마주친 적이 있다. 그는 “인권중심 사람에서 하는 박래전 열사 추모제 음식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세월호 진상 규명 활동을 하다 구속된 박래군 상임이사와 바깥세상을 잇는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람은 그렇게 연결돼야 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원문바로가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소셜 아티스트 홍승희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진실을 요구하는 일에는 '강단'이 필요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다부진 얼굴에 정신이 확 든다.

흐리멍덩한 내 눈을 끔뻑이며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소셜 아티스트 홍승희,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어쩐지 어색해서 나도 몰래 와락 웃어 보인 것 같은데, 확신할 순 없다. 그녀가 마주쳐온 오해의 얼굴들이 행여 내 얼굴에서 발견되진 않았을까, 제때 하지 못한 표정 관리가 뒤늦은 후회로 밀려온다. 



배후도 없고 조직도 없이, 전략도 없고 계획도 없이 그저 제 속에 있는 덩어리를 뱉었다 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고 꽃 같은 아이들이 스러졌을 때, 진실이 침묵 속에 갇히고 유족의 통곡이 무관심에 갇혔을 때 거리로 나섰다.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에 동참하고 팝 아티스트 이하 작가의 그림으로, 낚싯대에 매단 노란 천으로 비상식에 저항하며 아이들의 넋을 위로했다. 그것은 비참한 현실에 밤잠을 이룰 수 없던 한 인간의 몸부림이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구를 대신해서도 아니라 그래야만 그 자신의 삶이 아슬아슬하게나마 유지되더라고 그가 말했다. 


날것의 양심만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그에게 재물 손괴와 도로 교통 방해 죄란 명목으로 700만 원의 벌금 폭탄이 떨어졌다. 진실을 요구하고 진심을 나누는 일에도 강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팝 아티스트의 작품을 스티커로 만들어 붙이는 일도, 노란 천을 들고 거리를 걷는 것도 부조리한 시간을 견뎌내는 한 인간의 진통 같은 것이었기에 배후와 조직을 들춰내려는 사람들에게 돌려줄 말이 없었다. 그에게 소셜 아트는 인간 본연의 온전함을 찾는 일이며 내가 나로서 온전히 살아가려는 몸짓일 뿐 누구를 대신한 희생도 누구를 대표한 행동도 아니었다. 


내가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당황하고 어색해했던 것은, 지금의 현실을 기억하고, 잊지 않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가 자처해 짊어진 세월의 더께에 무책임하게 내쉰 나의 한숨도 섞여 있지 않을까 하는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이겠다. 그의 작업이 결코 희생과 대의를 담보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괴롭혔다. 소셜 아트를 바라보는 기울어진 시선과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마주쳐왔을 그에게 나의 심란한 마음이 또 다른 오해와 편견을 얹어준 건 아닐까 짐짓 걱정도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의 진심 어린 소통이 그의 예술을 담대함으로 무장하게 한다 했기에 부끄러운 이 글을 남긴다. 세월을 기억하려는 얼굴과 눈을 마주치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미약한 응원을 보낸다. 

"제 꿈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는 세상입니다. 억울한 죽음과 소외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몸짓이 저의 예술입니다." (홍승희) 

부디 무정한 세월을 기억하려는 그의 몸짓이 더 자유로워지기를, 그의 몸짓이 숨죽이고 있는 이 사회의 숨통을 틔워주기를, 끝내 진실과 정의가 살아 움직이는 세월이 오기를 바라본다.




원문바로가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고]'약자'를 위한 비례대표

경향신문 2015.08.27.

전진한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상임이사


여야는 지난 18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공직선거법심사소위원회를 열고 20대 국회의원 정수를 현행 300명으로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야당과 시민사회에서 주장했던 의원정수 확대 문제는 결국 포기하고만 것이다. 


이번 여야 합의는 여러 측면에서 매우 우려되는 점이 많다. 우선 이번 합의로 지역구 의원 수는 늘어나고 비례대표 의원 수가 줄어들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헌법재판소가 인구 최대 선거구와 최소 선거구 간 유권자 수 편차 비율이 2 대 1을 넘지 않도록 하라는 결정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지역구 의원 수를 늘릴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에 발맞춰 일부 정치권 인사들은 비례의원 제도를 축소·폐지하자는 주장을 하는 동시에 비례대표 의원 대부분이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나섰다. 

만약 비례대표 의원을 줄이고 지역구 의원이 늘어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예상해보자. 우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국회의 관심이 현저하게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그동안 청년실업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지만 국회는 실질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청년고용촉진법이 존재했지만 사실상 훈시규정만 나열되어 있을 뿐 청년들의 취업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를 끈질기게 사업적 이슈로 만들고, 공공기관과 지방공기업에 정원의 3% 이상 청년 미취업자 고용을 강제하는 법안을 만들어낸 사람이 청년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장하나 의원이다. 

애초에 장 의원은 이 법안의 적용대상을 대기업까지 확대하려 했다. 하지만 조직적인 저항으로 쉽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장 의원은 청년들의 경제적 권리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청년경제기본법’(가칭) 발의도 준비 중이다. 이것이 바로 초선 비례대표의 힘이다. 

이러한 성과들은 입법발의 내용에서 객관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선 국회 전진영 입법조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지역구 의원들은 주로 농림수산, 국토개발, 조세 정책에 관심이 많은 반면 비례대표 의원들의 법안 발의는 여성가족, 보건복지, 노동 분야 등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것들이 많다고 밝혔다. 비례대표를 줄이는 것은 곧 국회에서 약자에 대한 관심을 줄이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다. 

더 큰 문제는 표의 가치가 지금보다 더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올 초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2 대 1(200석/100석)로 도입할 것과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지역주의 완화와 유권자 의사를 충실히 반영하는 선거제도 개선’이었다. 

이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충분히 경험한 문제다. 고향인 대구에서 서너 번의 투표를 했지만 단 한 번도 지지하는 후보자가 당선된 경험이 없다. 심지어 지지한 후보가 30% 이상 득표를 했음에도 낙선자 신세가 됐다. 대구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표는 무의미한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정치적 무관심은 늘어나고, 그 무관심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무기로 돌아오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고 보았다. 

물론 비례대표제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여러 보완점이 필요하다. 그동안 비례대표를 어떤 기준으로 영입하고 또 당선 가능한 번호로 배치하는지 외부에서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부적절한 공천 헌금을 매개로 부적합한 인사가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 비례대표 선출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비례대표 수를 늘려 온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19대 국회 동안 세월호 사태, 메르스 사태 등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정치권의 이익을 위해 야합을 하는 순간 20대 국회에서도 이와 같은 사태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회적 불행은 국회의 무관심 속에 서서히 자라난다. 정치권은 고통받고 있는 약자들을 위해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정치개혁을 이뤄내야 할 것이다.



원문 바로가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창립선언문

2015.08.21 14:27 바꿈 소개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 창립선언문

  

바꿈을 선언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까?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급속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불황과 심화되는 양극화폭증하는 가계부채와 주거비치솟는 등록금과 사라지는 좋은 일자리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확산이 보여주는 정부의 무능그리고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는 정치권.

 

우리사회는 현재의 불만과 불안을 극복할 등불을 쉬이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책임감을 잃어버린 국가와 정치권의 무능은 어둠이 걷힐 것이라는 기대를 무색케 합니다또 시민사회의 역동성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우리사회 전반에 희망기대사랑활기존중배려는 약해지고 냉소와 체념조롱이 넘치고 있습니다.

 

광복 70년에 우리사회를 이끌어 온 긍정적인 힘을 우리는 어떻게 다시 복원해야 할까요지금무엇을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작지만 큰 첫 걸음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독선과 독단의 창조주 역할을 자임할 생각이 결코 없습니다우리는 정치시민사회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 곳곳에 남아 있는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찾고 같이 키워나갈 것입니다어떤 소박한 희망이라도 현실로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 갈 엔진이 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우리는 그 엔진이 힘을 발휘하는 작은 나사못연결 벨트윤활유가 되겠습니다.


오늘, 2015년 7월 7일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1.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은 개방적이며 유연한 방식으로 사회의 힘을 모으는 연결고리가 되고자 합니다공감을 기초로 공동의 관심사를 만드는 바꿈의 공간이 되겠습니다.

 

2.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은 한국 사회 전체와 파트너십 단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자 합니다개별단체로서 바꿈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협력과 조정을 통해 한걸음 더 진전된 가치를 창출하는 모델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3.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리더십과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가치를 창출하겠습니다.

 

4.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은 우리사회의 꿈과 희망을 발굴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재미있고 쉽게 전달함으로써 우리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5.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일반시민의 요구를 대변하지 못하는 사회운동을 지양합니다정치와 사회운동이 민주적 선순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은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배제되지 않으며우리 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꿈을 함께 꿀 모든 이들에게 손 내밀어 바꿈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2015년 7월 7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일동


'바꿈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꿈 창립 1주년 활동을 소개합니다.  (0) 2016.08.30
바꿈 프로젝트 소개_카드뉴스  (0) 2015.08.21
바꿈 프로젝트 소개_영상  (0) 2015.08.21
창립선언문  (0) 2015.08.21
임원 소개  (0) 2015.08.21
찾아오시는 길  (0) 2015.07.30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박근혜 대면보고 기피증, 메르스 사태 키웠다
대통령 대면보고와 e-지원 시스템
프레시안 2015.06.17.
전진한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준비위원, 알권리 연구소 소장

박근혜 대통령이 대면보고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이번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와 관련해서도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메르스 첫 환자가 확인된 뒤 6일이 지나서야 박근혜 대통령에게 첫 대면보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도 별도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라 국무회의 자리에 참석해서야 보고를 했다.

국가재난이 발생한 상황에서 각 참모진이 대통령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보고서 형태(서면)로 보고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고서는 ‘보고’의 보조수단이지 완결적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면보고는 보고의 주체와 내용이 명확히 기록되지만, 복잡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긴급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관련 대응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이번 메르스 사태의 심각성을 대통령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과 대응이 기민하지 못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면 과거 대통령들의 보고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과거의 사례를 보면 향후 박근혜 대통령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지점들이 보일 것이다. 이명박,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례에서 ‘보고 스타일’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과 달리 대면보고를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문제는 독대보고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지금도 포털에 ‘이명박 독대보고’를 검색해보면 원세훈 국정원장, 이영호 고용노사비서관 등 수많은 가신에게 독대보고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독대보고의 문제는 보고자에게 힘이 실리고, 보고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공식적으로 알 수 없어 국정의 왜곡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원세훈, 이영호 두 사람 모두 이후 큰 문제들을 일으켰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유독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관련 기록을 공개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재직 시절, 청와대에서 생산했던 수많은 비밀기록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묶어 최장 30년 동안 이명박 전 대통령 본인만 볼 수 있도록 만들어버렸다. 아마 2010년 당시 신종플루 사건 당시 대응 관련,  현 정부에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국가재난 대응과 관련해 역대 정부에서 가장 참고할 만한 모범사례는 무엇이 있을까? 참여정부에서 찾을 수 있다. 참여정부도 수많은 긴급사태와 관련해 실수와 문제점을 드러내긴 했지만 대통령의 신속한 대응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우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모들과 수시로 만나 보고와 토론을 즐겼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대부분 대면보고였으나 기록관리비서관(사관)이나 부속실 비서진들을 배석시켜 관련 사항을 꼭 기록하게 하였다. 

▲ 지난 17일 세종청사 보건복지부 중앙 메르스 관리대책본부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문형표 복건복지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독대의 문제점은 앞서 언급했듯이 대통령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본인의 정치적 입지에 이용하고자 과장·왜곡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보고하는 자리에 반드시 기록자를 배석시켰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와 관련해 위 제도를 잘 벤치마킹 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장이 바로 박원순 서울시장과 염태영 수원시장이다. 이 두 시장들은 지금까지도 사관제도를 두고, 수많은 참모 및 외부 전문가와 논의 했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대면보고를 활발히 하면서도 철저히 기록해, 부작용을 예방하는 것이다. 


또한 청와대 업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e-지원 시스템(업무관리시스템)을 개발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e-지원 시스템은 말단 행정관부터 수석비서관까지 그들이 보고한 보고서를 다 등록하고, 버전관리를 통해 그 과정에서 어떤 변경사항이 있었는지 모두 기록하는 것이다. 즉 행정관이 애초에 기획한 문건과 수석비서관이 그걸 어떻게 수정했는지 등의 경과를 대통령이 다 파악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이 시스템에서 생산되었던 수많은 보고서는 대통령기록관리시스템(PAMS)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이명박 정부에서 기능이 대폭 축소된 위민시스템으로 변하고 말았고 지금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조차 외부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위 사안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향후 반드시 참고해야 할 사안들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1년 전 세월호 참사 때도 실패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실망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35%로 떨어진 게 이를 증명한다. 이런 사태가 지속할 경우, 국정 장악력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이는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사태에 대해 스스로 국민에게 사과하고, 초기대응에 실패한 원인을 규명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국정스타일에 큰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시로 참모진과 전문가들을 만나 토론하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관련 사안들은 배석하는 비서진들에게 기록하게 하고 그 기록을 통해서 새로운 국정운영의 동력을 찾아야 한다. 

또한 실시간으로 보고되는 각종 보고서를 투명하게 등록관리 해, 복수의 관계자들에게 스크린 하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 혼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야를 이해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민들과도 소통해야 한다. 국정과제로 내세웠던 정부 3.0 캠페인을 더욱 크게 확대해, 국민소통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직 박근혜 대통령 임기는 반 이상 남았다. 이번 사태를 단순히 넘어가고자 한다면 또 다른 위기는 빠른 시일 내에 올 것이다. 이번 사태가 스스로 국정운영에 관해 돌아보고, 과거 대통령들의 장점을 벤치마킹하는 계기가 되어 국정스타일의 대변혁이 일어나길 바란다. 


원문바로가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봄과 함께 바꿈이 피어납니다"

지난 4월 7일 저녁 7시에 환경재단 레이첼 카슨 홀에서 회원단합대회를 개최했습니다.

평일 저녁 바쁘실텐데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매우 귀중한 자리였습니다.


양길승 6월 민주포럼 운영위원장님과 이소망 작가님께서 감동적인 축사로 행사 막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두 분의 축사는 '세대가 함께' 미래를 준비하자는 바꿈의 취지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어서 간략히 사무처 소개와

청년프로젝트 코디네이터님들의 소개 시간이 있었습니다. ^^

여러 청년단체와 네트워킹하고 공동프로젝트를 이끌어주실 귀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발표가 이어졌는데요...



우선 2.3일 설명회 이후의 사업 경과보고가 간략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뜨거운 관심!



그리고 이어진 BI(Brand Identity) 소개와 홈페이지 방향 브리핑!



직접 모바일로 접속해 체험해보았습니다...^^



발표는 영상프로젝트 소개로 이어지고

베타프로그램인 세월호 1주기 영상도 시연했습니다.



 



바꿈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바꿈에게 바라는 점, 생각 등을 공유하는 시간도 빠질 수 없지요^^



그리고 마지막 클라이맥스

여러 단체가 바꿈과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기로 협약을 맺었습니다.



법무법인 지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비례대표제포럼


 

이와 같이

"우리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안 하거나 못하고 있는 안건들,

바꿈이 프로젝트로 만들어 제안하고 실행하겠습니다."




4.7일 회원단합대회, 이렇게 무사히 마쳤습니다.

많은 분들의 긍정적 지지와 지원,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바꿈이 피어납니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람|전진한'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준비위원]간결한 정보의 힘으로 사회 바꿀 것

내일신문 2015.03.31. 이재걸


"매년 중요한 정부기록, 연구보고서가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소위 '전문가'들끼리만 공유될 뿐 태반은 일반 시민에게 전해지지 않아요. 어렵고 복잡하니까요."

정보의 홍수 시대. 사람들은 복잡하고 거창하기보다 간결하고 삶에 와 닿는 정보에 쉽게 귀 기울인다. 모바일이 주를 이루자 정보가 '손바닥'에서 넘치면 외면받는 상황까지 갔다. 정치·언론은 물론 시민사회도 '간결한 정보' 만들기가 숙제인 이유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바꿈)'은 정보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목표인 신생 시민사회단체다. 전 민변 회장인 백승헌 변호사를 비롯해 대학교수, 치과의사 등 다양한 분야 종사자 90여명이 참여 중이다.
 

바꿈은 정부기록을 비롯해 학계·기관 보고서와 시민단체 조사결과 등을 가리지 않고 연구·가공해 오는 5월부터 시민들에게 인포그래픽·그림 등으로 알기 쉽게 제공할 예정이다.

전진한(사진) 바꿈 준비위원은 "시민을 움직일 만큼 콘텐츠 생산능력이 뛰어남에도 이를 쉽게 전달하는 데 애먹는 단체들과 협업해 (정보를) 유통할 계획"며 "핵심은 정보의 간결화와 디자인"이라고 설명했다.

전 위원은 정보공개운동만 13년째인 기록 전문가다.

2000년대 초반 참여연대 정보공개사업단에 몸담으며 국가기록물 관리실태를 살피다가 아예 '기록관리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땄다. 기록관리학이란 정부기록을 분석·관리·이관하는 일이다. 전공을 이수한 대학원 동기들이 대부분 아키비스트(정부기록 전담 공무원)로 취업한 반면 그는 계속 시민사회에 남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를 만들고 활동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 후인 2013년에는 원전 관련 정보들을 망라·재구성한 '방사능와치' 사이트를 만들어 무려 방문자 800만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시민단체 사이트로는 드문 기록이다.

그는 요즘 '바꿈' 공식출범을 앞두고 안전·정치·복지·청년·동북아평화 5가지 주제와 관련한 논문들을 분석 중이다. 안전에 관한 것만 2217권 찾았다. 해양, 건축, 철도를 비롯해 김밥, 감기약, 향수 등에 관한 것까지 각양각색의 조사자료가 나오더란다.

전 위원은 "지난해 세월호참사를 계기로 해양안전에 관한 자료들을 집중분석했는데 2009년에 공개된 것만으로도 이미 참사가 예견된 상태였다"며 "이런 내용들이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돌고 시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아 사전에 경종을 울리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와 언론은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지만 우리는 발생할 사건을 미리 짚어내는 게 목표"라며 "이미 만들어진 수많은 기록을 분석하면 앞으로 벌어질 사회문제를 예견하는 게 가능하다고 본다"고 포부를 밝혔다.


원문바로가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숨겨진 정보, 전문적인 정보에 햇볕을 허하라.

–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을 왜 시작했는가?

더 플랜B 2015.4.5


전진한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준비위원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하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지켜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가 온몸을 감싸면서 빠르게 뛰던 심장 소리가 아직도 느껴진다. 당시 주변에 많은 활동가들이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고, 모이기만 하면 스멀스멀 용솟음 치고 있는 방사능 걱정으로 한숨 짓기 바빴다.

반면 일반 친구들을 만나면 두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었다. 방사능은 바람을 타고 미국 쪽으로 갈 것이라며 우리와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웃던 친구가 있었다. 너무 기가차서 각종 수산물과 공산품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물으니,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 한 친구는 각종 커뮤니티에 돌아다니는 흉측한 괴 생명체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도 이렇게 되냐며 나에게 묻곤 했다.

당시 이런 경험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우선 우리 활동가들이 벌이고 있는 각종 운동의 과정과 결과물들이 시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핵발전소 및 방사능의 각종 어려운 용어는 이를 더욱 가로막고 있었다. 이후 많은 고민을 했다. 그토록 위험한 핵발전소와 방사능의 위험을 시민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시민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참을 고민한 후 우리가 직접 이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아무리 어려운 용어라도 쉽게 풀어쓰면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2013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핵발전소 문제 및 방사능 문제를 인포 그래픽으로 정리한 ‘방사능 와치(http://www.nukeknock.net)’ 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인포그래픽은 디자인 전문가들과 홍익대 디자인과 학생들의 도움을 얻었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환경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어려운 용어는 되도록 쉽게 풀어 썼다. 사이트의 목적은 단 한가지였다. 중학교 2학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자. 사이트의 개설과 동시에 트래픽량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불과 몇 개월 만에 페이지뷰가 800만이 훌쩍 넘어갔다. 이 경험은 참으로 많은 깨달음을 얻게 해주었다.

방사능와치에 올라와있는 인포그래픽

그러나 얼마 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온 국민들은 가까운 바다에서 벌어진 이 사태에 대해 분노했다. 당시 정보공개센터 활동가들에게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세월호 참사가 왜 발생했는지 원인을 찾자고 했다. 자료를 찾을수록 엄청난 비밀들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통계청 사이트에는 선박들의 연령을 20년에서 25년으로 늘려주었던 2009년부터 해양사고가 속출했다는 통계를 볼 수 있었다. 프리즘이라는 사이트에서는 2010년 당시 국토해양부가 생산한 보고서에 해양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원인으로 운항 일정이 바빠 시스템을 유지할 시간이 부족하고, 안전관리매뉴얼의 분량이 많으며, 심지어 선원의 나이가 많고 선원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내용을 버젓이 공개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4년이나 방치해 둔 것이다.

해양경찰청 홈페이지에는 목포여객터미널에 12척의 배를 2시간 20분 동안 점검했다는 보고서가 나와 있었다. 한 척당 13분이다. 자전거 한 대도 제대로 검사하지 못할 시간으로 선박을 검사한 것이다. 이밖에도 기가 막힌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청와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은 자신들이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해양수산부 매뉴얼에는 컨트롤 타워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 매뉴얼에는 큰 재난사고가 나면 충격 상쇄용 아이템을 만들어 시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 있었다. 이외에도 세월호 사건이 총체적인 부실에 의해서 발생된 문제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자료를 보면 볼수록 소름이 돋았다. 이후 언론의 경쟁적 취재로 실시간으로 보도되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자료를 미리 발견해 시민들과 소통했더라면, 참사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자책감이 밀려왔다. 평소 이런 자료들은 시민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자료를 찾기도, 해석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자료들, 시민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이 사건 이후 향후 시민운동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두 가지 결론을 얻었다. 우선 기존에 전문가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있는 정보들을 일반인들에게 전달하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딱 중학교 2학년 수준으로 말이다.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생산하고 있는 컨텐츠를 살펴보니,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다. 시민사회단체에서 생산하고 있는 결과물들을 시민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최근 웹툰으로 제작된 미생, 송곳 등은 한국의 노동현실이 어떤지 생생하게 전달해주었다. 우리 시민사회단체들이 뼈아프게 느껴야 할 지점이다.

또 다른 결론은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 논평하기보다는 일어날 사고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각종 연구용역서, 학계 논문, 통계, 빅데이터 등을 찾으면서 위험성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자료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핵발전소 등의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많이 공유되고 있고 지역주민들도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지만, 다른 부분에 대한 위험 예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시민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이미지출처 : The Library by Zhu, on Flickr)

중학교 2학년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하 바꿈)’ 이라는 단체를 준비하고 있다. 기존 시민사회단체들이 생산하고 있는 수많은 컨텐츠들을 인포그래픽, 웹툰, 카드뉴스, 동영상 등으로 가공하여 대중들에게 전달하고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각종 자료들을 찾아서 공개할 예정이다. ‘바꿈’은 스스로 몸집을 키우지 않고, 시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유통하는 데 최대한 집중할 예정이다. 또한 ‘청년, 복지공동체, 안전사회, 지속가능한 미래, 한반도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성숙한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이와 관련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관련 자료를 찾아 최대한 쉽게 가공해 시민들에게 전달할 것이다.

컨텐츠가 차고 넘치는 시대다. 하지만 이 중에서 우리사회의 부패하고 썩은 곳을 지적하는 내용은 잘 찾을 수 없다. 온갖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정보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반면에 구석구석 시민들을 위해 훌륭한 컨텐츠를 만드는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있지만 내용의 전문성과 딱딱함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외면 받고 있다. 이 간극을 줄이는 것이 ‘바꿈’의 최대 목표가 될 것이다. 향후 ‘바꿈’이 우리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창립 주체로 참여하고 있는 나조차도 기대된다. 많은 성원 부탁드린다.


원문바로가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