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제도 공론화 평가토론회 자료집(최종).pdf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지난 3일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위원회는 공론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 ▲수능위주전형 비율 확대 ▲중장기적으로 절대평가 과목 확대 ▲공정하고 투명한 입시제도, 학교교육 정상화에 기여하는 입시제도 지지가 높게 나타났습니다. 공론화위원회는 “결과에 대한 수용도가 높으며, 공론화 과정이 생각을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라고 본 공론화를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대입제도개편 결과와 시민들의 수용성과 별개로 본 대입제도개편 공론화에 ▲의제 설정의 적절성 ▲공론화 설계 모형 검토 ▲공론화 대상과 규모 등 다양한 논의 지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이후 우리 사회 주요의제에 시민참여를 통한 공론화 과정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평가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할 평가 토론회는 사실상 전무한 형편입니다.

이에 한국형 공론화 네트워크는 대입제도개편 공론화 설계와 진행과정을 평가하고 향후 공론화 방향에 대한 개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한국형 공론화 네트워크는 공론화와 관련된 정부, 기관, 학계, 시민사회 등이 함께 모여 구성한 네트워크로서 대입제도 공론화를 평가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 사회 공론장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본 토론회를 개최합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참가신청하기 : https://goo.gl/gFQYEf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시민 참여단 활동은 이번 주 토요일에 1차 숙의 토론회가 진행되고, 그 다다음 주 주말에 2박 3일 일정으로 2차 숙의 토론회가 진행됩니다. 모두 참석 가능하시지요?” 

“네.” 

“온라인으로 진행된 사전 교육 모두 수료하시고 토론회도 모두 참석하시면 사례금으로 65만 원이 지급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대학입시제도대편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으로 선정되다.

모든 것은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됐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인터넷 강국이요 SNS 선진국이라고는 하지만, 정부의 모든 공식적인 대민 업무란 얼굴을 마주보고 접촉하는 대면 접촉 혹은 유무선 통화로 접근하는 ARS 응답을 벗어나지 못한다. 때는 지난 6월 중순경. 설거지를 하는 엄니를 대신해 전화를 받았다. 왜 내가 받았을까. 모르겠다. 모든 소설 같은 일에는 약간의 우연이 섞이기 마련이다. “안녕하세요?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공론화위원회입니다. 전화 받아주셔서 감사하고요,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나는 막 밖에서 들어와 옷을 홀딱 벗고 소파에 드러누워 허벅지를 박박 긁으며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친절했지만 무척이나 촉박했기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귀를 스마트폰에 바짝 갖다 댔다. 그 말투나 억양이 적어도 누군가의 등을 맛있게 떠먹으려는 살기가 느껴지지는 않았기에 나 역시 반 박자 빠른 속도로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이 전화기는 제 것이 아니라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우리 엄니 전화기인데요, 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말았다. 상담원 선생님은 맹렬한 기세로 준비된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 

“축하드립니다! 선생님은 대입 제도 개편을 위한 공론화위원회 시민 참여단의 예비 모집자로 선정되셨습니다!” 

이윽고 내 정치 성향과 연령대, ‘대입 제도’에 대한 의견 등을 묻는 간략한 설문 조사가 이어졌다. 상담원 선생님은 앞만 바라보며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그가 하루 과업을 조금이라 빨리 마칠 수 있도록 나 역시 신속하고 적확하게 답변을 뱉어냈다. 내가 기억하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원내 정당 중 지지하는 정당이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현행 입시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선생님께서는 대입 제도가 개편된다면 가장 시급히 고쳐야 할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입 제도 개편을 찬성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대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상담원 선생님은 모든 질문을 다 던진 뒤 “정말 운이 좋으십니다. 선생님께서는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공론화위원회로부터 시민 참여단 예비 명단으로 선발되셨고요. 최종 선발이 종료되면 7월 초쯤 다시 연락이 갈 예정이니까 꼭 전화를 받아주세요. 정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게 연거푸 ‘운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나는, ‘4000만 분의 2만’의 확률로 걸려온 이 행운의 전화를 끊었다. 7월 10일 한 차례 더 전화가 걸려왔고 다음날 참석을 재차 독려하는 당부 연락이 한 번 더 왔다. 다시, ‘2만 분의 550’의 확률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나는 꼭 참석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은 웃었다. 

“그리고 행사 당일 오전에는 외부 언론사에서 촬영도 하고 인터뷰도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은 가급적 측면부만 촬영하도록 사전에 협조해놓겠습니다. 혹시라도 언론에 얼굴이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면, 미리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고가는 길에 사고가 나면 보상금을 지원해드리기 위해 여행자 보험에 가입시켜드리겠습니다. 주민번호 열한 자리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고, 혹시라도 주민번호 노출을 원하지 않으시다면 그냥 생년월일만 불러주세요.” 

나는 언론에 내 얼굴이 나와도 괜찮고, 주민번호 11자리도 얼마든지 불러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정도 사기극이라면 한 번쯤 속아 넘어가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끊었고 2할, 아니 1할쯤 되는 책임감을 안고 첫 번째 숙의 토론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토론회가 열린 토요일이 됐다. 


7월 14일 토요일 08:34

오랜만에 서울역에 왔다. 세종대 국제컨벤션센터로 향하는 셔틀 버스는 서울역 앞 광장이 아니라 역 뒤편에 서 있었다. 지하철 1호선 출입구로 따지자면, 2번 출구 쪽이 아니라 3번 출구 쪽. 토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이 삭막하고 황량한 구도심에 서 있다니. 

550명의 시민 참여단 중 수도권과 제주도, 강원도에 거주하는 사람은 서울에서, 영남권과 호남권에서 사는 사람은 각각 부산과 광주에서, 그리고 중부권에 거주하는 시민 참여단은 대전에서 토론회를 진행한다. 서울과 광주 토론회는 7월 14일 토요일에 각각 세종대 국제컨벤션센터와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부산과 대전 토론회는 7월 15일 일요일에 각각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과 KT대전인재개발원에서 열린다. 김포에 거주하는 나는 세종대로 향했다.

전국 각지에 거주하는 시민 참여단을 세종대로 ‘이송’하기 위해 셔틀버스 여러 대가 투입됐다. 나는 서울역 출발 셔틀버스를 이용했다. 8시 50분에 출발하니 반드시 8시 40분까지는 도착하라는 문자가 행사 전 이틀간 세 통 정도 왔다. 문자 메시지에는 ‘인솔자’라는 정체불명의 직책명이 적혀 있었고 심지어 휴대전화 번호까지 나와 있었다. 나는 시민 참여단 이송을 책임지는 고위직 공무원들의 번호가 아닐까, 적어도 주무관쯤은 되겠거니 했는데 막상 집결 장소에 도착해보니 버스 앞에는 앳된 얼굴을 한 잘생긴 청년 두 명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참여단들의 신상을 확인하고 버스에 탑승시키고 있었다. 다 합쳐 4일 참석해 65만 원을 받는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꿀알바를 찾은 두 청년을 응원하며 버스에 올랐다. 

청년 알바생이 들고 있는 인원 명부를 슬쩍 보니 내 이름 옆에는 ‘30~39세’라고 적혀 있었다. 550명의 시민 참여단 중 ‘30~39세’ 그룹은 몇 명이나 될까? 가보면 알 것이다. 버스 좌석은 이미 절반 정도 차 있었다. 대다수가 40대 이상의 어른들이었다. 60대를 훌쩍 넘긴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시민 참여단의 모습을 실물로 영접하자 내가 정말 550명에 뽑혔구나, 라고 실감했다. 


09:29

나는 이날 처음으로 세종대가 강남 송파구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꾸벅꾸벅 졸다 깨니 캠퍼스 안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스태프’라고 크게 적힌 노란 조끼를 입은 청년들이 우리를 안내했는데, 나는 알바생들이 입은 그 노란색 조끼가 너무 탐이 났다. 한 벌 남으면 달라고 해야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씩씩하게 걸었다. 

‘광개토홀’이라고도 불리는 국제컨벤션센터 입구에는 무언가를 열성적으로 나눠주며 피켓 시위를 하는 어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이 나눠준 종이에는 “수능 전 과목 절대평가 도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위에는 “대입숙의에 참여하시는 시민들께 보냅니다”라는 글자가 바탕체로 적혀 있었다. 나는 고이 접어 책자에 가방에 넣었다. 

지하 2층에 내려가자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우리를 강당 안으로 몰았다. 강당 입구 앞에 설치된 임시 접수창구에서 공무원으로 보이는 남자로부터 내가 속한 조 번호가 xx번이라는 것을 듣고 기념품을 수령했다. 흔하디흔한 에코백 한 장과 싸구려 볼펜 한 자루였다. 나는 에코백을 곱게 접어 가방에 넣었다. 

강당 안에는 1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원형 테이블이 여러 개 펼쳐져 있었다. 이미 많은 참여단에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원형 테이블 하나가 한 조다. 어떤 테이블은 어색한 공기 속에서 생판 처음 보는 남과 탐색전을 벌이고 있었고(우리 테이블!), 어떤 테이블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미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내가 속한 xx조 테이블에는 남자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한 명은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누가 봐도 ‘꼰대’ 티가 나는 중년 사내였고, 한 명은 내 또래로 보이는 무척이나 순해 보이는 한마디로 만만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몇 사람이 더 올 때까지 나는 준비된 자료집만 뒤적거리며 침묵을 지켰다. 


공론화란?

특정한 공공정책 사안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입장과 이해관계를 깊이 있게 잘 살피며 민주적으로 해당 사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숙의자료집” 중에서

자료집에 적힌 ‘공론화’에 대한 정의다. 65만 원에 눈이 멀어 날름 신청했는데, 글쎄 과연 내가 그 값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왠지 말이 무척 많을 것 같은 50대 중년 사내는 여차하면 말을 걸어버릴 테다, 라는 태도로 이리저리 시선을 던지며 자꾸만 나와 순둥이 청년을 바라봤다. 다행히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우리 테이블에 앉자 자연스럽게 두 중년 사내끼리 말을 섞기 시작했다. 물론 ‘꼰대’ 티가 나는 사내가 훨씬 더 많은 말을 했다(오후 5시 행사가 끝날 때까지 가장 많은 말을 한 사람은 단연 이 ‘꼰대’ 아저씨다). 


10:20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나왔다. 통통한 체격의 여자였는데, 진보 성향 단체의 임원이었다. 몇 분 뒤엔 이른바 ‘모더레이터’라는, 이번 숙의 토론회의 두 번째 꿀알바 집단이 우르르 장내로 들어와 각자가 담당하는 조별 테이블로 이동했다. 사회자가 오늘 일정의 대강을 설명하는 동안, 모더레이터들은 원형 테이블의 빈자리에 조용히 앉아 잔뜩 가져온 짐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오늘 언론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진이 찍힌, 바꿔 말하면 언론 취재진들이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한 ‘임석상관’ 김영란 전 대법관이 입장했다. 그는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공론화위원회의 위원장이다. 김영란 위원장 뒤로 위원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그럼 본격적으로 토론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국기에 대해 예를 표하는 순서를 갖겠습니다. 장내에 계신 모든 분께서는 일어나주십시오.”

‘아니, 아직도 이런 전근대적이고 권위적이며 만고의 쓸데없는 짓(국기에 대한 경례)을 하는구나!’ 나는 예비군 훈련장에서나 하는 건 줄 알았던 이 오래된 의식을 따분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애국가 1절을 ‘시간 관계로 생략’한 뒤 김영란 위원장이 앞으로 나와 축사를 했다. 

“여러분, 정말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이 멘트 말고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550명의 시민참여단을 대표하는 9인의 참여단이 단상에 올라가 김영란 위원장과 악수도 하고 사진도 찍고 위촉장도 받았다. ‘아, 대한민국에서 국가가 주관하는 모든 행사는 이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구나!’ 예비군 5년차인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대한민국 공무원들의 노고에 깊이 탄복했다. 


10:45

장학사의 진행으로 간단한 설문조사가 진행되었다. 대입 제도 전반에 관한 의견을 묻는 설문이었고, 이번 1~2차 숙의 토론회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할 안건, 즉 ‘공론화 범위’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숙의자료집”이 제시하는 공론화 의제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

<공론화 범위>

1. 선발 방법의 비율

① 학생부위주전형(학생부종합전형, 학생부교과전형), 수능위주전형 간 비율 검토

② 수시 수능최저학력기준의 활용 여부 

2. 수능 평가방법 : (1안) 전과목 절대평가 전환, (2안) 상대평가 유지 원칙 

-“숙의자료집” 중에서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렇다.

첫째, 정시와 수시 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둘째, 수능을 절대평가로 할 것인가 상대평가로 할 것인가. 

셋째, 대학이 수험생들에게 수능 최저등급을 요구하는 것을 강제로 막을 것인가 허용할 것인가. 

시민 참여단은, 이 세 가지 의제에 관한 의견을 정리해 공론화위원회에 제출할 것이다. 그 ‘의견’이 향후 교육 정책 및 대입 정책에 어떻게 반영될지는 모른다. ‘의견을 정리하는 방식’은 설문조사다. 공론화위원회는 시민 참여단을 대상으로 위 세 가지 의제에 대한 동일한 질문을 세 번 반복한다. 공론화 활동(1차 및 2차 숙의 토론회)이 진행됨에 따라 참여단의 생각이 어떻게 변하는지 파악하려는 의도다.

지금 하고 있는 설문이 첫 번째고, 다다음주 2박 3일 2차 숙의 토론회에서 첫날과 마지막 날 각각 두 번째와 세 번째 설문을 진행했다. 총 3회 설문의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는지, 혹은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등이 주요 관전 포인트. 


11:20 

설문이 끝난 뒤 잠깐 짬을 이용해 ‘신나고 즐거운’ 자기 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모더레이터가 진행했다. 우리 조는 50대 아저씨 두 명, 20대 여자 대학생 한 명, 30대 후반 유부남 한 명, 40대 아저씨 한 명, 60대 할머니 한 명, 50대 아주머니 한 명, 그리고 30대 미혼자인 남자인 나 이렇게 총 8명이 뭉쳤다. 

50대 아저씨 두 명 중 한 명은 자영업자였고 나머지 한 명은 안전 관련 공사에서 일한다. 20대 여자 대학생은 자리에 앉자마자 펜을 들고 자료집을 정독할 정도로 토론회에 진지하게 임했다. 30대 후반 유부남은 치과 의사였는데 사례금이 있다고 하길래 덥석 신청했다고 한다. 40대 아저씨(사실 50대 같기도 하다)는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닌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50대 아주머니는 강원도에 오셨고 입시를 앞둔 자녀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내가 꼴찌로 소개했다) ‘김포 거주, 32세, 미혼, 회사원’ 딱 이렇게 네 단어만을 조합해 3초 만에 소개를 끝냈다.

이어서 곧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1교시는 “공론화의 이해와 시민 참여단의 역할”, 2교시는 “대입제도의 이해”였다. 각각 25분과 45분이 배정되었는데, 이 시간은 참여단의 질의응답까지 포함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발제자들은 말 그대로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급박하게 발표 자료를 읽었다. 

점심으로는 도시락을 먹었다. 칠리 새우 한 마리, 소불고기 조금, 치킨 텐더 한 조각, 계란찜 한 조각, 닭날개 한 조각이 들어 있었다. 맛은 그저 그랬다. 그래도 공짜밥이니만큼 야무지게 맛있게 먹어줬다. 식사를 마치고 양치를 하러 화장실에 갔다. 자리에 돌아와 보니 우리의 TMT 아저씨께서 장광설을 하며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아이구, 말씀을 참 잘하시네요.” 60대 할머니가 그를 칭찬하자,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아무도 말을 안 하니까 제가 그냥 나선 거죠 뭘” 하고 응수했다. “하핫!” 멋쩍은 웃음까지 더해져 그의 꼰대로서의 풍모는 가일층 웅장해졌다. 과연! 사람을 알아보는 내 식견이란! 나는 나 자신에게 감탄했다.


13:30

식사 후 본격적인 순서, 즉 이번 숙의 토론회에서 치열한 논쟁을 촉발할 네 가지 의제가 역순으로 발표되었다. 4번 의제, 3번 의제, 2번 의제, 1번 의제. 각각의 의제는 현행 입시 제도에 관한 서로 다른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고 당연히 그 해결책 역시 저마다 완전히 달랐다.

여기서 각각의 의제가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고 정리하고 평가하고 분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 같다. 결코 귀찮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 의제 발표 후 진행된 조별 토론에서 나온 의견들을 맥락 없이 죽 열거하는 것이 차라리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각 의제에서 인용한 통계자료들 출처는? 똑같은 자료를 갖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니까 헛갈린다. 이번 시민 참여단 활동에서 너무 완벽한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550개의 서로 다른 의견이 각축하고 뒤섞여야 ‘그나마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참여단 각자는 조금 거칠고 미완의 대안일지라도 서슴없이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 나온 의제들은 최선이아니라 차선이다. 이번 공론화 활동은 진화한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일 뿐,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자. 시민 참여단의 기본적인 역할은 대입 제도 개편 논의를 주변에 널리 알리고, 대안적 공의를 모으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다. 주변에 널리 알려 시민들이 대입 제도 개편에 관심을 갖고 동참하도록 노력하겠다.

의제들은 좋은데, 다들 왜 이렇게 발표 시간을 못 지키죠?

바람직한 교육의 모습이라… 적어도 입시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학생 스스로 포기하지는 못하게 해야겠죠.

무작위로 뽑힌 ‘비전문가’ 시민 집단이 모여 무슨 이야기를 하겠느냐고, 그런 아마추어 집단의 의견이 실제 교육 정책에 반영되는 것이 올바른 것이냐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도록 더 책임감을 갖고 참여단 활동에 임하겠다. 2차 때까지 모두 빠지지 말고 참석합시다.

2차 토론회 때로 오늘 모인 조가 유지되나요? (20대 여대생)

아이고, 우리 젊은 친구들은 공부 열심히 하시네. 우리 조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만 모였나봐. 하핫. (TMT 아저씨)

주최 측에서 나눠준 자료집의 질이 무척 형편없다. 우리 회사 신입사원이 만들어도 이것보단 잘 만들 것이다. 이런 자료집을 가져오면 그 직원은 사표 써야 한다. (‘대기업’ 건설회사 아저씨)


16:10

조별 토론을 마친 뒤, 각 조에서 나눈 이야기를 다른 조 참여자들에게 공유하는 발표 시간을 가졌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손을 들어 발언 기회를 얻으려 해서 좀 놀랐다. 하긴, 귀한 주말 중 하루를 통째로 할애해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라면, 저 정도의 열의는 평범한 수준일 것이다. 점심식사 후 진행된 의제 발표 때도 전문가 발제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도발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이 여럿 나왔다. 많은 시민이 마이크를 얻기 위해 손을 번쩍 들고 ‘여기요!’라고 크게 외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조에서는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고 당연히 마이크도 오지 않았다. 


17:20

귀갓길에도 역시 셔틀 버스가 운행됐다. 올 때 탄 버스를 다시 타면 된다. 인원이 이미 배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버스는 못 탄다. 서울역으로 가고 싶은 어떤 아저씨는 눈물을 머금고 다른 버스를 탔다. 오후 5시가 넘었음에도 태양은 강렬했다. 토요일이었지만 캠퍼스에는 수많은 학생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기네 학교에서 무려 ‘시민참여형 조사와 시나리오 워크숍이 결합된 형태로서 국내 상황에 적합한 공론화 모델이 개발, 적용되는 최초의 사례’인 이 공론화 활동의 첫 번째 숙의 토론회가 진행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강변북로로 진입한 버스는 아직 동호대교도 지나지 못했는데 서버렸다. 까치발을 들어 버스 앞을 내다보니 도로가 차로 꽉 막혀 있었다. 멀리까지 줄을 선 차들은 마치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6시면 넉넉하게 서울역에 도착하리라 생각했지만, 버스는 개미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움직일 뿐이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나보다 뒤쪽에 앉은 어느 아주머니였는데, 옆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건 것 같았다. 아마 같은 조였으리라. “이번에 아파트값이 많이 올랐더라고요. 저기 보이는 아파트가 내가 사놓은 아파트인데 원래는 되게 저렴하게 샀어요. 한 5억? 근데 지금 보니까 10억까지 올랐더라고. 참나.” 늘 버스 안에서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에워싸고 있는 아파트들의 소유주가 누구일까 생각했는데, 바로 그 집주인이 나와 같은 버스에 타고 있었다. 


시민참여단 선정

시민참여단은 전국 만19세 이상 성인 남녀 전체를 대상으로 한 ‘시민참여단 선정을 위한 대국민 조사’를 통해 선정하였다. … 우리나라 전체 국민을 대표하는 표본을 추출하는 1차 조사와, 1차 조사응답자 중 … 토론회 참석 의향을 밝힌 응답자 중 지역, 성, 연령 등 인구통계학적 분포 및 대입제도 개편에 대한 태도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시민참여단 550명을 선정하였다. 

-“숙의자료집” 중에서

과연, ‘인구통계학적 분포를 고려’해 폭넓은 계층의 참여단이 모였다. 수도권 변두리에 거주하는 임대아파트 입주자부터 강남 알짜배기 땅에 지어진 아파트의 소유자까지. 서로의 삶에 대해 조금도 상상해보지 못한, 아니 상상할 수 없었던 이 다채로운 계층이 모인 집단은 과연 어떤 공통된 의견을 내놓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한남대교, 반포대교, 동작대교, 한강대교를 기어이 돌파한 버스는 용산역을 뒤로 빙 돌아 청파동을 관통해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서울역 뒤편, 지하철 1호선 3번 출구 앞. 사람들은 짤막한 인사도 나눌 새 없이 각자의 공간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차 숙의 토론회가 끝났다.

ps.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2박 3일간 2차 숙의 토론회가 열린다. 이 후기도 곧 공유하곘다. 혹시 대입 제도 개편에 관한, 아니 대한민국 교육 제도와 철학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바꿈으로 서슴없이 이야기해주시길. 반영될지는 모르겠으나 성실히 전달하겠다. 


* 본 기고글은 318로 익명을 요청하신 공론화 위원회 참가자 후기입니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안녕하세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함께

스타트업법률지원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법률지원단은 초기 스타트업들이 겪는 법률적 어려움과

법과 제도상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예비 창업자들을 위한 교육에도 힘쓰고 있는데요

이번 스타트업 교육은 부천에서 진행됩니다!



9월 4일부터 10월 23일까지 총 7강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참가신청-

http://naver.me/I5treVcS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헌법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법이라면, 헌법 전문은 그 나라의 얼굴과도 같습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헌법도 비슷합니다. 프랑스는 헌법은 1789년 인권선언, 1946년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4년 환경헌장을 헌법 전문에 담고 있습니다. 

다른 건 이해되는 데 환경헌장이라고요? 환경헌장은 프랑스 헌법 전문에서도 당연 눈에 띄는 내용입니다. 법학으로 유명한 엑스 마르세유 대학에서 2011년부터 공법을 가르치고 있는 올리비에 르 봇(Oliveir Le Bot) 교수를 인터뷰하며 프랑스 헌법이 가지고 있는 환경과 동물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우리나라의 개헌 방향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프랑스 헌법 전문에는 ‘환경권’이 있습니다. 

프랑스는 모든 국민이 균형 있고 건강한 환경에서 사는 것을 하나의 권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헌법에서 환경권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인권과 동등한 권리로 놓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이러한 헌법 전문을 바탕으로 환경을 훼손시킬 경우 법에 따라 손해 배상을 청구하거나 훼손된 환경에 대해 복구할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올리비에 르 봇 교수는 헌법에 환경권을 담아 이를 국가적 목표로 삼은 것은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올리비에 르 봇 교수는 “예를들어 개발업자가 고속도로를 짓는데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면 인간의 이익만을 생각해서 고속도로를 짓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요? 간단한 예시지만 환경헌장을 헌법 전문에 명시함으로서 개발업자들은 개발 여부를 고려하여 국민들에게 의견을 물어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국가적 목표를 환경에 맞췄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올리비에 르 봇 교수는 여전히 이러한 환경권의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개발업자들이 과거와 달리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긴 하지만 여전히 보여주기식에 그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헌법에 동물권을 넣는 것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입니다. 


올리비에 르 봇 교수는 환경권을 넘어 이제는 헌법에 동물권을 추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올리비에 르 봇 교수는 “헌법에 동물권을 넣어 동물을 보호의 목표와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체적인 입법으로 이어져 현행 동물보호법을 더 효과적으로 보장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헌법에 동물권을 넣는다면 동물에 대한 소유권이 줄고, 동물로 경제적 이익을 버는 사람에게는 제재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은 국가적 목표이자 상징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인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동물처럼 약하다는 이유로 학대한다면 사회적 약자인 사람을 학대하지 않으라는 법이 있나요?

1851년 프랑스는 공공장소에서 동물을 학대하는 행위를 금지했지만 사람들이 몰래 동물을 학대하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동물학대를 막으려면 결국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처음에는 동물을 물건이나 물체로 정의했지만 법이 발전되면서 지금은 당연히 생명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즉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일입니다. 실제 인도, 브라질, 스위스, 독일,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이집트 등 8개국은 이미 헌법에 동물권을 넣고 있습니다." 

특히 스위스의 경우 2000년 연방헌법에 생명의 존엄성을 명시했습니다. 이를 반증하듯 동물학대에 대한 처벌수위도 굉장히 높은데요. 동물학대의 경우 최대 3년 이하 징역, 2,300만원의 벌금을 물론 재산에 따라 차등으로 부과되어 더 많은 벌금을 물 수 있습니다. 독일 역시 인간과 동물의 동등한 권리를 강조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헌법적 내용을 배경으로 독일에서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별도의 세금을 납부해 동물보호와 복지에 사용된다고 합니다

물론 프랑스도 아직 헌법에 동물권을 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개헌에서 환경헌장이 들어간것처럼 언젠가는 동물권도 헌법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동물권은커녕 환경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요?

헌법을 바꾸는 것은 시민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올리비에 르 봇 교수는 한국의 개헌 논의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올리비에 르 봇 교수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변화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변화할 가능성이 큰 국가라고 봅니다. 30년 동안 헌법이 바뀌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개헌을 원하는 데 이를 보장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헌법은 인권, 민주주의, 사회적 가치를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를 권리로 만드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민들의 권리가 헌법에 보장되면 이는 시민들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권리는 결코 국가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들은 이러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발의한 개헌안은 끝끝내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 지방선거가 이후 야당을 중심으로 다시 개헌 논의가 이뤄질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그 논의가 시민참여나 촛불정신의 발로라기 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커보입니다. 7월 17일 곧 있을 제헌절을 앞두고 우리 헌법이 어떻게 바꿔야하는지 또 어떻게 시대적 가치를 담아낼지 고민해 볼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일부 정치인들의 왜곡된 의도가 아닌 다수의 시민들의 참여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바꿈, 세상을바꾸는꿈에 후원해주세요 (국민은행 468037-01-023581)*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제 이름은 박화자이고 학교 급식실에서 12년을 넘게 일해 왔어요. 경력이 단절된 중년 여성이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지 않잖아요? 게다가 출퇴근, 방학, 주말을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이 직장을 선택했습니다. 

 

낮은 인력기준과 낮은 처우! 아파도 쉴 수 없는 노동환경


처음 일한 학교는 15명이 일을 했어요. 학생들이 1,800명 있는 학교였으니까요. 문제는 사람이 점점 줄더니 마지막에는 4명이 일을 했어요. 11명은 해고를 당한 셈이죠. 학생은 그대로인데 15명이 일하던 곳에서 4명이 일을 하니까 당연히 일이 더 많죠. 노동 강도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급식이라는 게 학생들이 밥 먹는 시간 안에 다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저희끼리는 시간싸움이라고 하거든요. 단시간에 온 힘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뛰는 일이 많아요. 적은 인원이다 보니까 산재사고도 많이 나고요. 노동 강도가 세지다 보니까 근골격계 질환, 그 다음에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폐암 같은 각종 암 이런 게 요즘에는 점점 많이 나오는 거예요. 


4명이서 일을 하는데, 한 사람이 아프면 잘 못 쉬어요. 왜냐하면 내가 쉬면 동료가 힘들어지니까요. 어쩔 수 없이 한 명이 쉬는 경우 알바를 한 명 쓰긴 해요. 그런데 이 알바는 한 사람 몫을 못하잖아요. 그때 제가 급한 맘에 뛰어다니다가 넘어져서 벽에 부딪히면서 어깨가 파열되었어요.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내가 다치면 당당하게 산재로 쉬어야 한다는 이런 인식이 없어요. 눈치를 봐야 해서요. 그래서 저도 산재 이야기를 했지만 동료들한테, 학교한테 왠지 미안했어요. 


노동강도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고와 질병들


급식실 후드가 열기를 잘 못 빨아들이면 여름에는 온도가 50~60도가 돼요. 습기도 많아져 옷이 다 젖도록 일 했는데 1년 반 동안 돈이 든다고 후드를 안 고쳐주는 거예요. 그러다 어느 한 분이 보건증 사진 찍었는데 폐가 이상하다 해서 큰 병원 갔더니 폐암 말기라는 거에요. 우리가 봤을 땐 원인은 일 때문인데 명확히 안 나오잖아요. 딱히 밝히기도 힘든 거고. 그 전에도 튀김하면서 몇 번이나 쓰러졌었데요. 튀김은 160도 이상에서 튀기거든요. 160도를 한 사람이 최하 2시간은 튀겨요. 후드가 안 되면 쓰러지는 거죠. 또 한 분은 뇌졸중이 와서 오른쪽 뇌가 다 죽어서 마비가 됐고 지금 요양원에 있어요. 학교는 그 사건 이후 후드를 고쳤어요. 하루면 고칠 수 있는 건데. 그게 돈이 얼마나 든다고……. 


절단 사고도 많이 나요. 야채 같은 것도 기계로 썰잖아요. 손이 빨려 들어가요. 그리고 넘어지는 사고나 끓는 물에 화상사고도 많아요. 3년 전인가 어느 한 분이 후드를 닦다가 끓는 물에 빠져서 돌아가셨어요. 후드를 닦기 위해서는 솥을 밟고 올라가서 닦아요. 시간이 여유로우면 솥에 있는 끓는 물을 다 식히고 나서 올라갔겠죠. 그런데 시간 안에 끝내야 하니까 그냥 끓는 솥에 올라가서 닦는 거죠. 실수라는 게 내가 아무리 조심하려고 하지만 어느 순간적으로 나는 거니까요.


급식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대우와 오해들


저희 급식실 노동자는 위장병을 달고 살아요. 왜냐하면 짬 날 때 얼른 밥을 먹기 때문이에요. 밥도 학생들 주고 남는 거 먹을 때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많이 먹을 수 없죠. 점심시간도 따로 없고요. 그런 게 좀 서럽기는 해요.


노조를 만들고 활동하면서 너희들이 공무원 되려고 그러느냐는 말들이 많아요. 그런데 고시원에서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 합격해도 급식실에서 일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는 임금체계가 1년을 일 하나 20년을 일 하나 똑같아요. 이걸 좀 다르게 하기 위해서 근속수당을 만들어서 1년차 3만원 받으면 3만원씩 올라가서 오래 일한 사람은 거기에 맞게 더 받는 거 잖아요. 그거를 왜곡하고 있어요.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산재를 당당하게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쳤을 때나 골병들었을 때 산재로 당당히 쉬고 싶어요. 


‘산업안전보건법’이라는 게 있어요. 노동부는 학교가 서비스업이라서 법 적용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희는 급식실은 예외라고 주장했어요. 결국 노동부에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다고 했는데 교육청과 교육부가 서로 미루고 안 해줘요. 법만 만들어줘도 우리가 일할 수 있는 환경도 바꿀 수 있어요. 사고가 났을 때 산업안전보건위원회에서 사고 원인을 파악하고 사고를 예방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그 안에서 할 수 있어요.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에이삐: 


“퇴사하면 필리핀 어학연수 가려고, 여기는 답이 없다.”

“유럽 바리스타 자격증 따자! 영국 카페에서 일하는 게 삶의 질이 더 좋을 듯!”

“해외 나가면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몰라. 돈 모아서 일단 나가”


5년차 직장인인 회사 동기들이 모이면 꼭 이런 대화를 한다. 신세한탄과 더불어 퇴사하자를 외치곤 했는데, 언제부터일까 아예 한국을 떠나자는 말이 입버릇이 됐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탈출구는 아예 한국을 벗어나는 것이 답이라고 말하고 있다. 올해 동기들의 목표는 모두 영어 마스터하기다. 명확하지 않아도 한국에서는 어느 직장을 가든지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한국 기업들의 착취적 노동환경은 구조적인 국가 시스템의 문제니까. 



나는 특히 대학생 이후부터 지금까지 3가지의 배신의 경험 끝에, 외국으로 가야겠단 생각을 시작하게 됐다. 3가지 배신이란 첫째, 학문의 배신, 둘째, 고용의 배신 셋째, 기업의 배신이다. 

 

1. 학문의 배신 - 사상보다는 방법론에 치우친 정치학


나는 꽤 진보적인 가치관을 지닌 10대 소녀였다. 친미주의자인 선생님에게 반항하면서까지 ‘효순이-미선이’ 추모 집회, 반미촛불집회에 나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재단’이 주최하는 청소년 토론대회에 나갔고, ‘전국 고등학생 토론대회’에 나가서 ‘청소년 노동권 신장’에 대해 피력하기도 했다. 학교 축제에서는 ‘전태일 열사’의 얼굴을 판넬에 그려 전시하기도 했다. 나는 이 사회에 쓴소리 할 줄 아는 진보적 언론인이 되고 싶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바람대로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정치외교학과에 입학 후, 뜨겁던 나의 정치의식은 희미해졌다. 


정치학 수업은 정치사상의 근간, 역사, 정신을 배우기 보다는 행태주의, 기능주의, 방법론에 입각한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정치학도로서 정치원리와 선거제도 등의 방법론을 배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수업의 비중이 월등히 행태주의에 쏠렸던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다. 또한 2008년부터는 글로벌 바람이 불어 외국인 교수들이 대거 임용되었다. 정치외교학과에도 영국 출신의 외국인 교수가 임용이 됐고 그는 ‘국제정치’를 가르쳤다. 더 나아가 한국인 교수도 ‘미국정치론’이라는 수업을 개설하여 영어로 수업하고 영어로 시험을 보았다. 전공 수업이 학문의 깊이 보다는 영어 공부를 독려했다. 


이러한 커리큘럼 과정 아래, 정치학도로서의 정치의식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학생들 또한 어려운 정치사상 수업은 회피하고 점수 따기 쉬운 방법론 수업만 수강했다. 정치학도로서 가져야 할 문제의식, 시대정신은 강의실에서 휘발했다. 선배들은 더 이상 술을 마시면서 논쟁하지 않았다. 경제학, 경영학을 복수전공해서 각기 취업 전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바빴고 교내 취업센터 문을 두드리기 바빴다. 이것이 바로 단결할 수 없는 20대, 88만원 세대의 한 단면이었다. 


나도 시대정신의 열정을 잃고, 정치색을 잃어갔다. 점차 회색분자의 중간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히려 나는 어렸을 적 좋아했던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미술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문화기획, 철학 수업을 수강했고 문화예술에서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2. 고용의 배신 – 계약직, 저임금을 피하기 위한 방황 ‘꿈’과 ‘고용의 안정’은 ‘반비례’하다는 씁쓸한 결론.



4학년, 취업준비생 시기. 많은 친구들이 대기업에 지원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며 사라졌다. 나는 목적 없이 무조건 대기업에 취업하는 건, 청춘을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나의 길을 찾기 위한 노력과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술동아리에서 시작된 관심으로 문화예술기획, 컨텐츠 기획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창의적인 내 재능과 능력을 믿었고 ‘창조’를 근간으로 두는 ‘기획자’의 직업을 갖고 싶었다. 특히 내가 졸업할 당시인 2011년은 트위터, 페이스북을 비롯한 다양한 온라인 서비스가 각광 받은 시기다. 온라인 서비스에서 비전을 보았고 컨텐츠 기획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다행히 ‘웹에이전시’에서 인턴의 기회를 갖게 됐다. 


야근을 자처하면서 수 십 개의 스토리보드를 그리고 벤치마킹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본부장은 나를 인정해주었고 3개월의 인턴 기간이 끝난 후 정규직 전환도 수월하게 통과했다. 그러나, 나는 연봉계약서에 싸인을 할 때, 굉장한 찜찜함을 느꼈다. 연봉 1800만원, 기대보다 매우 낮은 연봉에 솔직히 실망했다. 알고 보니, 에이전시 계통의 연봉 체계가 10년차가 아닌 이상 박봉을 면할 수 없는 구조였다. 6개월 후, 결국 친구들과 연봉비교가 시작되면서 저임금의 자괴감을 못 이기고 퇴사했다. 


새로운 직장을 찾다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미술계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미술계는 박봉 중에서도 박봉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비전공자인 내가 미술계에 입문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이 기회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IT계에서 미술계로 직종 생태계 전환을 하며 나는 다시 인턴 생활과 저임금의 삶을 시작했다. 전시기획 인턴으로 받은 월급은 월 70만원이었다. 내 동생의 아르바이트 월급 보다 적었다. 그러나 회사 직원들 모두가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즉, 미술계는 집안이 받쳐주지 못하면 종사하기 힘든 구조인 것이다. 게다가 나를 제외한 모든 직원들은 석사 이상의 고학력자였다. 국장은 박사 출신이었고, 과장도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입는 옷은 소위 명품이었다. 국장, 과장의 연봉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직급이 무색할 정도로 적었다. 여느 사기업 말단사원의 연봉을 받고 있었다. 대체 그녀들은 그 월급으로 어떻게 화려한 패션을 자랑하며 생활유지를 할까. 직원들은 국장의 부모가 돈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가 국장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돈이 많아서 국장까지 갈 수 있다는 논리가 통하는 곳이었다. 인턴 생활 6개월 째, 계약 직원 2명이 퇴사를 했다. 국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 이래서 여유 있는 애를 뽑아야 된다니까! 이번에 새로 뽑은 00씨는 아빠가 한의사잖아. 그래서 뽑았어. 집안이 받쳐줘야 오래오래 다닌다니까!”


퇴사한 2명은 저임금을 견디지 못해 퇴사한 것이다. 그들은 사기업의 행정직 업무로 이직을 했다고 했다. 나도 머지않아 퇴사하느냐 저임금을 버티느냐의 고민이 찾아왔다. 미술계는 석사는 기본이다. 나도 미술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박봉으로 석사까지 밟아야 했다. 넉넉한 집안의 자녀가 살아남는 것이 통설이 된 이 곳. 박봉으로 석사를 하는 출혈을 일으키면서까지 이 곳에서 일해야 하는 당위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려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결국 미술계를 떠났다. 문화예술을 향한 비전과 꿈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 백수가 됐다.


취업준비생의 삶이 다시 시작됐다. 나는 컨텐츠 기획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출판사에도 지원을 했었는데 모두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 1~2년을 제시했다. 지난 2년 동안 저임금과 계약직 생활에 질린 나는 ‘계약직’이란 단어를 듣기만 해도 부아가 났다. 결국 다른 친구들처럼 고용의 불안정에 대한 걱정 없이 사기업, 가능하면 대기업에 취직하기로 결심했다. 2년의 방황 끝에 얻은 결론은 ‘꿈과 고용의 안정은 비례하지 않는다’ 였다. 꿈을 위해서는 고용의 불안정을 견뎌야 한다. 하지만 그건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저임금과 계약직의 나날들, 그리고 집안이 곧 능력이 되는 고용 현장의 아이러니를 다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3.기업의 배신 – 효율 아래 인간? 인간에 대한 예의는 어디에?



현재의 불안정을 넘어서는 길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 뿐이었다. 100개 이상의 기업에 서류를 제출했다. 직업적으로 꼭 어딜 가고 싶다는 방향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기업 공채 입사라면 어디든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의 체면을 위해서도 더 좋았다. 또한 적당한 월급, 안정적인 고용 구조, 조직적인 시스템을 꼭 느껴보고 싶었다: 더 정확히는 친구들이 받는 연봉을 나도 받고 싶었다. 


당시 나는 졸업한지 2년이 넘었기 때문에 졸업예정자만 대상자로 뽑는 기업은 지원 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건이 된다 싶으면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큰 관심이 없는 기업에도 모조리 지원했다. 제철회사, 제조기업, 게임회사 등 다양한 기업 면접장에 갔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한 대기업 유통 회사에 최종까지 붙었다. 


기업이 요구하지 않은 포트폴리오까지 별도 제출해가며 마케팅을 하고 싶다고 강하게 어필했다. 절박함이 통했는지 2013년 나도 대기업의 신입사원이 됐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저임금의 스트레스는 다소 해소가 됐다. 하지만 고용의 불안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원점 상태가 됐다. 고민은 여전하다. 답이라고 생각했던 대기업도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원했던 체계와 시스템이 있고 적당한 월급이 있지만, 노동 환경은 ‘지속 불가능’이다. 내가 몰랐다. 기업에는 인본주의 사상이 없다. ‘효율경영’ 아래 ‘노동하는 직원’이 있을 뿐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배려가 없다. 


매해 조직개편이 차갑게 일어난다. 회사는 ‘비효율, 비능률 척결’을 명분으로 오랫동안 회사에 충성했던 사람들을 단칼에 쫓아낸다. 금번 조직개편에서도 40대 과장, 차장, 부장 급들이 우수수 나갔다. 사전 통보란 없다. 인사발령이 뜨면 보통 일주일 내에 나가야 한다. 어떤 기업은 인사발령이 뜨면 바로 그 다음날 이동을 한다고 한다. 만약 그런 회사라면 통보 받은 다음날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바로 실직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올해 사업부의 목표는 ‘Low cost operation’ 이다. 매출은 계획대비 ‘110%달성’, 비용은 예산대비 ‘90%만 소진’하란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한 말인가. 비용은 줄이면서 매출은 초과 달성하란다. 가능한 미션인가? 게다가 비용은 작년 대비 30%나 삭감했고, 매출 목표는 작년보다 15% 신장계획이다. 참으로 무서운 목표인 것이다. 이와 같은 회사의 무리한 목표 아래서 직원들의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는 더욱 심해진다.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이 직원들은 끊이지 않는 실적 압박을 받는다. ‘저녁 있는 삶’은 꿈일 뿐, 보고 자료를 위한, 즉 페이퍼 업무를 위한 새벽 출근과 밤샘 야근이 강행되고 그것에 대한 보상은 없다. 노동의 질, 삶의 질이 바닥 수준으로 떨어진다. 


요새 야근 수당을 주는 회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야근수당을 대체하기 위해 회사가 고안한 아이디어는 ‘시간 외 수당 1시간’을 무조건 연봉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회사의 꼼수다. 야근 수당은 본래 세금 제외 대상인데 ‘시간 외 수당’이란 것은 연봉에 포함되어 세금까지 뗀다. 직원들 입장으로서는 손해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6시에 퇴근하는 사람은 없다. 시간외 수당 1시간 보다 직원들은 훨씬 더 강도 높은 야근을 하고 있다. 회사는 이를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한다. 


그리고 요사이 회사의 장기 목표 중 하나가, ‘향후 10년 이내 현재 인원의 30% 감축’이라는 소문이 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2015년 12월 시작된 ‘두산인프라코어’의 대규모 구조조정 사건. 신입사원까지 포함하여 희망퇴직을 받았던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 곳에는 내 친구도 있었다. 그 때 전해들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팀장이 주임, 대리 급들을 불러놓고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 


“너네들 중 누가 퇴사할래?” 팀장이 물었다. 

“저는 결혼도 했고, 와이프가 임신 했습니다. 팀장님.” 한 선임 대리가 말했다.

“그래? 너는 죽어도 못나가겠다 이거지? 그래 너는 그럼 퇴사하지 말고, 여기서 승진할 생각 추호도 하지마!” 


두산인프라코어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이듬해 양호한 영업이익을 얻었다. 재무상황이 크게 개선됐다고 한다. 씁쓸하다. 사람이 죽는 대신 기업은 살았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우리 회사도 두산의 피바람나는 구조조정이 언젠간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분명 회사는 사람에 의해서 굴러가고 사람의 노력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사람다운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기업에 인본주의 사상을 심어주고 싶다. 


오래 전부터 인사팀에서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안착시키기 위한 교육 등을 수시로 연다. 그러나 기업 내 하향식 업무 지시와 위계적인 조직문화가 고쳐지긴 힘들어 보인다. 위계적인 질서로 꽉 짜인 조직 분위기 아래,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의 재기 발랄한 창의성은 3개월 안으로 말살된다. 어느 누군가 호기롭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면 눈썹을 찌푸리며 “그게 될 것 같아?” 라는 말로 아이디어의 발산을 빠르게 제지한다. 모순적인 것이, 창의적인 기획을 요구하면서 창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올해로 입사한지 5년차가 됐다. 지난 1월 대리로 승진했다. 그런데 동기 한 명은 진급하지 못했다. 그녀는 1달 전에 아기를 낳아 출산휴가 중이었다. 동기들은 조심스레 그녀가 출산휴가 중이기 때문에 누락된 것 같다고 짐작을 하고 있다. 3개월 출산휴가가 끝나면 바로 업무 복귀한다던 그녀는 1년 육아휴직을 써버렸다. 아마도 자존심에 1년 휴직 후 퇴사할 것이다. 또한 1년 육아휴직을 쓰면 아예 다른 사업부로 발령을 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업무의 연속성이 깨진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여자직원들은 1년 육아휴직 후, 그냥 퇴사해버린다. 


우리 사업부의 여자 직원 비중은 65%수준으로 굉장히 높다. 하지만, 여자 과장은 15% 남짓, 여자 차장은 10% 남짓, 여자 부장은 5% 남짓이다. 여자 임원은 없다. 그 많은 여자 직원들의 생명력은 대리에서 보통 끝나는 것이다. 여자 직장인으로서 비전 찾기가 힘들다. 


3가지의 배신 끝에, 회의론자가 돼버린 나



지속가능하지 않은 이 일터에서 내 삶을 전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회의감이 든다. 물론 업무적으로 지난 4년간 많은 성장을 이루었고, 모범상을 받을 만큼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과장으로서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숨이 막혀온다. 또한 그 때까지 이 회사가 건재할 것이란 보장도 없다. 게다가 요새는 같은 업무를 5년 째 반복하니 매너리즘까지 왔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월급 이상의 가치가 없다. 회사에서 인정 받는 것은 업무와 나의 적합성 때문이 아니고, 단지 내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업무를 확실하게 할 뿐이다. 내 재능을 살리는 일, 내 인생의 비전을 위해 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꿈을 찾기 위해, 다시 24살의 방황을 또 하고 싶진 않다. 저임금과 고용의 불안정, 그 비참함을 나는 절실히 겪었고 잘 안다. 그렇다면 결국 이 회사에서 지루한 버티기를 지속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숨이 나온다. 


나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어려서부터 창조적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 미래 비전은 바로 그 어딘가에 있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답 없는 고민만 되풀이 될 뿐이다. 결국 지구본을 반대편으로 돌려 유럽에서 시선을 멈춘다. 외국에서 이론부터 탄탄히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서른 한 살의 내가 해외로 눈을 돌리는 이유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일까. 여태까지 이야기를 했듯, 단 하나의 이유가 아니었다. 하루 이틀 겪은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10년 동안 학문의 배신, 고용의 배신, 기업의 배신들을 겪으면서 쌓인 결과다. 


-기능주의에 매몰된 학풍과 이론의 실종

-불안정한 고용과 터무니없는 저임금

-지속불가능한 노동환경

-인본주의사상이 부재한 기업과 효율경영이란 무시무시한 슬로건


여러 가지 배신의 연속들이 한국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만들었다. 구조적인 문제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요새는 희망이란 단어가 굉장히 낯설다.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희망’이란 단어를 쓰는 것인지 잊었다. 한국에서의 희망은 체념했다. 내 주변의 서른 한 살들은 이제 ‘외국’이라는 단어 뒤에 ‘희망’을 쓴다. 


100세 시대. 아직 인생의 70년이 남았다. 남은 70년을 위해 서른 한 살들은 무엇을 헤야 할까. 희망, 꿈, 열정, 긍정의 구름 아래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곳. 마음껏 창의적일 수 있는 노동 환경, 인간 중심의 철학을 가진 기업. 역사와 이론 중심,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학교. 

한국에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유토피아적 상상일 뿐일까.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동그리(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


이 글을 쓰기 전, “인권, 인권이 존재하기 위해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본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봤을 때, 인권은 늘 그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는 여부와 함께 확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물론 이는 선결, 앞뒤의 문제가 아닌 동반자적인 입장이겠다.) 하지만 성소수자 인권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왜 원하지 않는 것일까? 이를 위해 성소수자의 존재를 끊임없이 지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그렇고 내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대학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 속에 대학 사회가 있는 것이니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나는 내가 속해있고 접근성이 높은 대학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속해 있는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이하 큐브)는 2013년 차별금지법 제정과 대학 내의 성소수자 인권 또한 우리 사회의 인권지수와 무관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면서 2014년에 만들어진 연대체이다. 이곳은 2016.12.31 기준으로 전국 54개 대학, 59개모임이 모여있다. 이처럼 대학사회는 상대적으로 성소수자에 친화적이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일 수 있겠다. 하지만 성소수자모임이 많은 만큼, 어떤 경우에 따라 가시화가 되어 있다보니 그 만큼의 반동과 혐오, 탄압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서강대학교의 경우는 학내 성소수자모임인 ‘춤추는 Q’에서 신입학시즌에 게시한 성소수자 신입생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교수가 임의대로 철거한 사례가 있었다. 학내에서 게시를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행정정차를 다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해결하는 과정에서 교수는 ‘서강대 학우는 비성소수자들도 있는데, 성소수자 입학생만 축하하는 것이냐 그러면 안된다.’는 말과, 원래 지저분한 것을 잘 떼는 사람이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되기도 하였다. 이에 학생 사회에서 각 학생회가 규탄 서명을 내고 고소장을 접수 하는 등의 대응을 진행하기도 했다. 


보수 기독교 교단의 대학인 총신대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총신대의 경우, 퀴어문화축제에 본 대학모임인 깡충깡충을 색출해 내겠다는 이유로 축제 당일 학교본부와 교단 소속 목사를 퀴어문화축제 행사장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퀴어퍼레이드를 하는데 깡충깡충 구성원들의 신원노출을 우려해 대신 깃발을 들었던 사람을 학교에서 고소를 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반동성애 운동을 하는 기독교이기에 채플시간에 혐오발언은 물론 교수들의 혐오발언도 매우 심한 곳이기도 하다.


몇몇 사례일 뿐, 대학이라는 공간의 혐오는 어느때보다 짙고, 반동은 어느 때보다 심하다. 숭실대는 인권영화제에 성소수자 관련 영화를 상영한다는 이유로 대관거절, 고려대도 마찬가지며, 성소수자의 존재를 대학 사회에서 끊임없이 지우려하고 지움당하고 있다 하지만 작년 김보미 서울대 총학생회장, 고려대 동아리연합회장를 시작으로 연세대 총여학생회장, 카이스트 부총학생회장, 계원예대 총학생회장이 생겨났고, 뿐만 아니라 학생사회에서 끊임 없이 커밍아웃을 하고 학생 사회의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일까? 왜일까?


이런 대학사회 내 탄압 속에서도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고 있으며, 선출직은 아니지만 커밍아웃을 한 채, 인권위원회라는 학생사회 내 기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내가 있는 학교는 그렇게 성소수자를 비롯한 혐오가 가시적으로 팽배한 공간은 아니다. 하지만 교수님들의 입에서 “동성애는 출산을 할 수 없기에 수용할 수 없다.”, “동성애는 죄다.” 라는 말들이 간간히 나오고 있는 공간이다. 내가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하고 활동을 결심하게 된 것 역시, 교수님들의 동성애 혐오적인 말들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여자/남자친구에 대한 물음은 물론, 이성애중심적인 발언이 나오고 그 과정에서 나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이 답답했다. 


또한 학내에서 각종 문제시 되는 인권침해적 상황, 그리고 발언들이 비일비재하지만 아무도 제약하거나 조정할 수 없었던 상황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인권위원회라는 기구도 없었고, 총학생회 역시 부재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이 상황에 있어 몹시 못마땅 하였고 이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모으고 정책과 상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오는 것은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있는가?”였다. 그래서 내가 인권을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당사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커밍아웃을 했고, 학생 대표자들의 인준을 통해 학생회를 할 수 있었다.


학생회를 하면서 학생 사회는 많이 변했다. 각 과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보다 가시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교육들을 각과가 자생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기존에 말하지 못하던, 소수자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장애인도 장애인권 소모임이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있고, 채식인들의 인권 역시 활발하게 교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로서 나의 커밍아웃은 완성되었다. 


나의 커밍아웃은 맨 처음에는 나의 야망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대학이라는 공간에 있으면서 쉽게 학생회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커밍아웃을 했던 것도 있다. 그리고 그냥 나를 숨기는 것 자체가 너무 이해가 가지않아서 말한 것도 있다. 내게 커밍아웃의 시작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나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소수자성을 무기삼아 치사하게 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커밍아웃은 학교 안에 다른 변화와 의미를 만들어 냈다. 커밍아웃은 단순히 나의 존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었다. 숨겨진 사람들, 존재들이 세상에 거는 대화였던 것이다. 소통이었다. 커밍아웃은.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끊임없이 내재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언어화를 하는 내부의 커밍아웃을 경험하고 그것을 밖에, 세상에 말하는 하는 커밍아웃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오히려 나를 커밍아웃을 함으로서 세상으로부터 공격당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의 사회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커밍아웃을 하는 이유를 찾았다. 그것은 나의 존재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이고 우리 공동체에 던지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로 인해서 학교는 변했다. 교수님들의 문제적 발언을 문제제기 할 수 있는 창구가 만들어졌고, 학생회가 소수자를 위해 신경써야 하는 부분들을 인식하고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존재하였으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 나의 커밍아웃의 시작은 조금 별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인권을 함께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인권은 어느 하나, 누구 하나만의 것이 아니다, 정말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면서. 나는 나의 커밍아웃으로 만들고자 했던 학교를 만들 수 있었다. 


나의 존재로 세상에 끊임없이 말을 걸고 나를 증명해 보일 것이다. 나의 존재가 우리 모두에게 좋다. 좀 더 설쳐보자.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나보배(바꿈 청년네트워크)


세계 8위 컨테이너 선사인 국적선사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로 물류대란과 경제적 손실이 막대해 큰 이슈인 가운데, 찬물을 끼얹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바로 승선실습생의 처우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미 한 언론사의 보도로 이 바닥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이 또한 이슈로 오래 자리 잡지 못하고 잊혀질 것 같았다. 그래서 한 번 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해기사 실습생, 소위 승선실습생은 해기사 지정교육기관과 오션폴리텍에서 소정의 학습을 마친 후, 위탁기관인 해양수산연수원이나 자교의 실습선 그리고 해운선사에서 승선해 승선실습교육에 임하게 된다. 특히 이번에 거론할 문제가 바로 해운선사에서의 실습이다. (이하 선사실습)

 

선사실습은 보통 6개월정도 이루어진다. ‘선원의 훈련, 자격증명 및 당직근무의 기준에 관한 국제협약’ ( 이하 STCW )의 기준에 맞는 훈련기록부를 작성하고 평가하면서 체계적인 승선실습교육을 받도록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훈련기록부에 크게 벗어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교육이라고 보기 어려운 단순작업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지시 등이다. 장시간의 단순육체노동 혹은 밀폐구역 작업과 고소작업 등과 더불어 야식, 동영상 다운로드, 개인 심부름 등 사적인 업무를 강요하는 것 등이다. 이런 부조리에 대해 항의하기 어렵다. 해상생활의 특수성 때문이다. 고립된 환경에서 외부와의 소통에 어려움이 따르고 그로 인해 부당함을 대처하지 못하고 스스로 참는 일이 많다. 내부에서는 불만이 많지만 사회 밖에선 전혀 주목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것이다.

 

그리고 임금에 대한 문제이다. 선원법이 보장하는 선원 최저임금기준에 합법적으로 제외되어있다. 선원 최저임금의 고시에 따르면 해기사 지정교육기관 출신으로 근로자 신분이 아닌 순수 기술습득을 목적으로 실습 승선한 경우는 최저임금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합법적으로 수산해양계 교육기관 출신자가 실습생으로 승선하면 최저임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해괴한 논리로 지금까지 적게는 월20만원에서 60만원대를 받는다.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실로 납득하기 어려운 급여가 아닌가 한다. 현장실습생에 관한 판례에 보면 실습교육 중에도 사용자의 이익증진에 영향이 있었다면 근로자로 봐야한다는 판례가 있다. 교육의 목적에 벗어나 사측에 이익을 안겨준다면 근로자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원은 근로기준법이 아닌 선원법을 준수하도록 되어있고 승선실습생은 선원법상 선원으로 제외되어있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실습생은 저임금 교육성 노동을 하고 있다. 물론 현장실습에선 작업현장에 동참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피교육자가 느끼기에 과연 교육과정이라고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승선실습을 거쳤던 해기사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으면 한다.

 

나는 이등기관사로 승선하는 동안 2명의 실습생이 거쳐 갔다. 30만원을 받던 미성년자 실습생이었다. 실습생이 동승하면서 분명 나는 작업 활동에 큰 도움을 받았고 편했다. 그들의 교육활동은 사용자인 선주에게 분명 이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실습생 시절도 그 친구들처럼 야간당직과 밤낮을 가리지 않은 입출항과 정비작업의 연속이었다. 최근 201683일부터 적용되는 직업교육훈련 촉진법 개정안에서는 미성년자이거나 직업훈련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현장실습생에 대해 주 35시간, 합의 시 11시간으로 총 5시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현장실습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또한 밤 10시에서 아침 6시까지의 시간과 휴일에는 현장실습을 금하고 있다. 그 외 근로기준법의 일부도 준용되는 등 현장실습생에 대한 보호적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조금씩 변화는 오고 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작 선사실습생들은 이 사실에 대해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지 걱정이다.

 

이들의 고초를 교육기관과 더 나아가 해양수산부가 실습생의 처우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하고 책임져야한다. 해운업계의 오래된 악습에 대해 취업률을 이유로 실습생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모습은 지양되어야할 것이다. 해기사는 유사 시, 물자수송을 담당하는 역할과 동시에 한국의 주력산업인 조선 및 해운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직이다. 해기사의 시작점에서 견디어야할 부당함의 무게를 덜어 주어야한다. 오늘도 선원법의 몇 문장에 힘겨운 하루를 보냈던 시절과 아직도 그 힘겨움을 겪어야할 예비해기사들을 생각하며 결의를 다진다.

 

 

* 나보배씨는 승선근무예비역으로 승선근무 마치고 지금은 환경단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최근 대학에 입학자가 많다고 난리이다. 대학의 입학 정원이 고등학교 졸업자가 훨씬 많다고들 이야기한다. 이제는 대학의 덩치를 줄이고 대학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 대학의 학과 정원을 줄이고 대학의 학과를 통폐합하고 있으며 이를 제대로 수행하면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겠다고 한다. 이를 두고 수많은 대학 교수,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서고 심지어 대학 졸업생들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남의 일로만 바라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교육권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제31조에 교육권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와 의무, 의무교육와 무상교육의 원칙을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하고 있음에도 그 헌법 조항을 실행하기 위하여 제정한 여러 법률에 의하여 그 교육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늘 음지에서 있어야 했고 존재마저 부정당해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야 했다. 병신, 봉사, 귀머거리, 불구자, 심신미약자, 장애자, 장애우. 바로 장애인의 교육과 대학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한국에서 장애인의 교육권 문제는 지금까지도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장애인의 교육권 자체는 헌법, 교육기본법과 같은 법률에 의하여 보장되었고 특수교육진흥법에 근거하여 실행되었지만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이러한 법률에서 장애인들의 교육권을 제한해서 적용할 수 있는, 요컨대 중도 중복 장애인의 교육권을 유예하거나 예외로 둘 수 있는 조항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수많은 장애인들이 교육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육권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들과 장애 학생 학부모들의 오랜 투쟁 끝에 2008년이 되어서야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에서는 그동안 침해당했던 교육권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고등교육, 즉 대학교육에서는 아직까지도 문제가 산적해 있다. 


장애인의 대학 교육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장애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는 동인이 부족하다. 둘째, 장애 학생이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하다. 셋째, 장애 학생이 대학에 입학한 후 받을 수 있는 지원이 부족하다.


우리가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장애 학생 당사자들이 얼마나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가’일 것이다. 장애 학생이나 장애 학부모들의 대학 진학 요구 자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2011년에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특수교육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 학생의 학부모들이 장애 학생의 상급학교에 대한 진학을 희망하는 비율이 43% 내외로 나타났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은 장애 학생의 대학 진학 요구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장애에 대한 사회 시선의 변화, 장애 학생 부모의 학력 향상 등을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 학생의 대학 진학 요구와 장애 학생의 대학 진학 비율 자체는 비장애 학생의 그것에 비교하면 낮은 수준이다. 특수교육 현장 특히 특수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장애 학생들의 대학 진학에 대한 인식을 들어 본다면 그 원인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 학생들은 특수교사나 혹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장애 학생에 대한 낮은 기대, 그리고 장애인의 취업 시장이 가지고 있는 특성으로 인하여 대학 진학에 대하여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다. 특수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는 학생들의 진로 특성은 다음과 같다.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전공과 진학이며 무직 및 미상, 보호 수용, 취업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장애 학생들은 대부분 전공과에 진학하며 직업 교육을 받거나 취업을 준비하고 취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취업 현장에 뛰어든 장애인들을 원하는 산업 현장은 대부분 2차 산업에서 단순 조립을 하거나 제과 제빵을 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직업군들은 고학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되려 고학력이 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장애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한 후 졸업하여도 마땅한 직업을 갖추기에 쉽지가 않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장애인 의무고용 제도에 따라 장애인을 고용하는 데 소극적이고 그나마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선에서 경쟁할 수 있는 취업 방법은 공무원 혹은 교사 임용을 준비하는 것이며 그나마도 그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전환 및 자립을 위해서 대학에 진학할 필요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교육 그 자체에 대한 소극적 자세로까지 이어진다.


장애 학생의 대학 입학 기회 부족은 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입시 교육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장애 학생과 학부모들의 대학 진학 요구가 점차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입시 교육은 답보 상태에 놓여 있다. 장애 학생들은 대학 입시를 목표로 둔다 하더라도 현재 교사들과 특수교육기관들은 대학 입시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먼저 대학 입시에 관한 경험이 없을뿐더러 대학 입시에 대한 정보 등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하다. 특수교육기관의 고등학교 과정을 거친 학생들의 진로 설정은 취업 및 직업 교육에 한정되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장애 학생의 상당수가 직업 교육을 담당하는 전공과로 진학하거나 바로 취업 전선으로 가고 있다.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특수교사들도 대학 입시와 관련된 정보, 요컨대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대학 모집과 관련된 정보나 준비 방법 등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는 특수학교일수록 더욱 심하다.


거기에 더해서 장애 학생들은 사교육을 받을 기회 자체도 부족하다. 사교육 현장은 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일단 사교육계에서도 가지고 있는 입시 정보는 대부분 일반 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비장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들이다. 특수교육기관에서 재학하고 있는 장애 학생들을 위한 입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거기에 덧붙여 장애 학생의 이동권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상당수의 사교육 시설은 건물 입구부터 강의실까지 장애 학생이 이동하고 사용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공교육부터 사교육에 이르기까지 장애 학생이 대학 입시를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대학으로 진학한다 하더라도 장애 학생이 경험하는 어려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장애 학생의 교육 문제 지원를 비롯하여 여러 지원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서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에는 각 대학에 장애학생지원센터를 설립하고 운용하도록 하고 있다.(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 제30조) 그와 함께 장애 학생 지원을 위한 특별지원위원회를 설치 및 운영을 규정하고 있다.(동법 제29조) 더불어 장애 학생과 관련된 지원 제공을 학칙으로 규정하도록 하고 있다.(동법 32조) 이러한 법률을 근거로 대학은 특별지원위원회와 장애학생지원센터를 기반으로 장애 학생에 대한 편의와 지원을 제공하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대학 장애학생 교육권 실태 및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2009년 4월 현재, 장애학생이 1명 이상 재학 중인 218개 대학 중 장애학생 지원 업무를 전혀 시행하지 않고 있는 대학은 무려 193개에 이르고 있으며,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특별지원위원회를 개최하지 않은 대학도 무려 172개교에 이른다. 장애학생의 재학 여부와 관계없이 전국의 353개 대학 중 장애학생 지원 관련 사항을 학칙에 반영하고 있는 대학은 80개교에 불과한 실정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학 장애학생 교육권 실태 및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에서는 개선이 필요한 사항으로 다음을 지적하였다.


첫째, ‘장애인 대학입학 특별전형 제도’는 계속 확대 시행되어야 한다고 조사되었다. 다만 수단으로 전락한 특별전형제도가 그 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둘째, 대학의 장애학생 특별지원위원회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장애학생지원센터 또는 장애학생 지원부서는 전문성이 부족하여 장애학생에게 적절한 서비스가 되지 않고 있다. 도우미의 경우 사전 교육 없이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 셋째, 특별전형 관련 지원 대학의 정보가 부족하여 대학 선택의 어려움이 있으며, 문자통역 등 적절한 수험편의가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므로 공정한 경쟁이 어렵다. 입학 지원 과정에서도 여전히 차별행위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합격생에 대한 대학생활 안내가 부족하다. 넷째, 장애학생을 위한 교수-학습지원 가이드라인 구축, 대체강좌 개설 지원, 튜터링이나 멘토링 지원 등의 교수-학습 지원 환경이 여전히 구축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보조공학기기 지원이나 교수-학습 지원을 할 수 있는 인력 등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역 없이 수업을 듣거나 교재 없이 수업에 참여해야 하는 장애학생들도 발견되었다. 따라서 효과적인 교수-학습 지원 체계가 확대 또는 구축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섯째, 대학 내 시설의 이동 및 접근 편의가 미흡한 편으로 나타났다. 강의실을 비롯하여 대학 내 각종 시설에 대한 편의시설 설치가 부족한 경우가 있었고, 시설 이용에 따른 추가적인 지원이 부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숙사 지원의 경우 활동보조인 지원 등 인력 지원이 필요하지만 이를 모두 지원하고 있는 학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애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자치활동이나 학생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와 같은 학교 내에서의 활동에 대한 별도의 지원 체계가 부족하여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어려운 것으로 확인되었다. 여섯째, 현재 장애학생의 진로 및 취업지원은 주로 상담을 중심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학교 차원에서 장애학생의 취업 정보 제공, 취업 지원, 추수지도 등 다양한 취업 지원 프로그램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7년 이래로 대한민국의 인권은 개선되어 왔으며 이제는 완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대한민국의 인권은 이야기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으며 만민이 평등한 사회라고 진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장애 학생이 현재 겪고 있는 교육권 침해 실태, 특히 장애 학생의 대학 진학, 재학, 졸업을 둘러싼 문제점들은 장애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단편이다. 장애 학생들이 대학의 진학 과정에서, 재학 및 졸업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어야 교육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소수자의 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졸업을 앞두고 새 국회에


2016.5.26. 한겨레


박영민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활동가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졸업이 다가왔습니다. 그간 대선부터 지방선거, 총선까지 거의 다 해본 것 같아요. 나의 한 표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를, 고민하고 또 염원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제보다 더 진보했고, 좋아질 거라는 희망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동국대 북한학과에 재학 중인 저는 최근 36년 만에 개최된 북한 조선노동당의 당 대회를 관심 있게 봤습니다. 당 대회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악화된 남북관계는 북한학도에겐 막연한 정치가 아닙니다. 취업과 미래를 결정지을 현실에 가깝습니다.


당장 남북교류를 다루는 회사도, 정부부처도 없는 상황이니, 막막하기만 합니다. 금강산 관광사업 중단으로 2011년 기준 약 6000억원대의 손해를 입은 현대아산뿐만 아니라 개성공단 중단 사태로 사업주와 노동자들이 생활고로 힘들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사업계획이 확대될 일도 없기 때문이죠.


최고 수치를 기록한 청년실업률 앞에 정부는 청년과 대학에 그 탓을 돌립니다. 취업을 하지 못하는 것은 대학에서 적절한 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수요를 염두에 두지 않은 학문을 배운 청년들 탓이라는 것이지요. 정부의 이러한 불호령 앞에 대학은 앞다퉈 ‘프라임 사업’이라고 불리는 구조조정을 진행합니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인문·사회계열 인원은 축소되고 그 인원을 공학계열에서 충당했습니다. 교육부에는 ‘너무 많은 대학과 대학생’이 오직 인문·사회계열에만 해당했던 모양입니다. 프라임 사업의 결과로 해당 대학 전체 인원의 11%에 해당하는 5351명이 ‘감소’한 것이 아니라 ‘이동’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인문계열과 공학계열을 복합한다는 명목으로 신설된 학과들을 보면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 곳인지 알 수 없습니다. 경희대는 국문학과와 전자전파공학을 합쳐 웹툰창작학과를 만들겠다는 입장을 밝혀 논란을 샀고, 국민대는 ‘엔터테인먼트디자인 테크놀로지학과’ 등 읽기도 힘든 영어를 다 가져다 붙여 과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사실은, 대학에선 문과의 씨를 말려놓고 정작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자며 ‘인문학 증진법’을 공포한 게 다름 아닌 정부라는 것입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청년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우리가 왜 취업에 실패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가장 분명한 건 문과생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겁니다. 적절한 분배도 없이 발전을 외치며 돈 되는 기업만 키워주는 풍습이 원인입니다. 인력난에 힘들어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경직된 시장은 고려하지 않고 취업이 안 되면 창업을 하라고 말하는 정부가 원인입니다.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나라 정치의 암담함이 보입니다. 청년들의 투표율이 계속해서 상승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생존의 문제가 닥친 청년들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없습니다. 승리했다는 성취감에 취해 20대 국회에 기대하고 있는 청년들을 잊어버리진 않았으면 합니다. 앞으로의 4년은 눈에 보이는 성과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패기 넘치게 출발 테이프를 끊은 만큼 모두의 염원을 빌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꼭 일조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원문 바로가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 전태일 재단 이사장 이수호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현실이 이러니 우리가 할말이 없지요"

창신동 전태일 재단을 찾아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초행길이라면 재단 건물을 쉬이 지나칠 지도 모른다. 건물의 외관이 주변 봉제공장들과 허물없이 생긴 통에 그렇다. 전태일 재단 이사장인 이수호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골목을 더듬거리며 다니느라 진이 빠진 상태에서 건물 내부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려니 숨이 턱턱 막혔다. 계단을 밟아 오르며 선생이 지나온 자리를 하나씩 곱씹었다. 국어교사, 전교조위원장, 민주노총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내 딴에 어설프게 알아 봐둔 약력만으로도 이러했다. 선생이 머무르는 재단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나도 모르게 큰 숨을 고르게 된 것이 오직 계단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이수호 선생을 만나기 전 공부가 필요했다면 너무 부끄러운 고백일까.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선생이 교육운동,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투쟁하던 80년대는 내가 태어난 시대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월이기에 그의 삶을 어쭙잖게라도 아는 체 하려면 사전공부가 필요했다. 그러나 선생의 인생을 몇 줄 이력으로 알아보려는 무모함은 이수호 선생의 인자함 앞에서 백기를 들었다. 찾아 온 이들을 향한 애정 어린 그의 눈빛에 나는 그만 고백해버렸다. 선생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고 말이다. 나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사람 좋게 웃으며 1948년, 경북 영덕에서의 출생부터 털어놨다.
 

영덕에서 태어나 대구 변두리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가난한 집안 살림을 생각해 대학 진학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선생님의 권유로 야간학교를 가게 됐는데, 교직 이수가 가능한 국문학과였다. 실은 대학을 가게 된다면 꽃을 만지는 농대에 가고 싶었다며 선생이 멋쩍어 했다. 꽃을 만지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교육, 노동계의 최전선에 서서 투쟁을 이끌던 그였다. 그러나 이내 원예도 그가 하면 참 어울렸겠단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 쓰는 위원장, 시 읽어주는 위원장이었다. 

"노동조합에 상근하는 사람들이나 활동가들은 탄압을 이겨내고 민주화를 이뤄내기 위한 싸움, 투쟁을 주로 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어요. 또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을 이겨내는 우악스러움 같은 것들도 있죠. 그럴수록 정서적이고 따듯한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민주노총 위원장일 때 회의 시작 전에 짧은 시를 읽었어요. 거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마음 속엔 항상 따듯함을 간직하고 있거든요. 저는 그것을 살려내고 싶었어요." 

노동 운동의 부드러운 결을 알아보고 밖으로 되살리려 했던 그의 안목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꽃을 사랑하던 소년 이수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와 운동의 간극은 크다. 물렁함이 오히려 독이 되지는 않았을까, 부드러움이 도리어 해가 되는 건 아닐까.  

"도종환 시인의 시 중에 <부드러운 직선> 이라는 말이 있어요. 직선이라는 것은 힘 있게 쭉 뻗어가는 것인데, 그것도 사실은 부드러울 때 더 힘이 있고 강해지고 그러면서 부러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강하기만 하면 부러지잖아요. 부드러우면 유연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런 태도가 굉장히 중요해요."

부드러운 직선, 도종환 시인에게서 탄생한 시어가 이수호 선생의 삶으로 살아지고 있는 듯 했다.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다 학교에서 해직당하고 반복되는 투옥을 경험했지만 물러섬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그만의 부드러운 기개로 부러지지 않고 지난한 시절을 이겨왔을 것이다. 


"지금 현실을 보면 우리 세대가 좀 더 잘 했더라면 이런 사회는 안 물려줬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제가 겪어 온 시절과는 개념이 조금 달라졌지만 청년실업과 빈곤문제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심하고 구체적인 문제로 남아있어요. 현실이 이러니 저희 같은 선배세대가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선생의 단단함도 지금의 현실을 얘기할 때만큼은 급히 초라해졌다. 말끝을 흐리는 그의 얼굴에서 착잡함이 묻어났다. 이제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시각과 방식으로 자기들이 살아갈 시대에 맞는 정답을 써야 하는데 당신 세대가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숨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태일 재단에도 젊은이들이 북적였으면 좋겠다했다. 전태일 정신을 박물로 남기지 않고 젊은 세대와 함께 살아 숨 쉬게 하려는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마음만큼 젊은 세대와 더불어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부끄럽기 그지없는데, 지금의 제가 아주 작은 만큼이라도(이 마음도 버려야 하는데)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젊은 세대들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나를 수단으로 삼으세요."

나는 자신이 보내온 세월을 한 없이 낮추는 선생의 초연함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서글펐다. 단지 우리가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배 세대들의 통렬한 반성문을 받아 볼 자격이 있나 스스로 되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청년은 답이 아니다. 건강한 시대를 만드는 합은 서로를 그러안는 세대 간의 포옹이 아니던가. 이수호 선생이 청년에게 거는 기대는 쭈뼛거리는 청년에게 그가 먼저 내밀어 준 손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밀었던 그의 손을 이번엔 나도 덥석 잡고 가능한 오래 함께 걷고 싶다.


"이제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뒤에서 밀어주는 일이겠지요. 제가 운동을 해오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기울인 노력이 씨앗이라면 봄과 같은 조건만 되면 일시에 새파랗게 싹을 틔운다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 중요해요. 그런 과정의 총합으로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젊은 그대들이 착 피어날 때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해요." 

선생의 위로와 배웅을 받고 건물을 나와 걷다가 문득 돌아봤다. 창신동 골목길에 오롯이 자리한 전태일 재단. 그곳에 가면, 다시 시인의 말을 빌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이수호 선생을 만날 수 있다. 위로가 말장난처럼 번져가는 세상에서 온 몸으로 마음을 전하는 어른이 거기 있었다.  




덧) 이수호 선생님은 1974년 울진군 제동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1989년 전교조 결성에 앞장섰다가 해직이 될 때까지 서울 신일중고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했습니다. 전교조 활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두 번에 걸쳐 구속되어 2년의 투옥생활을 했고 전교조가 합법화 되면서 1998년 10년 만에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복직하여 2008년까지 33년을 교사로서 살았습니다. 그 동안 전교조 위원장,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 노동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지금은 전태일 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이주노동희망센터의 이사장, 한국갈등해결센터의 상임이사,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을 돕는 손잡고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대학고발자

페이스북 바로가기

블로그 바로가기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