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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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호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부터 그 나름의 선택을 한다. 그리고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로 나가는 순간, 앞으로의 결정들이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하기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미친 듯이 엿보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남성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도 같을 것이다. 남성을 결정한 것은 당신이 아니지만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로 한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당신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로 선택한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 글은 나의 소중하고 특별한 계기들로 인해 페미니즘을 접한 그 순간의 이야기이다. 반대로 말하면, 계기 없이는 이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나의 찌질한 이야기이자,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항상 이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친구 두 명이 있었다. 스물의 그들은 몰랐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나타나는 차별들에 점점 숨을 가빠했다. 여성의 역할을 요구했고 여성으로 살아가길 강요받았다. 그들이 느낀 주변의 눈빛은 이마트에 높이 쌓인 예쁘장한 인형들을 고를 때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상자 안에 담겨 비닐 시트지 너머의 자신들을 고르고 있는 행복해 하는 눈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스물의 나에게 ‘너의 눈빛도 똑같다’고 말했다. 나는 듣기 싫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몸서리치게 노력한 스무 해 남짓한 나의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을 삐딱하게도 바라보고 이런 저런 활동들도 해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의 눈빛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얘기해주었다.


모든 것에 지쳤을 때쯤 문득 그들이 나에게 왜 저런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내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해보기로 했다. 그들과 함께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은 그들을 구석구석 훑어본 뒤 나를 쳐다본다. 묻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다니고 있는 나의 자격과 능력을. 그런 시선에 나도 그 사람을 쳐다보면 시선을 피한다. 나의 눈빛은 맞받아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훑어본 그 사람과 같은 눈빛이다.


주변은 나에게 물었다. 그들이 너와 연인 관계인지, 친구 관계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 주변은 그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인형들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을 하나씩,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주변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들을 단지 나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나는 불편했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점점 깨달았다. 주변이 했던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생각하고 했던 말들이었음을. 산더미 같이 쌓인 인형들을 웃으며 고르고 있는, 시트지에 뿌옇게 입김이 서릴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바라보던 사람이 나였음을. 그들은 항상 이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숨을 가빠하며 시트지를 손으로 밀쳐내고 있었다. 묻어난 그 얼룩진 손자국 하나하나에 분노와 슬픔, 그리고 살고자 하는 욕망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입김으로 보이지 않게 덮어버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입김 위에 나의 숨을 포개지 않기로 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로 살기 선택한 순간은 이렇게 축축했다.


선택 이후의 세상은 상자로 가득했다. 집, 학교, 직장에는 모두 켜켜이 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모두 얼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저 얼룩은 아이와 야근에 시달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고, 저 얼룩은 오늘도 무사하길 바라며 막차 시간을 다급하게 확인하는 사람의 것이었고, 저 얼룩은 사람들의 시선에 지쳐 지하철에서 조용히 마스크를 꺼내 쓰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우리가 상자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순간들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상자가 아닌 당신 나름대로의 것으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본 그것의 어딘가에는 아픔과 분노가 묻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가족을 통해, 친구를 통해, 뉴스를 통해, 그 가슴 아픈 순간이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 그 얼룩들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와 같은 생물학적으로 남자, 특히 이성애자라면 우리는 젠더 위계에서 가장 최상위층을 차지하고 있는 권력자이다. 동시에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빨간약을 삼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몸서리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시태그 운동에 참여했는가. 아니면 스스로의 남성성에 괴로워하며 페미니스트의 자격과 의무를 이리저리 따져보았는가. 당신의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데이비드 J. 커헤인(David J. Kahane)은 「남성 여성주의라는 모순 어법」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 하는, 혹은 현재 하고 있는 남성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허식가(the poseur)이다. 그는 페미니즘 이론을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실천하게 되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부장적 환경과 직장 상사나 친구와의 관계 등에서 갈등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성인 것과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며 단지 페미니스트로 인지되길 바랄 뿐이다. 따라서 자아성찰에 따른 고통은 없다.


두 번째는 내부자(the insider)이다. 그는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실천도 하며 책임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잘 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가부장제와 같은 페미니즘이 말하는 해악들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하지만 그가 이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신의 자부심으로 삼기 위함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고민이 자아성찰로 이어지지 않는다. 주변에서도 지지를 한다. 자신의 애인이, 동료가, 친구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변화한다는데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세 번째는 인본주의(humanism)자이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가부장제의 이익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부장제로부터 어떻게 억압을 받는지 잘 알고 있다. 인본주의자들이 집중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제로부터의 억압 부분이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남성이 되길 바라며, 여성적 특성과 더욱 관계 맺기를 바라지만 초점은 남성들 간의 경쟁 약화,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 증가와 같은 남성들의 복지에 있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은 가부장제의 폐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네 번째는 자기 학대자(the self-flagellator)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깊은 지식과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성차별적 충동, 과거에 현재에 대한 죄책감과 끊임없이 싸운다.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런 과도한 자기성찰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발전적일 수 없다. 자기 비하에 몰입하면 할수록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에 머뭇거리게 되고,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자기 학대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본주의자 또는 내부자로 옅어지거나 아예 페미니즘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도 한다.


커헤인이 제시한 이 네 가지 유형이 전부인 것도, 남성 페미니스트가 반드시 이 네 가지 유형 중 하나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분류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자기 성찰과 이론, 실천을 동시에, 적절한 수준으로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두려움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면 할수록 페미니즘이 비판하고 있는, 타파해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개안 직후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한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행동과 언어, 살아온 과정에 대한 재해석이었다. 태어나 처음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끼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책임을 물었다. 나는 자기 학대자였다. 당신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즘, 그 안과 밖의 어려움


나의 경우 이전까지의 나에 대한 재해석과 이로 인한 태생적 한계에 대한 내적 집중은 동시에 외적으로의 어려움을 가져왔다. 나의 주변 환경에서의 어려움은 페미니즘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페미니즘을 모르거나 이에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들, 혹은 모르는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해내는 사람들이다. 나는 여성인 친구가 많은 편인데, 이는 페이스북의 이성애자 연애 관련 페이지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 주제이다. ‘절대 이성 간에는 친구가 될 수 없으니 자신의 애인이 이성 친구와 자주 놀지 않게 관리하라’는 것이다. 나의 남성 친구들도 이 문제에 대해 궁금해 했다. 이것은 ‘이성은 잠재적 연애 대상’이라는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성 페미니스트란 잠재적 연애 대상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습게도 이 관점은 국립국어원도 다르지 않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페미니스트’를 검색해보면, 페미니스트를 “「명사」 「1」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2」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자기성찰의 의도와 그 목적은 여자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현실에서 실제로 여성과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보며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이 사람은 게이가 아닐까’하는 소수자 혐오이다. 남자가 여자와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게이만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인식을 나타낸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소수자 혐오가 결합된 이 무지와 폭력의 끝은 우리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이것이 페미니즘을 모르는 바깥에서의 문제라면 페미니즘 안쪽에서의 문제는 결이 다르지만 더 중요하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해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이다.


가부장제의 폐해에 대하여, 성적 차별에 대하여 아무리 공부를 하더라도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적 구조와 그것의 부분이자 재생하는 주체로서 나는, 이러한 관성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나의 페미니즘 지식과 실천 경험에 빗대어 자신감 있게 내딛은 것이 내가 가진 권력과 결합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또한 나는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을 말할 때 ‘이것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닌 남자에게도 가치 있는 일이다.’, ‘여성이 살기 좋은 세상이 우리도 살기 좋은 세상이다.’ 등과 같이 이것이 남성들을 차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운동이 결국 남성들의 이익과 복지 향상을 위한 것이라면 연대할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내려놓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온다는 것이다. 당신의 페미니스트 공동체와 그 연대는 어떠한가.


남자가 뱉어내는 페미니즘


고민의 연장으로 무엇보다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남성이 무섭다는, 남성혐오에 걸릴 것 같다고 고백하는 여성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슬픈 이유는 이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항해 우리 주변의 남성들이 단순히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죽음과 억울함의 대비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답고자 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죽음


몰래 카메라가 있을까 화장실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여성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에 떠는 여성

테러를 당할까 이별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

아기를 출산하는 순간 해고되어 재취업되지 않는 경력단절 여성

자신의 꿈을 이루려 일과 육아를 모두 떠안다 과로로 떠난 여성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었다고 해고된 여성

허락 받지 못한 가짜 페미니즘을 하는 메갈리아

가임기여서 지도에 표시된 여성

여자라서 죽은 여성


억울함


남자만 군대 가서 억울한 남성

남자만 무거운 것을 들어서 억울한 남성

여자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운전하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자신보다 똑똑한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직장 상사인 것이 싫은 남성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라 싫은 남성

성평등주의가 아닌 여성주의라 싫은 남성

‘나도 여자가 많은 집에서 태어난’ 남성

여성들이 자신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아서 싫은 남성

여성과 남성이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고 1인 시위하는 남성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닌 계급의 문제라며 조개 무덤을 쌓는 남성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억울한 남성


그리고 이 죽음에 대비한 나의 페미니즘 역사는 남자들의 억울함만큼의 보잘 것 없음을 자랑한다. 내가 페미니즘을 하고자 한 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하고자 한 이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유는 그저 ‘살아있고자’ 함이었다. 나는 죽음에 대비해 불편함과 억울함을 뱉어내듯이 ‘인간’을 뱉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더 나은 인간이기 위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기에 그들을 ‘보호’하고자 허겁지겁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권력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그것을 통해 보호하고자 함은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당신이 만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커헤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윤리적으로 불완전하고 복합적인 존재로 기꺼이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둘은 비판에 대해 개방적일 것과 지속적으로 자아 성찰을 하라는 것이다. 셋은 남성 활동가들과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한남’과 ‘유니콘’의 사이, 분노와 용서의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방에 앉아 울고만 있지 말자. 칭찬 받으려 하지 말자. 페미니즘으로 치장하지 말자. 분노와 용서 사이의 그 어딘가를 뚫고 나가자. 내가 만난 페미니즘은 무엇이 가장 옳은 길인지 알려주는 것이 아닌, 무엇이 옳지 않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한계를 넘기 위해 당신이 만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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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아니 사실 태어날 때부터 내 존재와 생명을 위협하는 젠더폭력을 숱하게 겪어야 했다. 남존여비 가정에서 태어났고 여아낙태 위험과 부계폭력에 처해 변변찮은 도움구할 곳 하나 없이 버텨왔다. 5살적에는 납치와 강간미수, 8살 때는 바지와 속옷을 벗고 발기된 성기로 쫒아오던 아저씨도 있었다. 당구채로 어떤 날은 듀오백 의자로 흠씬 두들겨 맞으며 아버지의 가부장적 참교육을 버텨내던 날들, 아버지의 자해로 선혈이 낭자하던 내 방 침대. 이별 통보에 염산을 들고 숨어있겠다던 전 남자친구 그리고 한강 투신 협박. 


어둡고 지독한 이야기, 토해내는 처절한 언어,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정적인 경험들로 내 삶의 역사는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스스로를 미친 듯이 분리하고 싶었다. 유쾌하지 않은 ‘비정상적’ 삶에서 탈출하여 유쾌한 나만의 '정상'범주를 꾸리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 피해경험은 사소한 것, 잊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야 나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전까지 나의 피해경험은 내가 지독하게 운이 나빠서 우연하고도 특이하게 겪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오직 개인의 경험으로 덮어버릴 피해와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슷한 경험들, 그로인해 삶을 이어가는 것 조차 힘들어하는 사람들, 혹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 앞에서 나의 착각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나의 역사였지만 오직 개인의 경험으로 덮어버릴 피해와 상처들이 아니었다. 강남역 사건이 터지고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며 두려움과 분노에 눈물을 훔치며 모이는 여성들은 그들 자체로 젠더피해의 산증인들이었다. 그 삶의 경험으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그 심정으로 거리에 나온 것이었다. 나와 같은 상처를 위로하며 곧 자신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발화하기를 막 시작했다. 강남역 사건이 페미니즘 계보에 중요한 지점이 되는 이유는 그것에 있다. 시대 여성들이 발언하기를 시작했다는 것. 그동안 삶에서 겪어온 젠더피해에 대해 우리는 묵인 “당했다.” 가해자는 자연적인 본능을 억눌러야하는 현자가 단순 실수를 저지른 것이 되는데 반해 피해자는 상황에 있어 조금의 흠결도 있어서는 안 되는 완전무결한 순결성을 지녀야만 비로소 시혜적인 피해자로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왜 여성의 피해사실과 그로인한 사회적 약자성을 젠더권력을 가진 남성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가? 왜 이 사회에서 젠더피해를 말하는 것은 유별나고 예민한 것이 되는가? 여성이기 때문에 거쳐야했던 이 지독한 일상이 많은 누군가들에게는 고백이 되고 충격이 되고 새삼스러운 일이 되고 균열이 되고 불쾌함이 된다. 과소산정 된 피해의 통계치는 그 숫자마저 지워지기 일쑤지만 그 단순 산정되는 숫자 너머에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존재한다. 강남역에 모인 여성들은 남성과 공존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쉽게 생각하고 발화할 수 없었던 서로의 젠더폭력 피해경험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피해경험을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피해자에 대한 스스로의 코르셋을 벗고 행동할 수 있었다. 


코르셋에 가둔 ‘약자의 권력’


앞서 말했듯 약자의 권리는 피해경험 자체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젠더사회 억압의 유지를 원하는 남성사회는 여성의 피해경험을 쉽게 부정하거나 무시한다.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피해경험을 무시하고 피해경험을 말하기 이전에 피해의 인지 자체를 못하도록 교란시킨다. 무력하고 나약한 약자의 이미지를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남성성을 자성해야 하는 젠더 가해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한다. 


1. 순결한 피해자 코르셋


‘몸가짐, 조신함’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순결함은 모두 성범죄 피해자에게 “원인제공자”의 낙인을 찍어 폭력의 책임을 전가하는 동시에 성범죄 가해자에게 가해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덜어내는 가해자중심 정서이다. 애초에 젠더권력자들이 정해놓은 완전무결한 기준에 합당하는 피해자는 있을 수 없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순결함은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장치일 뿐이다. (*꽃뱀논리가 대표적인데, 성범죄의 무고죄 판결이 여타의 다른 범죄와 유사한 2% 수준에 그침에도 젠더폭력의 피해자성을 어떻게든 인정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억압기제로 작용한다.)


피해자에게 원인을 귀결하는 정서에 성범죄 피해자는 스스로를 추스르고 폭력의 원인을 자신으로부터 검열하기에 이른다. 목소리를 내어 신고를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의 상황이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 피해자는 사회의 부당한 시선과 프레이밍에 차선의 자기방어라도 하기 위해 피해사실 자체를 묵인한다. 밝혀지지 못한 폭력이 주변 곳곳에 산재해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순결함을 강요하는 사회적 정서는 결국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여성들 스스로 예방하고 방어하라는 것이 된다. 흉흉히 들려오는 범죄소식에 젠더약자들은 서로를 조심하자며 밤늦게 다니지 말자며 다독일 뿐이다. 심지어는 남성 애인들의 “어떤 옷을 입지 말라”, “어떤 화장을 해라”하는 말들. 폭력에는 특정 시간과 장소와 피해자의 옷차림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의 강간의지 그 자체에 있을 뿐이다. 성범죄는 근절해야할 것이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조심하는 것인가? 잠재적 범죄자는 없다는데 왜 잠재적 범죄의 대상화가 되어 범죄의 책무를 발생도 전에 부담하고 있는가. 공공연한 젠더폭력과 피해경험은 가히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잠재적 피해자도 아닌 엄연한 젠더 피해자로 잠재적 범죄의 대상화가 된다. 순결한 피해자 코르셋은 모든 여성의 신체를 성적인 대상임을, 갈취될 수 있는 대상(물건)임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여성들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공론을 어떠한 문제의식 없이 내면화하기 쉽다. 일종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으로 스스로 현실적인 코르셋을 인지하지 못하고 판단력을 잃게 되어 자신을 지배하는 담론에 휘둘리게 된다. 


2. 순결한 모성애 코르셋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딸로 태어나 남성의 아내로 가정의 어머니로 만들어진다. 가부장사회의 생애주기를 거쳐 만들어진 모성애는 여성의 무한한 희생을 요구한다. 미혼 여성은 개인의 꿈, 욕망, 정체성과 상관없이 신체적인 특징을 꼬집혀 ‘가임기 여성’으로 몰살당한다. 


남성사회는 여성이라면 꼭 수행해야 마땅한 역할이라며, 철저히 무시하고 혐오하면서도 돌봄 노동을 강요한다. 여성의 노동을 아주 저렴하게 착취한다. 만들어진 모성애로 세뇌된 우리의 어머니들은 스스로가 착취를 당하는 것을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존재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돌봄 노동은 반드시 필요로 되는 존엄한 노동이다. 근대화의 과실이 자유시장의 범주에 있었던 남성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탄생과 죽음까지에 여성 돌봄 노동의 착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의 분담은 유한한 인간 존재를 위해 서로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도 폭력적인 남성성의 해체를 위해서도 분담되어야 할 의무이다.


주변에도 미혼모는 넘쳐나지만 미혼부는 보기 드문 것이 현실이다. 제대로 된 성교육도, 미혼부모가 되었을 때의 어떤 방침과 제대로 된 지원제도도 없는 사회에서 덜컥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책임은 대부분 여성에게 돌아간다. 미혼부에게 양육비를 요구하는 소송 자체가 많지 않은 것은 아이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을 모성애라는 미명하에 여성이 조용히 떠안기 때문이다. 미혼부에게 양육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모성애의 양심으로 지워버린다. 양육비를 요구해도 대부분의 미혼부가 지급할 경제력이 없는 것이 실상이긴 하나 많은 미혼모가 최저임금의 벌이로 지원 없이 혼자 아이를 키워나간다. 신체적 순결함에 위배된다는 미혼모에 대한 징벌적 시선을 모성애의 부담과 함께 떠안는다.


3. 친절한 페미니스트 코르셋


페미니즘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참으로도 다채로운 혐오와 코르셋이 펼쳐졌다. 페미니즘을 뜨거운 감자로 만든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문제되어 왔던 유리천장이나 성범죄보다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고 믿었던 남성들의 인식을 재확인한 충격이 컸다. 분노하고 좌절한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친절함, 피해경험에 대한 상처를 부정당한 경험들, 세상으로부터의 단절감, 자기혐오가 이어졌다. 젠더폭력의 현실에는 그저 안주하던 자들이 내가 페미니즘을 말하기 시작하자 나의 태도를 뒷짐을 지고 지적하며 나의 생각과 언어를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언젠가 나는 평화를 말했고 또 언젠가 나는 계급 갈등도 지적했다. 그들과 희망을 가지고 공유했던 담론들이 페미니즘 앞에서 모두 무너졌다. 그들도 나의 입장에 어떤 충격과 상처를 받았을 수 있겠지만(사실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 대부분이라 짐작한다) 나로서는 나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참혹한 심정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면서 오랜 친구들과도 결별했다. 지독한 스토킹으로 힘들었던 시절(그 스토킹은 6년째 지속되고 있다) 정신적으로 많이 도와줬던 고마운 친구들인데, 친구들의 혐오발언을 견디지 못해 내가 스스로 뛰쳐나오게 되었다. 인연이 애석하지만 내가 미안할 것이 없듯 그들도 페미니즘을 알지 않고서야 영원히 미안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친구는 내가 정상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페미니즘)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고, 어떤 친구들은 당장의 부계폭력에 처한 내게 무턱대고 그래도 아버지를 미워해선 안 된다고 했다. 약자의 권리를 찾아가자는 이 글도 그들에게는 피해의식에, 망상에 찬 과격한 글이라고 읽힐 것 같다. 그들에게는 없는 피해가 내게는 있으니 구분되는 의식이 내게 투철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의 입맛에 맞는 페미니즘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새로 만나서 기쁘다는 위안은 하지 않겠다. 차별주의자일지라도 내게는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다. 마음 아픈 인간관계의 결별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도 나의 페미니즘은 더욱 필요한 것이다. 


4. 남성성 코르셋 


만들어진 여성성의 코르셋은 아주 정교하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나의 경험과 언어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공부하면서도 나의 무의식적인 코르셋과 남성성에 여전히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나는 자아의 깊은 곳에 트라우마처럼 남성성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성성에 대한 트라우마는 나의 페미니즘 언어를 흐리게 하고 자꾸만 판단을 교란시키려고 한다. 약자의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해체해야 할 나의 마지막 코르셋은 바로 이 공포심일 것이다.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 외쳐야 한다. 


여성은 여느 남성과 같은 인간임에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성으로 규정되고 착취당하며 폭력에 처해 진다. 피해자의 발화를 억압하는 남성중심의 '정상'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은 끝없는 자기검열을 한다. 여성성의 '비정상'을 느끼고 자기혐오를 떨쳐내야 한다. 착취가 공공연하여 정당화되는 구조에서 독자적인 존재인 나를 분리해내는 과정이다. 


‘더럽혀진’, ‘발랑까진’ 피해자는 없다. 젠더피해를 밝히고 마땅히 권리를 찾아야할 약자성에 무력하고 나약한, 완벽한 순결성을 요구하는 시선은 약자성을 젠더권력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시혜적 약자성일 뿐이다. 약자성은 여성의 피해경험 자체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지 가해자인 기득남성이 인정하느냐 마느냐 검증할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다. 시혜적 약자성은 근본적으로 약자성의 지속을 고질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억압이 깃들어 있으며 여성들의 권리 찾기를 교란시킨다. 우리의 피해경험을 지우고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시혜적 약자성에서 떨쳐나 스스로의 권리를, 약자의 권리를 찾아 외쳐야 한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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