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나요?


네! 지구의 생명체로서 그들에게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사상가 헨리 솔트는 1892년에 “사람이 권리를 가진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동물도 권리를 가진다.” 고 한 바 있죠. 2009년 EU가 채택한 리스본 조약에서도 동물을 지각력 있는 존재로 인정, 동물의 복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영국 농장동물복지위원회는 1979년에 동물의 5대 자유를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동물의 5대 자유는 각국 동물복지의 기본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동몰의 5대 자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동물의 본래의 습성과 신체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정상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할 것, 둘째. 동물이 갈증 및 굶주림을 겪거나 영양이 결핍되지 아니하도록 할 것. 셋째. 동물이 고통, 상해 및 질병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할 것, 넷째. 동물이 정상적인 행동을 표현할 수 있고 불편함을 겪지 아니하도록 할 것, 다섯째. 동물이 공포와 스트레스를 받지 아니하도록 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해야 할까요?


2014~15년 길고양이를 무려 600마리나 불법포획해 산 채로 끓는 물에 넣는 등 죽인 후, 건강원에 판매한 자에 대한 처벌은 고작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80시간 이었습니다. 즉 실형 선고가 아닌 셈입니다. 이웃의 반려견을 훔쳐 잡아먹은 자에 대한 처벌 역시 점유이탈물 횡령죄만 적용되었습니다. 즉 차량운전자는 30만원의 벌금, 취식자 3명은 각각 50만원씩 벌금으로 약식기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동물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은편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축산업의 99%는 공장식 축산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017년 1/4분기 기준으로 육계와 산란계를 합친 닭은 무려 약 1억 3,000만 마리나 살고 있는데 대부분은 A4용지 보다 작은 닭장 안에 평생을 갇혀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공장식 축산은 가축 전염병에 매우 취약합니다. 2000년 이후 구제역과 조류독감 때문에 살처분된 가축의 누적 수는 총 8천만 마리가 넘습니다. 문제는 살처분된 가축 대부분은 감염 여부와 무관하게 살처분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동물실험으로 연간 최소 287만 마리의 동물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동물을 물건이 아닌 생명의 주체로 대하고, 인간에 국한된 권리 주체 개념을 확장하고, 동물보호가 안되는 현행 법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그럼 헌법에 동물보호와 동물권을 명시한 사례가 정말 있나요? 

네. 그렇답니다. 스위스, 독일, 인도, 브라질, 세르비아는 헌법에 관련 내용을 담은 사례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스위스는 2000년 '생명의 존엄성'을 연방헌법에 명시 했습니다. 특히 스위스에서는 동물학대 등 동물보호법 위반시 처벌 수위가 무척 높습니다. 최대 3년 이하 징역, 약 23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되며 재산에 따라 벌금이 차등부과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무려 11억 4500만원까지도 벌금 부과가 가능합니다.

또한 에콰도르는 세계 최초로 2008년 자연에 권리를 부여하는 '자연권'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켜 헌법에 반영했습니다. 이에 따라 에콰도르에서는 국가에 환경파괴 예방 의무를 부여하고 있으며 국가의 행동이 미흡할 시 시민들이 소송을 할 수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은 이 세상의 동등한 창조물이다.” 독일 동물보호법 1조 1항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독일은 기본법을 토대로 인간과 동물의 동등한 권리를 법에 담고 있습니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반려동물을 기르는 사람이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여 국가가 동물보호와 복지를 증진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개헌을 위한 동물권 행동 "개헌동동"

생명체로서 동물이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동물의 권리를 헌법에 명시하기 위해 개헌동동 활동에 함께해주세요. 

'개헌동동'은 동물의 권리를 헌법에 명시하기 위해 2017년 11월 15일 생긴 프로젝트 그룹입니다. 현재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변호사들,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바꿈, PNR(People for Nonhuman Rights), 한국고양이보호협회, 핫핑크돌핀스 등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특히 헌법에 동물권을 넣기 위한 아래 핑거액션에 꼭 참여해주세요! https://goo.gl/GRrD2b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은

"도전하는 청년을 응원합니다" 라는 주제로 다음 스토리펀딩을 진행중입니다.


다섯번째 순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

(너무나도 바쁜?) 인권활동가 정욜씨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5930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의식을 잃은 백남기씨가 317일간의 사투 끝에 결국 사망했다. 그동안 경찰의 과잉진압과 물대포 운용 지침을 지키지 않은 행위에 대한 비난 목소리가 높았고, 강신명 경찰청장이 살인미수로 고발당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은 침묵 중이다. 오히려 경찰은 유가족들과 대책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시도하다 법원으로부터 영장 발부를 거부당했음에도 영장 재청구로 맞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05년 11월 15일 농민대회 과정에서 사망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유가족과 국민에게 사과한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민이 사망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꼭 닮았지만, 정부의 대응은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인 26일, 황인성(64) 6월민주포럼 운영위원장을 만났다. 황 위원장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정국에서 복귀한 뒤 청와대 비서관으로 들어가 2005년 두 농민의 사망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성명이 나올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근무했다.


▲ 참여정부 시민사회수석으로 근무한 황인성 6월민주포럼 운영위원장 황인성 위원장은 2005년 여의도 농민시위 과정에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사망할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근무했다. ⓒ 박영민


"공권력에 의한 사망, 관심과 성의부터 보여야"


-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 2005년 전용철, 홍덕표씨가 여의도 시위에서 사망한 당시 시민사회수석으로 근무했다. 우선 시민사회수석실이 어떤 곳이었는지 말해 달라.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정국이 끝나고 업무에 복귀하면서 비서실을 재편했다. 기존의 정무수석실과 국민참여수석실을 없애고 시민사회수석실을 신설했다. 시민사회수석 산하에 시민사회비서관실, 사회조정 1비서관실, 사회조정 2비서관실, 사회조정 3비서관실과 치안비서관실 등 5개 비서관실을 두었다. 국회 및 정당 관련 업무는 정무팀으로 축소하여 비서실장실에 배속했다. 첫 시민사회수석으로는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으로 일하다 사표를 내고 청와대를 떠났던 문재인 변호사를 임명했고 내가 후임이었다."


- 시민사회수석실이 상당히 커진 것인데 왜 그런 재편이 있었나?

"알다시피 참여정부 초기에 원전 방폐장, 사패산 터널. 천성상 터널, 화물연대 파업 같은 사회적 갈등이 많았지 않나? 노 대통령은 공공갈등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해소하는 문제가 효율적인 정책 추진과 사회의 민주적 성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국회와 정당 관련 사안은 열린우리당이 자율적으로 대응하도록 축소했지만, 정책추진과 관련된 다양한 이해관계자 등의 요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정책추진 부처와의 원활한 소통과 조정을 지원해서 일종의 정책고객인 국민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일에는 비중을 크게 둔 것 같다."


-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2005년 11월 15일 여의도 농민시위 과정에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사망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었나?

"집회해산 과정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 기억한다. 초기에는 피해발생의 전후 사정이나 직접적 원인과 책임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경찰, 농민단체와 야당 사이에 책임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정부 내에서는 경찰의 자체 진상조사가 있었고, 독립적 국가기관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가 진행됐다."


- 진상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더라도 시위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초기 대응이 중요했을 것 같은데?

"사람이 죽었으니까 청와대 비서실 내에서는 사망한 농민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고 조의를 표하는 문제가 논의됐다. 당시만 해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청와대에서 조화를 보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처리를 주문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공권력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인명이 훼손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노력은 진행하더라도 유족과 관계자들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조문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관심과 성의를 표하고 실질적 대화와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 그래서 조화를 보냈나?

"내가 직접 갔다.(황인성 전 수석은 2005년 11월 29일, 고 전용철 씨의 빈소를 방문해 조문하고 유족과 대책위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유감을 표하고 진상에 입각해 합당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 - 기자 말) 당시 언론에서는 청와대 수석이 농민들에게 절을 했다고 굉장히 크게 보도했다."


"노 대통령 사과, 모두가 말렸다"


- 2005년 12월 26일 저녁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전원회의 결과를 공개하면서 전용철, 홍덕표씨 사망원인이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라면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바로 다음 날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참모들의 의견이었나?

"아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사과해야 한다는 말을 쉽게 꺼내기는 어렵다. 경찰의 진상조사가 진행 중이었고, 소관 부처가 있는데... 시민사회수석으로서도 진상을 숨기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엄정하게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시점에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가지 않았다."


- 그렇다면 대통령 자신의 생각이었나?

"그렇다. (2005년 12월) 27일 아침에 대통령이 비서실장, 정책실장, 소관 수석인 나를 불러서 농민사망 사태에 대한 대통령 사과를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 참모들의 반응은 어땠나?

"다들 만류했다. 아직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고 각 부처에 직접적인 책임자들도 있었다. 경찰청도 있었고. 그런데 대통령이 먼저 사과하는 것은 너무 나가시는 것이라는 신중론이 다수였다."


- 만류에도 강행한 것인가?

"당시 대통령 입장에서는 따지려면 따져볼 만한 내용은 충분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검토할 부분은 있지만 공권력 행사는 엄중한 문제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할 공권력이 국민에게 피해를 준다는 건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문제다. 대통령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하셨다."


- 당시 경찰청의 입장은 어땠나? 반발이 있었을 것 같다. 

"경찰청을 담당하는 수석실이 시민사회수석실로 바뀐 데에는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이지만 가장 민생과 밀착해 있는 대민 부서이고, 각종 집회나 시위에 대응하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갈등을 올바로 관리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의 사과성명 발표가 확정되자마자 경찰청장에게 전화로 대통령께서 곧 기자회견을 하실 예정이라고 알려주고 이후 대응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경찰청장의 해임 요구에 "임기를 보장하기로 한 경찰청장을 해임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결국 12월 29일 스스로 사퇴했다.

"당시 경찰청장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이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할 정도로 진상이 명확히 규명되었다고 보지도 않았고, 경찰들의 사기를 생각할 때 대통령의 사과가 과도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기자회견 뒤에도 경찰내부에서 뒷말이 나왔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통령의 사과가 공권력을 행사할 때 요구되는 정당성과 엄정성에 대해 공직사회의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의 대응, 지나치게 안일해"


▲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경찰의 부검영장 재신청이 이뤄진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백남기대책위와 시민들이 시신 탈취를 막기 위해 영결식장 입구와 연결 통로 위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 이희훈


- 전용철, 홍덕표씨가 사망한 지 정확하게 10년 뒤에 백남기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지고 결국 317일 만에 사망했다. 그렇지만 정부에서는 노무현 정부와 달리 사과가 없다. 어떻게 보고 있나?

"당시 청와대 내부의 논의과정을 지금과 비교해 보면 너무 안일하다. 공권력의 행사와 무관하게 사람이 죽었다면 누가 (정부의) 책임을 거론하겠나? 설령 진상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공권력의 행사 과정에 인명피해가 있었다면 같이 아파하고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기본이다."


- 만일 지금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어떻게 조언할 것인가?

"경찰은 물대포 사용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정당한 공권력 행사 과정이라고 항변하면서 죽음에 이른 건 본인(고 백남기씨-기자 말)이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를 밝히는 것은 그 과정대로 하더라도 유감을 표하고 공권력 행사에 과잉이나 불법이 없었는지는 자체조사해서 적절한 조치를 지시하는 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라면 그런 조언을 할 것 같다. 그런데 일 년 가까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가족이 원치 않는데도 시신까지 부검하려고 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민간단체가 행사하는 물리력과 공권력은 그 성질과 질, 양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다. 공권력 행사는 엄정하게 집행되도록 더 엄격하게 대처해야 한다."


-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바가 남다를 것 같다. 

"민주사회에서 기본적인 것은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결사의 자유다. 그래서 기본권이다. 기본권의 존중을 우선시 하면서 공권력이 행사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공권력이 우위에 있고, 이것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국민의 권리 행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잘못된 인식과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 그래야 갈등으로 인해 부딪쳐도 연성대치가 되지 강성대치로 나아가지 않는다. 강성 대치 상황에서는 예상치 못한 희생이 나온다. 연성대치 속에서 갈등조정의 길을 찾아야 한다."


지난 해 고 백남기씨가 물대포에 쓰러진 지 2일이 지난 11월 16일,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은 새누리당 초·재선 의원 모임에서 "미국에서는 (시위대가) 폴리스 라인을 벗어나면 경찰이 그대로 (시위대를) 패 버리지 않느냐. 그게 오히려 정당한 공권력으로 인정을 받기도 한다"며 경찰당국을 옹호했다. 2015년 12월 18일, 경찰은 백남기씨가 쓰러진 11월 14일의 민중총궐기가 오래 전부터 폭력 집회를 목적으로 치밀하게 기획, 모의한 것이라며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 대해 소요죄를 적용해 검찰로 송치했다. 여당과 경찰의 초기 대응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발생 42일 만에 국민에게 사과했지만, 고 백남기씨의 317일간의 사투 동안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국민의 인권은 공권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일까? 대국민 사과문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공권력의 행사에 관한 구절은 고 백남기씨의 사망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상식'이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공직사회 모두에게 다시 한번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 2005년 12월 27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 중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 반올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이기화 사진작가


"전에 찍었던 사진들이에요."

  

그곳으로 가기 전 기화 작가가 사진 몇 장을 건넸다. 익숙한 것이 먼저 보였다. 낯익은 것을 먼저 발견하는 자연스러운 시선이었다. 오죽이나 눈에 익어서 시야를 가린 조형물과 멀찍한 거리 따위는 그 기업의 로고와 입구를 알아보는 데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보였다. 거북이 등을 닮은 비닐 천막과 거울 기둥에 비친 사람들이 말이다. 나는 그 모습을 내게 익숙한 것들을 다 알아본 후에야 겨우 보았다.


▲거울. ⓒ이기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이 꼬리를 무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과 겨울이 지나갔고 어느덧 여름이 봄의 뒤꿈치에 붙어 따라왔다. 작년 가을 강남 한복판 고층 빌딩 아래에 여섯 장의 파레트를 깔고 자리를 만들었다. 춥고 궂은 날엔 비닐을 둘렀고 볕이 강한 날은 파라솔 아래 둘러앉았다. 거리를 지나가는 수천 개의 발걸음을 머리맡에 이고 거리잠을 자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260여일이 지나고 있었다.


 

▲CCTV ⓒ이기화

 

사람들의 무관심한 발길보다 괴로운 것은 24시간 내내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저 ''이다. 저들을 향해 하루도 쉬지 않고 말을 걸고 있지만 지켜보는 자들은 답이 없다. 감시카메라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제 없는 보상, 철저한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깨진 스티로폼을 새 것으로 바꾸는 것과 비오는 날 비닐을 두르는 것, 그늘을 만들 파라솔을 세우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농성장. ⓒ이기화


여기는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 꾸려놓은 작은 농성장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사람들이 있다. 20073,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며 삼성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다. 삼성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반올림'의 활동도 그와 함께 시작됐다. 올해로 벌써 9년째다



▲고무신. ⓒ이기화

 

아버지는 고무신 안에서 피어오른 꽃들을 살뜰히 보살핀다. 이 꽃을 보러 속초에서 서울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온다. 이 꽃들 중에 아버지의 딸 유미가 있기 때문이다. 9년 전 1명이었던 피해자 수가 222명으로 늘었고, 그중 76명이 사망했다. 모두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화사한 얼굴로 농성장을 둘러싸고 있는 76개의 고무신 꽃들이 실은 떠난 이들의 얼굴이었다. 안타까운 죽음을 꽃을 피워 기억하려는 반올림의 마음씀이 애달프다.


▲현수막. ⓒ이기화

  

201411, 삼성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조정위원회(조정위)를 통해 처음으로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삼성, 반올림, 삼성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세 주체였다. 그리고 이듬해 조정위의 권고안이 나왔다. 삼성의 공익법인 설립을 통한 보상 및 재발방지대책 수립이었다. 그러나 삼성은 조정위의 권고안을 무시한 채 자체적인 보상위원회를 꾸려 일방적인 보상을 실시하려 나섰다. 그 과정에서 반올림은 배제됐고 피해자의 진심에 가닿는 사과도 물론 없었다. 반올림이 노숙농성장을 꾸린 이유다



▲황상기 씨. ⓒ이기화

 

"해결, 마무리, 합의, 최종타결." 

 

속보가 쏟아졌다. 9년 간 쌓인 피로가 단숨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저 이야기는 반올림의 목소리가 아니다. 올해 초 반올림은 삼성과 사과와 보상을 제외한 재발방지대책에만 합의했다. 반올림이 요구한 사과와 보상 문제는 삼성의 거부로 답보상태였지만 피해자가 더 늘어나는 상황을 막는 것이 중요했다. 쏟아져 나온 속보에서 2개의 의제 해결이 남았음을 알린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세상은 삼성직업병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곳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매일 밤 이어 말한다. 발전기를 돌려 겨우 밝히는 작은 불빛이지만 그 빛 아래로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과 함께 안전한 노동환경과 노동자의 인권에 대해 말한다.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사는 건강한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가끔 노래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함께 읽는다. 반올림이 마련한 좁은 자리를 굳이굳이 찾아 들어와 앉아주는 엉덩이들이 있어서, 그 몸들이 만들어내는 빽빽한 밀도가 든든해서 버틴다. 거리를 오가며 작은 눈인사로 아는 체 하는 시민들의 지지와 끼니때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오는 사람들의 정성으로 농성장의 하루하루가 쌓인다.


▲농성장부감. ⓒ이기화

 

내가 눈에 익은 것들만 알아보며 사는 사이 많은 노동자들의 건강한 삶이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낯선 풍경을 외면하는 사이 반올림은 직업병이라는 비극을 멈춰보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농성장을 나와 집에 가는 길, 다시 돌아본다. 처음엔 쉬이 알아보지 못했던 그들의 자리가 보인다. 빌딩이 화려하게 들어선 강남 한 복판, 이곳에 세운 비닐천막은 분명 초라하다. 그러나 이 비닐 등껍질을 두른 반올림이 삼성이라는 태산을 등에 이고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이 지켜지는 세상으로 그들과 함께 가려고 온몸을 거리로 내던져 놓고 있다.


▲농성장2. ⓒ이기화


이 미련한 거북이들이 걷기를 멈추지 않는 한, 삼성직업병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유미 영정. ⓒ이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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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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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가야금 싱어송라이터 정민아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 & 오민정 사진작가

"삼풍 무너져도 정부 책임 생각 안 했죠"


가을밤이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낯을 익히다 어느덧 불콰해진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던 밤이 있었다. 사랑방을 자처하며 오합지졸들을 끌어 모은 집주인은 묵혀둔 동치미 독 헐 듯 냉장고를 헐어 자꾸만 음식을 내왔고 밤도 좋고 술도 좋고 인심도 좋은 시간이었다. 막차 시간이 코앞이라는 사실 말고는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시간을 재고 있던 내가 적당한 때를 보고 일어서자 집주인이 덜컥 팔을 잡아끌었다. 진짜 보고 가야 할 사람이 아직 안 왔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시냐는 물음에 사랑방 주인장이 답했다. "일단 한번 만나봐."


나는 그날 막차를 놓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사랑방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놀고도 흥이 가시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홀로 낄낄거렸다. 악기가 사람을 닮은 것인지, 사람이 악기를 닮은 것인지 여운을 길게 남기는 것이 나타난 사람이나 그가 들고 온 악기나 꼭 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배웅가라며 불러 준 천안도 삼거리를 제멋대로 흥얼거리며 아주 그냥 취해버렸다. 다음 날 두통을 부르던 숙취는 없었다. 그 밤엔 술이 아니라 사람에 취했던 것이다.


정민아, 가을밤에 만났던 그녀를 한 계절을 보내고 다시 만났다. 25현의 가야금을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 국악기를 들고 홍대 앞 라이브클럽에서 공연하는 '희귀한' 뮤지션, 국악으로 포크와 재즈,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고, 4개의 정규앨범과 다수의 프로젝트 음반을 낸 전업가수. 정민아를 소개하려면 이것저것 화려한 수식들이 많다. 심지어 그녀는 팬 카페와 페이스북 팬 페이지도 보유한 스타였다. (비록 팬 카페주인과 페이지 주인이 본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소개보다도 첫 대면과 동시에 속이 뻥 뚫리는 그녀의 호쾌함이 무엇보다 사람을 홀린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덤으로 봐도 좋고 망설임 없는 그녀의 행보는 일단 한번 만나보라던 사랑방 주인장의 자신감을 단연 인정하게 하는 대목이다.



"제가 그 전에는 대한민국의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별 생각 없이 나갔던 광우병 촛불 집회에서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 당시에 수많은 경찰들이 거리를 메우고 길을 못 건너게 하는 거예요.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권력에 의해 한 순간에, 아무 때나 바스라질 수 있는 자유 안에서 살았던 거지요. 그저 길을 건너려고 하는 사람을 권력이 저렇게 탄압할 수 있다는 것을 한 순간에 알게 되면서 제 생각과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용산 참사, 이랜드 노조, 이주노동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폭력을 겪고 있는 여성들, 세월호 참사. 우리 사회의 이면을 앓고 있는 곳이라면 부르면 무조건, 부르지 않아도 찾아서 다녔다. 한 덩치 하는 가야금을 이고 지고 가야 하는 것은 그녀에게 결코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꿔보리라는 포부는 없다. 음악이 상처를 치유할 것이라는 낙관도 없다. 음악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힘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해야 한다고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몰랐던 것을 알게 됐으니까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단다. 


"저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정부 책임이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당시 제가 봤던 어떤 보도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사고가 났구나 하는 정도로 알고 무심히 넘겼던 거예요.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반드시 미래에 되돌아온다'. 이건 되게 명백한 진실 같아요. 세월호 참사를 그때의 저처럼 단순한 사고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 사건이 결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말을 해줘야 해요. 제 음악과 활동들은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길 봐달라고 하는 외침이기도 하지만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우리가 지켜보고 있겠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지난해 5월 홍대역과 합정역 사이에서 예술인 100팀의 버스킹(거리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는 행위)이 있었다. 1인 시위의 기준이 되는 20미터씩을 사이에 두고 인간 띠처럼 이어 진행한 공연이었다. '세월호를 지켜보는 작은 음악가들의 선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릴레이 1인 시위를 기획한 것도 그녀였다. 세월호 참사 500일에 맞춰 15인의 음악인이 함께 만든 '다시, 봄' 이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유쾌하게 그리고 더 없이 진지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에 그녀의 눈망울이 유독 커다란 이유를 알게 됐다. 바라보고 있는 것도, 담아낼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이쯤에서 그녀의 음악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음악에 문외한이자 겨우 그녀의 말을 받아쓰는 게 일인 내가 음악을 말하겠다는 게 무척 우습지만, 음악이라 써놓고 정민아의 일상이라 읽으면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작사 작곡하는 모든 노래가 생활밀착형이다. 



"국악고를 거쳐 음대에 입학하면서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엔 계급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좀 더 우월하게 살 것이다, 국립국악원 같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좋은 학벌의 집안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 살겠다고 생각했죠. 정작 부유하게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부유한 미래를 꿈꾸는 철딱서니였어요. 그런데 이런 황당한 생각이 깨지게 된 게 생계를 위해 전화상담원 일을 하게 된 경험이었어요. 금방 그만두겠다던 그 일을 4년 반 정도 하게 됐는데 그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을 보게 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직업을 갖고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깨우쳤죠."


세상물정 모르던 철없는 음대생은 '국립'이 붙는 탄탄한 직장을 얻는데 족히 7번은 실패하고 당장 급한 생계부터 해결하고자 전화상담원 일을 시작했다. 엄마의 빚을 떠안고 살던 은미를 만난 곳이다. 집나간 엄마를 대신해 은미가 빚을 갚으며 집안 살림을 꾸리고 있을 때 은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은미는 3일장을 끝내고 돌아와 다시 전화기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민아는 은미의 허락을 받고 곡을 만들었다. '은미 이야기'다. 1집 <상사몽>을 발표하고 전화상담원을 그만둔 정민아는 광화문역 7번 출구 앞에서 매일 아침 주먹밥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1집이 1만 장이나 팔리는 성과에 힘입어 과감히 퇴직을 결단했지만 보릿고개는 금방 찾아왔다. 주먹밥 장사를 시작한 첫날 2000원짜리 주먹밥이 36개나 팔렸다. 그 후 단 하루도 첫날보다 많이 팔아본 적이 없다. 쫄딱 망했지만 노래 한곡이 남아 3집 앨범에 실렸다. 곡 이름은 '주먹밥'.



정민아는 중학교 2학년 때 동네의 작은 교습소에서 가야금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가야금을 타면서도 락키드였던 그녀는 홍대 라이브 클럽을 들락거리며 록, 재즈, 헤비메탈 등의 라이브 공연에 흠뻑 빠져 살았다. 그런 그녀가 클럽 공연에 서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야금을 들고 무대에 서기까지 실용음악학원에서 화성과 기타, 피아노 등을 배웠다. 작곡의 기본을 익히고 밴드들이 하는 앙상블 수업에 가야금을 갖고 들어가 장르가 다른 음악과 접목도 해봤다. 정민아의 음악은 그렇게 다져지기 시작했다.

 

"저는 제가 상위 1%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1%가 아니라, 음악가로 먹고 살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상위 1%라고 생각하거든요. 풍족하지는 않지만 이제 전화상담원을 하거나 주먹밥을 판다거나 하지 않아도 공연하고 음반팔고 하는 정도로 먹고 살 수는 있어요. 되게 감사한 일이에요."


상위 1%치고는 참 소박한 생활을 하는 중이지만 그 덕에 4집 앨범까지 나올 수 있었다. 4집 앨범을 준비하며 그녀 스스로 가사를 주우러 다녔다고 하는데, 팔도의 도서관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이십여 년 전 서른세 살이던 엄마와 손을 잡고 찾아갔던 수리산 한증막도 다시 갔다 왔다. 서울 수원 전주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그녀가 주워담은 순간은 다름 아닌 사람의 순간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 바라 본 사람들의 작고 외로운 순간순간들을 곡으로 담아냈다.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나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것이 사람이라고 담백하게 노래해 주는 이, 젊은 엄마의 외로움을 알아봐준 이, 작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충분히 아름답다 말해주는 이, 가난한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봐 주는 이가 있다는 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정민아의 음악이 전하는 진심이었다.



"만약 운이 좋아서 악단시험에 붙었다면 이런 세상을 몰랐겠죠. 이제는 세상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 이상해요. 저번에 세월호 미사에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중에 세월호 이전과 이후에 뭐가 변화됐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그냥 그 이전과 이후에 변화된 삶을 사는 거라고. 제가 광우병 집회에 나가 일순간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처럼 그 이전과 이후는 절대 같지가 않잖아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이제 그냥 제 이야기로만 노래를 만들 수 없어진 거예요.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 스스로가 그렇게 변화됐으니까. 화상입기 전과 후의 삶이 다른 것처럼."


그녀를 만나면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웃음도 많고 입담도 좋지만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그 품이 넉넉해서 한 자리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사는 얘기 풀어놓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언제고 오래 머물러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이냐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모르죠'와 '무계획'이었다. 그런 건 없단다. 그럼 당장 할 일은 무엇이냐 물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콘서트'란다. 


정말 못 말린다. 아니 말리지 않고 싶다. 삶에 대한 거창한 계획을 늘여놓지 않은 그녀가, 하루하루 필요한 곳에 가서 자리하겠다는 정민아의 즉흥이 너무 미더워서 그렇다. 누군가 내게 정민아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가보시라, 그곳에 그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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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인권활동가 정욜님은 현재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서 청년입문서 프로젝트의 청년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 반듯한 사람

KBS 조우석 이사가 "더러운 좌파"로 호명한 인권활동가 정욜에 대하여

성소수자 HIV감염인 박래군 등 가장 낮은 곳의 사람과 사람을 잇는 연결고리

한겨레21 제1083호 레드기획


박승화 기자


“콜록콜록.”


오명으로 호명당한 사람이 아팠다. 누군가의 모진 소리를 들어서는 아니다. 너무 열심히 일하다보니 몸이 신호를 보낸다. 매주 월화수목은 인권재단 사람에서 일하고, 금요일은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 나가고, 시시때때로 ‘한국 HIV/AIDS 감염인 연합회 KNP+’ 일을 한다. 살다가 살다가 너무 열심히 살다가 찍혔다. 공영방송 KBS 이사인 조우석 <미디어펜> 주필이 지난 10월8일 바른사회시민회의 등이 주최한 ‘동성애·동성혼 문제, 어떻게 봐야 하나’ 토론회에서 정욜(37)씨를 동성애와 좌파의 연결고리로 지목했다. “더러운 좌파” 운운한 발제는 옮기기도 민망해 원문을 인용하진 않는다. 다만 “바빠서 분노도 밀어내야 할 판”이라는 정욜씨의 감상을 전한다.


점차 개인을 향하는 혐오


“얼마나 자극적이에요. 통진당(통합진보당)에 동성애에 심지어 에이즈 환자와 살았어. 열심히 해서 그렇게 됐다기보다는 그들의 의도에 적합해서 간택받은 거죠.” 그렇게 그는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다. 통합진보당·동성애·에이즈. 독재정권 시절이라면 빨간 줄이 세 개고, 나치 수용소라면 분홍별 세 개는 달았을 운명이다. 지난 10월8일 토론회에 잠입 취재한 게이 후배가 사실을 알렸을 때, 그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혐오가 점점 개인을 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걱정해서 ‘괜찮다’고 했지만 속으로 많이 끓었어요.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거나 영화로 찍은 건, 사회와 소통하는 각색의 주체가 저였기 때문에 전혀 다르죠.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되는 게 놀라워요.” 침묵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을 침묵으로 남겨둘 자유가 점점 위협받고 있다. “기사가 났던 날, 밤 10시에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어요. 주무실 시간인데, ‘혹시 안 거 아냐?’ 싶었죠. 한참 망설이다 신호음이 끝날 때쯤 전화를 받았는데, 너무 밝은 목소리로 ‘고구마를 캐왔는데 맛있으니 가져가’란 거예요. 가슴을 쓸어내렸죠. 제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는데, 그 기사만 보면 행복한 게 아니잖아요.”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이런 소리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빵을 배워서 일본으로 도망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대학에선 일어일문과를 다녔고, 4학년 때 학원을 다니며 제빵 기술을 배웠다. 2003년의 일이다. 그가 “현석이”라고 부르는 청소년 동성애자 육우당이 유서를 남기고 동성애자인권연대(동인련) 사무실 안 문고리에 목을 매어 숨졌다. “아, 나는 안 되나보다.” 당시 동인련 대표였던 정욜씨는 맡겨진 소임에서 달아나지 못했다. “저는 빚을 청산하고 있는 거예요.” 육우당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지난 10여 년 동안 청소년 성소수자 이슈를 열심히 챙겼다. 운명처럼 지난해 한국 최초로 청소년 성소수자 쉼터 ‘띵동’을 활동가들과 같이 만들었다.


가브리엘은 ‘행동하는 성소수자인권연대’로 이름을 바꾼 동인련에서 가장 친했던 형이다. 이태원에 클럽이 오픈하면 좋아하는 보세옷을 입고 함께 갔다. 물론 인권모임도 함께했다. 그랬던 형이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우리 형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일 때문에 바쁜가” 궁금했다. 그러다 병원에서 가브리엘을 다시 만났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가브리엘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2002년 무렵이었다.


“그때는 빨리 수업을 마치고 병원에 형이 먹고 싶은 음식을 사가서 함께 먹고 오는 게 일과였죠.” 그렇게 HIV 감염인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2004년 만들어진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에 참여했다. 나누리+ 초기 모임은 육우당 사망을 계기로 마련한 동인련 사무실에서 자주 열렸다. 에이즈 인권운동을 하면서 한때 감염인 애인을 만나기도 했다.


내 동생, 육우당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청소년 동성애자 '육우당'이 남긴 유품이 2013년 10주기 추모제에 맞춰 정리됐다. 동성애자인권연대 제공


성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인 청소년과 감염인, 그의 마음이 향하는 이들이다. 그에게 “가장 급진적인 운동”이라고 하자 “가장 인권적인 분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성소수자 인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청소년과 감염인 인권이고, 그것이 풀려야 다른 문제도 풀린다”고 말했다. 급진적이든 인권적이든 실은 소소하고, 답답한 과정의 연속이다. 청소년 성소수자의 암담한 상황에 한없이 귀기울여야 하고, 감염인들과 이것이 왜 인권의 문제인지 끝없이 대화해야 한다. 거리에서 거창한 캠페인을 하기보다는 병원을 끝없이 들락거리며 싸워야 하는 일이다. 힘없는 자들이 힘을 갖게 되는 자력화, 그가 하고 싶었고 해온 일이다. “답답한 과정을 어떻게 버티냐”는 질문에 그는 KNP+가 하는 ‘감염인 사랑방’ 모금 캠페인을 예로 들었다.


“모금에 대해서 토론하면 별로 말씀하시는 (감염인) 분이 없어요. 잘 모르는 분야니까요. 그런데 후원의 밤에 어떤 음식을 할까를 놓고는 30분 넘게 토론해요. 갈비냐 탕수육이냐를 놓고. 저는 그게 좋아요. 비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이분들이 아는 정보를 가지고 열심히 토론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가장 완벽한 7가지 종류의 뷔페를 만들기로 스스로 결정한 거예요. 지금은 음식이지만 나중엔 인권 문제로 이렇게 토론할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가장 소외된 곳으로 간 덕분에 가장 진실한 얘기를 들었다. 귀하디귀한 ‘사람책’을 읽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성소수자운동을 통해 성장했다. 지난 10여 년 성소수자운동은 한국에서 예외적으로 성장하는 운동이었다. 성소수자운동에서 시작한 그가 동성애와 좌파의 연결고리가 된 과정은 이렇다. 1997년 우연히 대학에서 대자보를 보았다. 동인련의 전신인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대동인) 전화번호로 연락했다. 인권운동은 신세계였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을 만나고 인권단체연석회의에 참여하며 시야를 넓혔다. 2002~2012년 동인련 대표를 한 그는 동료들과 함께 열심히 집회에 나갔다. “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가 우리의 인권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고 느껴 함께하면서 정보인권 활동가들을 알게 되고,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을 하면 평화운동가들과 만나고, 동인련 회원 중에 병역거부자가 나오면 ‘전쟁 없는 세상’ 활동가들을 소개했죠. 이렇게 계기가 계속 있었죠.”


없던 것을 만드는 “창업가 기질”


2008년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가브리엘의 치료에 절실한 '푸제온'을 국내에 출시하라고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육우당과 가브리엘은 정욜씨를 청소년과 감염인 인권운동으로 이끌었다. 한겨레 윤운식 기자


양복 입은 정욜을 기억하는 이가 적잖다. 그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회사에 다니며 동인련 대표를 했다. 회사가 끝나면 자주 집회에 왔고, 때로 휴가를 내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집회와 회의에 자주 나타나 그를 직업적 활동가로 생각하는 이도 많았다. 그랬던 그가 2011년 3월 인권재단 사람에서 상근을 시작했다.


“인권활동가들에게 오는 메일링 리스트에서 채용공고를 봤어요. 인권센터를 짓는데 모금을 담당할 활동가를 채용한단 거예요. 박래군씨한테 장문의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요. 전화를 했더니 ‘미안하다’고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인권센터라는 도전해볼 만한 공간에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 좋았어요. 영리기업에서 익힌 업무도 활용하고 싶었고요.” 그렇게 ‘좌파와 동성애의 연결고리’가 완성됐다. 따지고 보면 청소년 쉼터도, 감염인 모임도, 인권센터도,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다. 그에게 “은근히 창업가 기질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렇네요” 하며 웃었다.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환대하는 운동을 했으나 자신은 정작 환대받지 못하는 세상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생존자”라고 불렀다. “생존자라는 말을 좋아하진 않지만 나를 설명하기 위해 쓰게 되죠.” 1998년 입대한 그는 성정체성이 드러나 군 정신병원에 입원당했다. “정신병자임을 인정하면 제대시켜준다”는 말도 들었다. 한 달 넘게 독방에서 뭔지도 모를 약을 먹어야 했다. 그의 상식으로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었다. 힘든 시기를 거쳤지만, 다행히 부대에 복귀해 군 생활을 마쳤다.


올해도 하필이면 ‘띵동’이 있는 서울 성북구에서 일이 터졌다.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사업으로 선정된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예산이 성북구 보수 개신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쓰지도 못하고 ‘불용 처리’돼버렸다. 하필이면 서울시민인권헌장 무산 사태와 겹쳤고, 그는 성북에서 고군분투했다. 조우석씨는 발제문에서 성소수자 서울시청 점거농성에 대해 “3일 동안 이뤄졌던 이 점거농성 끝에 정욜과 박원순 둘이 직접 면담을 진행했으며, 직후 농성을 철회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밀약이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고 썼다. 그러나 정작 정욜씨는 “바빠서 서울시청 농성장에 자주 가보지도 못했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10월에도 심란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 그와 ‘희망을 만드는 법’ 류민희 변호사가 참고인으로 출석하게 돼 있었다. 여야 합의로 의원들이 신청한 참고인을 모두 부르기로 했지만, 막판에 그와 류 변호사 등만 출석을 못하게 됐다. 성소수자 단체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인 유승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해명을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다. 이렇게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보수 개신교의 압력에 야당 정치인도 굴복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하필이면 유승희 의원은 띵동이 있는 동네의 지역구 의원이다.


정욜씨는 “다음 총선에서 보수 개신교 세력은 후보들에게 동성애에 대해 질의하는 것을 넘어 직접 찾아가 묻고 따지는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운동이 새로운 법을 만들고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있는 것을 지켜내는 더욱 힘든 싸움이 될 것”이란 얘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은 참 반듯한 사람, 정욜에게 자꾸만 싸움을 건다.


환대받지 못하는 사람을 환대하는 운동가


박래군 인권중심 사람 소장과 그에게 연결고리가 있긴 있다. ‘잊지 못하는 동생’이다. 박래군 소장의 동생 고 박래전씨는 1988년 독재정권에 저항해 분신했고, 정욜씨의 동생 같은 육우당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상을 비관해 2003년 자살했다. 서너 해 전 망원시장에서 정욜씨를 마주친 적이 있다. 그는 “인권중심 사람에서 하는 박래전 열사 추모제 음식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세월호 진상 규명 활동을 하다 구속된 박래군 상임이사와 바깥세상을 잇는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람은 그렇게 연결돼야 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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