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 있는 사람들

2011년의 일이다. 수능을 치고, 가, 나, 다군으로 나누어 지망하는 대학과 학과에 지원서를 썼다. 어느 학과를 지원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 중에는 지금 재학중인 북한학과가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지원한 학교와 학과들을 메모해두셨다. 그런데 다른 학교와 학과는 그 이름 그대로 적어두시고는, 유독 북한학과에 대해서만 ‘북-’이라고 표기해놓으셨다. ‘북-’. 아버지가 나의 지망 학과를 메모하던 그 순간에 북한학과는 왜 ‘북-’이되었을까. ‘북-’은 뭘 의미하는 걸까. ‘북-’은 도대체 뭘까.

북한학도로 약 5년을 보내면서, ‘북-’의 정체가 조금씩 밝혀졌다. 북한학과 단체티를 입고 버스에 타면, 심심찮게 사람들의 시선이 등 뒤로 쏠린다. 자세히 보기 위해 가방을 들추어보는 분들도 계신다. 단체티를 입고 거리를 걸을 때, 누군가 뒤에서 “김대(김일성종합대학)다니세요?”하는 해괴한 질문을 한 일도 있었다. 한 선배는 지하철에서 전공 서적을 읽다가 웬 할아버지에게 젊은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고 등짝을 맞았다고 하며, 학과 학우가 전공 과제를 하기 위해 인터넷을 사용하다 사이버수사대에 덜미가 잡혀 경찰서에 출두되었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들려왔다.

같은 학교의 학우들도 북한학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 학교에 그런 과가 있어요?”하고 놀라며, “그 학과에서는 뭐 배워요?”하고 물어온다. ‘뭐 배워요’가 정말 무엇을 배우는지에 대한 궁금증만을 함축한 의문은 아닐 것이다. 이설주가 누군지 아느냐는 둥, 장성택이 왜 죽었냐는 둥, 북한에 핵무기가 몇 개냐는 둥의 질문은 애교다. 조금 친해진 사람들은 친밀함이라는 관계성 뒤에 살짝 숨어서는 “북한 추종하고 그래?”, “위험한거 아냐?”, “빨갱이학과야?”하고 물어온다.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 내가 북한학과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 간부와 선임들은 ‘북괴학과’라고 말하며 깔깔거렸다. 인터넷에 북한 관련 글을 몇 번 기고한 적이 있는데, 댓글은 정말 가관이었다. 시민으로서 나의 존재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부모님까지 들먹여졌다. 악플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편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꽤 많이 받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꽤 많이 받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이것이 ‘북-’의 정체였다. 그건 다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북-’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만연한 적대감, 총체적 무지, 사회적 배타성, 그러면서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두는 묘한-韓-친밀감, 필연적인 운명공동체 의식, 궁금증 따위의 것들이 온데 뒤섞여있는 복잡한 무언가. 나보다 인생을 훨씬 오래 사셨던 아버지는 ‘북-’의 정체를 나보다 훨씬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북한학과를 ‘북-’이라고 기입한 아버지의 표현은 그야말로 정확했다. 때때로 누군가 나에게 학과를 물어오면,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한번쯤 머릿속으로 굴린다. ‘북-’.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 또한, 아마도 ‘북-’에 대해 마냥 심심한 반응을 보이진 않을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니까 나는, 말하자면 북한학과라기보단 ‘북-’에 있는 사람이다.

“온 나라가 최순실이니 뭐니 하면서 시끄러운데, 당장 우리 앞에 있는 건 저거라고, 저거.”

안보견학차 강원도 철원에 들렀을 때다. 날은 추웠고, 분단 한반도의 최전선이라는 것을 시위하듯 호국훈련이 한창이었다. 철원에 들어서면서 가장 처음 본 모습은 군인들은 도로에 벌벌떨며 서서 차량운행을 통제하고있던 모습이었다. 자주포들과 병력을 실은 군용 차량들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신철원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고석정으로 이동하는 길, 앞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군용 트럭 ‘두돈반’ 을 보며 택시기사는 푸념하듯 내뱉었다. 철원평야 저 편에서는 쾅, 쾅 포탄소리가 울렸다.

그해에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철원의 군대에서는 지뢰폭발 사고가 있었다. 지뢰를 밟은 병사는 다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마 그것은, 휴전국에서 태어난 죄일 것이다. 아이들이 멋모르고 지뢰를 발로 걷어차다가 목숨을 잃거나 하는 일은 전방지역에는 비일비재하다. 전쟁이 끝나고 60년도 더 되는 세월이 흘렀으나, 변한 것은 크게 없다. “우리 앞에 있는 건 저거라고.” 그게 단순히 철원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안보관광을 하는 길에 관광안내사는 힘주어 강조했다. “애국심으로, 나라를 지켜낸 어르신들에게는 감사를, 나라를 이끌어갈 세대에게는 격려를 주어야 합니다.” 나라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땅덩어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뿐인가, 관광안내사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던 나로서는 그런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에 가서 설명을 들은 후, 내가 북한학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안 군인은 내게 질문이 없냐고 물었다. 북한학과라면 더 많은 질문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게 생각했던 군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이 조그만 전망대에서 질문이랍시고 할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북한학과라는 이유만으로 말을 걸어주었음에 고마워하면서, 앞에 있는 강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했다. “저 강에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을까요?” 군인은 ‘아니’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북한이나 통일, 혹은 분단에 대해 보다 심화된 사유를 기대한다. 누군가는 투철한 안보관을, 누군가는 깊은 평화관을 기대한다. 단순히 북한학과에 있는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탈북민 관련 단체에서 일을 하거나, 북한 관련 연구소나 부서에서 근무하거나, 여하튼 북한이나 통일과 관련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 ‘북한에 대한 만연한 적대감, 총체적 무지, 사회적 배타성, 그러면서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두는 묘한-韓-친밀감, 필연적인 운명공동체 의식, 궁금증 따위의 것들이 온데 뒤섞여있는 복잡한 무언가’에 항시적으로 부딪치는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힘쓸 것이고, 누군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단순히 ‘북-’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요구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그 누구라도, ‘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 많이, 더 자주 요구되거나 그렇지 않을 뿐, 누구나 북한이나 통일에 대해 특정한 사유를 요구받고 있다.

2015년 말 국정교과서 논란이 한창일 당시, 새누리당 당사 앞에는 “우리 아이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는 문구의 현수막이 걸렸다. 나는 그 현수막을 보자마자 대번에 칼럼을 하나 써서 인터넷에 기고했다. 주체사상을 배운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현실은 부당하며, 오히려 그런 현실 자체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체사상을 배운다는 사실을, 마치 주체사상을 내면화하고 믿기 시작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북한에 대한 적대감의 지나친 발현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라는 말도 북한 앞에서는 무용하기 짝이 없다. 주체사상을 배운다는 식으로 여론을 조장하는 것은 전혀 이성적이지 못하다. 반응은 꽤나 뜨거웠다. 물론, 악플도 많이 달렸다.

“우리 아이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우고 있습니다”는 문구는,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그 누구라도 주체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현실을 명확히 인지한 가운데 만들어진 문구다. 그러한 현실을 당리당략에 맞게 악용한 것이다. 흔히 ‘북풍’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리 사회 정치의 풍토는, 그 효과가 무척이나 확실하므로 지금껏 끈질기게 살아남아있다. 

어떻게 보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나서 시작된 박근혜 퇴진 시위 초기에 평화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던 것도 ‘북-’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평화롭지 못하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은, 시위 현장에서 경찰 버스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향해 던져졌던 ‘프락치’라는 말이다. 프락치의 의미가 ‘전문시위꾼’, ‘선동가’, ‘폭력주의자’, ‘종북세력’ 등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은 구태여 자세히 짚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초 북풍은 북한이라는 존재의 위험성을 각인시킴으로써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이른바 ‘안보위기 결집효과’를 극대화하고, 동시에 반대세력을 흔들기 위한 보수 기득권층의 전략이었다. 1997년의 총풍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북풍은 주도하는 자가 뚜렷했던 전략이었다. 그러나 북풍은 점차 전략을 넘어, 온 나라를 휘감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구조처럼 굳어지고 있다.

탄핵 소추안이 기각되고 난 후, 헌법재판소에서 진행되는 탄핵심판에서 박근혜는 또 한 번 북풍을 이용하고자 했다. 탄핵심판에서 박근혜의 대변인인 서석구 변호사는 촛불집회에서 불린 노래의 작곡가가 김일성 찬양 노래를 만든 전력이 있다며, 촛불집회는 민심이 아니라고 말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의 대항마였던 문재인을 향해, 북한에 의견을 물었던 종북주의자라는 식의 주장이 나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자 몇몇 언론들은 박근혜가 2005년에 김정일에게 썼던 편지를 공개했다. 김정일을 ‘위원장님’이라고 부르거나, 남북이 아닌 ‘북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위원장님의 건강을 기원’하는 박근혜를 소개함으로써 북풍의 방향을 오히려 박근혜에게 돌리고자 했다.

북풍을 박근혜에게 돌리고자 했던 현실은 무척이나 불편하다. 북풍이 단순히 북한이라는 존재의 위험성에 대해 경각심을 고취하는 수준을 넘어, 어떤 형태로든 북한과 관련되거나 북한에 친밀감을 표하는 행위를 경계하는 수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그 어떤 평화적 사유와 행위도 배척된다면, 평화통일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헌법마저도 경계대상이 된다. ‘북-’에서 살아가는 나와, 나와 같은 사람들과, 한반도 남쪽의 모든 시민들은 분단의 옭아맴 속에서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의 남성들이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2년을 군대에서 보내야 한다거나, 여성들이 군대에 가지 않는다는 치졸한 이유로 차별을 당하거나, 전방의 주민들이 지뢰사고를 당한다거나, 남북관계가 악화되어 북한이 동해와 서해 어업권을 중국에 팔아넘겨 우리나라 어민들이 어획에 피해를 입었다거나, 그 결과 꽃게나 오징어의 가격이 폭등하거나, 개성공단이 폐쇄되어 한동안 교복 공급량이 수요량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교복 대란이 있었다거나, 하다못해 북한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는 사실이 있다거나, 하는 현실보다 더욱 심각한 현실이 닥치고 있다. 북한학과를 ‘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더욱 가혹해졌다는 것, 과거에는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다양한 주장과 실험을 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그조차도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는 것, 이제는 ‘북-’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들조차 배척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분단은 강하다. 그러므로 분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은 더욱 강해야한다. ‘북-’에 있는 사람들은 그 이념과 사상은 달랐을지언정, 분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그러나 북풍이 거세지는 오늘날에는 노력의 스펙트럼이 상당부분 소실되고 있다. 이래서는 평화적으로 분단을 넘어서는 일은 점차 불가능에 가까워지기만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분단은 강하다. 그러므로 분단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은 더욱 강해야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의 범위를 우리 손으로 제한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여전히 ‘북-’의 한가운데 선 채로, 언젠가 ‘북-’이 아니라 평화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순간을 꿈꿔본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서는 청년네트워크 2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부터 시작해 현재 약 5개월째 진행중입니다.

우리 사회 각 의제별로 10개 분과를 만들어 토론하고 논의하고 있으며
그 결과를 빠띠에 올려 온라인 소통도 하고있습니다.

또한 그 내용을 바탕으로 다양한 카드뉴스와 칼럼, 인터뷰를 내고 있고
다음 스토리펀딩 카카오 같이가치 펀딩도 진행중이랍니다.

이제 막 반환점을 돈 바꿈 청년네트활동을 소개합니다!

자세히보기 : https://sway.com/MBTFnjWIdMRURI7r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최유진 더불어민주당 뉴파티위원회 위원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54.5세 국회의원은 '헬조선' 못 바꾼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서른>에 나오는 주인공 수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읊조린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수인이 이미 겪어본 아이들의 미래는 이렇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은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다니기가 버거울 것이다. 졸업 후에도 빠듯한 살림살이가 이어질 것이고, 고수익 보장이라는 말에 속아 다단계 조직에 발을 들여 놓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살갑게 지내던 누군가를 그 지옥에 불러들여야 할 때도 있고, 나를 대신한 그이가 불어난 빚과 망가진 인간관계에 시달리다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십년간 자취방을 여섯 번이나 옮겨 다니게 될 테지만 제대로 된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십 대의 젊은 소설가가 그려놓은 대한민국 청년의 삶이 이렇다. 교육, 주거, 취업, 인간관계까지 한 편의 짧은 소설에 청년의 삶 면면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고 여기, 소설이 채 말하지 않은 청년 이야기를 풀어 놓는 이가 있다. 최유진 위원이다. 김애란의 소설에 그의 이야기를 더하면 대한민국 청년의 서글픈 초상이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더불어민주당 뉴파티위원회 위원으로 있는 그가 집중해서 활동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소설에는 쓰이지 않은 청년정치이기 때문이다.


"아이들한테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희망이 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너무 미안하고... 또 한편으론 화도 나요. 사람이 어떤 기회를 얻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 발전도 하는 거고 새로운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건데, 지금 청년세대는 삶에 대한 새로운 기회조차 못 잡고 있는 게 현실이죠."



<서른>을 쓴 소설가와 최유진 위원은 아마도 일면식이 없을 테지만 그 둘이 공유하고 있는 감수성이 퍽 닮았다. 문학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가 갖는 온도차는 있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당사자들의 비슷한 체험이 문학과 정치라는 각자의 그릇에 담겨 있는 셈이다.


"청년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로 취급받고 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헬조선, 흙수저, 노답사회 이런 표현 자체가 청년들이 불공정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끊긴 상태인 거죠. 정당별로 청년 정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실제 청년들이 가져갈 수 있는 파이를 나눠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청년들도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한국 정치에서는 그런 시스템이 없어요. 캐나다에서 40대 총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0대, 20대부터 정치적 경험을 쌓게 하고 사람을 길러내는 인재 육성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 정치권처럼 선거철 보여주기 식으로 청년을 호명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죠."


우리나라 총 인구 중 20,30대의 비율은 30%다. 그러나 20,30대의 당사자성을 갖고 있는 19대 국회의원은 단 4명뿐이다. 쉽게 말해 20,30대 연령의 국회의원 수가 겨우 4명이라는 거다. (그나마도 20대 국회의원의 수는 0명이다) 19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이 54.5세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현재 국회가 세대의 다양성을 대변하는데 얼마나 허술한지 알 수 있다. 청년정치가 부재한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노인관련 법안은 청년에게 혜택을 주는 법안의 4배에 달하고, 현행 정치자금법에서는 청년세대를 위한 예산의 정도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청년들의 투표율이 낮다고 하는데, 지역정치, 지역구 선거 자체가 현재 청년들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아요. 대부분의 청년들은 자기가 나고 자란 지역을 떠나 원룸에서 살고 고시원에서 살아요.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착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걸 아는 정치인들은 공보물을 원룸촌, 고시촌 이런 곳엔 보내지 않아요. 청년 투표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거죠.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엘리트 위주의 정치로 일관해 오던 기득권 정치가 바뀌지 않고 제론토크라시, 노인 정치가 계속된다면 인구절벽을 앞둔 한국은 더 이상 성장하거나 발전하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어요. 청년을 포함해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이 정치에 뛰어들어 변화의 에너지를 만들어야 미래를 꿈꿀 수 있죠."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부정한 힘을 알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면 이런 과정을 타고 흐를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 정치는 유용하며 직접적이다. 정치가 발휘되는 방향에 따라 당장 우리의 일상생활부터 달라지기 마련이다. 최유진 위원은 왜 우리 삶을 바꿔 줄 희망의 씨앗을 정치에서 찾고 있을까?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하고 조형물 작품을 냈던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오히려 앞에 것, 유용하지 않은 예술을 써먹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말이다.


"대학 1학년 때 하반신이 마비가 되는 사고가 있었어요. 전쟁기념관에 있는 기념탑을 만들다 떨어졌는데 마비의 원인을 찾지 못해서 두 달을 천장만 보고 있었거든요. 그때 누구나 장애가 생길 수 있고 누구든지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어요. 그리고 평생 누워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제야 이 사회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없는 곳인지 알게 됐어요."


제주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최 위원은 서울에 있는 예술고에 입학했다. 제주도에서 왔다는 이유로 이름 대신 '제주도'로 불렸고 같은 이유로 왕따와 구타를 당했다. 해녀의 숨비소리를 들으며 맨발로 뛰놀던 아름다운 추억이 주류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청소년기의 상처와 대학에서의 사고는 미술가의 길을 걸으려 했던 그를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극도의 입시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를 환영할 수 없었고 하반신 마비의 환자와 더불어 살아갈 여유가 이 사회엔 없었다.


원인 모를 하반신 마비는 척추신경에 박혀 있던 작은 뼛조각이 문제였다. 치료 후 두 다리로 땅을 다시 디뎠을 때 그에게 아낄 몸 같은 건 없었다. 다양한 사회문제에 몸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학내에서는 등록금 투쟁에 앞장섰고 서울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를 조직해 친일 인명사전도 만들었다. 진보정당에 들어가 사회진보 운동도 열심히 했다. 2009년엔 다큐 <오체투지 다이어리> 공동 연출도 맡았다. 그가 스물아홉 살이었던 해였다.


"오체투지는 신체의 다섯 군데를 바닥에 닿게 하는 가장 낮고 겸손한 수행이에요. 2008년, 사회적 약자들이 더욱 열악한 조건에 내몰리고 민주주의의 후퇴가 우려되던 상황이었는데, 문규현, 정종훈 신부님과 수경스님이 사람과 생명, 평화의 길을 찾는 순례를 떠난다기에 카메라 촬영법을 급히 배워 수행단에 합류했어요. 순례를 기록하기 위해 참여하긴 했지만 당시 제 개인적으로 자기반성도 필요했고 새로운 시작점을 찾아야 했을 시기라 저 역시 수행한다는 심정으로 동행했어요."


이십대 초부터 다양한 정치사회운동에 참여해오며 나름 잔뼈가 굵어졌을 시기에 관성적으로 사회문제를 보고 접근하려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고 있던 진보운동은 점점 힘들어졌고 스스로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최 위원이 선택한 것이 오체투지 순례길이다. 고생스러웠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단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느라 빚도 좀 생겼다.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작품이 제2회 DMZ다큐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의미를 남겼다. 상금도 받았는데 빚 갚는데 고스란히 쓰였다고 한다. 


상도 상이지만 그에게 <오체투지 다이어리>가 남긴 의미는 사실 따로 있다. 약자의 외침을 대신해 고행하는 수행자들 곁에 소박하게, 더러는 아프게 살아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들이 울고 웃으며 풀어놓는 사는 이야기를 가까이 들으며 최 위원은 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사회와 저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야말로 좋은 사회와 좋은 정치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치에 있어서 당사자들의 직접참여는 최 위원이 인터뷰 내내 강조하던 내용이기도 하다.


"제가 작업해오던 공공 설치 미술은 다른 미술보다는 생활에 밀접한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예술을 통해 절박한 현실을 직접 바꾸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죠. 정치는 직접적이에요.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가 정치에 달려 있고, 우리가 처한 답답한 현실을 우리 손으로 직접 풀 수 있는 수단이 정치이기 때문에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청년뿐만 아니라 다양한 당사자들이 정당 안으로 들어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김애란의 <서른>을 읽는다. 


도시에 어둠이 내리면 아파트마다 회사 로고를 본뜬 네온등에 불을 밝힌다. 손잡이도 없는 작은 창 너머로 세기의 문장(紋章)처럼 박혀있는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수인은 그가 살고 있는 이 방이 공간이나 장소가 아닌 어디론가 계속 이동 중인 물체처럼 느껴진다. 창밖의 세계와는 같은 시공을 공유할 수 없는 채로, 묵직한 가속도를 내며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우주선처럼 말이다. 


"청년정치는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미래가치를 스스로 찾고,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죠. 끊임없이 경쟁만을 쫓기듯 하게 만드는 불공정한 룰을 깨고 다수의 청년들을 패배자로 만드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면 해요. 그런 움직임 속에서 제 역할이 있다면, 많은 청년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진입로는 만드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송곳이 낸 작은 구멍이 나중에 큰 물길을 트듯이 제가 그 작은 구멍을 내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청년들이 허공에서 보내는 타전은 땅에 채 닿기도 전에 희미해지고, 그들이 타고 있는 우주선은 방향을 잃은 채 자꾸만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다. 청년이 정치적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청년들의 고독한 우주선은 더 많이, 더 멀리, 더 빨리 지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청년정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최유진 위원이지만 그의 열정만으로는 저 많은 우주선을 다시 지구로 회귀시키는 건 아마도 불가능 할 것이다. 


최유진 위원에게 청년문제의 모든 짐을 지워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청년 정치인이 귀한 이 시대에 그가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희망이 있다는 말로 대신하고도 싶지만 아무래도 희망이란 단어는 익숙하지 않아 차마 못쓰겠다. 그러나 그도 말했듯 작은 구멍을 낸다고 했다. 최유진 위원이 낸 구멍이 비록 송곳만큼의 크기라도 그것은 메시지가 수신되고 발신되는 소통의 창구가 될 것이고, 그 길을 따라 청년들의 우주선이 다시금 지구별에 착륙하는 날도 올지 모르겠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애쓰고 있는 아이들이 결국 서른 살 수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서늘한 예감은 허공에 날려 버린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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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정치 집담회>


“대한민국 청년정치의 현실과 그 역할”


■ 일시: 2016.1.20.수 오후4시

■ 장소: 창비서교빌딩 2층 회의실



어느새 2016년 총선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정치를 심판할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아직 크지 않습니다.

바꿈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나누고자 여러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20일(수)에는 청년정치인, 청년단체 소속 청년들 25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이번 집담회에서는 청년정치가 실종된 대한민국 정치현실 속에서 그 이유를 분석하고

청년이 정치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 어떠한 변화가 필요한지 논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 정치상황에서 청년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지지를 부탁 드립니다.



160120_청년정치 집담회_자료집.pdf




○ 사회: 안희철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

○ 발제: 장경태 (더민주 서울시당 대변인 / 매니페스토 청년협동조합)

성치훈((사)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 한국청년유권자연맹)

최유진(청년클릭/비례대표제포럼)

곽현욱(청년들이만들어가는새로운정치 청새치)


○ 초청단체: 내사랑전북청년포럼, 대한민국효녀연합, 매니페스토 청년협동조합, (사)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정의당 미래정치센터, 청년 주빌리, 청년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정치 청새치, 청년유니온, 청년클릭, 한국유권자연

○ 후원단체: 세교연구소, 세상나눔, 6월민주포럼

○ 지원단체: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사진 촬영해주신 곽현욱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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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 총선 집담회>


“시민의 삶과 지역 시민사회운동,

그리고 2016년 총선”


■ 일시: 2016.1.12.화 오후3시

■ 장소: 대전광역시 NGO 센터



어느새 2016년 총선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무능한 정치심판할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아직 크지 않습니다.

바꿈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나누고자 여러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12일(화)에는 대전광역시 NGO센터에서 서울, 대전, 대구, 광주 등지의 지역 시민사회 인사 30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이번 집담회는 대한민국 공동체 운영의 심각성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각을 공유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해 구상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지지를 부탁 드립니다.



160112_지역사회 총선 집담회_자료집.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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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가야금 싱어송라이터 정민아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 & 오민정 사진작가

"삼풍 무너져도 정부 책임 생각 안 했죠"


가을밤이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낯을 익히다 어느덧 불콰해진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던 밤이 있었다. 사랑방을 자처하며 오합지졸들을 끌어 모은 집주인은 묵혀둔 동치미 독 헐 듯 냉장고를 헐어 자꾸만 음식을 내왔고 밤도 좋고 술도 좋고 인심도 좋은 시간이었다. 막차 시간이 코앞이라는 사실 말고는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시간을 재고 있던 내가 적당한 때를 보고 일어서자 집주인이 덜컥 팔을 잡아끌었다. 진짜 보고 가야 할 사람이 아직 안 왔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시냐는 물음에 사랑방 주인장이 답했다. "일단 한번 만나봐."


나는 그날 막차를 놓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사랑방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놀고도 흥이 가시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홀로 낄낄거렸다. 악기가 사람을 닮은 것인지, 사람이 악기를 닮은 것인지 여운을 길게 남기는 것이 나타난 사람이나 그가 들고 온 악기나 꼭 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배웅가라며 불러 준 천안도 삼거리를 제멋대로 흥얼거리며 아주 그냥 취해버렸다. 다음 날 두통을 부르던 숙취는 없었다. 그 밤엔 술이 아니라 사람에 취했던 것이다.


정민아, 가을밤에 만났던 그녀를 한 계절을 보내고 다시 만났다. 25현의 가야금을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 국악기를 들고 홍대 앞 라이브클럽에서 공연하는 '희귀한' 뮤지션, 국악으로 포크와 재즈,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고, 4개의 정규앨범과 다수의 프로젝트 음반을 낸 전업가수. 정민아를 소개하려면 이것저것 화려한 수식들이 많다. 심지어 그녀는 팬 카페와 페이스북 팬 페이지도 보유한 스타였다. (비록 팬 카페주인과 페이지 주인이 본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소개보다도 첫 대면과 동시에 속이 뻥 뚫리는 그녀의 호쾌함이 무엇보다 사람을 홀린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덤으로 봐도 좋고 망설임 없는 그녀의 행보는 일단 한번 만나보라던 사랑방 주인장의 자신감을 단연 인정하게 하는 대목이다.



"제가 그 전에는 대한민국의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별 생각 없이 나갔던 광우병 촛불 집회에서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 당시에 수많은 경찰들이 거리를 메우고 길을 못 건너게 하는 거예요.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권력에 의해 한 순간에, 아무 때나 바스라질 수 있는 자유 안에서 살았던 거지요. 그저 길을 건너려고 하는 사람을 권력이 저렇게 탄압할 수 있다는 것을 한 순간에 알게 되면서 제 생각과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용산 참사, 이랜드 노조, 이주노동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폭력을 겪고 있는 여성들, 세월호 참사. 우리 사회의 이면을 앓고 있는 곳이라면 부르면 무조건, 부르지 않아도 찾아서 다녔다. 한 덩치 하는 가야금을 이고 지고 가야 하는 것은 그녀에게 결코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꿔보리라는 포부는 없다. 음악이 상처를 치유할 것이라는 낙관도 없다. 음악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힘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해야 한다고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몰랐던 것을 알게 됐으니까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단다. 


"저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정부 책임이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당시 제가 봤던 어떤 보도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사고가 났구나 하는 정도로 알고 무심히 넘겼던 거예요.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반드시 미래에 되돌아온다'. 이건 되게 명백한 진실 같아요. 세월호 참사를 그때의 저처럼 단순한 사고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 사건이 결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말을 해줘야 해요. 제 음악과 활동들은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길 봐달라고 하는 외침이기도 하지만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우리가 지켜보고 있겠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지난해 5월 홍대역과 합정역 사이에서 예술인 100팀의 버스킹(거리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는 행위)이 있었다. 1인 시위의 기준이 되는 20미터씩을 사이에 두고 인간 띠처럼 이어 진행한 공연이었다. '세월호를 지켜보는 작은 음악가들의 선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릴레이 1인 시위를 기획한 것도 그녀였다. 세월호 참사 500일에 맞춰 15인의 음악인이 함께 만든 '다시, 봄' 이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유쾌하게 그리고 더 없이 진지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에 그녀의 눈망울이 유독 커다란 이유를 알게 됐다. 바라보고 있는 것도, 담아낼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이쯤에서 그녀의 음악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음악에 문외한이자 겨우 그녀의 말을 받아쓰는 게 일인 내가 음악을 말하겠다는 게 무척 우습지만, 음악이라 써놓고 정민아의 일상이라 읽으면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작사 작곡하는 모든 노래가 생활밀착형이다. 



"국악고를 거쳐 음대에 입학하면서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엔 계급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좀 더 우월하게 살 것이다, 국립국악원 같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좋은 학벌의 집안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 살겠다고 생각했죠. 정작 부유하게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부유한 미래를 꿈꾸는 철딱서니였어요. 그런데 이런 황당한 생각이 깨지게 된 게 생계를 위해 전화상담원 일을 하게 된 경험이었어요. 금방 그만두겠다던 그 일을 4년 반 정도 하게 됐는데 그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을 보게 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직업을 갖고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깨우쳤죠."


세상물정 모르던 철없는 음대생은 '국립'이 붙는 탄탄한 직장을 얻는데 족히 7번은 실패하고 당장 급한 생계부터 해결하고자 전화상담원 일을 시작했다. 엄마의 빚을 떠안고 살던 은미를 만난 곳이다. 집나간 엄마를 대신해 은미가 빚을 갚으며 집안 살림을 꾸리고 있을 때 은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은미는 3일장을 끝내고 돌아와 다시 전화기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민아는 은미의 허락을 받고 곡을 만들었다. '은미 이야기'다. 1집 <상사몽>을 발표하고 전화상담원을 그만둔 정민아는 광화문역 7번 출구 앞에서 매일 아침 주먹밥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1집이 1만 장이나 팔리는 성과에 힘입어 과감히 퇴직을 결단했지만 보릿고개는 금방 찾아왔다. 주먹밥 장사를 시작한 첫날 2000원짜리 주먹밥이 36개나 팔렸다. 그 후 단 하루도 첫날보다 많이 팔아본 적이 없다. 쫄딱 망했지만 노래 한곡이 남아 3집 앨범에 실렸다. 곡 이름은 '주먹밥'.



정민아는 중학교 2학년 때 동네의 작은 교습소에서 가야금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가야금을 타면서도 락키드였던 그녀는 홍대 라이브 클럽을 들락거리며 록, 재즈, 헤비메탈 등의 라이브 공연에 흠뻑 빠져 살았다. 그런 그녀가 클럽 공연에 서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야금을 들고 무대에 서기까지 실용음악학원에서 화성과 기타, 피아노 등을 배웠다. 작곡의 기본을 익히고 밴드들이 하는 앙상블 수업에 가야금을 갖고 들어가 장르가 다른 음악과 접목도 해봤다. 정민아의 음악은 그렇게 다져지기 시작했다.

 

"저는 제가 상위 1%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1%가 아니라, 음악가로 먹고 살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상위 1%라고 생각하거든요. 풍족하지는 않지만 이제 전화상담원을 하거나 주먹밥을 판다거나 하지 않아도 공연하고 음반팔고 하는 정도로 먹고 살 수는 있어요. 되게 감사한 일이에요."


상위 1%치고는 참 소박한 생활을 하는 중이지만 그 덕에 4집 앨범까지 나올 수 있었다. 4집 앨범을 준비하며 그녀 스스로 가사를 주우러 다녔다고 하는데, 팔도의 도서관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이십여 년 전 서른세 살이던 엄마와 손을 잡고 찾아갔던 수리산 한증막도 다시 갔다 왔다. 서울 수원 전주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그녀가 주워담은 순간은 다름 아닌 사람의 순간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 바라 본 사람들의 작고 외로운 순간순간들을 곡으로 담아냈다.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나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것이 사람이라고 담백하게 노래해 주는 이, 젊은 엄마의 외로움을 알아봐준 이, 작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충분히 아름답다 말해주는 이, 가난한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봐 주는 이가 있다는 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정민아의 음악이 전하는 진심이었다.



"만약 운이 좋아서 악단시험에 붙었다면 이런 세상을 몰랐겠죠. 이제는 세상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 이상해요. 저번에 세월호 미사에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중에 세월호 이전과 이후에 뭐가 변화됐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그냥 그 이전과 이후에 변화된 삶을 사는 거라고. 제가 광우병 집회에 나가 일순간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처럼 그 이전과 이후는 절대 같지가 않잖아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이제 그냥 제 이야기로만 노래를 만들 수 없어진 거예요.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 스스로가 그렇게 변화됐으니까. 화상입기 전과 후의 삶이 다른 것처럼."


그녀를 만나면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웃음도 많고 입담도 좋지만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그 품이 넉넉해서 한 자리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사는 얘기 풀어놓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언제고 오래 머물러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이냐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모르죠'와 '무계획'이었다. 그런 건 없단다. 그럼 당장 할 일은 무엇이냐 물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콘서트'란다. 


정말 못 말린다. 아니 말리지 않고 싶다. 삶에 대한 거창한 계획을 늘여놓지 않은 그녀가, 하루하루 필요한 곳에 가서 자리하겠다는 정민아의 즉흥이 너무 미더워서 그렇다. 누군가 내게 정민아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가보시라, 그곳에 그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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