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2017 촛불항쟁이 개헌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지에 관해 이론(異論)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보다 민주화된 사회를 바라는 것이 촛불의 정신이었다면, 민주적 요소가 부족한 헌법에 대한 개정의 필요성이 있는 상황에서, 현재 개헌론을 단지 정치권의 셈법이라고 하여 백안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촛불 이후 한국사회의 재구성과 개헌

더구나 사실 현행 헌법은 아무래도 30년이나 된 '헌'법이다 보니,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기도 하다. 다시 말해, 민주화가 요청되는 조항이 많다는 것이다.

우선, 멀게는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유신 체제, 80년 신군부까지 독재정권하에서 마련된 독소조항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헌법 제67조 제2항에서는 대통령 선거 시 동표일 경우에 국회에서 결선투표를 하도록 되어있는데, 이것은 제헌헌법 당시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되었던 간선제 규정을 개헌을 통해 직선제로 바꾸는 과정에서 다소 형식적으로 들어간 조항이다.

또 헌법 제29조 제2항 국가공무원 이중배상 금지 규정의 경우, 박정희 군부통치 시대에 들어간 대표적 독소조항이다. 헌법 제90조에 있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설치 규정도 전두환이 꿈꾸던 이른바 '상왕정치'의 잔재에서 연유한 조항이며, 구성된 적도 없는 기구다. 이러한 잔재는 이번 기회에 일거에 폐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은 헌법 개정이 30년이 지난 만큼, 새롭게 변화한 사회상을 반영하지 못한 조항들에 관한 개정의 필요성이다. 예를 들어 헌법은 '민족문화'를 강조하는데(헌법 9조), 다인종·다문화 국가로 이행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이러한 용법은 대단히 부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 변화상에 따라서 해석에 의해서만 인정되던 기본권을 조문화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정보 기본권의 경우 1987년에는 제기되지 않았던 권리이다.

아울러 제도 설계 당시에는 충분히 숙고하지 못했으나, 30년간의 운영 결과 흠결이 발견된 조항들의 개정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헌법재판소 제도는 1987년 헌법에서 갑자기 부활하였는데, 헌법재판관 임명권자의 문제와 재판관 임기 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쟁점이 되어왔다. 때문에 일정한 조문 정리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이견(異論)이 없는 상황으로 안다.


헌법 개정의 총적 방향에 관하여

문제는 이번 헌법 개정에 관한 논의가 1987년의 '직선제 쟁취'와 같이 단일한 구호로 요약되기는 어렵다는 점에 있다. 정치·사상적 견해에 따라서 '어떤 헌법개정이 필요한가'에 대한 주안점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 현재 가장 관용적이면서 손쉬운 표현은 '촛불정신을 반영한' 개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촛불정신을 반영한' 개헌안이란 무엇일까에 관한 논증과 해석의 싸움이 제기된다.

'촛불정신을 반영한' 개헌에 관한 가장 손쉬운 동의 지반은 시민이 참여하는 개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시민이 참여하는 개헌은 가장 손쉽게 합의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충족하기 어려운 원칙일 듯 하다.

다음으로 논의가 필요한 점이 촛불정신을 반영한 개헌안이란 무엇인지의 문제다. 다소 투박하게 이야기해서 촛불정신을 반영하고, 시민참여형 개헌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맞닿아있는 개헌안이라면 결국은 '민'이 '주'인이 된다는 의미에서 '민-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개헌의 제1원칙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개헌은 현재의 헌법을 민의를 보다 잘 반영할 수 있고, 민주적 통제가 보다 더 확보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헌법으로 고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비록 지금의 헌법도 민주공화국을 선언하고 있지만, 현재보다 더 민주적인 방향으로 헌법 개정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문제의식을 압축하자면 이번 개헌은 '헌법의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다만 그 구체적인 개정방안과 관련해서는 항상 복수의 안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개방적 자세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시민참여형 개헌이 가지는 의미 중 하나는, 개헌 의제의 쟁점에 있어 논의구도를 시민의 힘으로 선점하고 이끌어나가는 작업을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조심스럽지만 다음과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


기본권 중심 개헌이라는 접근의 탈피 

2017년 상반기에 국회의 개헌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아울러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전문가를 중심으로 구성된 개헌특위 자문위원회가 구성돼 있다. 개헌특위는 2개의 소위원회와 6개 분과의 자문위원회로 구성돼 있다. 현재까지 개헌특위의 합의안과 개헌특위 자문위원회의 안이 각기 존재하고 양 안의 의견이 합치되거나 조율된 상황은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흥미로운 것은 개헌특위에서 합의된 내용 가운데 기본권 분야의 비중이 가장 높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개헌특위에서 여야가 합의한 기본권 관련 사항만 60여 가지에 달한다. 반면 총 130조 중에서 국회와 정부, 즉 정부형태와 관련된 60개 조문에 대해서는 개헌특위 내에서 합의된 개정의견이 10여 개에 불과하다.

물론 정부형태에 대한 이견이 극심한 상황에서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그러나 흔히 개헌과 관련하여 기본권 중심의 개헌이 되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담론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과정은 다소 역설적이기도 하다.

물론 기본권 분야에서도 첨예한 논쟁이 될 지점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현재 개헌특위 내부에서만 찬반이 확인된 기본권 관련 사항도 40가지 이상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번에 개헌이 합의된다면 어떤 형태가 되었든 적어도 기본권 부분에서는 1987년 헌법에 비해서는 어느 정도 진전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 면에서 '기본권 중심'이라는 레테르를 상투적으로 사회운동이 사용하는 것이 적합한지 의문이다.


정부형태 논의의 불가피성

흔히 정부형태와 기본권 장외에 다른 영역들은 다소 부수적으로 취급되거나, 종별적으로 취급되어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 영역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개헌의 모든 영역들은 상호연관성이 크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정부형태와 사법, 정부형태와 지방분권, 정부형태와 경제·재정도 모두 연결되어 있다.

사법부 영역에서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가 대표적이다. 현재 헌법상 헌법재판관은 대통령 3인, 국회 3인, 대법원장 3인이 임명하게끔 되어있다. 외관상 중립으로 보이는 행정·입법·사법부의 수장이 각기 임명하지만, 실제로는 여당 측 인사가 7.5인, 야당 측 인사가 1.5인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정치적 다양성이 반영되지 못하고, 헌법재판관을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것이 부적합하다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다. 이러한 제도에 대한 대안으로 국회에게 모두 선출권을 주자는 의견이 강력한데, 결국 이 문제는 정부형태 논의와 연관이 되는 사항이다.

지방분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학계 및 시민운동 일각에서는 강력한 지방분권국가를 위해서 양원제의 도입이 불가피하다는 유력한 견해가 존재한다. 이 역시 정부형태 문제와 강한 연동성을 갖는다.

경제·재정과 관련해 대표적으로 감사원의 조직분리를 주장하는 견해가 상당히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 쟁점 또한 국회와 대통령의 관계에 따른 입장에 비춘 접근이 필요하다.

이렇듯 개헌안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을 수립하는데 있어 정부형태에 관한 논의가 필수적인데, 시민사회운동진영 내부에서 정부형태와 관련된 논의를 금기시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인지 의문이다.


개헌을 통한 정치개혁 - 선거제도 개혁 

정치제도 개혁은 개헌과 강한 연동성을 갖는다. 국회에서 개헌특위 활동 기간 연장을 합의하면서 별도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설치를 합의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비록 대통령 단임제·중임제·이원집정부제·의원내각제와 같은 정부형태와 관련하여, 시민사회의 공통된 의견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더라도 국회 구성에 있어서 비례성이 충분히 반영되는 것에 관해서는 개헌 논의와 동반하여 제기되고 주장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현재의 대통령 등의 권한에 대하여 분권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 찬동하더라도, 민의가 반영되지 못하는 선거제도가 지속된다면 국회의 권한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안으로 이해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비례성을 반영하는 선거제도의 헌법규범화'와 관련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민참여형 개헌과 헌법발안

개헌운동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는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 다만 촛불정신을 반영한 시민참여형 개헌, 그리고 '헌법의 민주화'를 상징할 수 있는 개헌안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직접민주제적 요소'의 확대는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

직접민주제와 관련한 가장 대표적인 제도는 국민소환, 국민발안, 국민투표부의권 등이 거론된다.  필자는 그 중에서도 특히 헌법개정절차에 국민발안의 도입(부활)이 시민참여형 개헌이라는 문제의식에 가장 부합하는 제도라고 생각하며, 이와 관련하여 다소간의 '특권화'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이와 관련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목소리가 부족하다.

다양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있지만 대부분 단체 고유의 영역(여성, 노동, 인권, 환경, 지방분권 등)에 대해서는 헌법개정의 목소리를 높이는 반면에, 개헌에 직접민주제적 요소를 반영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주되게 입장을 내는 단체가 현저히 적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여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연대하여 직접민주제의 요소가 반영될 수 있는 개헌이 되도록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있다고 판단한다.


외면하기보다는 개헌에 적극적인 개입을

개헌이라는 커다란 장이 누군가의 의지만으로 열릴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재 개헌론을 외면하기 보다는 적극적인 개입과 실천을 위한 긴장감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개헌의 장은 단순히 개헌성사여부를 떠나서, 한국사회 이슈전반에 관하여 개헌 국면을 통해서 시민토론과 교육이 재활성화될 수 있는 '광장'으로 이해하고 사회운동이 적극 개입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시민참여 개헌이 단순히 안을 성안하는 작업에 대한 시민의 참여로 이해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헌법 전반에 걸쳐있는 다양한 우리사회의 쟁점을 드러내고 시민들의 토론을 활성화하고 합의를 재구축하는 공론의 장을 형성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의 개입이 가질 수 있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다양한 정치 사상적 견해를 지닌 집단‧계층‧조직 등이 개헌이라는 정치적 광장에서 다양한 토론과 교육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다종다기한 장을 다시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헌정사가 시작된 이래 민의가 오롯이 반영된 개헌이 이뤄진 적이 없다. 어쩌면 이번 개헌도 아쉬움과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갈 수 있는 개헌의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긴장감, 책임감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쪼록 올곧은 개헌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길 소망한다.


시민참여 개헌 플랫폼 바로가기 http://bit.ly/시민개헌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바꿈)이 함께하는

스타트업법률지원단(스법단) 첫 번째 교육 '스타트업 안녕하십니까?' 가 끝났습니다. (짝짝짝)


본 토론회는 사례공유와 상담 위주로 진행되었습니다.

1부는 강연 위주로 진행되었고

2부는 상담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스법단_외부교육1차_자료집_최종.pdf


자료집은 첨부파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blog.beautifulfund.org/26629/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복을 입고 재판에 출석할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정에 사복을 입고 선다면, 그건 굳이 이야기하자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동료 변호사들의 덕이다. 이들이 한 일의 혜택을 박 전 대통령이 보게 됐다는 짓궂은 말에 이석태 변호사(전 4.16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는 웃으며 답했다.

"처음 문제를 제기 한 지 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지만, 민변 동료 변호사들이 재소자 인권 문제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것과 연관이 있어요. 서준식 선생이 1991년 발생한 강기훈 사건과 연관되어 다른 혐의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 미결수도 헌법상 무죄 추정이 적용되므로 사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거죠.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그 이후로 법무부에서 교정 규정을 바꾸어 지금처럼 재소자가 원하는 경우 사복 차림으로 공판정에 출석하게 된 거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변은,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옹호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들이 모인 법률가 단체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민변이 30년 전 6월 민주항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문호를 활짝 연 6월항쟁, 그 이듬해인 1988년 5월 창립된 민변은 사법 제도 민주화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 왔다. 민변의 창립 멤버인 이석태 변호사는 사무국장, 회장직을 역임했다. 


이석태 "6월항쟁은 내 삶의 큰 변화" 

때문에 이 변호사에게 6월항쟁은 "삶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온 사건"이다. 6월항쟁 직후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발전을 요구하는 사회적 흐름에 합류해 왔고, 민변과의 인연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2년간의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1985년 변호사가 되었다. 연수원 시절부터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연수원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연수원 생활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에 가 있었어요. 선배 변호사들을 돕고 하다 보니 연수원 수료 후 그 사무실 변호사가 됐죠." 

이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로펌은 당시 국내외 큰 기업이 고객인 곳이었다. 대학생 시절 "학생 운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신문> 기자였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서 놀았"던 이 변호사에게는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 모른다. 

"소송을 하면 대개 대리하는 당사자가 당시의 대기업일 수밖에 없는데, 제가 보기에는 법리적으로 노동자들의 주장이 옳은 경우가 많았어요. 제 생각이 사무실의 방향이랑 좀 어긋나 있던 거죠." 

이런 일 등으로 생각이 많던 때 6월항쟁이 터졌다. "당시 변호사들도 국민운동 본부 등에 직접 참여해 호헌 철폐 등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저는 보통의 변호사로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어요." 6.10 항쟁 당일에도 거리에 있었던 것 같다고 이 변호사는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제가 일하던 법률 사무소가 당시 남산 초입에 있는 도쿄호텔이라고 부르는 높은 건물 내에 있었어요. 그 건물 8층에 법률 사무소가 있었고, 그 사무소 내에 남대문 시장이 보이는 쪽으로 제 방이 있었죠. 거기서 보면 서울시청까지 보여요. 그 부근에서 매일 시위를 하니까 자연히 구경삼아 들락날락거리게 되고, 그러다가 광장으로 나가게 됐죠. 연세대에서 이한열 군 사망 사건이 터졌을 때(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에 피격돼, 7월 9일 사망)도 시위 대열에 합류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넥타이를 거의 안 매고 살지만, 그때는 늘 넥타이에 정장하고 있을 때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넥타이 부대라고…. 아무튼 자주 나갔어요."

기업을 대리하는 로펌이라면 눈치를 주지는 않았을까. "굳이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나가는 거죠. 당시 그 로펌은 엄금까지는 아니지만, 변호사가 근무 시간에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걸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죠. 그래도 변호사는 좀 자유로우니까요." 6월항쟁의 한 복판에 섰던 이 변호사는 그해 가을, 로펌에서 나왔다.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이 변호사는 민변 전신인 청년변호사회(청변)에 우연히 관여하게 됐다. 대학 동기들이 청변과 이 변호사의 연결고리였다. 

그 무렵 태동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대개 비슷했겠지만, 6월항쟁의 끝에 조직된 청변 또한 학생 운동권의 영향을 다소 받았던 것으로 이 변호사는 기억했다. 

"변호사로서 억울한 사람을 돕는다는 보편적인 측면 외에 변호사일 자체를 사회 운동으로 생각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변호사 부문운동이라고나 할까요. 사회 발전 과정에서 변호사가 기여할 바를 정하고, 그런 일을 다른 부문과 연관 지으면서 해 나가는 거죠. 처음에는 스터디 그룹 유사하게 10여 명의 변호사가 소규모로 같이 공부하면서 여러 방면의 논의를 했어요."

제대로 된 조직을 구성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되자, 당시 주요 시국 사건을 변호하는 선배 변호사들이 만든 단체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와 합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청변이 해소되고 민변이 됐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없는 젊은 변호사들이 선배들로부터 배우고, 또 그 열정을 바탕으로 조직에 활력이 생기게 된 거지요." 

그렇게 민변이 탄생했다. 민변이라는 이름은 조영래 변호사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베어스타운에서 창립모임을 가졌는데, 이름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때 50여 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무슨 협회라든가 하는 식으로 의론이 분분했죠. 대체로 좀 딱딱하고 경직된 이름이 많았는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하니까 뜻이 분명하고 부르기 쉽지 않습니까. 나중에 그 이름을 줄여서 민변으로 하게 된 거지요." 

지금 민변은 회원 수가 1000명이 넘지만, 출범 초기에는 51명에 불과했다. "그 중에 젊은 변호사들이 절반쯤 되려나. 당시에 제가 젊은 변호사 축에서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어서 간사 역할을 했는데, 민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서 일이 많았어요. 그 후 차츰 민변 회원 수가 늘어나면서 일을 분담하게 되었지만, 제 사무실 동료들 또한 민변 회원이어서 이래저래 민변 업무와 관련된 일을 계속하게 됐지요. 그러다보니 민변 회장도 했고, 그 전에는 사무국장도 했어요." 그는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고 하면 되겠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운동권들의 혜택을 보고 있다" 

6월항쟁의 결과 탄생한 민변은 법률 전문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된 영역을 꾸준히 넓혀왔다. 민변 변호사가 헌법 소원을 제기했던 미결수의 수의 착용 문제뿐만 아니라,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 역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재판을 다수 할 때라 법정이나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개선을 요구하게 된 거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 점차 여러 조건들이 나아지게 되었는데, 그 혜택을 우리가 변론한 사람들 외에 다른 피의자나 재소자들이 보게 된 거죠. 예를 들면 변호인 접견권의 보장, 텔레비전 시청이라든가 집필의 편이 등 모두 어느 날 거저 생긴 게 아니고, 일정한 투쟁을 통해 획득해 낸 거예요."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배제시키고자 했던 이들, 이른바 '운동권'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끝끝내 지켜낸 헌법적 가치가 오히려 이들을 단죄하려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권에 까지 이르러 이를 지켜내는 상황(헌법재판소는 탄핵 결정문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서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역설에서 6월항쟁 이후 지난 30년 동안 진척된 민주주의를 새삼 목격하게 된다. 

"불과 20년 전에는 피고인들이 재판정 가운데 서서 수갑이나 오랏줄에 묶여 재판을 받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사와 피고인들의 노력으로 피고인들의 손이나 팔에서 수갑과 오랏줄을 풀게 하고, 자리에 앉히고, 그리고 변호사 옆에 앉게 된 거죠. 말하자면 이게 다 역사가 있는 겁니다. 6월항쟁의 성과가 모든 면에 미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잘못된 구태를 지적하여 고치고, 형사소송법이 바뀌고 해서 지금처럼 어느 면에서는 미국 영화에서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 됐습니다."

이 변호사는 "예전에는 수사 기관에서 피의자가 조사를 받을 때 변호사가 참여를 하지 못했어요. 접견 시에도 교도관 등이 옆에서 듣는데 하기도 했죠"라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 변호사의 말에 박 전 대통령이 변호사와 함께 검찰 조사를 받고, 7시간 동안 조서를 검토했다는 뉴스가 곧바로 떠올랐다. 

"이런 잘못된 제도나 관행이 고쳐진지 불과 10년이 되지 않았어요. 조사가 끝난 후에야 변호사를 따로 만났고, 조사 때는 변호사가 입회를 할 수 없었어요. 조서의 도장도 본인이 혼자 내용을 보고 찍었습니다. 지금은 조사 자리에서 변호사가 다 보고 확인하지요."

이 변호사가 언급한 '변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은 지난 2007년 6월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법률에 명시됐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권리가 법률에 보장된 지 만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역시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 법률의 개정을 이끌어낸 대법원 판결(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을 담당한 김형태 변호사도 청변을 거쳐, 민변의 회원이다. 두 변호사는 함께 법무법인 덕수를 이끌고 있다.

"강기훈 사건, 더 나은 변호사가 실무를 담당했더라면…"

이 변호사는 매향리 미공군 사격장 소음 피해 소송, 동성동본 금혼 폐지와 호주제 폐지 헌법소원, 일본군 '위안부' 헌법 소원 사건 등 각종 사회적 관심이 큰 재판에도 참여했다. 6월항쟁이 "사법부의 독립에도 좋은 영향을 줬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라고 이 변호사는 설명했다.  

1987년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시민사회운동과의 결합 또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성과를 이야기하면서 이 변호사는 계속 "좋은 동료들과 해서 얻어낸 결과"라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저희가 6월항쟁 이후에 민변을 만들었어요. 또 중요한 사회적 의미가 있는 소송들은 변호사 혼자 할 수 없어요.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협력해야 하는데 그게 컸죠. 일례를 들면, 호주제 폐지문제는 초기에 변호사들이 기획했지만, 여성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계속 진행 해 나가면서 점점 더 많은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얻어서 된 거예요. 이들 시민사회 단체는 대개 6월항쟁의 산물이었죠." 

하지만 6월항쟁은 군사 독재 세력인 노태우 씨에게 대통령 자리를 또다시 내어 주며 미완의 혁명으로 종료됐다. 그 한계는 여기저기에 상흔으로 남았다. 이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30년의 변호사 활동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묻자, 그는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1991년)을 꼽았다. 6월항쟁 이후에도 교체해내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의 연장, 노태우 정권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강기훈 씨가 누명을 벗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4년. 지난 2015년 열린 재심 공판에서 대법원은 강기훈 씨에게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이 변호사는 20여 년 동안 변호인단의 일부로 강 씨의 변호를 맡았다.  

"글쎄… 결국 본인은 늦게나마 무죄를 받아서 다행이긴 한데요, 비록 노태우 정권 하라고 해도, 제가 조금 더 경험이 있고 주도면밀했더라면 초기 재판 당시 무죄를 받지 않았을까, 강기훈씨의 억울함을 좀 더 일찍 덜어드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제 역할이 당시 변론을 이끈 작고한 김창국 변호사님과 박연철 변호사님을 도와 실무적인 일을 하는데 있었지만요." 

이 변호사와 강기훈 씨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도, 이 사건을 조작해 낸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주임검사였던 신상규 씨와 검사 안종택 씨는 모두 검사장을 지냈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기춘 씨는 국회의원과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당연히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다. 국가와 당시 주임검사 신상규 씨, 강 씨의 필적을 감정한 김형영 씨 등을 대상으로 한 민사 소송만이 진행 중이다. 이 변호사는 "국가 책임, 김형영 씨 본인의 책임은 물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검사들 책임은 어떨지…"라고 말했다. 형사상 책임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묻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거짓을 만들어 내고, 책임지지 않는 김기춘과 같은 권력들은 그렇게 적폐로 쌓였다. 그리고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던 2014년, 세월호에 과적된 적폐는 결국 참사로 이어졌다. 

지난해 9월 박근혜 정부에 의해 강제 종료된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 위원장을 맡았던 이 변호사는 이 대형 비극을 어떻게 봤을까. 이 변호사는 일본에서 중고 배를 수입해온 때부터 해운 관련 규제 완화 그리고 구조 과정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제들을 단계별로 지적했다. 그리고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실 문제를 지적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사 당일 오전에 뭘 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오후에는 머리를 하고, 세월호가 이미 다 가라앉은 뒤인 오후 5시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갔습니다. 총체적으로 재난을 예방하고 참사 발생 시 구조해야 할 국가 재난 관련 기구가 부실한 겁니다.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 거고요."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이 변호사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다행히도 무너진 신뢰가 회복되는 모습이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서였다. "변호사로서 종종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과 협력해서 일을 해온 저는 대규모 집회 때는 사실 좀 걱정이 있어요. 저러다가 혹 폭행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대의에 손상이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보니 촛불집회 초기 시민들이 경찰 버스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서로 자제하고, 오히려 차벽에 꽃이나 재미난 내용이 들어 있는 스티커를 붙여 평화적인 집회를 유도하더니, 나중에는 스티커 등을 떼 말끔하게 하는 등, 저 스스로 이번 촛불 집회는 참여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고 공부가 됐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맨 앞에서 집회를 이끌었지요. 때문에 저는 이번 촛불 집회로 박근혜 정부 4년을 지나면서 어려움에 처했던 우리 사회의 민주적 시민 의식이 커다란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 변호사는 "만약 6월항쟁 같은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현재 진행형인 6월항쟁의 의미를 설명했다. "더 이상 독재로 회귀하거나 국민들의 민주적 바람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죠. 촛불은 보다 발전된 형태에요."

6월항쟁의 미래가 촛불집회로 나타났다면, 2017년 촛불집회는 어떤 모습으로 평가해야 할까. 촛불을 들고 나선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까. 난해한 질문에 이 변호사는 웃었다. 

"우선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을 겪으면서 기초가 손상된 사회 정의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가 하고 있는 일을 민주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해나가야 하겠지요. 그리고 공화국 헌법 1조, 국민 자신이 주권자라는 것을 늘 자각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정부가 잘못할 때에는 자기 스스로 먼저, 그리고 동료들과 연대해서 나서고 외쳐야 할 준비를 위해서 말이지요."

이 변호사의 답변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과 무척 흡사해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대를 강조한 이 변호사와 잘 어울리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의 사무실 입구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故 신영복 선생님께서 써 주신 문구 '함께 하는 삶'이 적혀 있었다.



 >>원문보기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6349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은 지난 10일 박근혜 대통령의 범죄행위를 중요한 것만 정리해 7가지 협의를 제시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는 ①'군사기밀 누설죄'(법정형 1년 이상의 징역), ② '외교상기밀 누설죄'(법정형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 ③ '공무상비밀 누설죄' (법정형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 ④ '대통령기록물 무단 유출죄'(법정형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 ⑤ '제3자 뇌물제공죄' (법정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 ⑥ CJ그룹 압력 행사에 따른 '직권남용죄'(법정형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 '강요죄'(법정형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죄'(법정형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 ⑦ 차은택의 '광고대행사 포레카 강탈 시도 혐의'에 박 대통령이 광고사 인수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한 부분에 따른 직권남용죄, 강요죄,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죄이다.


이어 민변은 지난 14일, 박 대통령의 범죄 혐의를 밝히기 위한 7대 수사원칙을 밝혔다.


① 피의자 신문

민변은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을 중대범죄 혐의 사건으로 정식 입건한 뒤, 참고인인 아닌 피의자 신분으로 특정한 후 피의자신문절차를 개시할 것을 촉구했다. 이미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인만큼 진실규명을 위한 수사를 위해 박 대통령 퇴진이 전제되어야 한다고도 밝혔다.


② 박 대통령과 관련자들의 대질신문

민변은 구속된 안종범이 뇌물수수행위에 관한 '대통령 지시'를 얘기하고, 정호성도 문건의 유출이 '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임을 진술하고 있으며, 문화산업을 돈벌이 수단으로 변질시키기 위한 문체부 인사 관여에 대해서도 '대통령 지시' 언급이 있는 이상, 안종범, 정호성, 차은택, 최순실 등에 대한 대질신문을 철저하게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③ 영상녹화를 위한 소환조사

민변은 대질신문 조사가 필수적인 이 사건에서 서면조사와 청와대 방문조사는 불가하다고 밝혔다. 대신 소환조사를 촉구하며 모든 조사과정을 영상으로 녹화하고 기록하여 한 점의 의혹도 남기지 말아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장소 역시 현재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외에 다른 대안은 반대했다.


④ 범죄지에 대한 압수수색과 현장조사

또한 민변은 청와대 압수숙색을 촉구했다. 실제 언론은 태블릿PC와 전 민정수석 김영한의 비망록까지 확보한 반면 검찰은 뒷북수사로 인해 미르, K스포츠재단, 전경련, 삼성을 압수수색하고서도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우병우 휴대전화에서조차 필요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민변은 청와대 집무실, 부속실 할 것 없이 범죄지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수수색 재개 및 현장조사를 촉구했다.


⑤ 재벌총수와의 독대에 대한 수사

재벌총수와 대통령의 독대가 몇 차례에 걸쳐 있었으니, 각 시기별로 서로의 요구사항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대통령의 모든 국법상 행위가 문서로써 행해져야 한다는 헌법 제82조에 반하여 이루어진 독대가 아닌지,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 부서 관련 책임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⑥ 추가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수사

민변은 '현재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 대하여는 개인비리에 관해서만 초점을 맞춘 수사가 진행되고 있으나, 이른바 '비선실세 정윤회 문건유출 사건' 당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직권을 남용하고, 직무를 유기한 의혹이 드러나고 있다. 또 최순실과 그의 딸을 위해 부역했던 문체부 차관 김종과 정경유착 고리의 핵심을 자처했던 전경련 부회장 이승철. 이들은 국회에서 위증까지 했음에도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고 밝혔다. 이에따라 민변은 이들에 대한 구속수사를 촉구했다.


⑦ 남김 없는 여죄 수사

이외에도 민변은 국정원 여론조작행위 의혹, 어버이연합 등 관제데모 자금지원행위를 전경련에 요청한 의혹, 세월호 7시간 동안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한 의혹, 공영방송을 어용방송으로 개편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의혹, 독일 수사기관이 먼저 개시한 최순실 자금세탁혐의와의 연관성 의혹, 평창 동계올릭픽 이권개입 의혹, 사드배치 등 방산비리 의혹 등 대내외적으로 제기된 수 많은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 역시 촉구했다.


>> 본 카드뉴스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성명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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