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윤(우리미래 공동대표)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은 미래세대인 청년들의 이야기를 모아 시민이 참여하는 개헌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2030세대 여러 청년들의 상상력을 담은 개헌 이야기를 카드뉴스와 함께 시리즈로 연재합니다. 두 번째 기사는 '국민주권' 입니다. - 기자 말


이성윤씨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청년 중심의 정당 '우리미래' 공동대표 입니다. 이성윤 대표는 국민주권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습니다. 시민들의 주권이 표출된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그리고 최근 촛불집회까지... 이성윤 대표는 이러한 주권표출의 의미를 되새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이후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할 수단이 부재하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했습니다.

이성윤 대표는 주권의 정의는 국가의 권력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이며, 대한민국에서는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나온다." 고 명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선거 때를 재외하고 국가의 권력이 국민들에게 있다고 느끼기는 힘들다고 강조했습니다. 실제 스위스는 국민투표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아일랜드는 시민이 참여하는 개헌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성윤 대표는 첫째. 국민발안권(국민이 직접 입법에 관하여 제안 할 수 있는 제도), 둘째. 국민소환권(선출직의원이나 공무원을 임기가 끝나기 전에 국민에 의하여 파면, 소환 하는 일) 셋쨰. 국민투표권(국가의 중대한 사항을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를 물어 결정하기 위한 투표) 넷째. 대통령피선거권(청년도 도전하고 싶다) 등의 포괄적인 개헌을 주장했습니다.


국민주권 확대를 담은 개헌, 당신은 찬성하시나요? 반대하시나요?

>> 개헌안 자세히보기 : http://wouldyouparty.org/polls/104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30년만에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현행 헌법의 한계가 개헌 동기는 민주적이었지만, 실제 개헌 내용에는 시민이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라면 이번 개헌은 어떻게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시민 참여 개헌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서 제작한 카드뉴스와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말]

현재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위원장 이주영, 이하 개헌특위)가 구성되어 있고, 각 분야 전문가와 헌법 관련 사회운동 활동가 등 50여 명으로 구성된 개헌특위 자문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개헌특위 자문위원회는 지난 6개월 간의 활동을 통해 헌법 각 분야에 대한 자문위원 의견의 대강을 작성하여 각 분야별 토론회를 진행한 바 있다.

개헌특위와 자문위원회는 여야 각 정당과 문재인 신임 대통령이 내년 6월 지방자치단체 선거까지 개헌안을 마련하여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공약한 것을 염두에 두고 그 활동기한을 내년 6월까지로 연장하였다. 자문위원회 논의를 토대로 개헌특위는, 소위원회를 열어 7월-8월까지 분야별 주요쟁점에 대한 합의사항 및 이견사항을 정리하여 국민의견수렴과 공감대 형성을 위한 국민대토론회, 5000명 국민대표 원탁토론 등을 진행한 후 다시 헌법개정안 작성을 위한 기초소위원회를 구성하여 개정안을 완성한 뒤 전체회의, 본회의, 국민투표 등의 절차를 밟겠다는 활동계획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헌특위는 특히 국민의견수렴을 위하여 온라인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국민의 개헌의견을 청취하는 한편, 국회에 2곳의 자유발언대와 주요 도시로 찾아가는 자유발언대를 운영하며, 소위원회 기간(7-8월)동안 국회 방송을 통한 연속 TV토론을 비롯하여, 전국 주요도시 순회 국민토론회와 공중파 및 종합편성채널 TV토론 및 여론조사 등의 국민참여형 공론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5000명 개헌 국민대표를 구성하여 원탁토론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최소 2-4배수의 개헌국민대표를 공모하여 성별, 연령별, 지역별 대표성을 기준으로 1차로 선발된 사람들에게 참가 가능 여부를 확인한 뒤, 최종적으로 5000명을 선발하여 수도권 등 4개 권역에서 총 4차례, 4시간가량의 원탁토론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개헌국민대표 방안은 개헌과정에서의 시민참여와 사회적 합의를 위해 김종민 의원이 지난 2월 15일 발의한 '국민 참여에 의한 헌법개정의 절차에 관한 법률안(이하 개헌절차법)'의 일부를 제한된 형태로 수용한 방안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5000명의 선발기준이 아직 불분명한 것은 차차 개선될 것이라 이해하더라도, 총 4개 권역에서 1000명 이상이 모여 4시간 총 4번의 토론으로 무엇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을지, 이런 절차에 과연 '숙의'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자칫 요식행위로 그칠 것이 우려된다.

국민자유발언대 역시 필자가 개헌특위 시작부터 일관되게 주장해온 것이었으나, 국회 마당 혹은 특정 건물을 정치개혁과 개헌논의를 위해 온전히 개방하자는 본래 제안과는 동떨어진 단순한 형식적인 발언대 설치로 그치는 느낌이다. 이미 새 정부가 국민인수위원회를 광화문에 설치한 사례도 있는 만큼, 보다 적극적인 국회개방 및 개헌 공론화 계획의 수립이 아쉽다.


헌법개정 주권실현 국민행동 제안 

국회 개헌특위가 제안하는 방안들은 현재로서는 매우 요식적어서, 국민의 직접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제한적일 것으로 예측된다. 하지만, 어떤 좋은 제안에도 각계 각층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다면 개헌 논의는 빈껍데기로 전락할 수 있다.

우선, 각 부문과 지역에서 개헌 논의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주권적‧인권적 요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노동조합과 각 직능단체, 지역주민단체, 각 분야 인권단체와 환경단체, 사회적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단체와 권력 감시 단체 등이 해당 의제나 분야에 관련된 다양한 시민토론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권리선언과 제안을 정식화해야 한다.

둘째, 국회에서의 개헌논의, 정부 각 기관에서의 (이제 본격화될) 개헌논의에 대응할 수 있도록 전국적인 시민사회 개헌논의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각계각층이 국회 개헌논의의 자문역만 수행하고 있을 수는 없다. 국회특위 자문위원회가 시민을 대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민의회도 가장 바람직하긴 하지만, 시민의 참여를 촉진할 시민사회 자신의 마당 혹은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 일을 진행할 전국적인 연석회의 혹은 연대체가 필요하다.

셋째, 국회 및 정부 개헌논의에 대한 모니터와 개입이 절실하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개헌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변죽만 울리고 실제 조문작업에는 참여하지 못하거나, 막판 절충에 가장 중요한 주권자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국회에서 열리는 모든 헌법 관련 회의의 공개를 요구하고 누구나 모니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넷째, 개헌특위와 특위 자문위원회, 나아가 국회와의 바람직한 시민참여를 위한 협력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개헌특위가 제안한 요식적인 개헌에 관한 국회 자유발언대가 아니라 정치개혁을 포함해 '정치개혁과 개헌을 위한 시민대토론 마당'이 국회에 마련되도록 협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시에 4-5개의 토론회를 동시에 개최할 수 있고, 만민공동회가 가능하며, 수시로 누구든지 제안을 접수하고 발언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아고라를 국회 안에 마련하는 사업을 협의할 수 있다. 또한 요식적인 5000명 개헌 국민대표가 아니라 쟁점별로 실질적인 시민 합의 회의가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을 협의할 수 있다.


헌법개정 주권실현 연석회의를 구성하자

이에 '헌법개정 주권실현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 구성을 제안한다. 연석회의는 헌법 개정 논의에 촛불시민혁명을 이끈 주권자들이 보다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촛불 이후의 대한민국을 보다 주권과 인권의 기반 위에 올려놓고 국가권력과 헌정질서가 그 주인인 시민과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안전, 나아가 모든 생명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복무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연석회의는 헌법 개정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개입하기를 원하는 각계각층 사회단체와 인사들의 협력기구이자, 시민사회 각계각층의 개헌 논의 혹은 권리 선언을 연결하고 소통하며 증폭하는 디딤돌, 가교, 마당, 혹은 확성기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헌법 개정 과정에 시민사회의 발언과 참여를 촉진하기 위한 각종 사업을 기획‧추진하고, 각계각층 주권자들의 민주적 토론에 바탕을 둔 새로운 권리와 헌법적 장치들을 제안하고 공론화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개헌논의가 국회의원과 일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나 특정 정치-사회 세력의 이해관계에 갇히지 않도록 견제하고 감시하며, 견인하고 협력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요구와 권리를 헌법 개정 논의에 반영하고자 하는 시민, 특히 사회적 약자들과의 공동 협력과 법률적 이론적 지원 및 대변 활동을 수행하고자 한다.

연석회의에 참여하는 단위는 헌법 개정과 새로운 권리의 제도화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회단체 및 모임이 될 것이다. 노동조합, 직능단체는 물론, 지역주민단체나 모임, 부문단체나 모임, 연구자나 연구자 단체, 각종 인권-환경-시민단체, 개별단체와 연대기구 등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렇다면 연석회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우선, 촛불권리선언을 비롯한 분야별 권리선언과 선언들을 헌법 조문화하는 작업이다. 노조, 단체, 모임, 지역 등에서 실정에 맞는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개헌 토론회 및 간담회를 통해 권리선언을 작성하고, 이를 헌법화하는 것이다. 또한 촛불권리선언 참여 주체들과 테이블 토론회나 개헌 만민공동회 형식을 빌린 자리를 마련하여 권리선언 항목별 개헌쟁점에 관해 논의할 수도 있다.

둘째, 국회 개헌특위 안과는 별도의 '시민개헌안'을 조문화할 수 있다. 바람직한 개헌 방안에 대한 시리즈 토론회를 개최하여, 시민사회가 제안하는 개헌 과제들 가운데 공통된 사항과 토론해야 할 사항을 정리하고, 소통을 통해 이들 개헌 과제들을 분류 및 종합하여 시민개헌안을 도출하는 것이다. 무작위추첨 방식에 의한 시민합의회를 개최, 특정 개헌 쟁점에 대해 논의할 수도 있다. 이 작업은 국회 혹은 신문 및 방송사들과의 공동 개최도 가능하다.

헌법권리찾기 시민학습 프로그램도 필요하다. 개헌의 필요성과 의미, 쟁점, 새로운 권리 목록 등을 알기 쉽게 정리한 소책자 발간이 첫째 방안이다. 헌법과 주권자 권리에 관한 강사단을 구성, 운영 및 강의 매뉴얼을 개발하여, 각종 단체를 비롯한 학교, 모임 등에 파견을 나가는 '찾아가는 학교'도 만들 수 있다.

기존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제휴하여, 시민참여를 위한 온라인 플랫폼을 형성하는 작업 또한 요구된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서는 시민 발언과 조문 토론 등의 작업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원회와의 공동 사업이다. 국회 개헌특위와 공동 토론회 및 시민 참여 방안에 관한 간담회를 진행하고, 정치 개혁과 개헌을 위한 광장을 열어 국회 특위가 제시한 개헌 자유 발언대를 실질적으로 시민 참여가 가능하도록 개선하고, 기타 정치 개혁과 개헌에 관한 국회와의 협력 사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참여 개헌 플랫폼 바로가기 http://bit.ly/시민개헌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30년만에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현행 헌법의 한계가 개헌 동기는 민주적이었지만, 실제 개헌 내용에는 시민이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라면 이번 개헌은 어떻게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시민 참여 개헌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서 제작한 카드뉴스와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말]





새 헌법을 어떠한 내용으로 채우느냐 하는 것 이상으로 헌법 개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누가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선거로 선출한 국회에 입법권을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정치 체제의 가장 근본이 되는, 그리고 가장 큰 사회계약인 헌법 개정에 있어서만큼은 주권자인 국민이 단순히 국민투표 방식이 아닌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요청된다.

바로 이 점에서 아일랜드의 시민주도형 개헌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국회가 아닌 시민이 중심이 된 개헌의 방향에 대해 모색하고자 한다(분량 상, 기사에서는 아일랜드의 사례만 다루며, 아이슬란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민주도형 개헌 사례는 아래 첨부한 파일을 참조하라).


아일랜드의 헌법회의(The Convention on the Constitution)

2008년 아일랜드를 휩쓸었던 최악의 경제위기는 '정치개혁'을 제1의 정치 어젠다로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2011년 총선에서 주요 정당들은 헌법 개정에 시민 참여를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 2012년 2월 정부안이 발표됐고, 7월 양원은 헌법회의 설립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헌법회의는 의장을 포함하여 총 100명 규모로 구성되었다. 정부에 의해 임명된 1명의 의장, 66명의 일반 시민 그리고 33명의 의원으로 이루어지는데, 일반 시민은 선거인 명부를 기반으로 하여 선출하되 최대한의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론조사 회사가 선발 작업을 전담토록 하였다. 참고로 각종 부대비용은 헌법회의에서 지급하지만 시민 구성원이 된다고 해서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정당원 및 로비 단체 회원 여부,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도 등은 참가 배제의 사유가 되지 못하였다.

일반 대중의 참여가 중요함을 강조하며 홈페이지를 통해 컨벤션 활동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홈페이지에는 각종 보고서 및 제안서가 업로드 될 뿐 아니라 전체회의를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정부는 총리실 공무원이 관리하는 사무국을 설립하여 업무를 보조하도록 지원하였다.

헌법회의는 총 10회 이상 소집되었으며, 주말을 이용하여 하루 반나절 동안 진행되었다. 각 회의는 미리 배포한 자료에 대한 전문가들의 발표, 이슈의 찬반 입장에 따라 나뉜 집단 간 토론, 조력자(facilitator)와 기록담당자(notetaker)가 배석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라운드테이블 논의로 구성되었다. 토요일의 심의가 끝난 후 일요일 오전, 구성원들은 전날의 논의에 대해 재고한 후, 표결에 참여하였다. 참고로 헌법 회의의 모든 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데, 동수일 경우 의장이 캐스팅 투표권을 행사했다.

안건 중 대통령 출마자격을 35살에서 21살로 낮추는 것(헌법회의는 대통령 임기 단축 의제를 자체 토론 결과 부결시키는 대신 후보 나이를 낮추는 방안 마련)과 동성결혼 허용 등 2건은 의회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국민투표에 부쳤다. 대통령 출마 나이를 낮추는 것은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으나, 동성결혼은 통과했다.

톰 아널드 의장은 최종 보고서에서 헌법회의의 활동을 "아일랜드의 정치적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평가하였다. 공정한 방식으로 정보가 제공되고 질문할 기회가 주어지며 적절한 논의의 장이 형성된다면, 시민은 얼마든지 복잡하고 기술적인 이슈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정책적 결정을 도출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시민들 중 추첨으로 선발한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

헌법회의 활동이 활발했지만 의회에서 보수파의 반발 등으로 그 성과가 충분하지 못하였고 의회의 이런 미온적인 태도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이와 함께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논쟁거리 중 하나인 낙태 문제가 헌법 개정 논의를 위한 시민의회 구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아일랜드 수정헌법 제8조에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권을 인정함으로써 낙태를 전면 금지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2016년 총선 뒤 엔다 케니 총리 등 집권당은 시민의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시민의회가 다루게 될 안건은 낙태와 국민투표, 인구 고령화 대책, 기후 변화, 선거일 고정 문제 총 다섯 가지로 결정되었다.

정부는 7월 27일, 대법원 판사인 메리 러포이(Mary Laffoy)를 의장으로 임명한다. 곧이어 9~10월에 걸쳐 이루어진 99명의 시민 구성원은 무작위로 선출하되 인구조사에 반영된 인구통계학적 변인을 대표하도록 조정하였다. 대표성의 원리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참여를 독려하는 금전적 인센티브는 주어지지 않았다. 헌법회의와는 달리, 시민의회가 숙고할 의제와 관련된 시민단체 혹은 이익집단의 회원으로 소속된 경우 참여할 수 없도록 하였다.

시민의회 활동의 초석은 다름 아닌 시민들의 '심의'이기 때문에, 각 회의 때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한 원탁회의(roundtable discussions) 세션을 여러 차례 제공한다. 원탁회의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전문가나 초청된 연사의 프레젠테이션 이후 구성원들이 들은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마련된 비공개 세션이다. 다른 하나는 때때로 시민의회의 특정한 문제, 예컨대 권고안이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해 한층 더 상세히 고려할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원탁회의를 계획한다.

비공개 세션을 제외한 전체회의(plenary meeting)의 전 과정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생중계한다. 이는 시민의회의 주요 원칙 중 하나인 개방성을 위한 것으로, 완전한 투명성에 기반한 운영을 위해 회의 공개는 물론 홈페이지에 업로드되는 모든 문서는 무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면 제안서(written submissions)는 일반 대중 뿐 아니라 이익단체로부터도 제출받았으며, 더 나아가 직접적으로 시민의회에 대변되지 않은 이주민(diaspora), 18세 미만의 청소년 등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부문으로부터 의견을 들을 수 있도록 완전히 개방되었다. 첫 회의 이후 약 9주간 제출받은 제안서는 우편을 통해 5000건 이상, 온라인으로 8000건 이상을 기록하였다. 이는 헌법회의에 제출된 모든 제안서의 수보다 다섯 배나 많은 것이다. 

헌법의회의 후임자 격인 시민의회는 현재 진행 단계에 있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헌법회의의 활동에 제기되었던 냉소적 시각을 털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첫째, 헌법회의와 달리 시민의회는 일반 시민에게만 참여 자격을 부여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 시민에 대한 전에 없던 정치적 신뢰를 전제하고 있다. 둘째, 시민의회는 1년 동안 총 다섯 가지의 안건에 대해 숙고함으로써 논쟁적이고 복잡한 사안에 대한 학습에는 보다 긴 시간을 투자하는 등 심의의 속도를 스스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시민의회에 대한 세 번째 기대의 근거는 시민의회가 다루는 안건의 현저성(saliency)에 있다. 시민의회를 촉발시킨 지점에는 수정헌법 제8조, 더 나아가 아일랜드를 지탱해온 습속에 대한 논쟁이 자리하고 있다. 즉 현저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구상된 시민의회는 단순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국가적 분열을 초래해온 이슈에 대해 아일랜드 사회의 전 부문을 대변하는 '미니 공중(mini-public)'이 숙고하는 것에는 상징적이고 근본적인 중대성이 존재한다.


시민주도형 개헌, 우리는?

위에서 상세히 소개한 아일랜드 사례와 역시 시민주도형 개헌을 추진한 아이슬란드, 그리고 남아프카공화국 사례는 그 절차나 방식 등에서 상이하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그 역할의 차이는 있었지만 바로 시민이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필자가 참여하는 추첨민회네트워크에서는 지난 2월 윤소하 의원(정의당)을 통해 법안을 입법청원한 바 있다. 의석수에 따른 헌법개정특위가 아니라 국회 차원에서 추첨을 통한 시민의회를 구성해 헌법 개정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성, 연령, 지역을 고려한 추첨 방식으로 진행하며 추첨을 통해 선발된 이들에게 참여 여부를 확인 후 거부할 경우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예비후보자 중에서 충원해나가는 방식을 취하면 될 것이다. 규모는 통계적 대표성 및 예산 등을 고려해 최대 500명을 넘지 않되 최소 300명은 되어야 할 것이다.

추첨시민의회에서 개정안 하나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요구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경우도 정해진 의제에 한두 가지 추가 의제를 자체적으로 선정해 심의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추첨시민의회가 완전히 새로운 개정안을 마련하기는 기대할 수 없다.

대안으로 국회 의석을 갖고 있는 정당들은 먼저 정당 차원에서 헌법개정안을 마련하여 시민의회에 제출하게 하고 일정 수 이상의 서명을 받아 시민단체가 헌법개정안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들 안을 갖고 분과별 위원회를 구성해 온라인에서 논의하고 한 달에 한두 번 오프라인에서 전체 회의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개정안을 제출한 정당 및 시민단체는 시민의회에 출석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전체 회의는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을 이용해 1박 2일 과정으로 운용하고 TV나 인터넷으로 생중계한다. 분과별 온라인 논의는 인터넷 전자공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일반 시민과 연계 역시 상시 유지된다. 시민의회 홈페이지에 게시판을 마련함으로써 의견 제시가 가능하도록 한다.

이와 함께 공청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취합할 수 있다. 시민의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한 개정안을 국회에 보내면 현행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어 국민투표에 회부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올 연말까지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정치권이 시민참여 개헌 방식을 받아들일 것이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시민사회가 헌법개정 내용에 이것을 담아야 한다고 정치권을 상대로 운동을 하기 앞서 시민참여 개헌 방식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올 연말까지는 시민참여 개헌 방식을 정치권이 수용할 수 있도록 운동을 지속하면서 어떠한 방식의 시민참여기구를 만들지에 대한 논의 역시 전개함으로써 내년 초 시민참여 개헌기구를 국회 차원에서 출범시킬 수 있도록 목표를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내년 6.13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 회부는 물 건너가게 된다. 예산과 투표율의 문제가 있겠지만 지방선거와 동시에 꼭 국민투표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아니면 대통령이 명확한 약속을 표명한다면 2020년 국회의원선거 때 국민투표에 회부해도 될 것이다.

시민사회는 이와 함께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의회 방식을 관철시키는 운동을 병행함으로써 2020년 총선 때는 현행 소선거구제가 아닌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참여 개헌 플랫폼 바로가기 http://bit.ly/시민개헌

발제문 전체 보기  [바꿈] 이지문_시민주도형 개헌사례와 과제.pdf.pdf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탈출이 힘든 헬조선에서는 인어나 도깨비가 나오는 판타지물 드라마가 인기가 있다. 운명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면서 이 시대를 사는 게 오히려 더 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헬조선에서는 신분상승의 욕구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우리가 '노오력'만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일들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비슷한 이야기로 알랭 드 보통의 책 '불안'에서는 심리적으로 신분제 사회가 견고한 봉건제 시대 사람들이 현대 사람들보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성과주의','노력주의'는 현대화로 인한 전 세계의 추세이지만 인어와 도깨비가 등장하는 걸로 보아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유난한 것 같다. 


특히 청년이라는 우리 세대는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세상 아래 살고 있는데도 어느 것 하나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 학교, 취업, 결혼 선택되기 위해서 구걸하는 세대이다. 자소설을 쓰지만 누구 하나 우리의 스토리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없고 압박면접 준비를 하지만 그 압박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를 '삼포', '오포'를 넘어 'N포' 세대라고 부른다. 

너무 이상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투표’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왜냐면 그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 몇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건 투표권, 참정권뿐이다. 가지고 있는 것마저 포기한다면 미래가 없다. 정치 공학적으로 보았을 때 기성세대는 우리가 투표를 하지 않으면 우리를 대놓고 이용할 것이다. 아니, 이용해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정말 중동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고 유력 대선후보가 말한 것처럼 일이 없으면 자원봉사라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말 잔혹한 사실은 우리가 투표를 한다고 해도 정치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우리의 취약성을 이용할 뿐이다. 최근 들어 청년 정책이라는 말이 귀에 익숙할 것이다. 대선이 임박했다는 신호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포퓰리즘이라고 말하고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 말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은 그렇게 당선되고 나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들만 취하고(당선) '나 몰라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용당할 것인지 그들을 이용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얻어낼 것인지, 어떻게 ‘똑똑한 유권자’가 될 것인지는 전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그렇게 정치인들과 속고 속여야만 하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있는 걸지도 모른다. 죄수의 딜레마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여기 체포되더라도 절대 죄를 자백하지 않기로 약속한 A와 B가 있다. 두 범죄자가 체포되어 각자 심문을 받고 있다. 여기 그들에게 주어진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두 죄수 모두 자백하지 않으면 각자 1년 형을 받는다. 둘 중 한 명만 자백하면 자백한 자는 석방되고, 자백하지 않은 자는 8년 형을 받게 된다. 둘 다 자백하면 각자 5년 형을 받는다. 두 죄수 모두에게 유리한 선택은 함께 자백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자백할지 배신을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무조건 상대방과 협동할 수 있을까? 한정된 정보 안에서 서로 유리한 선택을 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다가 둘 다 5년형을 받는 것이 지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죄수의 딜레마에서 청년세대들은 정치인들이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고 순진하게 (그것도 단편적으로) 투표를 했었고 정치인들은 항상 우리를 속여 이득을 보고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선출하고 방치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투표율은 가공할만한 것들이 못되었기 때문에 눈치 보지 않고 우리를 속이고 있었다. 

 

우리는 투표율로 그들을 위협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작년 총선부터 청년 투표율이 가공할만한 숫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집계기관마다 다른 것 같지만 20대 총선에서 20대 투표율이 4.4% 포인트가 오르고 30대 투표율은 7.7%가 올랐다. 20~30대의 투표율 증가가 여론조사를 뒤집고 여소야대라는 상황으로 현 정부를 심판했고 심지어 3당 체제라는 새로운 시스템까지 만들어 냈다고 볼 수도 있다. 지난 대선에서도  2030세대의 투표 관심은 높았다. 

정치인들은 숫자에 약하다. 빠르게 증가하는 투표율을 잡기 위해서 많은 청년정책이 쏟아질 것이다. 마치 은하수에서 무수한 별들이 쏟아지는 것처럼. 청년실업률 해결정책, 육아보육정책 같은 정책들이 다양하게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유리한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거’라는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무기는 선거 후 금방 사라지고, 다음 선거 직전까지 정치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 다시 정치인들은 무릎을 꿇고 퍼포먼스를 하거나 다시 우리에게 선택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투표 후에 선출된 권력을 방치한다면 정권이 바뀐다고 해도 똑같이 정치인들이 우리를 이용하는 일들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미래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 이러한 반복을 끝낼 수 있다. 죄수의 딜레마를 풀기 위해 제임스 피어론이라는 학자는 미래의 그림자(shadow of future) 이론을 만들었다. 미래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처럼 죄수의 딜레마의 게임이 일회성이 아닌 여러 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플레이어들은 서로 협력을 해서 윈윈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투표로부터 한 단계 나아간 청년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이다. 반복해서 정치인들에게 그들의 대체 가능성을 망각하지 않도록 확인시켜준다면 그들은 우리의 눈치를 더욱더 살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미래의 그림자를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를 속일 수 없게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누군가 똑똑한 사람들이 알아서 우릴 구원해준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가 직접 참여해야 한다. 똑똑한 사람들을 선출했다면 그들이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지 항상 반복해서 일깨워 주어야 한다. 선택하고 감시하고 심판하는 일에 우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이 내놓은 오지선다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 문제 제기와 해결책까지 내놓을 수 있는 청년이 되어야 한다. 정책적으로 정치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어놓고 집단화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며 대체할 수단이 별로 없다면 우리가 직접 선거에 피선거권자로 나가는 것도 최선의 방법이다. 지역공동체로부터 선출직 피선거권자가 되는 것이다. 군의원, 구의원, 시의원, 도의원, 구청장, 시장, 군수, 도지사, 교육감 그리고 국회의원 대통령이 있다. 에스엔에스(SNS) 같은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널리 우리의 플랫폼을 알리고 후보를 위해서 전격 지원해야 한다. 실패하고 성공한 선배들로부터 배우는 일도 잊지 말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것 우리 세대의 가장 큰 힘일 것이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자. 

청년은 이제 가장 정치적인 계층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뛰어난 창의력과 열기로 대기업에 비정상적으로 소수의 경영인들에게 이윤을 남겨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치열한 경쟁력을 갖고 자신과도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정시 퇴근과 안정감을 핑계로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 것도 말이다. 그러한 열정과 경쟁력을 갖고도 정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되려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세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주화 운동에서처럼 모든 것을 다 걸고 참여하라는 말이 아니다. 조금씩 간단하게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가까운 곳에부터 찾고 서로 공유하고 함께 뜻을 모아 즐거운 일로부터 시작해라. 투표하고 기획하라. 그리고 직접 선거에 나가라. 멋진 아이디어와 젊은 패기를 갖고. 우리가 그런 계층이 된다면 유력 대선후보와 정치인들이 말했던 것처럼 더 이상 우리에게 ‘노오력’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년 미국 대선에서는 버니 샌더스 열풍이 불었다. 한국보다 더 비싼 미국 대학에서 교육비 무료화를 내 걸고 월 스트리트 (Wall Street) 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가 이야기하는ᅠ사회 민주주의는 유럽에도 가능하니 미국에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많은 청년들이 화답했다. 청년이 아닌 아웃사이더였던 버니 샌더스가 청년들의 정치 참여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청년들은 다시 정치 참여에 손을 떼기 시작했다. 그들은 트럼프를 혐오하면서도 힐러리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힐러리 후보에게 좀 더 버니 샌더스의 정책을 밀어붙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트럼프 승리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 청년들은 그런 일회성의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투표는 똑똑하게, 참여는 확실하게, 그래도 안 되면 우리 스스로 나서자. 근본적인 참여가 해법이다.


훌륭한 청년단체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청년유니온, 민달팽이 유니온, 동네형들, 체게바라 기획사, 협동조합 성북신나— 등등. 이런 단체들과 마음이 다르다면 사람들을 모으고 직접 조직을 만드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 투표하고 참여하고 조직하고 그리고 선거에 나가라!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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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민주포럼,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빠띠ᆞ·우주당,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추첨민회네트워크, 한국여성단체연합, 흥사단, 바꿈세상을바꾸는꿈은 오는 2017년 7월 19일(수) 오후 7시 서울시 NPO지원센터 1층 대강당에서 “시민이 직접 쓰는 개헌안, 어떻게 만들 것인가?” 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주최단체들은 본 토론회를 통해 시민 주도적 개헌과 관련해 각 단체에서 진행·기획 중인 사업을 공유하고, 시민참여 개헌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 확산을 통해 향후 개헌 논의에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 내고자 노력할 예정입니다.


본 토론회 자료를 첨부하오니 많은 관심과 참여부탁드립니다^^


20170719_바꿈_시민참여개헌_토론회 자료집.pdf



⦁ 사회 전민용(6월민주포럼)

⦁ ‘시민이 주도하는 개헌을 제안하며’ ㅣ 백승헌(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 ‘젠더 관점에서 본 개헌의제’ l 박차옥경(한국여성단체연합)

⦁ ‘개헌 의제의 쟁점과 과제’ ㅣ김준우(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시민 주도형 개헌사례와 과제’ ㅣ 이지문(추첨민회네트워크)

⦁ ‘개헌정국과 시민사회 대응’ ㅣ이태호(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 ‘시민사회 개헌운동의 흐름과 과제’ ㅣ 김전승 (흥사단)

⦁ 시민 주도 개헌, 온라인에서는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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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 69주년 제헌절이다.


헌법은 국가의 기본원리와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하는 근간을 이루는 법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지난 69년 동안 9차례 개정되었다. 개헌을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또는 국회가 개헌안을 발의하고, 이를 20일간 공고한 후, 60일 안에 국회애서 의결해야 한다. 국회 의결 후에도 30일 안에 국민투표를 실시해야만 개헌이 가능하다.


헌법을 권력유지와 연장을 위해 악용해 온 역사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개헌은 행정수반의 권력 유지나 연장을 위한 꼼수로서 개정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첫 번째 개헌부터 문제였다. 1차 개헌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권력연장을 위한 ‘발췌개헌’이었으며 심지어 이때는 한국전쟁 중이었다. 2차 개헌도 초대 대통령에 대해 3선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이었다. 특히 이때 개헌은 개헌선인 2/3에서 1표가 부족했으나 사사오입이라는 억지 논리로 부결이 가결로 정정되었다. 이로 인해 2차 개헌을 흔히 ‘사사오입 개헌’ 이라고 부른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헌법을 권력 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6차 개헌은 3선 연임제한을 없애기 위한 개헌이었다. 당시 여당은 야당의 참석을 막기 위해 새벽 2시 30분 국회 제3별관에서 개헌안을 기습 통과시켰다. 


더 큰 문제는 유신헌법이라고 불리는 7차 개헌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간선제와 중임제한을 폐지한 헌법, 국회해산권과 추천권 등을 통한 국회 유명뮤실화, 긴급조치권을 통한 초법적 대통령의 권한 확대는 헌법정신을 크게 훼손시켰다.  


헌법을 수호하고 시민의 힘을 보여준 역사


그러나 개헌이 꼭 독재자들의 수단으로만 악용되어 온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4.19혁명 이후 3차 개헌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의원내각제 변경, 헌법재판소와 지방자치제를 새롭게 정립했다. 이어진 4차 개헌은 3.15 부정선거 반민주행위자, 부정축재자를 소급하여 처벌하기 위한 개헌이었다. 


특히 현행 헌법을 만든 9차 개헌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물이다. ‘호헌철폐’와 ‘독재타도’의 당시 시민들의 외침은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한 현행 헌법의 6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또한 국회 국정감사권을 부활시켜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졌으며, 기본권을 확대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다.  


촛불. 이제는 시민 참여를 통한 개헌의 역사를 쓸 차례!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은 우주당(우리가 주인이당)에 시민이 직접 쓰는 새로운 헌법 프로젝를 열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자세히보기<<


87년 헌법 개정이후 지난 30여 년간 10차 개헌에 관한 논의는 끊임없이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여전히 개헌을 정략적으로 악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덮고자 임기 내내 반대했던 개헌을 갑작스럽게 들고 나온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룬 현 시점에서 시민 참여를 통한 민주적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부터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워왔고, 오늘(17일) 정세균 국회의장 역시 "개헌은 검토 대상이 아니라 국민적 요구이며 정치권의 의무"라며 개헌이 시대적 과제임을 밝혔다. 


실제 국회는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개헌특위는 2018년 2월까지 개헌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개헌특위는 이원집정부제, 4년중임제 등 다양한 권력구조 개편 외에도 지방분권 강화, 기본권 보장, 고위공직자비리수차처(공수처) 신설, 5.18 정신 포함 등 다각적 개헌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시민참여’이다. 지난 9차례 헌법 개정이 독재자의 권력 유지나 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4.19, 6월항쟁으로 시민들로부터 추동되었으나 정작 내용적 측면에서는 시민 참여가 배제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박근혜 탄핵과 평화적 정권교체를 만들어낸 시민들의 촛불의 최종 종착점을 개헌으로 보고 있는 시각도 있다. 시민사회 역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추첨민회네트워크, 대화문화아카데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흥사단, 바꿈세상을바꾸는꿈(바꿈) 등 여러 단체에서 다양한 개헌논의를 준비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개헌과는 다르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민주주의 발전은 시민참여 개헌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위키와 찬반 기능을 바탕으로 한 ‘플랫폼’의 등장은 시민참여 개헌을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빠띠의 ‘우주당’이다. ‘우주당’은 ‘우리가 주인이당’의 약자로 더 이상 정당 중심, 특정 인물 중심의 정치만 존재하지 않도록 더 쉽고 재미있고 실용적인 우리의 정치를 할 수 있는 프로젝트 정당이다. 여기에 바꿈은 ‘함께 그리는 대한민국’ 이라는 이름으로 개헌 프로젝트를 열었다.(http://bit.ly/시민개헌 ) 이들의 목표는 앞서 말한 시민참여형 개헌. 즉 누구나 개헌논의에 참여해 시민이 쓰는 헌법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개헌이 예정대로 내년 6월 지방선거에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면, 국회 의결은 최소 한 달 전인 5월에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 보다 앞서 대통령의 공고 기간까지 생각한다면 내년 초에는 개헌안을 발의되어야 한다. ‘촛불’로 보여준 시민참여의 힘이 개헌이라는 구체적 결과물로 이루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이지만, 기존의 전문가, 국회 중심의 개헌 논의와는 전혀 다른 시민참여 개헌 논의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관심과 주목을 끌 수 있을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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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남


우리의 삶은 여전히 피폐하고 고단하다. 국가의 성장 중심적 경제정책은 화려한 성공을 가져왔지만, 사회적 부작용도 동시에 출몰시켰다. 대한민국은 고용 불안정, 소득 불평등, 저출산 및 고령화 등 각종 사회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성장 일변도의 정책은 일반 시민들의 삶의 영역에 고스란히 침투하여 생활여건을 급속히 악화시켰다. 이렇게 불안과 위기로 점철된 사회는 시민들에게 행복을 제공해 줄 수 없다. 구체적인 해법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정책적 한계는 앞으로도 시민들의 생존권을 더욱 옥죌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인 청년이 이러한 부작용을 전면적으로 감내해야 할 자리에 서 있다. 취업난, 주거 빈곤 등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청년 세대에게 압축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제는 청년들이 현실 정치문제를 외면한 채 살아가기 어렵다. 정치는 사회 문제를 개선하는 유용한 수단이자 방법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향한 혐오와 냉소적 시선은 사회적 위기의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만이 곤궁한 삶의 극복과 생활환경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정치의 새로운 주체로 청년들이 나서야 한다. 한국 정치의 주요 특징으로 법률가, 언론인, 교수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영입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전문 지식인을 충원하여 해당 분야의 사회적 갈등을 포착하고 정책 능력을 강화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전문 정치인을 양성하는데 취약점을 노출한다. 정치 영역 밖의 전문가는 정치에서 필요로 하는 역할과 능력을 지니지 못할 수도 있다. 체계적인 학습 과정을 통해 국가와 사회를 운영할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 외부 지식인의 투입보다 전문 정치인의 육성이 올바른 정치의 모습일 수 있고, 그 대상은 청년이어야 한다.


눈을 돌려 외국을 살펴보면 젊은 정치인의 성공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정치 경험을 쌓고 중앙정치에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2살에 영국 보수당의 정책연구소 특별보좌관으로 정치를 시작했고, 토니 블레어 총리도 22살에 입당해 41세에 최연소 노동당 대표가 됐다. 스웨덴 정치인들은 청년 시절부터 정치권에 뛰어들어 각종 훈련과 경력을 거치면서 정치인의 자질과 능력을 길러간다. 라인펠트 스웨덴 총리도 10대 중반에 보수당 청년위원회에 가입했고, 마흔이 넘어 총리가 됐을 때 이미 16년의 정치적 경륜이 묻어 있었다.


외국 사례에서 살펴보듯 이른 나이에 정치를 시작할 때 정치적 역량과 경륜을 쌓을 기회가 제공될 수 있다. 준비되지 않은 정치인의 등장은 선의의 목적과 상관없이 사회적 결과는 참혹할 수 있다. 젊었을 때부터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반복적인 정치적 훈련과 학습을 통해 기본기를 습득하고, 정치인이 지녀야 할 덕목을 축적하는 것이 좋은 방향일 수 있다. 그래야만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설득과 타협을 통해 사회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다. 


이제 청년들은 선거철만 되면 호명되는 정치적 동원 대상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현실정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와 인물이 새로운 문제의식을 보여줄 수 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은 정치적 경험과 자산은 위기의 한국사회를 혁신할 수 있고, 청년들이 정치적 주체로 당당히 설 때 대한민국의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민국의 청년 지도자를 맞이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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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윤(우리미래 공동대표)


매주 토요일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100만명이 모인 광장에선 사람들의 열기가 영하의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10년 전에도 나는 촛불을 들고 광화문광장에 있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던 그 현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현실정치가 교과서의 정치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나라 헌법 제 1조 1항과 2항이다. 10년 전에도, 지금도 헌법에 명시되어있는 이 정의는 헌법에 명시만 되어 있을 뿐 현실에선 적용되고 있지 않는 듯 하다. 그저 이상적인 글로, 단지 좋은 글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필요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치참여에 대한 인식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번 계기를 발판삼아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투표하는 청년’에서 ‘정치하는 청년’으로의 탈바꿈이다. 언론, 학자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은 청년들에게 선거날 놀지 말고 투표장에 나갈 것을 매번 주문했었다. 


2012년 대선 2030세대의 투표율은 69%였으니 전체 투표율이 75%였음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투표율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청년의 삶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대학등록금이 비싸다는 건 10년 전부터 이야기가 나왔고 최근 3년에는 최저임금을 올려달라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을 향했다. 하지만 대학등록금은 여전히 비싼 채 선거철에만 나오는 이슈가 되었다. 최저임금은 매년 조금씩 오르고 있지만 지금 속도로 언제 1만원이 될지 알 길이 없다. 왜 청년들의 목소리는 정치권에 반영되지 않을까? 왜 청년이슈는 매 선거철 모든 후보가 공약으로 내세우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만 남아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투표하는 청년’으로 즉, 정치의 객체로 남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투표를 하면 세상이 바뀔꺼라는 잘못된 믿음이 우리를 정치의 객체로 머물게 했다. 


등록금과 임금을 비롯한 주거문제, 육아문제 등 청년이슈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청년정치인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청년 유권자 비율은 40% 가까이 되지만 300명의 국회의원 중 청년국회의원은 1%인 3명 뿐이다. 이 3명도 사실상 청년국회의원이라고 볼 수 없다. 새누리당 신보라의원은 지난 국정감사에서 청년정책 중 하나인 청년배당을 강하게 비판했고, 더불어민주당 김해영의원은 40대가 되면서 사실상 청년의원으로 볼 수가 없게 됐다. 국민의당 김수민의원은 시작부터 리베이트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러야했다. 이정도면 사실상 20대 국회에 청년국회의원은 없다고 봐야한다. 최소한 청년유권자 비율에 가까운 120명의 청년국회의원은 있어야 청년문제가 국회에서 다뤄지고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평균 연령 55.5세의 20대 국회의원이 과연 청년의 삶을 공감할 수 있을까? 1억이 넘는 연봉을 받는 정치인들이 시급 6,470원 받는 청년의 삶을 대변할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한다. 정확하게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11월 16일은 2017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던 날이다. 5년 전에 수능을 봤던 나는 올해 수능 날짜가 언제였는지, 올해 입시제도는 어떻게 바뀌는지 모른다. 더 이상 수능이 ‘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 10시간 학교에서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의 삶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장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해야하는 나는 고등학생들의 인권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균나이 55.5세의 국회의원들이 2030세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각 세대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세대가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야한다. 18세 선거권 보장이 이슈인 지금 나는 선거권 뿐만 아니라 피선거권까지 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학교 내에서 이뤄지는 주입식 교육, 비정상적인 교육시간, 강압적인 학교 문화, 서로를 죽이는 경쟁문화를 해결할 수 있다. 고등학생의 삶은 누구보다 고등학생이 더 잘 알고, 청년의 삶은 누구보다 청년이 더 잘 대변할 수 있다. 유권자 비율 40%에 맞춰 최소한 120명의 청년 국회의원은 있어야 한다. 청년의 문제를 정치권에서 다루고 해결하려면 ‘투표하는 청년’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청년이 정치를 해야한다. ‘투표하는 청년’에서 ‘정치하는 청년’으로 탈바꿈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표만 해서는 우리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정치 판을 짜기 위해서도 ‘청년’이 정치권에 많아야 한다. 2012년 시민들은 안철수에게 새정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새정치가 무엇인지는 누구도 정의할 수 없었다. 누구는 지역구도를 타파하는 것을 새정치라 얘기했고, 누구는 정경유착을 근절하는 것을 새정치라 했다.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을 새정치라 정의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새로운 주체들이 나서 기존에 없었던 전혀 다른 방식의 정치를 시작하는 것이 새정치라고 생각한다. 2017년인 지금, 십상시가 존재하고 친박, 친문과 같은 계파정치가 아직도 정치권에 존재한다. AI가 인간과 바둑을 둬 이기는 오늘이지만 조선시대에나 있을법한 정치가 여전히 여의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촛불은 불면 꺼진다는 어느 국회의원의 망언에 시민들은 꺼지지 않는 스마트폰 플래시를 들고 나왔다. 2017년 촛불은 스마트폰 플래시로 진화했지만 국회의원은 여전히 바람으로 불을 끌 수 있다는 구시대적인 발언과 발상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 이제는 2017년에 맞는 정치를 해야한다. 2017년 정치란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정보)과 정치의 결합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보화시대에, 스마트폰에 최적화 된 세대가 바로 청년들이다. 인터넷과 정치의 발칙한 결합을 청년들이 시작하고 있다. 이미 그 움직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정치 스타트업 ‘와글’과 개발자 협동조합 ‘빠흐티’에서 개발한 국회톡톡은 입법 청원 플랫폼이 대표적인 예다. 


시민 누구나 입법제안을 할 수 있으며 이 제안 지지자가 1천명이 넘으면 국회의원들에게 입법제안이 전달된다. 그리고 이에 동의하는 국회의원이 법안을 만드는 구조이다. 온라인과 정치가 접목되고 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청년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발전된 기술과 정치의 결합, 이것이 새정치의 시작라고 생각한다. 인터넷과 정치를 접목한 이런 트렌드는 전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뉴질랜드 ‘루미오’, 미국 ‘브리드게이드’, 스페인 ‘디사이드 마드리드’ 등이 대표적이 예다. 미디어와 정치를 결합한 새로운 정치판을 청년들이 짜고 있다.


부패할대로 부패해진 일부 정치인에 비하면 청년은 깨끗하다는 장점도 있다. 가진 게 없으니 깨끗할 수밖에 없다. 무릎 꿇는다고 깨끗해지지 않는다. 몇 번의 대국민 사과로는 청렴해 질 수 없다. 새로운 세대를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만이 새정치가 될 수 있다.


청년의 정치참여를 이야기 할 때면 “청년들이 뭘 아냐?”, “무엇을 믿고 이 나라 정치를 맡기냐?”는 질문을 몇 번 듣곤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새 시대를 연 것은 늘 청년들이었다. 젊은 화랑들이 신라의 주축이었고, 일제와 맞서 독립을 외친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그 시대의 청년들이었다. 독재자 끌어내리고 민주화시대를 연 세대 역시 그 시대의 청년들이었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위 두 질문에 산 증인이자 답변이 아닐까. 


우리의 모든 일상이 곧 정치이다. 내가 내는 등록금, 내가 받는 최저임금, 내가 사는 집, 결혼, 육아, 취직 이 모든 것이 정치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정치를 혐오하고 무시하면 내 삶은 바뀌지 않는다. 더럽고 비열하지만 그래도 내 일상을 바꾸는 가장 빠른 길은 정치를 바꾸는 것이다. 정치는 더럽고 기존 여당은 부패했으며 야당은 무능함의 끝을 보여줬다. 이제는 색다른 정치를 해야한다. 엘리트 중심의 정치가 아닌 평범한 시민들의 정치를 여의도에서 해야 한다. 부패한 여당 대신 깨끗한 청년이 나서야 한다. 무능한 야당을 교체할 새로운 기술과 세대가 필요하다. 정치가 평범한 청년들의 의지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이제 답은 하나다. 


평범한 청년들이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하는 청년’이 되어보자.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촛불광장에 페미니스트가 있었음을 기억하라

 

바꿈 활동가 박영민 


인터뷰 전 날, 김금옥 센터장(여성미래센터)을 만났다. 어느 단체의 페미니즘 관련 행사, 그곳에서 촛불과 뉴페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계보가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던 언니들과의 만남이 참으로 즐겁다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오후 다시 만난 김금옥 센터장은 일단 차나 한 잔 마시자며 반겨주었다



집회를 함께 만들어 간, 집회에는 없는 사람들.

“610, 아마 거리에 있었는지, 지금 생각은 잘 안 나요. 아니면 학교에서 지금으로 하면 홍보물, 이거를 밀든지 뭘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6월 항쟁 때가 대학교 4학년 때였기 때문에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전부 다 거리에, 가두시위가 있으면 나가고 하는데 우리는 또 다음날을 준비해야 하잖아요. 메시지 같은 걸. 그래서 아마 가두시위가 아니었으면 총학생회 사무실 어디선가 이벌식 타자기를 두드리고, 수동식 등사기를 밀고 (유인물을 찍고). 어떤 때는 그럴 시간이 없으면 철필로 써서 찍고 다음 날 거리에서 시민들한테 나눠줬거든요.”

인터뷰 연재 초기에 만났던 황인성 이사장(수원민주화계승사업회)의 말들이 생각이 났다. 민주헌법쟁취운동본부(이하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항쟁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전 날부터 미리 나와 있었던 상황, ‘007작전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암호를 전달하는 등의 행동들.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김금옥 센터장도 마찬가지였다. 6월민주항쟁의 주역이라 불렸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1기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 환호하는 광장에 내가 있었나, 6.29때는 분명 있었는데, 환호하고 옆 사람 끌어안고. 610일날은 잘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왜냐면 집회를 준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늘 광장에서 함께 할 수만은 없거든요.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그걸 못 보거든요.

6월민주항쟁 때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전국에 비상상황, 그 때 계엄이 선포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잡혀가면 뭘 하고 옆에서 챙기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비상연락망 짜고 누가 다치면 병원가고, 누가 잡혀가면 변호사 연결해서 무료변론 해줘야 하잖아요. 이런 것들도 역할이 있었으니까 매번 광장에 거기 가서 있지는 못했어요. 우리는 막 그 광장에 가고 싶었죠.”

매일 매일 거리에 있던 삶이었고 그렇기에 그 날, 610일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에 순간 부끄러워졌다. 여전히 투쟁하는 삶을 살고 있는, 지난 30년 간 쉬지 않고 활동해온 그에게 적절치 못한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집회를 준비하느라 집회에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는 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을 30년 전의 활동가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잡히지 않았다면 삼거리에 있는 공중전화박스, 거기에 달려있는 전화번호 책에 표시를 할 것. 그 표시를 확인하면 약속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 면회를 가는 이들에게 질문을 부탁하고 답변을 전달받고. 그저 일상의 대화인 줄 아는 내용, 결국은 암호를 번역하고. 첩보영화 저리가라는 내용을 준비하고 달달 외웠을 이들을 생각하니 마냥 즐겁진 않았겠다고 하는, 철저히 준비할 만큼 무섭고 두려운 느낌도 있었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지역보다 더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김금옥 센터장이 있었던 전라북도는 당시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았던 광주의 기억을 어느 곳보다 절실히 간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웃 광주에서 계엄령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아직 그것을, 피해도 드러내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여전히 군부가 있었던 거예요. 억압했던 사람이 정권을 연장했는데,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나오니까 거의 막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런 소문도 돌았던 거예요, 계엄이 선포 될 거라고.”

이번 촛불에서는 엉뚱한 집단이 계엄을 요구했지만 실제로 계엄의 공포를 느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87년의 성과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꼭 계엄령 때문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집회 속에 없는 집회를 만든 사람들은 존재했다.

여성단체에서 운동할 때도 3.8(세계여성의 날)때 우리 활동가들은 그걸(행사 전체를 ) 못 봐요. 활동가들은 죽어라 자기가 만들었던,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구현된 모습을 자기는 모른단 말이에요. 뭐 일하고 무선하고, 현장에서 뛰어다니느라.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백조의 발들이잖아요. 또 활동가들이 일하는 사진은 아무도 안 찍어, 다 환호하는 사진만 찍잖아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후원의 밤이나 3.8행사 때는 활동가들 일하는 걸 쫓아다니면서 찍어서 보내주기도 했어요.”

아마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저 무대를 세우는 데 얼마가 들었을까, 누가 세웠을까, 곳곳에 있는 스피커는 누가 가져다놨을까. 매주 진행되는 집회에서 식순은 누가 정리했을까, 발언은 누가 수집했을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행사에서 나타나는 질서정연함은 그저 시민의식의 발전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이 질문들의 답은 대부분 퇴진행동의 활동가들에게 있을 듯하다. 촛불이 더 높게, 더 활활 타오르도록 그 밑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활동가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거리에 나가고 싶어 했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지금은 행사 때 마다 활동가들의 사진을 꼭 꼭 찍어준다고 한다. 당신도 분명 이 역사 안에 있었고, 우리가 그것을 기억한다고.



여성의 운동과 여성운동

학생운동을 하는 속에서 여학생들도 사회 진보적 의식화를 했는데 맨날 중요한 결정은 남학생들이 하고. 화염병 던질 때는 우리를 보호한다며 뒤로 빠져라, 돌멩이를 치마에 담아서 와라, 하는 식이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별 분업이 있는 거죠. 집에서 엄마가 하는 일은 여학생들이, 아빠가 하는 일은 남학생들이, 그런 게 아무도 어색하지 않은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쫙 역할 분담이 되는 거야. 그러나 그 중에 그게 불편한 사람들이 있겠죠? 저 같은 사람들?”

열심히 공부를 했다. 노동, 역사, 철학. 동기들과 스터디를 하고 의식화에 함께 뛰어들었다. 그러나 마주한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의 환경들은 사진에 찍히지 않는 활동가처럼 여성을 운동의 주체로 여기지 않고 줌-아웃(Zoom-Out)시키기 일쑤였다. 여성들은 분노했고, 목소리를 찾아 나섰다. 남학생회가 되어버린 총학생회 외에 총여학생회를 출범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도 여학생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남학생회도 있냐, 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희는 총학생회 자체가 남학생회니까 (라고 했어요). 여학생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우리도 여기서 여성들이 주체로서 사회변혁의 학생운동을 참여하겠다, 하면서 여학생회 만드는 걸 한 거지.”

총여학생회를 만들고, 단과대별 여학생회까지 조직했다. 없는곳은 없는 대로, 있는 곳은 있는 대로 '선출범 후인식'으로 일단 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가능한 단과대 별로 여학생회를 만들고 출범에 성공했다. 경쟁자 없는 단선의 선거였지만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떤 여학우는 와서 항의한 적도 있어요. 자기는 여성으로서 곱게 대학 졸업하고, 자기 집은 먹고 살만도 하고, 그냥 시집 잘 가서 자기 편하게 살았으면 되는데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줘서, 여성이 차별받고 살고 있는 걸 알려줘서, 힘들게 살게 하냐고. 왜냐면 그 때는 주체로 선다는 건 그런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어요. 우리(운동권)는 또 달랐지만 그런 사람들, 소위 일반 학우들 생각에는 싫잖아요, 예전에는 편했는데, 이런 걸 직면하고 나서 갑자기 나의 삶이 불행하고. 그렇다고 이 세상이 금방 바뀔 것 같진 않고 너무 힘들어.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 모든 여성에게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 중엔 빨간 약을 먹어버린 네오처럼 더 이상 되돌아갈 출구도 없는 곳으로 들어와 버린 이들도 있었고, 때문에 한탄도 있었다.

그러면 차라리 몰랐던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푸념도 했지만 결국 이미 알아차려버린 걸 어떻게 할 거야,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같이 그런 사람이 모여서 또 활동을 했죠.”

재밌게도 푸념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여학생회는 활기를 띠었고, 5개 단과대로 시작했던 여학생회가 전 단과대에 생길 정도로 발전을 거듭했었다. 물론 여성들의 움직임은 비단 학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876월항쟁을 겪기 전부터 개별 사건마다 여성들은 목소리를 내어왔다.

“85년도에 25세 조기 정년제를 폐지하는 운동을 했어요. 너무 웃기죠, 놀랬죠. 25살 먹었으면 여자는 시집을 갈 나이기 때문에 퇴직하라는 거야. 그 사건으로 그 때 있었던 단체의 여성단위들이 모여서 대책위를 꾸려서 싸움을 했어요. 그러다가 87년도에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고, 그 때 당시에 부정선거가 많으니까 공정선거 감시 운동을 한 거죠. 그래서 여성유권자 감시단, KBS시청거부 같은 것을 여성운동이 했었어요.

선거가 끝나고 그 대책위(25세 조기정년투쟁)가 우리도 여성문제를 여성들이 상시적으로 제기하면서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조직을 만들자, 상설기구를. 그래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을 만들게 되요, 872월에. 그래서 올해로 여연이 30년이 됐어요. 85년도 조기정년투쟁의 그 연대의 경험, 그리고 권인숙 성고문 사건 공동대응, 그리고 여성유권자공정선거감시운동 등의 운동의 경험들이 쌓여서 상설화된 게 여연의 역사에요.”

그는 여연의 역사, 그리고 여성운동을 하는 단체를 만들게 된 이야기를 하던 중 최근 촛불광장의 페미존(Femi-Zone)’의 발생과 조금은 유사한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자신의 생각 혹은 바른 말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구역설정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가 말하는 안전공간이라는 또 다르겠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서, 페미존이라고 해서, 구역을 조성하면서 목소리를 내잖아요. 용기와 바른 말을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니라. 왜냐하면 안전하지 않으니까, 공격당하니까. 그래서 그런 걸 만들어서 그 목소리를 규합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 같아요. 그걸 대비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도 여성단체연합, 여성운동하는 곳, 여학생회 등 어쩌면 우리가 용기를 내서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 같아요. 여성운동조직은 그런 공간인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거리낌이 없었던 거지.”


민주주의는 여성혐오와 함께 갈 수 없다.

더 이상 놀라고 강조하는 것도 무색하리만큼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현재의 뜨거운 키워드다. 그러나 또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운동을 30년 넘게 해온 김금옥 센터장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오랜 시간 페미니스트로 살아온 그의 앞에 신인류가 등장한 것이다.

김 센터장이 경험한 87년의 항쟁, 그 당시의 민주주의와 지금은 분명 다르다. 문제인식은 깊어졌고 사고의 폭은 넓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성숙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고 했던 주체들 중에는 일명 뉴 페미니스트(이하 뉴페미),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메르스 갤러리의 탄생 이후 등장한 2030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촛불 광장에 정권교체가 목표여서 나온 사람도 있고, 정말 이 시대를 바꿔야 된다, 가치를 바꿔야 한다, 세대를 교체해야 된다, 정말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천차만별이 나온 거예요. 어쨌든 정권교체까지는 동의를 하니까 연대를 했고, 그리고 진짜 우리가 이 사회를 새롭게 바꾼다는 것에 대해 동의가 됐어요, 그래서 새로운 민주주의로 내용이 바뀌고 확장해야 된다고, 직접민주주의를 더 확대해야 된다고, 이게 다 맞았어요.

그런데 이 민주주의 내용에서 딱 걸린 거예요. 민주주의 안에는 성평등이라고 하는 것,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그런 평등이 있어야 그게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인데. 이 다양한 정체성과 주체들이 다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니까 이제 불편해진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하자 성평등 문제는, 일단 정권교체가 중요하지. 87년에는 그런 게 통했어요. 왜냐면 독재타도, 민주쟁취 그게 너무 큰 상황이라서 거기에 집중한 거예요. 그 안에 차이라든가, 어떤 다양성을 드러내가지고 그것이 가시화될 상황이 못 됐었어요. 물론 그 안에 그런 마음에 가지고, 그런 주체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게 들어날 수 있는 시대적, 사회 인식적, 주체들의 상황이나 정치적 맥락이 그랬던 것 같고.

그런데 이번 2016, 2017년 안에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나도 거기 갔어, 정권교체 외쳐, 소수자도 왔고 누구도 왔고 나도 깃발 들고 왔어, 나도 정권교체 세력이야.’ 그런데 갑자기 이제 성차별과 이런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니까 옛날 버릇이 나와서 또 지엽적인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또 이게 왜 지엽적이냐,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죠.”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페미존이 넓어지는 만큼 여성운동단체도 활발했다. 촛불광장이라는 것은 시민의 힘으로, 시민이 만든 만큼 누구도 배제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확실히 했다. 집회에서 수화통역을 할 것을 제안한다거나 여성혐오적, 소수자혐오적 발언에 문제제기를 한다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소위 시니어그룹의 페미니스트들 역시 발맞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헌정질서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집회였지만 우습게도 논란은 한 가수의 공연여부에서 비롯되었다.

“(DJ DOC 공연에 대해) ‘여성단체는 반대했다’. 다양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이 노래를 무대에서 공연하지 않으면 안 오겠다는 사람은 없지만 이 노래가 불편해서 오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한다면 그 사람들은 오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을 안 했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했는데. 우리가 어떤 자격으로 그 사람들을 못 오게 하냐 이거예요. 퇴진행동이 그동안 합의 해왔던 것에 비추어서도 이런 상황이면 공연을 진행하기 어려운 거지요. 그런데 '일부여성단체들이 반대해서 공연이 취소 됐다'는 기사들로 인해 난리가 났지. ‘니들이 뭔데 못 하게 하냐도 있고 잘했다도 있고.”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그의 말처럼 그 노래 공연이 없으면 안 오는 사람은 없지만 진행하면 안 오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다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지 않으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는 이 일은 ‘DOC 사건쯤으로 불리며 이번 촛불시위에서 꽤 굵직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여성운동을 하며 공격 받는 일은 흔했다고 한다. 이번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이 덜 비판적으로 산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하는 농담처럼 일베에서 소위 신상 털리기를 당하면 오히려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고. 그러나 이번 공격은 당혹스러웠다. 일베가 아닌 '촛불집회 참가자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이들'이라는 사람들에게 '친박페미'라는 말을 듣는 것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사과를 받기도 했었다.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아주 많았던 것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하는 페미니스트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양립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 되었지만 여전히 함께 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꽤 많았던 이번 촛불이 탄생시킨 대통령은 다름 아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다. 성차별은 없애도록 노력하겠다, 소수자와 함께 하겠다는 선언도 아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

물론 선언만 하면 자동으로 페미니스트 자격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삐걱거림은 잦았다. ‘나중에사건이라든지 동성애 반대 발언이라든지, 왜 굳이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했을까, 그 진정성에 회의를 가질 수 있는 일들도 존재했다.

페미니스트, 그 개념을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모든 차별에 반대하고 그런 차별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내기 위해서 실천을 해야 되잖아요, 실천까지 포함하는 건데. 본인이 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는지, 어떤 의미로 했는지, 대중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또 우리는 계속 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서 그 선언도 고맙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그랬으며 어떻게 할 거야. 그런데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으니까 이렇게 해야 페미니스트야’, 라고 요구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 것은 긍정인 것 같아요.”

인터뷰를 진행했던 날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았을 시기였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여성인사들이 내각구성 후보에 올랐고 그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국가보훈처 처장으로 지목된 피우진 중령이었다. 선거운동 기간의 불협화음과 달리 내각의 성비를 적절히 맞춰나가겠다는 공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금옥 센터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말도 전했다. 피우진 중령이 보훈처장에 지목된 아주 기쁜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군대 내 동성애자 색출 작전이 있었고, 어느 대위에게는 징역 2년이 구형되었으니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상반된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문재인 대통령을 마냥 옹호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과, 촛불광장에서 그랬듯이 계속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야한다는 목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이 정부가 스스로가 촛불정권이라고 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되고, 그 촛불광장에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는 것, ‘87년체제라고 하는 한계를 넘어 더 큰 민주주의, 확장된 민주주의를 열은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들의 목소리를 배제한다거나 후순위로 취급하는 것은 이 정권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각인시키면서 견인하는 책임을 같이 져야 하는 거예요."

김금옥 센터장은 힘의 균형이 깨져 있는 사회에서 결국 우리는 연대를 통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전했다. 페미니스트들과 다른 운동과의 연대, 정부와 시민사회와의 연대, 제대로 된 젠더 거버넌스. 이게 나라냐는 물음에서 , 그러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시대. 그 시대의 서막을 연 촛불광장은 따로, 또 같이를 실현할 수 있을까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시대의 교사로서 지킨 '전태일 정신' 


바꿈 활동가 박영민

 

골목 깊숙이 들어있는 건물, ‘지난겨울, 그 광장의 촛불을 헛되이 말라!’라는 글귀가 써져있는 커다란 현수막.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전태일재단의 건물을 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짐작도 못할 시대의 청년이었던 전태일은 무슨 심경으로 스스로에게 불을 지폈을까. 여전히 저 건물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또 누구일까.


“이런 사진은 어디서(웃음), 민자당 분쇄!(웃음), 이게 89년에, 지금 박근혜 있는 곳에, 내가 박근혜 선배잖아요(웃음) 구속 선배”

 

이수호 이사장(전태일 재단)에게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찾은 예전 사진을 건네니 박근혜의 구속선배라며 미소를 지었다. 민주화운동부터 전교조 결성,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의 활동을 이어온 스스로를 ‘좌파운동의 정통’이라고 표현하며 농담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이수호 이사장. ⓒ바꿈 


“이중적인 아픔의 87년”

 

“(6월 10일 당시)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죠. 신일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그 때 고3을 맡아서 가르치고 있었어요. 그 때 민주화가 이제 막 진척되던 그럴 때여서 87년에 전두환이 호헌발표를 하고 그 뒤에 계속해서 저항이 벌어지고 그래서 매일 매일이 뒤숭숭하기도 하고 힘들고 했는데.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하고 명동이나 그 당시에 신세계 앞, 그 쪽에서 주로 시위를 많이 했어요.”

 

“학생들을 그렇게 데리고 나갈 형편이 안됐죠. 교사가 나가는 것도 굉장히 힘들게, 몰래. 마음 맞는 선생님들이랑 했지. 그렇게 나서면 바로 학교에서 징계를 당하거나 교장한테 불려가서 혼이 나거나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웃음)”

 

신일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이수호 이사장은 학교 이야기로 6월 항쟁의 기억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비단 남북만의 책임이 아닌 외세의 개입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해직된 선생님, ‘커밍아웃’하듯 시위에 참여했다는 선생님. 오늘 날의 촛불처럼 대중화되어있던 시위가 아니었던 만큼 각자의 위치,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특히 수업을 지루해 하는 학생들은, 쌤 얘기해주세요, 시사적인 문제, 요즘 뭐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하면 또 못 이기는 척 하고(웃음) 세상 돌아가는 얘기하고 그랬죠. 그 당시에 주로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그랬잖아요. 신일고등학교도 그런 전통이 또 있었어요. ‘전고협’, 전국고등학교협회 이런 식으로. 거기에 신일고등학교도 이제 관련이 있고. 그래서 고등학교 학생운동에 상당히 앞장서는 학생들도 있었고. 그래서 그런 학생들 보면 안타깝잖아요, 대학은 가야 되지 않겠니?(웃음), 하면 (학생들이) 지금 대학이 문제예요? 나라가 이런데?”

 

정작 본인은 학교에서 징계를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위에 참여했지만 앞장서는 학생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니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하셨잖아요’ 라는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에 ‘이중적인 아픔’이라는 말로 답을 이어갔다.

 

“(앞장섰던 학생 중에) 한 학생은 바로 노동현장으로 갔어요. 그냥 공장에 취직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 노동운동, 운동의 삶으로, 운동의 정신으로 갔는데. 그 뒤에 다 헤어지고 나는 교육운동하느라 정신없고, 해직당하고 감옥가고, 그 학생들은 나름대로 그랬는데. 어느 날 자살을 했어요. 고등학교 제자죠. 그런 아픔도 있고. 그 때 같이 하던 다른 친구는 몇 년 그러다가 너무 힘드니까 그래서 공부해서 대학가고. 그러면서도 뭔가 좀 사회를 위해서 노동자를 위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노무사 공부를 해서 힘든 노동자들 도와줘야 되겠다, 마음을 먹고. 지금도 노무사로서 노동자들을 도우면서 아주 잘 하고 있는 제자도 있죠. 그 때는 같이 고등학생으로, 학생운동을 하다가 결과가 그렇게 되더라구요, 우리 삶이 다 그런 거죠.

 

그런 개인, 개인의 삶이 전체적으로 합쳐지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한다거나 그 시대를 반영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삶은 또 각각 자기 삶에 있어서 힘들기도 하고 그런 거죠. 교사로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막 해서 정말, 뭐 (사회운동을) 할 수 있지만 그랬을 때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다 귀한 자식이고 자기 삶을, 해야 하는데 그걸 일치시키는 게 힘들잖아요. 참 힘들더라고 솔직히. 그래서 사실 비겁하게 아주 적극적으로 학생들한테 얘기를 못하는 그런 게 있죠. 그 당시도 이제 87년 그 무렵에 그런 이중적인 아픔이 있어요.”

 

학생들을 보다 민주적인 환경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결코 학생들과 같이 시위에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시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 삶이 다 그런 거죠’라고 담담히 말했지만 제자의 죽음, 운동가로서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제자를 지켜보는 선생의 마음을 안타깝지 않게 표현할 길은 없어보였다.


 

▲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수호 이사장. ⓒ전교조 홍보영상 캡쳐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

 

수업과 시위를 병행하며 87년 6월을 보낸 이수호 이사장은 이후 교사들과 함께 본격적인 교육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이하 전교협)를 창립한 후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창립까지 6월항쟁 이후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육계의 열망은 뜨거웠다.

 

“우리가 처음 나서고 할 때는 교육문제, 학교의 심각한 문제. 학생들이 비교육적인 상황 속에서 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 이런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면서 한계에 부딪힌 거예요. 이런 것(교육적인 내용)만 가지고는 힘들다. 운동을 하는 주체, 운동을 하는 사람, 교사면 교사, 그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고민을 하고 그게 확실해야 운동이 지속되고 힘이 있다. 이러면서 교사의 문제로 자기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거죠.

 

세상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은데 교육문제만 달랑 해결이 안 되잖아요, 개혁이라는 것이 사회전체가 각 분야가 동시에 움직여지는 거지, 다 썩어빠지는데 교육 하나만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회전체를 바꾸는데 어떤 관점이 필요한가, 하는 토론이 벌어진거죠. 그리고 그 때(전교협)는 회원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암만해도 교육법 하나를 못 고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아니구나, 이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는 조직, 단체가 필요하구나, 그리고 교섭이나 이런 것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단체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노동조합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그러면 노동조합을 하자”

 

전교조 결성 이후 1,527명의 교사가 파면, 해임되는 등의 외부에 의한 억압도 있었지만 내부의 분쟁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당시 노동조합, 노동자, 그리고 좌파라는 말에 대한 반감은 ‘빨갱이’에 대한 반감만큼이나 강력했다. 교사협의회에서 교직원노동조합으로 탈바꿈하자 탈퇴한 회원들도 많았다고.

 

“요즘 좌파라는 말을 홍 뭐시기 대선후보가, 당신 우파요 좌파요, 하는데(웃음), 아 그걸 나한테 물어봐요, 나 좌파요! 뭐가 잘못 됐소?(웃음)”

 

노동자로서 교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그는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후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활동할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노조생활을 한 그의 역사를 보니 조금 의아한 지점도 있었다. 교육운동과 노동운동. 그 사이의 연결지점을 어디서 발견한 걸까.

 

“나는 항상 전교조 위원장이든 민주노총 위원장이든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든 내 교사로서의 한 역할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 교사는 스무평 교실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고 본업이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역할을 폭도 넓혀야 된다는 거예요.

 

스무평 교실에서 열심히 수업하고 있는데 뒷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어떤 술 취한 남자가 들어와서 애들 수업을 방해한다고 하면 교사가 앞에서 수업하면서 ‘야 그거 신경쓰지말고 이거나 열심히 해 내 할 일은 가르치는 일이야,’ 하는 게 교사의 역할은 아니잖아요. 저것도 처리해야 되잖아. 그러면 잠시 분필을 놓고 당신 여기 왜 들어왔어, 하고 끌어내는 것도 교사의 역할이고 그것도 교육이다, 라고 느끼고. 나는 천상 교사잖아요.”

 

“그리고 한 번 교사는 영원한 교사고. 지금 나이가 (정년을) 넘어서 학교에 근무는 못하지만(웃음) 뭐 특강이다, 교사 연수다 부르면 ‘아이 내가 뭐’ 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서(웃음), 얼른 가서 애들 만나보기도 하고. 이런 식이죠.”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교사 이수호는 참 여러 군데서 ‘수업을 방해하는 술 취한 사람’을 끌어냈다. 교육, 청소년, 장애,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갈등해결 등 하는 일도 소속 단체도 다양하고 꾸준했다.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사셨던 건가 싶을 만큼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곳이 많았는데 그는 자신의 공사다망한 삶의 원인을 의외의 것에서 찾았다.


“웬 늙은 선생이(웃음), 운동권도 아닌 사람이(웃음)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굉장히 성실하고 주변에 선망도 있는 사람이 같이 해주니까 얼마나 고마워요, 그러니까 그 때부터 내 역할은 항상 나이 많은 그런 것 때문에(웃음), 부위원장, 무슨 위원장, 나이 때문에(웃음) 그래가지고 맨 그런 역할만(웃음), 온갖 그런 위원장 다 했다니까요(웃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일찍이 교사생활을 시작한 이수호 이사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온 동료 교사들보다 10살 정도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나이를 먹는 속도는 참으로 공평하여 처음부터 10살 많게 시작한 나이차는 결코 좁혀질 생각을 안 하고, 결국 어딜 가도 나이 많은 사람, 이것저것 책임지는 사람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민주노총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억압과 내부의 계파갈등으로 위기를 맞이한 노동운동을 살리기 위해 어떤 역할을 계속 맡아왔던 자신이 결국 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노총 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희망과 실망이 섞인 임기를 보냈다. 함께 운동했던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동운동이 귀족화 ‧ 권력화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우리나라 대표적 제조업으로서 조선업 이런 거잖아요. 조선업 대부분이 그 어마어마한 철판, 용접하는, 정교하고도 힘든 일이에요. 그걸 20-30년 한 사람이 연봉 6-7000만원 뭐 받는다고 그걸 무슨 귀족이고 어떻고 도둑놈처럼 (취급하는 건)그렇잖아요. 금융업이라든지 연구전문직이라든지 소위 말하는 전문직이라는 쪽은 연봉 1-2억 받아도,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거는 이제 뭔가 이게 기준과 기본이 잘못된 거잖아요.”

 

1987년은 6월항쟁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2016년 겨울은 100만 명의 시민이 광장을 가득 메웠던 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광장에는 언제나 노동자들이 있었다. 지난 30년 간 노동자들은 귀족노조, 종북, 빨갱이 등 여러 부당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시위를 이어갔다.

 

“사실은 작년 촛불의 어떻게 보면 강력한 밑받침이 되고 그렇게 됐던 에너지 중의 하나는 1년 전에 있었던 백남기 농민 돌아가신 민중총궐기, 그 때는 얼마나 탄압을 받았어요. 경찰이고 뭐고. 물대포로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러면서도 저항을 했잖아요. 모든 욕을 먹어가면서도. 그런 것들이 깔려 있는 거거든요.

 

세월호, 백남기 등등의 사건들이 밑에 응축되어서 막 언젠가는 기회만 있으면 폭발하는 거잖아요. 그런 하나의 과정 밑에는 운동의 정신과 흐름, 희생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에너지는 욕 얻어먹어가면서 운동하고 있는 농민이나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들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

 

언제나 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작년 겨울의 광장을 우리가 다 같이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5월 10일을 문재인 대통령의 날로 기억하겠지만 누군가에게 5월 10일은 광화문에서 고공농성과 단식을 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6일 만에 땅으로 내려온 날로 기억될 테니 말이다.

 

거대한 파도가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잔해들은 억압에 가장 깊숙이 박혀있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푸념하는 나에게 이수호 이사장은 여기까지 온 것도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만큼(정권이 교체된 만큼) 달라지겠죠. 난 그것도 대단하다고 봐요. 어쨌든 (정권)교체 자체도 의미가 있고. 헌법재판소 이정미 재판관이 그 차분하면서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파면선고를 했지만 사실 촛불이, 촛불 시민들이 파면선고를 내린 거죠. 그 얼마나 대단해요. 그 자체도 정말 역사에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고.

 

촛불, 민중, 국민의 큰 승리로 기록되고 또 그 만큼, 지금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졌잖아요. 다당제가 돼서 제일 위에서부터, 안철수 문재인, 심상정 그 옆에까지 가면 좌로 또 길어지고, 민중연합당도 있고. 이번에 출마를 못했지만 또 있고. 우로도 쭉 있고.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어진 거예요. 우리가 그걸 인정해야 해요. 그걸 선악으로 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것도 대단하다고 봐야죠.”


 ▲ 이수호 이사장. ⓒ바꿈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 의식”

 

“사실 그 무렵,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에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이 막 일어난 그 사이에, 내가 그런(사회운동) 고민을 하면서 만났던 책이 전태일 평전이에요. 전태일하고 나하고 나이가 동갑이잖아요, 그러니까 더 절실히, 부채의식도 있고. 그 평전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겁거나 울컥하거나 이런 수준을 넘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교육운동으로 이끄는 하나의 계기가 됐던 그런 거였는데. 그러면서 이제 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죠. 같이 있는 거죠, 같이.”

 

영원한 젊은이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인 전태일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본인도 얼마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차비를 모아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줬던 이야기, 국회도 찾아가고 시청도 찾아가고, 근로감독관도 찾아가고 심지어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 실패의 실패를 겪다 어렵사리 데모를 준비했지만 사전에 경찰에게 정보가 새어나가 결국 스스로를 불태우는 최후의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

 

당시 중간관리쯤이었던 미싱사로 일했던 전태일은 자기 밑에서 일하고 있던 13살, 14살의 어린 여공들의 삶을 보며 정말 마음 아파했었다고.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수호 이사장의 목소리에도 절절한 마음이 묻어있었다.

 

“얘(전태일)가 마음이 아파가지고. 일기에도 쓰여 있지만, 그걸 보면 마음이 아파서. 그게 인간이잖아요. 뭔가 좀 힘든 일 보고 하면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거야.

 

전태일은 자기의식, 자기를 바라보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던 친구 같아요. 그러면서 나는 이 사회에서 어디 위치해야 하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기에 대한 책임이죠. 그리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자기를 바라보면 바로 남들이 보이잖아요. 관계 속에서의 자기. 그리고 연대의식,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이런 것들이 이제 발전을 하게 되잖아요. 자기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게 잘 안 돼요. 남들이 보이지도 않고. 그리고 항상 나보다 더 고통 받고 소외당하고 힘든 그런 약자를 생각하고, 이들과 끊임없는 소통과 연대. 이게 전태일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누구이고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나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관계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전태일의 정신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수호 이사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전태일이 여공들에게 풀빵을 건넸던 것처럼 아주 작은 일도 분명 의미가 있고 또 그 작은 일을 통해 사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람은 결코 혼자 잘 살 수 없고, 또 혼자만 희생해 세상을 구할 수도 없다고. 나와 사회 간의 균형잡기를 ‘전태일 정신’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을 통해 참신한 교훈을 얻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30년 전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이 삶을 사시겠냐 물으니, 후회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대에 맞는 교사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 때 나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내가 교사로서 그 시대 상황에 맞게 나는 판단했다고 봐요. 물론 갈등도 했죠. 그 현장, 현실, 아이들. 그 삶과 내 삶을 어떻게든지 좀 알차게,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 되는데, 그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인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를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이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지금 3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고.

 

또 내가 이 무지렁이가, 엄청 복을 받아가지고 아까 얘기한대로 내가 역할이 항상 무슨 회장, 사무처장, 위원장(웃음), 이런 게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 명 밖에 없는데(웃음), 그러니까 내가 그런 식으로 보면 참 복이 많은 거죠. 나는 지금 입이 100개가 있어도 할 말 없고. 다만 내가 잘난 척 하면서 그런 역할을 했는데 세상이 뭐가 달라졌나, 그렇게 내가 해서 잘 해놓은 게 뭐냐 할 때 부끄럽고 그냥 그럴 따름이죠.

 

이제는 책임지는 일이나 이런 거(대표) 안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굉장히 어렵게 싸우는 친구들이 밑에서 남을 도와주는 일을 ‘같이 좀 합시다, 도와주세요’, 하면 외면할 수가 없어요. 와서 하자는데 어떻게 해야지. 나는 빚이 있는데. 빚을 갚아야지(웃음). 전태일재단도 그렇고. 그래서 뭐 남은 기간, 남은 힘이 있으면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좀 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아주 뭐 자랑스럽고 그럴 것도 없지만 크게 뭐 자신이 부끄럽거나 그럴 것도 없고. 아, 한 교사가 그 시대가 주는 그런 역할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면서 살았구나,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거죠.”

 

새로운 정권의 등장으로 매일 매일이 화제인 요즘. 촛불대선으로 세운 대통령의 행보가 많은 이들의 칭찬을 사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한 구석 어딘가에는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법 밖으로 밀려난 전교조는 여전히 법 밖에 있고, 땅으로 내려온 노동자들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이수호 이사장이 전 삶을 통틀어 지키고자 했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의 역할만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시민의 역할도 선명해져 간다. 87년의 역사와 2017년의 역사로 쟁취한 힘에는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고 그러기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꼭 나눠야 한다는 것. 이제 우리는 지난겨울 광장에서 외쳐왔던 ‘이게 나라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지 않을까.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보통시민의 변화, 6월민주항쟁의 핵심" 


1987년 6월 10일. 그는 며칠 전부터 집을 나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사전에 가택연금을 한다거나 연행을 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당시 상임집행위원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 몸을 담고 있었던 황인성 수원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은 30년 전 일을 어제 일인 양 또렷이 기억했다.  
 
"오후 9시부터 10분간 텔레비전을 끄고 전등을 끄자고 했어요. 그게 얼마나 실천될까, 이게 아주 관심거리였어요. 그때 내가 이화동, 저쪽으로 내려가면 종로5가 사거린데, 이쪽쯤에 내가 서 있었어요. 이 근처에는 사무용 건물이 있었고, 저쪽 낙산에는 서민아파트들이 주욱 서 있었어요. 대개 못사는 사람들이 사는 서민아파트였는데, 내가 볼 때 여기저기 창문의 빛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반 가까이가 꺼지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뭐라고 해야 하나. 등골에 찬 기운이 쫙 흐르는 거야… ." 당시 국본이 배포한 '6.10 국민대회 행동요강'의 4항에는 ‘전 국민은 오후 9시에서 9시 10분까지 10분간 소등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 전당대회에 항의하고 민주쟁취의 의지를 표시할 수 있는 기도, 묵상, 독경 등의 행동을 한다’고 되어 있었다. 


"엄청난 감격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앞서 오후 6시 태극기 하강시간에 맞춰 시청 앞에서도 지나가는 택시나 버스가 일제히 경적을 울리고, 차안에 있는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손수건이나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서 '아, 이제 우리가 하나가 되고 있다. 숨죽이고 있던 국민들과 운동본부가...' 이런 걸 확인하면서 몸이 떨렸거든. 그런데 소등한다는 것은 몸이 거리에 있지 않고 집에 있지만 이런 큰 국민적 저항행동에 나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하는 걸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것도 한 가족 단위로.… ." 


87년의 재야, 종교, 야당 정치인 등의 민주인사들은 그간 비밀리에 준비해 온 국본을 5월 27일 결성대회를 통해 공개적으로 발족했다. 이 자리에서 6.10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 대회이후의 계획은 뚜렷하게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한 달 만에 저 사람들이(독재 정권) 자신의 의지를 꺾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당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국민의 호응이 있었고, 그럼으로 해서 국민적 분노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큰지 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국민의 호응도, 6.29선언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황 이사장의 말에 "그렇다면 예상하신 것은 무엇이냐"고 장난 섞인 질문을 던졌다.

 

 

 황인성 수원민주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김지혜 바꿈 활동가

 

 

그해 초에 발생한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살인 사건 당시 개최된 국민추도대회(2.7.)와 평화대행진(3.3.) 때보다 대회 규모가 분명 커져 있었다. 4.13 호헌조치에 대한 국민적 반대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참여한 시민들의 규모가 정부와 여당을 정치적으로 몰아붙이는 계기가 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대회를 기점으로 국민적 저항 행동이 지속적, 그리고 폭발적 양상으로 분출되어 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시위학생들을 연행하려는 경찰들에게 멀리서 야유를 보내는 식으로 시위를 응원하던 시민들이, 쫒기는 학생들을 자신의 가게에 숨겨주고, 결국에는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 함께 서게 되는 변화를 보면서 뭔가 '일을 내겠다'는 색다른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직적으로 거리투쟁에 나선 학생이나 재야단체 회원들, 정당원들과 달리 말없이 숨죽여 살아오던 보통시민들이 국민행동요강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손수건 흔들기, 차량경적 울리기, 전등 끄기 등), 탄압에 대한 공포를 뚫고 한 사람 한 사람 시민의 작지만 분명한 결단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가 느꼈던 희망과 세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기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80년 광주가 학생들로 하여금 뭔가 현실을 거부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게 하는 일종의 명령을 내리는 그런 것과 같은 거예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은 광주의 죽음에 대한 빚진 마음, 이런 게 엄청 강했던 것이고, 그걸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지만,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어요."


계속되는 군사독재정권, 죽어가는 학생들, 고문, 최루탄, 그리고 5.18 광주항쟁. 자신의 집안에서 불을 끄는 일조차 무서웠을 시절에 그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온 거리와 광장은 흡사 그에게 기적이 아니었을까. 


"가치가 중시되는 시대, 30년 간 깊어진 문제의식" 


2017년 촛불이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은 비폭력이라는 기조도 한 몫 했지만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구호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장애, 여성, 성소수자, 채식 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구호들. 자신의 처지와 연결시키면서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017년의 변화라고 하는 건 87년보다는 문제의식이 훨씬 깊고 넓죠. 왜냐. 87년은 눌려 있었으니 일차적 요구가 대통령직선제(정부선택권)와 민주헌법 쟁취로 모였잖아요, 그게 됐어요. 그대로 된 거야. 됐는데 이런 제도적 변화가 왔다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느냐, 아니에요.

87년에 우리가 직선제 개헌을 했다고는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게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계속 발전하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데, 2017년의 변화라고 하는 것,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간 변화 또한 더 큰 변화를 위한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하는 걸, 6월항쟁 이후 30년이 가르쳐 준 거라고 생각해요." 

 

 

황인성 수원민주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김지혜 바꿈 활동가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결국 당선자는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였다. 정치권은 분열됐고, 재야세력 내부에서도 상호불신이 커졌다. 대안이 되어야 할 재야운동에 내적으로 균열이 생겼고, 이후 정세에 통일적으로 대응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개헌 후 대선 날짜가 결정되자 국본 상집위원 내에서도 비판적 지지그룹,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 후보단일화 그룹 등이 순차적으로 빠져나갔다. 황 이사장의 표현에 따르면 ‘이래저래 정파적이지 못한’ 몇 사람만 국본에 남았고, '상처뿐인 국민운동본부'가 되어버렸다. 뿔뿔이 흩어진 대가는 컸다.  


사실상 군부정권의 연장이라는 참담한 대통령 선거결과였다. 그렇지만 투쟁의 성과인 국민기본권의 확대로 시민적 공간이 열리면서 새롭게 시민사회의 다양한 운동이 나타나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30년 전 쟁취한 현행 헌법의 틀 내에서 시민들은 멈춰있지 않고 가능한 틈새를 찾아 끊임없이 자기성장을 도모해 왔음을 이번 촛불광장에서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에 억압된 상황 속에서는 문제는 있지만 주요하게 부각되지 않은 ‘가치’, 가치가 중시되는 시대가 온 거에요. 여성이라고 하는 가치, 환경, 평화·통일, 그 다음에 경제정의와 같은 이런 시민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는 6월항쟁 이후 있었던 많은 문제들과 그것에 대항했던 시민들의 공동의 경험은 누적되었고, 우리는 그 크고 작은 승리의 경험을 학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7년의 6월이, 2002년의 효순·미선이가, 2008년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이, 2015년의 백남기가 없었다면 오늘의 촛불과 탄핵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정치권의 미진한 결정들, 결국 변화는 시민들의 손으로"


동의가 어렵지 않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자각한 대중의 힘, 피플파워(people power)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망라해 역사가 증명해 주는 사실이니 말이다. 다만 그에게 조금 더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1987년 6월을 바탕으로 성장된 시민의 힘으로 故김대중 전 대통령과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이게 나라냐'를 외쳐야만 했느냐는 것이었다. DJ정권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었고, 참여정부 당시 시민사회수석을 맡았던 그에게 역진한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을 조금은 묻고 싶었다. 


"헌재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가 기각되어 다시 국정에 복귀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노 대통령께서 몇몇 시민사회 단체인사들을 초치해 간담회를 가졌지요. 그날 저녁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는 우리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중요하다는 말을 했어요. 왜냐. 제대로 된 변화는 정부, 관료나 국회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시민사회라고 하는 국민, 국민과 동맹을 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게 뭔가 조금 통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양반(故노무현)한테…."  


그때(참여정부) 왜 그러셨어요, 후회되는 것은 없으셨나요, 하는 다음 질문들을 마음 속에 담아뒀지만 결국 묻지는 못했다. '그(청와대) 안에 있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과는 참 많이 다르더라'는 그의 말. '내가 지금까지 내려온 결정들이 모두 미진했던 것만은 분명한데 그게 과연 잘못된 선택이었기 때문일까 혹은 이 역사의 한계였을까'하는 그의 고민. 굳이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밝혀내야 하는 수많은 죽음들, 이미 자살로 종결되어 오로지 가해자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만 남아있거나 아예 관련 자료제출을 거부하는 국가기관의 현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는 속에서 진상규명위원회의 진로를 두고 발생한 동료들 간의 다툼. 어느 가치에 설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순간들,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을 바꿔도 전문성을 앞세운 관료조직의 관성과 이해관계가 변화를 은근히 가로막거나 정책을 변질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왜 그걸 못했어!, 못한 건 사실인데(웃음), 그럼 그때 어떻게 했어야 하지, 하고 생각해보면 참 답이 없는 것도 있어요." 


미진한 선택들이었다는 고백은, 결국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결코 저 위의 권력자가 아닌 내 옆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공고히 했다. 의미 있는 변화는 여의도(국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나라가 바로 서려면 국민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 되는 항쟁의 결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으로서 말이다.         


"그걸 이번에 뒤집어 놓은 건 누구냐, 투표라고 하는 종이 돌을 던져서 국민들이 바꿔놓은 거예요(지난 해 4.13총선). 이 보이지 않는 종이 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행사한 것도 흩어져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이었고, 삐뚤빼뚤 이래해야 하나 갈피를 못 잡는 국회의원들한테 퇴진은 말할 것도 없고 퇴진 안 한다고 하면 그 때는 할 수 없다, 탄핵이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선택해야한다, 이렇게 만든 건 광장에 나선 국민들이었다고.."


"잘 늙어가는 충실한 시민적 삶"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바꿔나가는 세상. 말이야 낭만적이지만 그게 쉽나, 생각해보니 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원동력을 갖고 있기에 30년, 40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켰는지, 30차도 채 안 되는 주말의 촛불집회도 매 주 참가하기 버거운 삶인데 말이다.  


"일단은 이게 뒤에 쫄쫄 따라간다고 생각했는데(웃음) 어쩌다보니 내가 제일 가운데 있고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선배들은 다 잡혀가고 내가 젤 앞에 있는 거야(웃음)."

 

 


황인성 수원민주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김지혜 바꿈 활동가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다음 질문을 던지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40년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현재와 같은 삶을 사실 것이냐 묻자, '지금처럼은 안 살 것 같다'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샤이'했던 고등학생 황인성은 기자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외교관이 되면 그도 연미복을 입고 파티나 다니는 것이 일인 줄 알았다고. 외교학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서울대에 안전하게 합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전혀 원치 않는 독어독문학과 원서를 써주셨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시위 같은 것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나 존경할 만한 친구들이 하나둘 군대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도시빈민 실태조사를 나갔다가 엄청난 빈부격차와 비인간적인 삶에 분노하면서 주저했던 마음도 잠시, 탁 하고 시작된 운동이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관념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분노라는 감정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처음부터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순간의 결단을 거쳐 어느새 여기에 와있는 것이라고. 매번 힘든 결단들을 해왔을 그의 젊은 날들이 고되게 느껴지는 찰나에 그가 해준 말에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


"청와대에서 나와서부터 인생관이 달라졌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뭔가 해야 되는 사람, 뭔가 앞장서서 고민을 하고 남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거나 가르쳐야 하거나. 약간 엘리트 의식이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 것들이 오히려 나를 옥죄어 왔다,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생각. 어떤 뭔가 내가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더 헌신적이고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이래야 한다는 거, 그건 조금 오만한 생각 같다,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아주 거대한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고루 발전해야 그 힘으로 뭐가 되는 거지. 어떤 특정 집단의 대단한 능력, 의지 이것 가지고 세상이 변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충실한 시민적 삶. 이런 것이 뭘까. 그런 걸 어떻게 할까. 그래서 우리가 21세기에 잘 늙어가는 사람이 되자(웃음), 시민으로서."


무려 4시간동안 나눈 이야기 속에서 무수한 말을 쏟아냈지만 결국 그의 메시지는 하나였다. '충실한 시민적 삶'. 독재정권의 부당함을 알릴 시간을 벌기위해 학생들이 건물옥상에 건 밧줄에 매달려 소리를 질렀던 시절부터 그의 표현대로 '삐까번쩍'한 2017년의 촛불집회까지, 지난 40년의 역사 속에서 고군분투한 그가 깨닫고 유지한 메시지였다.


1987년의 청년들이 6월민주항쟁으로 갚고자 했던 광주시민, 광주영령에 대한 빚. 지금의 청년이 용산에게, 세월호에게, 백남기 농민에게, 그리고 2017년 촛불에게 진 빚은 또 어떻게 갚아야 할까. 분명 그 답은 황 이사장의 삶처럼 돌고 돌더라도 결국은 ‘충실한 시민적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문 바로가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6919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정책배틀> 2탄. 주제는 검찰개혁입니다. 

'검사장 직선제 도입 찬성' 측에는 이국운 교수였고 반대쪽은 이광철 변호사가 나섰습니다


대한민국 검찰,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검찰권한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화되어 있고, 검찰이라는 단일 조직이 직접 수사권과 수사지휘권, 불기소권을 포함한 기소권, 공사유지권, 형집행권 등 재판 권한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경찰까지 지휘합니다. 


그러나 검찰이 권한을 자기 마음대로 행사하면서 검찰비리는 주기적으로 폭발하고 점차 대형화되고 있다. 대한민국 검찰은 자정 능력이 있을까요? 특권의식과 부패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한국 검찰로는 자정 능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민이 검사장 인선권을 갖자는 대안이 제안되고 있습니다. 검사장은 고등검찰청과 지방검찰청의 장을 말합니다. 지방검찰청은 서울에는 서울중앙지검이 있듯이 대체로 시 단위에 하나씩 있고 전국에 18개의 검사장 자리가 있습니다. 검사장 직선제는 임기 4년의 검사장을 교육감 선출 방식으로 선거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민에 의해 선출된 검사장에게는 검찰청 내 검사의 보직을 정할 권한을 부여하고 지금의 대검찰청은 지방검찰청 간 업무 조정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검사장 직선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사전조사는 35vs15로 50명의 시민중 다수가 직선제 도입 찬성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직선제 반대를 강조한 이광철 변호사와 패널들의 강력한 이야기로 직선제 반대가 10명 이상 앞서 갈 때도 있었습니다. 

이어진 분임 토론에도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최종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배틀 후에는 28vs22. 여전히 찬성이 다수지만, 

2시간의 배틀 후에 7명이 반대로 입장변경했습니다.

반대패널측이 시간부족을 아쉬워했다는 후문입니다.


2탄 검찰개혁은 전문가 영역으로 여겨졌지만

많은 시민들의 참여는 역설적으로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시민참여의 의사를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헬조선을 리모델링 해볼까요?

2016년 광장의 촛불은 대통령 퇴진을 넘어, 새로운 대한민국을 상상했습닌다.

되돌아보면 역사의 전환기를 맞을 때마다 시민은 광장에 나왔지만 그 끝은 패배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기획해보았습니다.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의 '함께 그리는 대한민국' [함께그대] 프로젝트입니다.시민배심단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카톡으로 후원하면 무료 후원이 가능합니다! 
꼭 많은 후원 부탁드려요!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은


"도전하는 청년을 응원합니다" 라는 주제로 다음 스토리펀딩을 진행중입니다.

6번째 주인공은 빠흐띠의 권오현 대표입니다.


온라인 플랫폼 유행속에 그걸 진지하게 현실화 시키고 있는 청년.

IT 기술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청년 

각자 자기영역, 자기분야에서 자기만의 촛불을 들고 노력하는

권오현 대표의 스토리펀딩을 응원해주세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6399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최근 대한민국은 최순실 비선실세 논란으로 인해 국민들은 분노와 깊은 허탈감에 빠져있다. 이 기막힌 사기극으로 인해 대부분의 피해와 앞으로 수습하는 과정에서 받게 될 정신적 피로감 역시 국민의 몫이다. 국민들은 이제 국민주권이 실현되는 새로운 대한민국, 새로운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 시작은 새로운 세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새로운 구성원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일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청소년과 음악인들이 모여 ‘18세 참정권 인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자 한다. 11월 17일 수능일 저녁 6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 난장법석 거리공연 ‘수능 18세! 선거19세? 투표권도 없는 18세 인생, 이제 끝내자!’는 2017민주평화포럼, 우리헌법읽기 국민운동본부, 인문예술공유지 문래당, 참여불교재가연대,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성대민주동문회 등이 공동으로 주최한다. 이 공연은 “1%를 향한 99%의 힘”을 모토로 지난 8월7일 종각에서 열렸던 ‘개돼지들의 카니발’의 연속 기획이기도 하다. 




이날 행사에는 집시트로니카 밴드 ‘오즈(OZ)’와 악마의 블루스 밴드 ‘김태춘과 바퀴벌레들’, 플라멩코 퍼포먼스 그룹 ‘뻬냐 플라멩카 엘 오리엔떼(Penä Plamenca El Oriente)’ 등 홍대 앞에서 주로 활동하는 개성적인 뮤지션들의 다양한 무대가 펼쳐진다. 



공연과 함께 현 시국에 대한 뮤지션과 관객들의 1분 발언, 참정권 확대에 관한 청소년의 1분 발언, 18세 선거연령 인하 찬반 투표 등도 이루어진다. 공연은 공연자와 참여 시민들이 어우러져 함께 즐기는 형식의 무대로 꾸며질 예정이다. 기존의 딱딱한 집회의 형식을 벗어나 관객이 공연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웃음과 노래와 춤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시민들의 힘의 원천임을 자각하고, 정치적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취지이다. 올해 초부터 돌풍을 일으킨 ‘손바닥 헌법책’도 현장에서 보급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성인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헌법만 지키면 99%를 위한 나라는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는 소망을 담았다. 



18세 선거권 인하 온라인 서명 : https://goo.gl/forms/m6xRpDMG5BBZ7fix1

18세 선거권 인하 온라인 찬반 투표 : https://goo.gl/forms/m6xRpDMG5BBZ7fix1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박승하(바꿈 청년네트워크)

현재 야권 최다선인 7선 이해찬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상황은 1987년 6월 항쟁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에 준해 당이 비상하게 대응해야 한다. 24시간 대기한다는 비상한 마음으로 현 국면을 타개해야 한다." 비장함이 전해진다.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1987년 6월 항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현재와 비슷한 상황이라면 30년 시차를 초월해 2016년 우리에게도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1987년 6월 항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먼저 기억할 대목은 1987년 6월 항쟁은 6월 한 달 사이에 발생한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1980년 광주의 비극 이후 도도히 성장한 민주화 운동의 절정이자 결실이었다.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눈 정권의 만행은 구전과 기록으로 퍼져나갔고, 광주의 진실을 접한 청년들은 시대적 아픔에 공명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84년 하반기 대학 총학생회가 부활했고, 1985년 2월 총선에서 관제야당 민한당이 몰락하고 김대중과 김영삼이 창당한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신민당은 1986년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을 추진했다. 정치적으로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선명야당이, 사회적으로는 재야와 청년을 중심으로 한 조직운동이, 전두환 정권과 각을 세우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민주화 운동의 성장과 확산을 경계한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1985년 민청련 의장 김근태는 남영동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했고,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폭로되었다. 6월 항쟁이 있던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은 물고문 끝에 사망했다.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이 저지른 고문 범죄를 은폐하고 조작했다. 국민적 공분이 일었고, 양심적 종교인과 지식인 시국선언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전두환은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면서 정권을 연장하려는 꼼수를 획책했다. 대통령 직선제 도입이 담긴 헌법 개정 논의를 중단하고, 1988년 2월 자신이 정권을 이양한다는 내용의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1987년 5월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한 전두환의 호헌조치에 맞서 야당과 각계 운동단체는 해방 후 최대 규모 연합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국민운동본부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적 지도력을 확보하고,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 개최를 결정하고 준비했다. 6월 9일 국민대회 출정식에 참여했던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 총에 맞아 쓰러졌다.

엄청난 반발과 저항이 몰아쳤다. 6월 10일 전국 514곳에서 총 5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한 번 폭발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전국적 규모의 집회가 계속됐다. 도로의 차들은 경적을 울렸고, 거리에는 넥타이 부대가 가세했다. 6월 26일 열린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 각지에서 180만 명이 참여했다. 6월 10일 이후 17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모두 2천1백45회에 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은 비상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후계자 노태우를 내세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훗날 밝혀졌지만 6∙29 선언은 국면전환을 위해 전두환이 기획하고, 노태우가 실행한 집권세력의 합동 공연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6∙29 선언을 정권의 항복으로 받아들였고, 야당은 직선제 이후 전개될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과 분열의 길로 접어들었다. 6월 항쟁의 중심이었던 야당, 청년, 노동자, 시민은 구심을 잃었고 정국의 축은 급속히 재편됐다. 그렇게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가 진행됐다. 결과는 828만 표를 얻은 노태우의 승리였다. 김영삼은 633만 표, 김대중은 611만 표를 얻었다. 민주진영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선거를 마치고 나서야 정권 교체와 시대 교체의 사명을 걷어찬 과오가 보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지금은 2016년이다. 

2016년으로 돌아오자. 지난 11월 5일 토요일 광화문 광장에는 20만 시민이 들어찼다. 시민들은 최순실에게 막강한 권한이 위임되었고, 미르∙K재단의 각종 비리와 유착에 대통령이 관계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성난 민심은 대통령 퇴진과 하야를 외치며 거리를 밝혔다. 대통령 지지율은 조사 이래 최저인 5%로 추락했다. 최순실에게 도움 받은 것을 인정한 첫 번째 사과와 관계단절을 선언한 두 번째 사과가 있었으나 민심을 돌리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일했던 김병준 교수를 총리로 지명해 반전을 노렸으나 역부족이었다. 대통령이 부정과 비리에 연루 되었다는 혐의를 벗지 못함으로써 정치적 권위와 권능을 상실했다. 전국 각지 시민들은 물론이고 이재명, 박원순, 안철수 등 야당 소속 정치인들이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47명은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떼고, 2선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11월 12일 <민중총궐기>와 12일 이후 대응이 주목 받고 있다.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시민들의 의지가 확고하고, 명분과 이유 또한 확실하다.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범죄에 대한 책임과 최순실과의 관계가 맞물려 있다. 수사기관이 대통령을 직접 조사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진실 규명에 편안한 조건에서 수사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하야,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통과해야 하는 탄핵, 2선 퇴진 후 거국내각 구성 등 어떤 방법이 구현되어도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시국은 점점 엄중해지고 있다. 이해찬 의원 말대로 1987년 6월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런데 앞에서 봤듯이 6월 항쟁은 불완전한, 절반의 시민혁명이었다. 2016년에도 집권세력은 대통령 거취와 무관하게 정국 전환을 시도할 것이고 상대의 실책과 균열을 유도할 것이다. 2016년에 1987년을 대입하려면, 성공과 실패를 분별해 실패를 줄이고 성공을 확대하는 경로를, 변화한 시대적 조건에 맞게 찾아야 한다. 
  
6월항쟁의 성과와 한계는 무엇인가?
  
1987년 6월 항쟁은 ① 정권의 폭력성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저항 ② 분노와 저항을 조직하여 표현할 수 있는 민주화 운동 그룹이 연합을 통해 일관된 메시지와 행동 전개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 ③ 넥타이 부대 등 중간층 시민들의 호응과 참여 덕분에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① 정권 폭력 규탄,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고 ② 대선 국면을 맞아 연합이 해체되며, 분열과 반목을 거듭했으며 ③ 넥타이 부대 등 민주화 운동의 주력이 아닌 시민들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추상적이고 강경한 이론과 구호에 치우침으로써 전두환이 설계한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보완하고 채워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2016년 한국의 시민들은 ①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 등이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축적하고 부정한 방법과 특혜를 활용해 결실을 누려온 것과 대통령의 공적인 권한을 사적으로 나눈 것에 강력한 분노를 공유하고 있으며 ② 최대 규모 연합은 존재하지 않지만, SNS를 통해 메시지와 행동을 조율한다. (#그런데 최순실은?) ③ 그리고 이런 국면을 주시하고 주도하는 사람들은 1987년 넥타이 부대에 해당하는 시민들이다. 수십만이 결의했던 운동 단체는 사라졌지만, 자신들의 손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사람들과 민주화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세대가 사회를 받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보완하고 채워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11월 12일 <민중총궐기>까지 그리고 최소한 당일에는 시민들이 공유한 분노의 범위에서 이슈를 찾아내어 문제를 제기하자. 기업, 언론, 기타 모든 사회 문제를 11월 12일에 해소하려 애쓰지 말자. 정말 중요한 문제는 박근혜의 범죄를 가려내는 것과 합당한 징벌을 내리는 것이다.
  
둘째. 박근혜 이후 추진해야 하는 문제와 대안을 시민과 함께 작성하자. 특히 여성․청년․청소년의 참여와 권한을 대폭 확대하자. 과거와 다른 시민 네트워크의 실체는 이들 단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때 조직적 기반을 갖춘 단체 및 정당의 시스템과 역량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광장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성취의 기억과 경험이다. 
  
셋째. 연대와 단합은 박근혜 대통령 하야로 인해 60일 안에 선거를 실시할 때, 다른 문제들과 함께 다루어질 수 있다. 연대와 단합을 자주 주장한다고 힘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경직된 메시지와 행동 통일은 활력과 긴장을 떨어뜨린다. 정당과 시민이, 문재인과 박원순이, 다른 의견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시대 과제를 새롭게 쓰는 것이다. 1987년 이후 30년의 과오를 청산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해방과 동시에 강제된 국민의 자리에서 많은 일을 했다. 1987년은 국민에서 시민으로 진화한 첫 관문이었다. 청년 학생의 헌신, 정치 거목과 사회 원로의 무게감이 관문을 통과하는 중심이 되었다. 그 후 30년이 지났다. 시민지성은 고비마다 참여와 투표, 행동으로 현대사의 방향을 잡아줬다. 정치적 리더십 구조와 시민을 중심에 둔 거리와 제도의 교감은 늘 확인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분노와 저항, 청산의 힘이 새누리당 지지자 전반을 향할 이유는 없다. 오늘의 파국에 대한 지지 집단의 회고와 성찰은 여론과 투표를 거쳐 반영될 것이며, 이명박과 박근혜를 안 찍었다고 우월한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보수는 극단적 변태를 마감하고 생존과 회복을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며, 2016년 시민혁명은 이러한 변화를 견인하거나 포용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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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바꿈 4차 포럼



세상을 바꾸는 온-오프라인 민주주의의 가능성




온라인 민주주의를 위해 개발 활동에 주력하고 있는 '빠띠'와 오프라인 청년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바꿈'

두 단체의 장점을 결합해 '바꿈 청년네트워크 사업'의 온-오픈 연계활동의 가능성을 진단합니다.



○ 일 시: 2016년 6월 23일 (목) 19:00

○ 장 소: 동국대 사회과학과 5층 컨퍼런스홀 (동대입구역 6번출구)


 - 사회: 손우정 (성공회대 연구교수)

  - 발제: "바꿈 청년네트워크 활동계획" _홍명근 (바꿈. 상임활동가)

          "온라인 민주주의와 빠띠의 도전" _권오현 (UFO팩토리 대표)

  - 토론: "온라인을 매개로 한 청년활동의 확장 가능성" _김정현 (와글 매니저)

          "온오프라인 연계활동의 기술적 쟁점" _전세경 (바꿈. 이사 / 위버로프트 대표)


○ 주최: [빠띠],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 문의: 02-3471-9686~7)



바꿈 4차 포럼 - 세상을 바꾸는 온-오프라인 민주주의가능성 - 참가 신청


참석자 파악을 위해 신청서를 간단히 작성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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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총선은 망했다? 그럼 89석은 뭔가

정치공학만 난무, 시대정신 논쟁은 실종

2016.4.1. 오마이뉴스


손우정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


▲  20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선거 현수막이 30일 오후 서울 노원역 인근에 나란히 걸려 있다.

ⓒ 남소연


20대 총선이 본격적인 레이스에 올랐다. 각 당은 말 많았던 공천을 마무리하고 승리를 위해 질주하고 있다. 판세를 점치는 다양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지만 관전 포인트는 새누리당이 개헌 저지선을 돌파할 것인가에 쏠려 있다. 박근혜 정권의 등장 이후 노골적인 민주주의 퇴행이 시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총선 결과에 따라 향후 한국사회가 격변을 겪을 것이라는 점은 당연지사다. 


예정된 듯 보이는 패배 앞에 그 정도를 축소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야권에서는 슬금슬금 후보 단일화 논의가 나오고 있다. 중앙당 차원의 야권연대는 물 건너 간 지 오래지만, 지역에서 개별 후보 차원으로 진행되는 단일화 논의는 급물살이다. 이미 몇몇 지역에서 '야권 단일후보'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만큼 유권자들이 주변화 된 총선도 드물다. 루소는 자유민주주의 대의제 하에서 국민은 선거 때만 주인이 된다고 역설했지만, 20대 총선에서 국민은 선거를 앞두고서도 주인행세를 못하고 있다. 선거를 둘러싼 모든 이슈의 초점이 계파갈등, 총선갈등에 집중되어 있으며, 선거를 앞둔 야권연대 논의도 철저한 선거공학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총선은 이미 망했다"는 냉소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번 총선을 이런 식으로 흘러 보내도 좋은 것인가? 


지금은 진보도 퇴행도 가능한 시대정신의 불안정한 각축기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을까? 또 어디로 가야 할 것일까? 이런 질문은 항상 중요하지만, 지금처럼 중요한 시기가 또 없다. 지금은 우리가 이제까지 지내온 시간과 다른, 새로운 어떤 체제를 예고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존재한다. 흔히 1987년 헌법개정으로 촉발된 정치체제의 변화와 함께 한국사회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 '87년체제'라고 보는 입장도 있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체제인 '97년체제'로 보기도 한다. 그 외 여전히 53년체제라는 주장과 새로운 08년체제라는 주장 등 현시기를 규정하는 다양한 논의가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활발히 일어났다. 


이런 다양한 주장 중 무엇이 타당한지를 따질 생각은 없다. 그러나 현재의 시기가 생명을 다한 기존의 체제를 넘어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시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1987년 이후 우리의 삶과 태도를 강하게 규정했던 요인들은 모두 그 정당성을 상실했다. 뿌리 깊은 분단체제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으로 흔들렸으며, 무한경쟁을 모토로 한 신자유주의는 영국과 미국에서부터 마지막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1987년 개헌의 최대 성과였던 자유민주주의적 대의질서 역시 마찬가지다. 체육관에서 뽑던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는 것이 시대과제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위임자와 수임자의 질적 괴리,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대의제의 한계 역시 이미 드러났다. 국회는 국민들의 신뢰를 전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은 87년 정치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기존 시스템의 한계가 자동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명을 다한 이 낡은 체제와 완전히 작별하지 못했다. 낡은 것은 사라졌으나, 새로운 것은 출현하지 않는 지적 방황과 혼란의 시기는 2008년부터 계속 진행 중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극복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과 방향은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그 방향은 마치 시계추가 좌우를 왕복하듯 87년 이전 시대로의 퇴행을 향해가기도 하고,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향하기도 한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보다 진보적인 체제로의 이행이 가능할 듯 보였던 시계추는 현 정부 들어 다시 오른쪽으로 급격히 이동했다. 소위 '민주화' 이전처럼 국가의 감시와 통제는 강화되고 있으며, 차이를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시도들이 반복되고 있다. 그동안의 민주적 성과가 아무리 보잘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노골적인 퇴행 앞에서도 '스톱'을 외치는 목소리조차 점차 작아지고 있다. 문제제기 수준의 이견이 '배신의 정치'라는 수식어 속에, 모호한 총선승리의 구호 속에 과감히 내쳐지고 있는 지금, 정치적 퇴행은 분명한 현상이다. 


의석이 없으면 진보할 수 없는가? 


지금의 시대가 진보도, 퇴행도 가능한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시점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불과 몇 해 전의 새로운 장밋빛 전망도, 지금의 퇴행도 확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지금이 퇴행기라면 진보의 공간도 있었다. 알다시피 2008년 촛불은 정치적 사건을 계기로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움을 구현하자는 집단적 움직임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새로운 시스템으로의 전환 가능성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공간은 존재하는데 말문을 닫아버린 야권이다. 


총선을 앞두고 정부와 여당의 퇴행을 막기 위해, 더 나아가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이 힘을 합치자는 목소리가 조금씩 강해지고 있지만, 그 수준은 한참 낮아졌다. 그나마 2008년 이후에는 가치에 기초한 단일화를 통해 새시대의 비전을 보여주려는 노력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철저히 선거공학적인 판단만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20대 총선을 앞둔 지금의 상황은 2012년 19대 총선의 분위기와 무척이나 다르다. 오히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분노의 심판론이 몰아쳤던 17대 총선 이후, 뉴라이트의 등장과 북핵 문제의 확산 등 전사회적인 보수화 바람이 불어 닥친 후에 치러진 2008년 18대 총선과 유사하다. 당시 2007년 대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일군 한나라당은 18대 총선에서 153석을 얻었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얻은 152석보다 단 한 석만 많았던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달랐다. 2008년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이 18석을 얻었고, 친박연대가 14석을 얻었다. 여기에 대부분 보수성향이었던 무소속까지 포함하면 보수진영의 의석수는 최대 210석에 달했다. 반면, 당시 더민주당의 전신인 통합민주당이 81석, 창조한국당 3석, 민주노동당 5석 등 진보·개혁 진영의 의석수는 모두 합쳐도 89석에 지나지 않았다.


▲ 2008년 18대 총선 결과 2008년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보수진영은 최대 210석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반면, 진보개혁적야권은 89석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1야당이 127석을 얻은 19대 국회가 2008년 이후 야당보다 더 잘 싸웠다는 근거는 없다. 2008년 이후 사회적 진보의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왔다.

ⓒ 손우정


2012년 총선에서 제1야당이 127석을 얻었고, 지금은 국민의당과 분당했지만 그래도 107석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과반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변명이 사실이라면, 2008년 총선 이후 2012년까지의 시기는 한국 정치 최대 암흑기여야 했다. 그러나 현실이 그랬는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촛불의 등장 이후, 오히려 죽을 쑤던 야권은 생기를 얻었다. 야권연대도 단지 후보를 단일화하는 것에서 더 나아갔다. 시민사회까지 적극적으로 결합해 야권연대를 추진했던 2010년 6.2지방선거에서는 각 중앙당 차원의 야권연대가 무산된 이후, 개별 후보 간 단일화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당시 광범위하게 '반MB연대'(이명박 대통령을 반대하기 위한 연대)가 제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후보단일화에 머물지 않았다. 내용 상의 가치연대를 추진하기 위해 시도되었던 것이 이른바 '공동정부 전술'이었다.


모든 야당이 포함되지는 못했지만, 서울의 경우 서대문, 노원, 강서, 동대문, 성북구에서 후보단일화와 공동정부를 위한 공동정책합의서를 도출했고, 경기도에서는 고양, 부천, 성남, 수원에서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졌다. 강원도, 경상남도, 대전시에서도 후보단일화와 지방공동정부, 공동 정책이 합의되었다.


물론 공동정부 구성과 합의된 진보적 의제가 선거 이후 제대로 지켜졌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최소한 당시에 추진된 후보단일화가 '묻지마 단일화'거나 정치공학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국민들에게, 이 단일화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비록 추상적이지만 지금의 낡은 시스템을 어떤 방향으로 바꿀 것인지에 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2012년 19대 총선도 마찬가지였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간에 진행된 단일화 논의에는 '공동정책합의문'도 포함되었다. 그 합의를 얼마나 지켰는지와는 별개로, 최소한 새로운 시대를 향한 가치 기반의 연대가 추진되었다. 이런 다양한 시도들의 성과는 지방선거 이후 무상보육과 무상급식 등으로 나타났고 최소한 '형식적'일지라도 여당 후보의 대선공약에도 포함되도록 강제할 수 있었다.


'권력의지'는 없고 '권력욕'만 있는가


총선을 앞두고 현재 제기되고 있는 후보별 단일화 움직임에 대해 재를 뿌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지난 3년간 집권여당이 보인 퇴행을 지켜보노라면,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시계추를 멈춰 세우는 것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울며 겨자먹기'로 사태를 관망하기에는 지금의 시점이 너무나 엄중하다. 선거공학에만 빠져 있는 야당의 모습에서 '권력의지'가 읽히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권력의지를 '집권을 향한 열망'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니체가 말했던 '권력의지'는 집권이 아니라 '새로움을 구현하려는 의지'를 말한다. 새로움을 구현하지 못하는 집권 열망은 권력의지가 아니라 권력욕과 다르지 않다. 이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 최악을 저지하기 위해 차악이라도 택하라는 오래된 정치공학적 산물은 아직도 분명히 존재하는 국민들의 열망을 끌어내는 데 한계가 분명하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선거에서,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표가 '다시 2012년 19대 총선 직후 정도'라면, 그래서 기껏해야 19대 국회 기간의 모습들의 반복만이 예상된다면  그래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열정과 에너지가 얼마나 되겠는가?


단지 선거 결과, 의석 수 몇 개에 집착하기보다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시야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엄중한 상황이다. 총선 결과는 단지 의석수 몇 개로 결론 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거대한 사회변화를 이루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느 때보다 실망감이 큰 이번 총선이라 할지라도,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이유다. 


또 하나. 민주주의에서 정치의 주체는 누가 뭐래도 국민이다. 2008년 총선에서 야권의 참혹한 패배 뒤에 이 사회를 조금이나마 긍정적 방향으로 이끈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의 힘이었다. 기성정당에 실망했다고 뒷짐 지고 냉소하고 있을 일은 아니다. 찾아보면, 여전히 국민이 할 일은 많고 그 힘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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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 2번 김종인'에 묻혀버린 사람들

더불어민주당 비례공천 사태에서 소외된 것은 결국 청년비례

오마이뉴스 2016.3.24.

박영민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자원활동가


종단이 정해준 단독후보와 이를 둘러싼 세력다툼, 이전 총장을 지지하는 교직원. 2014년 말부터 시작된 동국대학교의 총장선거 사태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각 이해관계들은 학내의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의 진정성을 교묘히 이용하려 했고 언론은 이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뱉어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끈질기게 행동했다. 40여 일의 고공농성, 2000여 명의 학생들의 총회, 50일의 단식투쟁 등 이미 고인 물이 되어버린 종단과 학교에 맞서 최선을 다했다. 학생들의 진심에 힘입어 동조단식을 결의한 4개의 천막이 생겨나고 학내는 민주주의를 되찾으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지난 2년간의 동국대의 모습은 이번 더불어민주당 비례공천 사태와 어딘가 닮아 있다.



기사 관련 사진

제20대 총선 더민주 공천장 수여 받은 박경미 제20대 국회의원선거를 20일 앞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공천장 수여식에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비례대표 후보 1번을 받은 박경미 홍익대학교 수학교육과 교수에게 공천장을 수여하고 있다. 이날 김 비대위 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해야 현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을 바꿀 수 있다"며 "더불어민주당에게 힘을 몰아 달라"고 호소했다.

ⓒ 유성호



유치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온다. 국민들에게 반감을 사는 후보들을 내세우는 것도 모자라 당헌·당규를 무시하는 행태, 당무정지라는 카드를 들고 나오는 모습까지 무엇 하나 이해하기 어렵다. 어느 일당 체제 독재국가의 선거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자행되는, 더군다나 자신이 진보임을 주장하는 야권에서 발생한 터무니없는 사건이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불합리로 점철된 비례공천을 발표하고 비대위원들이 독불장군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청년비례대표 후보들은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5분 면접', 내정 의혹, 현 의원들의 공천개입 논란 등 수차례의 부당함에도 인내심을 발휘하려 했던 후보들은 홍창선 공천관리위원장의 청년비례후보 폄하발언에 결국 참았던 분노를 표출했다. 


이들은 홍 위원장의 사퇴와 공식사과를 요청하며 수용되지 않을 시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홍 위원장과의 면담을 진행하려 했고, 약속된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들에게 가로 막혀 진입하지 못했다. 언론 또한 논문표절부터 각종 문제 발언, 김 대표가 2번을 받을 것인지, 14번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논란 등에 집중하느라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주지 않았다. 



기사 관련 사진

▲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과 장경태, 정은혜 비례대표 후보가 지난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비례대표 선출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김 의원은 "당헌에 명시되어 있는 청년 비례대표 2명을 명확하게 당선 안정권에 배치해 달라"며 "청년 비례대표 2석을 일반투표를 통해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하는 것은 명백히 당헌 위반이다"고 주장했다.

ⓒ 유성호



김 대표의 번호에 그리도 집착한 비대위원들과 언론은 청년들의 비례대표 번호에는 관심 갖지 않았다. 홀수에 여성을 배치해야 한다는 규약을 무시하면서도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청년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청년후보이자 여성인 16번의 정은혜 부대변인이 이러한 더민주의 생각을 정확히 증명한다. 규약위반을 감수하면서도 당선권 안에 청년을 배치하지 않는 지도부,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는 언론. 선거특수 마냥 '청년팔이'를 이용하려 했던 당 지도부와 언론의 초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힘겹게 싸움을 이어온 동국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청년비례대표 후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그들은 착한 내가 떠나면, 여긴 정말 나쁜 놈만 남아있는 정당이 된다는 말과 함께 지도부가 보여준 부끄러운 모습을 꼭 바꿀 것이라고 다짐했고 스스로에 당당했다. 


다른 공간 속의 똑 닮은 두 가지의 사건은 그들의 지도부만큼이나 우리를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놈이 그놈'하는 식의 염세주의는 나의 미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말 같지도 않은 사안으로 싸우고 있는 기득권의 모습에 우리까지 놀아날 수는 없다. 선거를 결정짓는 사람은 비례대표의 다양성과 상징성을 더럽히는 이들이 아닌 표를 던지는 '우리'다. 


지쳐 버렸다고 말하기엔 희망적인 청년들이 여전히 빛나고 있다. 속보로 쏟아지는 비례공천관련 기사들 속에서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는 우리가 응원해야 할 대상이 누군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회가 진보하려면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정의를 위해, 이 나라, 혹은 민주주의를 위해 진짜로 싸우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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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알파고'에게 맡기시라

민주주의의 후퇴를 야기하는 20대 총선 공천상황

오마이뉴스 2016.3.16.


박영민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자원활동가


청년이 고시에 몰리는 건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가지고 있는 매력 때문만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지와 내가 채점할 수 있는 명확한 답안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붙고 떨어졌는지, 어떤 기준인지,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알 수 없는 기업의 선출 과정에 지쳐 버린 탓도 있다. 16일 서울시의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준비한 더불어민주당 청년비례후보들도 이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식물국회'라는 평이 무색할 정도로 19대 국회의 마지막은 뜨거웠다. 전 국민을 집중 시킨 필리버스터부터 선거구 확정까지, 20대 총선이 다가오는 것을 의식한 정당들의 초조함이 곳곳에 뿌려졌다. 마지막 장식에 박차를 가하느라 정신이 없었는지 20대 총선의 공천 상황은 아비규환이다. 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후보가 결정되지 않은 지역이 많고, 상향식, 개혁을 천명한 초반의 패기와는 다르게 이번 공천과정 역시 '깜깜이 공천'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선거구 확정이 늦어지면서 후보를 결정할 시간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0대 총선의 공천 과정에서 문제가 된 것은 비단 늦은 결정뿐만은 아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상향식 공천을 통해 정치신인을 길러내고, 보다 민주적인 방식으로 후보를 선출할 것을 약속했지만 정작 국민들에게 보여준 모습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과의 마찰이었다. 심지어 살생부, 욕설 파동으로 당내 공천과 관련한 어두운 단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상황도 심각하다. 뚜렷한 방향도 없이 선거 관련 당규의 폐지와 유권해석을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위임하며 '입맛대로 공천'이라는 우려를 샀고, 이해찬을 비롯해 몇몇 후보가 당의 결정에 불복해 탈당까지 감행하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근거와 기준 없는 공천으로 비판받고 있다. 또한 정청래 의원 컷오프와 관련한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박영선 의원과 이철희 전략기획본부장이 공천과정에 개입했다는 논란을 사기도 했다. 


더민주당의 논란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학생 신분의 필자가 보는 더민주당의 청년비례대표 공천상황은 처참하다. 모호한 기준과 각종 특혜 논란과 관련해 합격자 4명 중 2명이 퇴출 및 사퇴로 자리를 떠났고, 2000여 명의 당원이 공천관리위원회 위원 전원 사퇴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성명서를 발표해 이목을 끌었다. 자신 있게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도 여의치 않은 청년정치인들은 차라리 '공천고시'라도 준비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5분 면접'으로 청년정치인들에게 모욕을 준 것과는 상반되게 두 정당은 개혁공천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개혁은 이전 국회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18대 총선 공천에서 한나라당은 현역의원의 39%를 탈락 시켰고 19대의 경우 46%였지만 20대 총선 공천의 경우 14일 기준으로 현역의원의 탈락 비율은 13%에 불과하다. 야당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18대 32%, 19대 37%를 기록했지만 20대 총선은 24%에 머물러 무엇이 개혁이라는 것인지 답답할 따름이다. 힘없는 청년정치인에게 보여준 잔인함과는 달리 '최악의 국회'라 소개되는 19대 국회에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다.  


국민을 대리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후보를 결정짓는 공천이 이러하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계파갈등과 '깜깜이 공천'의 반복이 1978년 단 한명의 후보로 진행된 대통령 선거를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공포감마저 느껴진다. 개혁과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두 거대 정당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잘할 자신이 없다면 물러나야 한다. 발전은 못할 망정 후퇴를 눈앞에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더 이상 그들에게 맡길 수 없다. 차라리 '알파고'에게 맡기시라,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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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나요?"

[토론회] 박근혜 정권의 성격과 시민사회의 대응

민중의 소리 2016.2.1. 이정무 기자



28일 열린 시민사회 활동가들과 참여적 지식인들의 토론회에서 발표를 맡은 이남주(성공회대 중국학과, 정치학) 교수의 발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럼 이제 독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나요? 나치의 쿠데타, 아니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까요?”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의 베를린 풍경을 묘사한 소설의 한 대목이다. 


물론 이 교수가 30년대 독일의 상황과 지금의 한국사회를 1대1로 비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일을 한국으로 바꿔서 “그럼 이제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나요?”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의 성격과 시민사회의 대응 토론회에서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점진 쿠데타(creeping coup d'état)

이 교수는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점진 쿠데타(creeping coup d'état)’로 설명한다. 이 개념은 마치 쿠데타처럼 1987년 이후의 민주적 거버넌스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키지만, 이를 군사정변 대신 선거절차를 통해 정당화하고 있는 정권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다. 

이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노태우-김영삼 정부와 마찬가지로 보수정권이다. 그러나 노태우-김영삼 정부가 1987년 이후의 흐름을 역전시키는 대신 수용 속도를 ‘늦추는’ 역할을 했다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다만 쿠데타처럼 급진적으로 민주적 거버넌스를 중단시킬 수 없으니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질적 전환을 시도한다는 의미다. 

이 교수는 일본이나 독일의 경우처럼 “공동체의 위기의식이 심화되지만 이러한 위기의식을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바꿔낼 수 있다면 이러한 시도는 성공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금 위기를 거론하는 것은 야권만이 아니라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도 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이들 보수진영의 ‘위기’론 뒤에는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roll-back)’ 전략이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지금을 단순히 역주행이나 보수와 진보 사이의 선거를 통한 정권 주고받기의 과정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올해가 역주행이 임계점을 넘어 ‘영구집권’으로 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통합진보당의 강제해산, 민주노총에 대한 소요죄 적용 시도, 국정원의 정치 도구화, 테러방지법 추진 같은 현상을 일회적 해프닝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1987년의 6월항쟁을 통해 정립된 거버넌스가 ‘민주주의’와 이를 제약하는 ‘분단체제’의 타협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설명했다. 1987년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국가운영의 원칙으로 되었지만, 국가보안법처럼 이에 반하는 요소들이 뒷문으로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보수 기득권세력에게 불편하지만 참을 만 했던 이런 ‘예외상태’는 김대중 정부의 남북화해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점차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보수세력내에서는 이들을 ‘종북’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비판자들의 정치적 생존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롤백(roll-back)’ 전략의 첫번째 성과였던 이명박 정부는 그렇기에 노태우-김영삼 정부와는 다른 성격을 띠게된다. 남북관계에 대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태도가 앞선 보수정부들과 다른 것도 당연한 셈이다. 다만 이명박 정부의 롤백 시도는 촛불시위와 2010년 지방선거(천안함 침몰 직후 진행된!)에서의 패배 등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이 교수는 평가했다. 그러나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다시 승리한 보수세력은 그 이후 좀 더 적극적으로 롤백 전략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 - 이제는 점진적 쿠데타라고 부를 - 이라는 주장이다.

무능과 무위:박근혜노믹스의 얼굴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의 성격과 시민사회의 대응 토론회에서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발제하고 있다.ⓒ양지웅 기자



두번째 발표를 맡은 김공회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은 현재 상황을 2007~8년의 위기가 장기화되고 있는 국면으로 분석하면서 박근혜 정부가 “나름대로 목표는 잘 세웠지만, 실제 하는 일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과 ‘무위’를 노동자에게 책임전가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 연구원은 2007년 이후 위기에서 국가의 위기관리 능력은 높아졌지만, 그로인해 위기가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되는 결과를 빚었다고 봤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물론, 자본 역시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이를 책임져야 할 국가도 부채가 쌓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김 연구원은 의도가 무엇이었건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과감한 복지공약을 내건 것은 시대적 흐름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고용률 70% 달성 목표나 ‘미래 먹거리 찾기’ 차원에서 제기된 창조경제론도 그 필요성은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같은 맥락에서 2014년에 나온 ‘통일대박론’ 역시 자본의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 차원에서 이해할만한 것이 된다.


하지만 김 연구원이 제시한 다양한 수치가 최종적으로 보여준 것은 박근혜 정부가 이 모든 목표에서 ‘무능’했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무위)’는 점이었다. 복지정책의 후퇴는 물론 교용률이나 남북교역추이 등이 이런 무능과 무위의 증거다.


대신 박근혜 정부의 일거리가 된 것은 부동산 경기 띄우기였다. 김 연구원은 부동산 경기를 띄워 경기회복의 실마리로 삼겠다는 정책 만큼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면서 “작년의 성장률에 (그나마) 기여한 부문은 민간소비나 설비투자가 아니라 건설투자였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건설투자가 본질적으로 미래에 발생할 투자인 주택소비를 현재를 끌어오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김 연구원은 이를 ‘가불형 성장’이라고 부르면서 이런 ‘가불’ 방식은 반드시 후과를 남기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블랙프라이데이같은 행사로 국민들을 부추겨 내년에 살 스마트폰을 미리 사게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벌써 정부내에서조차 주택의 과잉공급을 우려하는 목소리와 소비절벽의 조짐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좌우에서의 비판도 나와

박근혜 정부의 ‘성격’이라는 다소 낯선 주제에 대한 토론이었던 만큼 반론도 이어졌다.

정한울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원은 “(성격규정과 같은) 큰 그림도 필요하겠지만 박근혜 정부의 행태와 연결된 전략 개념이 더 좋겠다”면서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다음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보수회귀적 아젠다를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 연구원은 “박근혜 정부는 보수회귀적 측면이 있지만 여론을 매우 중시하는 등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 자신의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점진적 쿠데타같은 개념이 과연 필요한가에 대해서도 이견을 제시했다.

왼쪽으로부터의 비판도 있었다. 권영숙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은 “1987년 이후의 ‘현존하는 민주주의’가 정상이고, 지금은 비정상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획복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면서”라면서 “1987년 이후의 민주주의, 나아가 김대중-노무현의 자유주의 정부가 낳은 사회경제적 문제가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을 낳았고 이것이 두 우익 정부의 등장을 만들어낸 이유”라고 꼬집었다.

또 시민사회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는 발표자나 토론자 모두 충분한 의견이 제시되지는 못했다.

다만 김공회 연구원이 ‘최저임금영향률’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면서 “최저임금에 의해 자신의 임금이 정해지는 노동자가 14% 수준이며, 최저임금에 사실상 연동되어 임금인상률이 결정되는 노동자들을 포함하면 최저임금의 영향력은 막강한 수준”이라면서 “내년도 최저임금 결정과 관련해 이번 4월 총선에서 여야의 주요 정치세력으로부터 ‘불가역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제안을 내놓은 것은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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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총선 집담회>


“시민의 삶과 지역 시민사회운동,

그리고 2016년 총선”


■ 일시: 2016.1.12.화 오후3시

■ 장소: 대전광역시 NGO 센터



어느새 2016년 총선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정치심판할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아직 크지 않습니다.

바꿈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나누고자 여러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12일(화)에는 대전광역시 NGO센터에서 서울, 대전, 대구, 광주 등지의 지역 시민사회 인사 30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이번 집담회는 대한민국 공동체 운영의 심각성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각을 공유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해 구상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지지를 부탁 드립니다.



160112_지역사회 총선 집담회_자료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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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지역재단 농협연구교육센터 / 제작: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온라인 서명 바로가기>

<서명제안서, 서명용지>

서명제안서 및 서명용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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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나?"

대통령의 서거와 기록

 

전진한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상임이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그에 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1960~1980년대 30년이 넘는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투쟁과 열망이 언론을 통해 많이 소개되고 있고, 집권 이후 하나회 청산, 금융 실명제 도입, 역사 바로 세우기 등의 성과도 재평가받고 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현재 국정 교과서 도입과 대비되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물론 집권 기간 터졌던 북핵 위기, 외환 위기, 삼풍백화점을 비롯한 각종 참사 등 역사적 과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향후 김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반드시 그가 남겨두었던 대통령 기록을 참고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에 남긴 기록은 현재 대통령기록관에 103294건밖에 없다.(참고로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기간 중 남긴 기록은 755만여 건) 그조차도 대부분 대통령재가기록(결재기록) 및 시청각 기록(사진)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집권 기간 내내 수많은 사건과 의사 결정이 있었음에도 대통령 기록은 기껏해야 10만 건 남짓이다.


물론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존재하지 않아 제도상 체계적 기록 관리 및 보존이 불가능했다. 당시 임기가 끝나면 대부분 기록을 외부로 가져가거나 폐기하는 것이 대다수였다. 지금도 살아있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자발적 기증만 의존할 뿐 객관적으로 당시 상황을 입증할 만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과거를 탓해봐야 무엇하랴. 앞으로 대통령 기록을 남기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기록 관리 및 보존을 법으로 강제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 당사자의 자발성이 없으면 체계적인 기록 생산은 불가능하다. 풍부한 대통령 기록 생산은 후세대에 귀한 자산이 된다. 미국의 개별 대통령 기념관만 보더라도 우리 사회와 큰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 기록을 온전히 남겨도 정치권에 의해 악용당하거나 그 관리자들이 고초를 당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폐기' 논란이다.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과 공용 전자 기록 손상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백종천 전 청와대 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은 지난 1124일 항소심에서 또 다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서 관리 카드에 첨부된 이 사건 회의록을 다듬어 정확하고 완성도가 높은 대화록으로 정리해 달라는 의견을 낸 것뿐이므로 문서 관리 카드와 그에 첨부된 회의록 파일을 공문서로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무죄 취지를 밝혔다. 2013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초 폐기 논란은 불필요한 정쟁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애초 이 사건을 검찰에서 기소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 비약이었다. 우선 모든 공공 기관은 녹취록 초본에 대해 회의 참석자들과 결재권자가 회의록의 발언과 맥락을 검토해 수정하는 절차를 거친다. 최초 초본은 부정확한 부분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정은 필수적이다. 오탈자 및 맥락에 맞는 수정 절차를 거친 뒤 초본은 폐기하고 완성본을 승인된 정식 기록으로 등록하게 된다. 녹음을 했을 경우 원본 파일을 일정 기간 보존하는 것이 보통이다.


노무현 정부 관계자들은 이 과정을 충실히 지켰다. 우선 노 전 대통령이 회의록 초본 파일을 열어 확인한 뒤 '처리 의견'란에 "내용을 한 번 더 다듬어 놓자는 뜻으로 재검토로 합니다"고 명시적으로 기재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는 정확하지 않은 부분을 수정하라는 취지이지 폐기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게다가 녹음 원본은 국가정보원에 보존되어 있어 대통령 기록 폐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 사건의 경우 1심 재판부도 "이 사건 회의록 파일처럼 녹음 자료를 기초로 해서 대화 내용을 녹취한 자료의 경우 최종적인 완성본 이전 단계의 초본들은 독립해 사용될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완성된 파일과 혼동될 우려도 있어 속성상 폐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정리해 초본 폐기의 정당성을 인정해줬다.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녹음 원본과 수정된 회의록을 모두 보존하게 함으로써 당시 회담에서 어떤 발언이 있었는지 우리는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 이조차도 국정원에서 자신들의 필요성에 의해서 공개했지만 말이다.


이 사건을 포함해 체계적인 대통령 기록을 남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모들은 참 많은 고초를 당하고 있다. 후세대를 위해 대통령기록물법을 제정하고 기록을 남긴 것이 오히려 자신의 명예를 훼손하는 무기로 돌아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생생히 보았던 정치인들과 시민들은 기록을 남기면 부관참시를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생생히 얻었다. 역사적으로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전임 대통령 기록을 정치적 목적으로 왜곡하고, 악용한다면 향후 대통령들의 온전한 기록 보존은 기대하기 힘들다. 오히려 민감한 기록은 생산조차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이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 발전의 손해로 돌아올 것이 자명하다. 국민의 알 권리도 기록이 존재할 때 가능하다.


대통령직의 경험은 시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이는 기록으로 남겨져야 하고 그 기록은 우리 후세들을 위해 활용돼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러한 자산을 너무 쉽게 폄훼하고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곤 한다. 향후 대통령들이 자신들이 생산해 놓은 기록으로 평가받고 그 기록이 몸의 핏줄처럼 전국 곳곳에 유유히 흐르는 사회가 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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