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너뷰어: 바꿈,세상을 바꾸는 꿈

지난해에 이어 개헌을 이슈로 진행되었던 정책배틀 시즌2.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서소문 월드컬처오픈을 찾았던 시민정책배심단들은 제일 먼저 한 사내와 마주해야 했다. 유행이 좀 지나보이는 스타일의 롱패딩을 입은 곱슬머리의 사내는 이름을 확인하고 명찰과 기념품을 지급하기에 바빴다. 그는 바로 지난해 바꿈이 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상임활동가 공채에서 18: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최영환씨다. 


파마를 하고 나서 커트를 하면 모양이 잘 나온다는 고급정보를 전달해준 최영환 활동가. 


몰아치는 행사가 끝나고 조금은 여유로워야 했을 2월 8일, 바꿈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그를 만났다. 


- 반갑다. 점심 먹고 잠시 졸아야 할 시간인데 무척 바쁜 것 같다. 바쁘니까 30초 이내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30초 내로? 어... 이름은 최영환. 며칠 안남은... 20대가 얼마 안 남았다. 만으로 29살. 곧 만으로도 30살 되는.... 더 길게 할까?”


- 됐다. 자기소개가 너무 싱겁다. 그런데 원래 머리가 곱슬인가?

“파마한거다.” 


- 왜 했나?

“파마하면 편하다. 파마하고 커트하면 모양이 잘 나온다.” 


- 놀라운 정보다. 머리숱이 있을 때 열심히 하길 바란다. 그건 그렇고, 바꿈에는 왜 지원했나?

“작년에 바꿈에서 알바를 하다가...”


- 알바? 바꿈에서 알바를 쓴 일이 없었는데?

“작년에 홍명근 간사(지금은 사무국장이 되어 있다)가 알바할 생각 있냐고 해서 좋다고 했더니 회원가입서부터 쓰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년 분과 코디역할이었고, 알바비가 아니라 활동비였다. 하여튼 그러고 나서 (바꿈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고정적인 것 보다는 새로운 활동도 하고, 컨텐츠도 만들어 내는 활동에 관심이 많이 갔다. 그러다 상임 활동가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 그 전에 정책배틀 행사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들어오기 전에는 바꿈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나? 자세하게 말해 달라. 

“평가? 어려운데... 처음에는 그냥 시민단체 중에 하나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5년 동안만 활동할 목표를 세우고 있다는 것이 신선했다. 또 단점일 수도 있지만, 명확하게 이런 의제를 가지고 활동한다고 소개하기가 어려운데,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매번 관성적인 것 보다는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다는 말도 되어서 좋은 것 같았다.”


- 5년 활동이면 이제 반도 안 남았는데, 2년 6개월 뒤에는 어쩔 건가? 

“아직 생각해 놓은 것은 없다. 1년 정도 활동한 후에 본격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그때까지는 바꿈과 내가 하려고 한 목표를 잘 이루었으면 좋겠다.”


- 그래도 들어오기 전과 들어온 후에 평가나 마음이 바뀐 것도 있을 것 같다. 1월까지 수습이다가(바꿈의 상임활동가는 1개월 수습기간을 갖는다) 이제 정식 활동가인데, 그동안 참고 있었던 불만이 있었나?

“참았던 것은 딱히 없었다. 불만이 있으면 할 말은 다 했던 것 같다.”


- 그래? 그 중 가장 세게 했던 말이 뭔지 이야기 해봐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정치인 같다. 높은 사람 많이 알고 있나?

“높은 사람 중에는 홍명근 국장. 나에게 일을 시키니까.”


자기에게 일을 시키는 홍명근 사무국장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믿는 최영환 활동가. 그들은 뒷통수로 서로 교신을 하면서 일을 처리한다.


- 바꿈 활동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혼란도 있겠다. 

“그런 면도 있는데...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행정일이나 다른 단체와의 네트워크 등 고정된 일도 있다. 이게 그렇게 피로도가 높은 일도 아니고...”


- 아, 그런가? 피로도를 높여줘야 하나?

“생각해보니까 조금 피로도를 느끼는 것 같다.”


- 지금까지 인터뷰가 별로 재미없는데, 취미는 뭔가? 좀 재미있는 것 없나?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취미다. 그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듣는 걸 좋아한다.”


- 재미있는 대답도 아니고 정보기관에서 정보수집 하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 많이 듣는다.”


- 조금 진지하고 심각한 스타일인 것 같은데, 사람들 앞에서 잘 웃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잘 웃는 스타일이라기보다 사람들을 잘 웃기는 스타일이다.”


- 응? 왜 그렇게 생각하나?

“잘... 모르겠다.”


- 아리송하다. 암튼 신입활동가로서 아직 회원들과 서로 낯선 것 같다. 직접 회원들에게 연락하고 만나볼 의향은 있나?

“나는 그러고 싶은데, 이런 걸 귀찮아하는 회원들이 있을까봐 못하겠다. 만일 날 만나고 싶은 회원이 있다면 언제든 달려 나가겠다. 다만 밥은 사주셔야 한다.”


- 밥 사달라고? 사줄 수는 없고?

“이거 이대로 인터뷰가 정말 다 나가는 건가? 형편에 따라 내가 사드릴 수도 있고...” 


- 자, 바쁜 가운데 예정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바꿈에서 이루고 싶은 포부가 있다면 이야기 해 달라. 

“바꿈에서 이루고 싶은 건 생각중이다. 다만 내가 원래 미디어 컨텐츠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카드뉴스 같은 것 말고 바꿈 라이브방송 같은 걸 통해서 1분 단위의 짧은 컨텐츠를 해설하는 식이다. 그런 걸 해 보고 싶다.”


스스로 사람들을 잘 웃긴다고 착각하고 있는 최영환 상임활동가는 들어오자마자 “멍 때리는 여유도 없이” 수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 가장 힘이 센 사람을 홍명근 사무국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불운한 활동가, 그렇지만 묵묵하게 자기가 맡은 일을 빈틈없이 해내고 있는 역량 있는 활동가 최영환씨는 이제 바꿈의 사업을 든든하게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다. 


신임 활동가의 안 웃기는 웃긴 이야기를 듣고 싶은 회원들은 언제든지 양재역 인근 바꿈 사무실로 오라. 아, 밥값도 함께 가지고~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6월민주항쟁 30주년, 그 의미를 찾는 여정을 정리하기 위해 ‘6월민주포럼’과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이 좌담을 준비했다. ▲김중배 대기자(당시 50대, <동아일보> 논설위원),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당시 40대, 화가),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당시 30대, 노동운동가), ▲ 전민용 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 회장(당시 20대, 치과대학생),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 박영민 바꿈 활동가가 좌담에 참여했다. 2017년을 기준으로 80대에서부터 20대까지, 세대를 막론한 다섯 패널이 백승헌 변호사(‘바꿈’ 이사장, 당시 변호사 2년차)의 사회로 2시간 동안 ‘6월항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백승헌(변호사, 이하 사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크게 네다섯 가지 정도의 테마를 잡고 진행해보려 한다. 30년 전 항쟁 당시 20대와 30대, 4~50대 장년층을 망라하고, 또 당시 태어나지 않았지만 역사로서 이 부분에 참여하고, 역사를 이어받은 세월호 세대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패널들의 연령대가 달라서 경험이 다를 것 같지만, 사실 20대인 박영민 씨를 제외하고는 통시적으로는 체험이 비슷하다는 느낌도 있다. 몸이 어디에 있었건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6월항쟁이라는 주제를 전반적으로 평가하실 수 있는 분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먼저 6월항쟁 하면 뭐가 떠오르는지. 사적 체험과 사회적, 역사적 체험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인지부터 이야기 나누었으면 한다.

(좌담회 참석자들. 왼쪽부터 백승헌 변호사(사회), 박영민 바꿈 활동가, 김중배 전 MBC 사장, 김정헌 작가, 

전민용 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회장, 박석운 진보연대 대표 ⓒ바꿈)

▪ 30년 전 6월, 그날들의 기억


박석운(진보연대 대표, 이하 박석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거대한 성과, 위대한 승리를 했다는 점이다. 6월항쟁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7, 8월 노동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정치사회적 공간을 열고, 이어졌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권교체에 실패함으로써 ‘죽 쒀서 개줬다’는 의미도 있다.(웃음)


김정헌(화가, 이하 김정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단편적인 것만 생각이 난다. 광장에 모였던 것, 특히 故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제일 많이 모였던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구나 하는 사실에 굉장히 흥분했었다.

또, 6월항쟁에 미술이 많이 관여를 했다. 최민화 작가가 당시 많이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이한열 부활도’가 생각난다. 가운데에 부활도가 딱 놓이고, 만장이 일렬로 쫙 나오는 장면이 평생 두고두고 생각난다. 그때 광장에 모였던 체험이 2017년 촛불항쟁까지 온 게 아닐까 한다.


전민용(전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 회장, 이하 전민용)     치과대학을 다닐 때였다. 시험을 6월10일 무렵까지 본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는 시험 거부를 결의하고 거리로 나갔다. 의대, 치대생들이 함께 부상자들을 응급 치료하는 길거리 의료팀을 구성했다. 의료인가운을 입고 있으면 어디든 갈 수가 있으니까 그 중에 일부는 연락을 담당했다. 며칠 지나니 가운 입은 사람도 (통행이) 허용 안 되고, 잡혀 가고 그랬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6월 말 무렵에 경찰들도 거의 손을 놓고 집회를 막지 않아서 거리 집회 후 대학로 같은 곳에서는 차량 통행이 안 되고 군중들이 2~30명 씩 모여 길거리 토론회가 열리곤 했다. 거리에서 시국토론을 하는 것을 그 이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 것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세상이 바뀌는구나…. 

(최루탄을 피해 도망가는 시민들(1987년 6월 10일) ⓒe영상역사관) 


김중배(전 MBC 사장, 이하 김중배) 그때 <동아일보> 논설위원이었는데 정말 억압과 탄압이 심했다.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현 국정원)가 (신문사에) 출입을 하고, 협박을 했었다. 당시에는 내가 매주 칼럼을 썼는데, 안기부 출입하는 요원들이 나중에는 도사가 돼서 다음 주에 뭘 쓸 지를 아는 거다. 요원들이 예견을 하는데, 기가 막히게 알았다.

그때 딸이 중학생이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보니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누가 집에 전화를 해서 “네 애비가 그 따위로 놀면, 가족을 몰살할 텐데”(했다는 거다). 전화가 아래층에 있었는데, 우리가 위층에 있다가 안 받으니 딸아이가 받은 거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이여’ 칼럼을 쓰기 전에 사람들이 그렇게들 많이 전화를 했다. 말을 하기 전에 자꾸 운다, 통곡을 하면서. 그런가 하면 칼럼을 내보내고 나니까 영감들이 계속 전화를 했다. 그때는 SNS 없이 ‘전화부대’라는 게 있었는데, 전화를 어찌나… 요즘 어버이연합과 비슷한 건지는 모르겠다는데, ‘빨갱이 새끼 하나 뒤진 걸 가지고…’라며 정반대로 나왔다. 

지금도 생각하지만, 박종철이나 이한열, 이석규는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닌, 시대의 보통명사, 상징명사라는 생각을 그때부터 강하게 가졌다. 5.18광주항쟁 이후에 외국 나들이를 했는데, 광주 이야기를 아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보면 광주라는 도시가, 한 도시의 고유명사가 아닌 ‘민주’와 같은 어떤 보통명사와 같은 그런 인식으로 말씀하는 걸 많이 들었다. 박종철도 그렇게 생각했다.

전민용 대표가 말씀하시니, 6월26일(국민평화대행진)이 상당히 셌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사망한 박연채라는 친구하고 돌아다니는데, 최루탄이, 최루탄 폭격이 맹렬했다. 그때 나는 호암재단 앞으로 가고 있는데, 어떻게 (최루탄을) 쏘아대든지 막 밀려다녔다. 당시 우리 학생들이 용감하게 (전경을) 쫓아가서 사과탄(최루탄의 일종)을 탈취하고 난리가 나고 그랬다. 그렇게 쫓아다니다보니까 좀 피곤해서, 쉬려고 이렇게 자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내가 원래 까무잡잡한데, 의대생들이 보더니 ‘저 양반이 변고가 났나’ 해서 ‘선생님, 괜찮습니까?’ 하는 거다.(웃음) 지금도 선하다. 그때 의대 진료반원으로 나온 청년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또, (최루탄 때문에) 눈물이 나고 하니까 건물 화장실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잔뜩 있다. 전경들도 들어온다. 그러면 전경들이 그런다. ‘선생님들, 이렇게(눈 부미면서) 씻지 마세요. 물 뿌리세요.’ 

이 말씀을 장황하게 드린 이유는, 일련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에로스효과(Eros Effect)라고 할까. 사랑과 자유와 연대, 공감, 감수성 이런 것이, 말을 나누지 않았더라도,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할지라도 (생긴 거다.) 그 연장 확대판이 촛불이라고 생각한다. 으레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데 그런 에로스 효과가 가슴에 남아 있다.


전민용 우리도 식염수 가지고 다니면서 씻어 줬다. 그런데 최루탄 터지면 (진료를) 못 하니까, (의료팀은 나가기 전에) 눈에 마취 앰풀을 떨어뜨렸다. 그럼 마취가 돼서 따갑지 않다.


김중배 6월26인가 그랬다.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했는데, 우리는 <동아일보>에 있으니까 (신문로에 있는 사옥)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광화문에서 (경찰과) 딱 대치를 했다. 그러니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지도부에서 ‘더 이상 가지 말자’ (했다.) 그러니까 젊은 여성들이 꽃송이를 들고 전경들 가슴에 꽂아주고…. (웃음)

그때는 대학교수들이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에 다녔는데, 고려대 김충렬 교수가 올라 왔다. ‘청와대까지 가야하는데, 여기서 끝나면 안 되는데’ (그랬다). 듣기에 따라서는 ‘무모하다’고 생각이 될 수도 있었지만, ‘청와대까지 가봤자 뭐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들이 있었다.


김정헌 문화예술 쪽에서는 그때가 제일 활발하게. 우리가 그때 막 만들어놓은 ‘그림마당 민’이라는 전시장이 있었다. 유홍철, 김용태 이렇게 해서 참 어렵게 장소를 만들었는데, 거의 처음하다시피 한 전시회가 ‘반고문전’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나자마자 87년 3월에, 물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는,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 하고 ‘반(反)고문전’을 열었다. 

그때 신학철 작가도 아주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었는데, 박불똥이라는 작가는 전경들이 전두환을 붙잡아서 연행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걸 ‘반고문전’에 붙여 놨었다. 종로경찰서 대공과와 정보과가 항상 전시장을 드나들며 감시했는데, ‘반고문전’이 열린다니까 들이닥쳐서 압수해 가려고 했다. 그림마당 민이 지하에 있었는데, 거기서 밀고 당기고를 했다. 결국 몇 명이 연행당하고, 작품을 자진 철수하는 조건으로 해서…전시를 며칠 못하고 문을 닫고 끝냈다.

또 이애주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부터 해서 그때 활약들을 했다. 이애주가 춤을 췄다. 문화예술이 그때를 전후해서 막 폭발적으로 꽃을 피웠다. 문화예술 계에서는 6월항쟁이 아주 기폭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사회 네 분이 직업도 다르고 했지만 광장에서 다 만났다. 저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당시 2년차 변호사였다. 변호사들이 해방이후 처음으로 변호사 이름을 걸로 집단적으로 거리시위에 나섰고, 그러한 활동이 나중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결성으로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그 시위에서 최루탄을 맞아서, 수포로 조금은 고생했고 그 상흔이 오랫동안 남아 6월을 기념하기도 했다(웃음).

(故 이한열 열사 장례식(1987년 7월 9일) ⓒe영상역사관) 

박영민(세상을바꾸는꿈 활동가, 이하 박영민) 나는 중학생 때 역사책에서 배운 게 기억이 난다.


김정헌 역사교과서에 그런 게 나오나?


박영민 역사와 관련된  책에는 다 나온다. 6월항쟁만 단독으로 나오기 보다는, 3.1운동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 이런 항쟁이 있었다는 그런 걸 가르쳐 준다. 6월항쟁에 대해 이렇게 길게 고민해본 건,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를 하면서 사실상 처음이다.


사회 어쨌든 현 20대를 세월호세대라고도 하고, 촛불세대라고도 하는데, 촛불집회가 시작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 새롭게 다가오지는 않았나?


박영민 6월항쟁이 촛불집회 때문에 더 새롭게 다가오는 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런데 선생님들 뵙고 인터뷰를 하려면, 이 분들이 예전에 뭘 했는지 조사를 해야 되지 않나. 조사를 하면서 더 느껴지는 게 있다. 대학에서 북한학을 전공했는데,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을 쓴다. 통일이라는 것을 하나의 사건이 아닌 통일로 가는 노력 전체, 과정 전체를 통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선생님들 뵈면서 6월항쟁 역시 그렇게 다가왔다. 항쟁의 당사자였던 선생님들이 6월 어느 날에만 운동을 딱 하고 끝낸 게 아니었지 않나. 3~50년에 걸친 세월 동안 민주주의 하나 보고 계속 걸어온 발자취가 있는 거니까. 과정으로서 항쟁이 뭔지 최근에 고민을 좀 하는 것 같다.


김중배 중학교 때 배운 것이 몇 년도였나? 


박영민 2천년대 중반 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말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노무현 대통령 때 초등학교, 이명박 대통령 때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김중배 6월 10주년 때(1997년) 서울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서울대 학생들에게 6월항쟁 이야기를 했더니 모르는 애들이 많았다.


박석운 그래서 교과서가 중요한 것이다. 때문에 저들이 교과서를 바꾸려 하는 것이고. 정권이 바뀌고 교과서가 바뀌면서, 그 뒤 세대는 6월항쟁에 대해 알게 됐다.


사회 결국 체험이 어떻게 전승되느냐의 문제인데, 과거를 어찌 기억하는지와 현재와 연결되는 강도가 현실을 끌어가는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혹은 우리 사회에 6월항쟁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다고 보시나.


▪ 30년 후 되돌아본 6월항쟁


김정헌 앞서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술의 밑받침이다. 88년에 개인전을 했는데 작가들은 그 전부터 준비를 한다, 1년 전부터. 그때 일기식으로 쓴 노트를 보니, ‘반고문전’ 준비에서부터, ‘이렇게 내가 농촌하고 관련된 그림을 편하게 그려도 되는가’ 이런 자각심도 생겼더라. 일종의 문화적인 각성 같은 걸 6월항쟁 때 몸에 새긴 게 아닐까 한다. 6월항쟁을 거치며 나라는 사람이 아주 용감해 진 것 같다.

사람이 달라지면 안에서 그때 길러진 에너지가 알게 모르게 작동하는 것 같다. 그 전에는 집회 같은 데에서 노래를 같이 부르는 걸 쑥스러워 하고, 손도 올라가다 말고 그러다 끝났는데, 그 다음부터는 확확 올라갔다. 모르는 사람들하고 섞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뻔뻔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대신 세상을 상당히 용감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행동이 뒤따른 게 아닌가.

(왼쪽부터 김정헌 작가, 김중배 전 사장, 박석운 대표 ⓒ바꿈)


김중배 이 얘기를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좌담회 오면서 생각을 했다. 나는  4.19혁명 이전에 신문기자가 돼서 4.19혁명과 5.16쿠데타, 5.18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을 다 겪은 세대다. 4.19혁명 때는 그렇지 않은 데도 있었지만, 한국 언론 대부분이 시민, 민중들에게 굉장한 지지를 받았다.

그때는 신문사가 귀했다. 방송사로는 KBS가 있었지만 관영방송이었다. 신문사 취재하는 사람들이 지프차를 타고, 신문사 깃발을 꽂고 다녔는데 <동아일보>가 제일 환대를 받았다. 나는 <한국일보>에 있었는데 <한국일보>도 그런 지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통한으로 남아서 6월항쟁을 그런 각도에서 생각을 하는 것이, 저항을 하지 못했다. 물론 사회전체가 이렇다하게 저항을 못했지만, 언론은 더군다나 저항을 못했다. 저항의 역사적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부끄럽고, 통탄스러운 흔적이다. 

그런 세월을 겪다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5월광주항쟁에서 학살하고, 그리고 또 숨 죽여서 살았다. 그 시대의 축적, 분노와 착취, 억압의 아픔이 6월이라는 총체적인 그림으로, 김정헌 선생 말씀 받아서 얘기하자면 ‘그림으로 등장한 하나의 분화구’ 같은 것이었다.

이 말씀을 구태여 드리는 것은 촛불집회를 하고 정권이 교체됐지만, 실질적인 사회‧정치‧경제학적 ‘기축 기둥’은 거의 박정희 시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으로 박정희 시대의 신화, 마르크스적으로 말하면 박정희의 유령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바탕에는 지금도 이것이 기능하고 있는 그런 시대에 살았다. 문화‧예술계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언론계는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시대에서 조금 탈출하려고 하는데 미수에 그쳤다.


박석운 언론의 저항 말씀하셨는데,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당시 <동아일보>가 보여줬던 나름의 기여들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김중배 조금은 있었다.


박석운 그때는 <한겨레>도 창간되기 전이었다. 통제의 틈바구니를 뚫고, <동아일보>에서 언뜻 비치면서 뚫고 나오는, 그래서 김중배 선생께 협박까지 하는 그런 사태까지 벌어질 정도로 <동아>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당시에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 비록 지금은 <동아>가 엉망이 돼 버렸지만.


김중배 이 얘기가 6월항쟁과 관련 있을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언론이 지금보다 훨씬 부자유스러웠다. 나 같은 사람도 남산에 끌려 다니기도 했다. 지하 벙커가 남아 있더라고.

종합적으로 느끼기에는 그때는 통제를 받고 제대로 보도 못하고, 거기에 대해서 신문사에서 소속된 기자들이 우리가 정말로 마땅히 내보내야 될 진실을 못 내보내고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그 공감대가 일부 사주까지, 이를테면 <동아> 같으면 김상만 씨 정도는 공감했다. 내가 현역(언론인)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잖나.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달라졌다. 굉장히 퇴행했다.


박석운 그 당시 6월항쟁이 나름의 성과를 낸 배경으로는 축적된 모순, 누적된 민심 이반들이 있었다. 광주항쟁이 완전히 진압되고, 그 이후에 학생들의 처절한 투쟁들이 진행됐고,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유화국면’으로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뚫고 이런저런 민주화운동들이 움을 트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1985년) 2.12 총선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86년) 개헌 현판식 때, 5.3인천사태 등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탄압이 계속됐고 저항들도 계속됐다. 저항의 아주 큰 줄기가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 그리고 보도지침에 대한 폭로와 저항, 그러다가 박종철 고문치사가 터졌다. 모순의 강도가 훨씬 더 세지고, 그에 대한 저항도 질적으로 고양되는 과정을 거쳤다. 누적된 민심이반, 그게 (6월항쟁의) 배경이 됐다는 거다.

실제로 6월항쟁이 그 정도로 전국으로 번지게 된 데에는 미시적으로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6월 10일이라는 날짜에 주목해야 한다. 많이들 놓치는 부분인데, 6월10일 국민대회 때 초장에 경찰들이 요사이처럼 압도적으로 막았다면 성공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됐나. 그날 잠실운동장에서 노태우를 민정당의 다음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지명대회가 있었다. 그래서 주요 경력들이 다 강남에, 잠실운동장 근처를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 바람에 시내에 허술한 공간이 생겼다. 분노한 시민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동 가능한 공간이 생긴 거다. 모순의 한 결과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명동성당이다. 초전박살을 당하지 않고 커지면서 세(勢)가 붙었다. 세가 붙은 상황에서 탄압을 당했다. 토끼몰이 당하듯이 해서 명동성당으로 밀려 들어갔는데, 김수환 추기경 등 가톨릭에서 방어를 해줬다. 가뜩이나 민심이 이반된 상태에서, 가톨릭과 전면전을 해야 하는 부담이 전두환정권에게 생겼다. 그래서 준-해방구 거점이 형성됐고, 그 거점을 중심으로 어떤 사람들은 ‘구출하러 가자’고 하고, 넥타이부대가 나서고, 전국적으로 상징적인 공간이 된 거다. 언론에서도 핵심 이슈가 됐다. 

세 번째는 전두환정권이 계엄을 선포해야겠다는 고민을 하게 만든 동시에, 결국 계엄을 선포 못하게 된 원인이기도 한데 (6월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는 점이다. 명동성당이 거점이 되면서 거기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전국 방방곳곳에서 집회가 있었다.

나는 노동운동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뿐 아니라 수도권의 이른바 주요 위성도시들을 다니면서 가담을 하고, 판세를 봤다. 전두환정권은 서울을 방어하기도 급급한 상황이었고, 전체적으로는 무인지경이었다. 경찰들이 기가 죽어서 거점방어만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수도권에서의 시위가 굉장했다. 그런 양상들이 전국화되면서 경찰들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되어버린 거다.

(1987년 6월 10일 명동성당 앞에 모인 시민들의 모습 ⓒe영상역사관) 

본래 경찰은 대규모 집회에서 방어를 할 때, 전국의 경력을 거점에 다 모아서 수적인 우세를 잡으면서 철통방어를 한다. 그런데 그걸 못하게 됐다. 각 지역의 경찰들이 자기 지역 거점을 방어하는데 급급했고, 그 바람에 지역 대도시, 중소도시들은 무인지경이 됐다. 

계엄령을 내리지 못한 게 일각에서는 미국의 개입 때문이라고 하고, 일부 그런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미 시민들이 군중화되어서 전국적으로 준-해방구에 가까운 양상을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인을 투입하면 끝장이 나는, 전면전 내지 엄청난 유혈사태로 가면서 판이 뒤집히는 양상으로 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계엄 선포를 검토하다가 못했지 않나 생각한다.

또, 앞서 이한열 장례식을 말씀하셨는데, 이한열 열사 장례는 (노태우의 6.29선언 다음이니까) 6월항쟁의 중간 결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열린 공간에서 장례식이라는 계기를 잡아서 국민들이 대규모로 모인 것이고, 6월항쟁의 본질은 그 장례식 이전에 전국적으로 무인지경 내지 최루탄 맞아가면서 동시다발 내지 대규모 각각 현장에서 굉장히 열심히 많은 민초들이 함께 나서서 싸웠다는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저는 6.29까지 들불처럼 번져가는 과정이 1단계, 2단계가 이한열 장례, 3단계가 7월~8월의 노동자대투쟁이라고 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선 과정에서 죽 쒀서 개 주는. 


김중배 6월18일 계엄론은 여러 가지 증언과 기록이 있다. 전두환 정권에서 사실은 계엄을 준비를 했다. 여기에 미국이 반대를 했고, 경찰도 군대까지 동원해서 전국을 제압하기 어렵거니와 오히려 더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또 일부 증언들에 따르면, 군 내부에서 별로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계엄령을 하려고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동아>에서 칼럼 쓸 때인데, 정치부의 어떤 기자가 급히 만나자고 하더니 나더러 어디 좀 가 있으라고, 계엄령 내린다고 했다. 계염령을 내리면서 전국 검거령까지 준비가 됐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도망을 갔는데,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사회            내 사무실이 당시 서소문에 있었다. 6.10 이후부터 6.29 되기 전까지는 직장인들이 산발적으로 시위에 많이 참여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시작하고, 끝날 때 즈음에 들어가는 식의 집회들이 산발적으로 있던 상황이었다. 거기서 나한테 사무실 개업 자금을 대출해줬던 은행 대리를 만나는 일도 있었다.(웃음)


전민용 변호사들이 서명(운동)을 했는데 언제인가?


박석운 4.13 호헌 선언했기 때문에 5월 즈음이다.


전민용 호헌철폐 직선제 서명운동이 5월 무렵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민심이반이라는 게 확인되는… 치과계 쪽도 그동안 침묵하던 분들이 용기를 내어 서명에 많이 참여했다. 그 때까지도 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였는데도 여러 분야에서 꽤 확산이 됐다.


박석운 한국노총이나 주요한 관변 단체, 조직들이 다 호헌지지 선언을 했다. 한국노총은 그때 호헌 지지 선언을 해서 나중에 완전히 깨갱했다. 정권에서 호헌 여론을 조작하고, 동원하고 그랬던 거다. 그런데 민심이 이반돼 있었기 때문에 6월항쟁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됐다.


사회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명운동 하는 게 운동방식이 되기도 하였다. 집단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지만 , 참여자들에게는 혼자 고립돼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이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용기를 내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박석운 저들(전두환 정권)은 호헌 지지 선언을 조작했지만, 민주시민들은 각계 선언으로 확산돼 가는 그런 게 굉장히 귀했다. 신문에 날 정도였다.


전민용 <동아>에서 조그맣게 실어 줬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회 그런 거 보는 게 위안이 됐다.


박석운 <동아>가 그런 역할을 했다는 거다.


전민용 이런 부문별 서명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삶의 어떤 방향에 대한 전망이 생긴 거다. 그전에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평생 비밀 활동을 하고 수배 받고 고문당하고 투옥되고 그렇게 살 건가, 아니면 현실을 모르는 척 적당히 눈감고 살 건가 택일해야 했다면, 부문별 서명운동 과정을 통해서 많은 치과의사들이 참여를 하고, 6월항쟁을 거치면서 대중적으로 확산이 됐고, 이런 동력을 기반으로 부문 운동들이 생긴 거다.


박석운 시국선언한 게 기초가 돼서 6월항쟁 이후에 부문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사회 민교협(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모임)이니 <한겨레신문>도 그때 이야기가 되어  시작했다.


박석운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나 건치(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도 그렇다.


전민용 전문직이든, 예술계든 자기 분야를 가진 사람들이 서명한 힘을 가지고, 그대로 단체로 만들어 갔다. 독자적인 자신의 운동과 삶이 일치해 나갈 수 있는 게, 그게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큰 전환이었다.


사회 20대는 이해를 잘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6월항쟁에 참여했느냐, 나중에 들었느냐, 그냥 중고등학생으로 있었느냐… 이런 차이들이 있었다. 6월 항쟁때까지는 승리의 경험이 정말 희귀하였는데, 귀한 승리의 경험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자부심으로 이어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참여한 분들일 수록 승리만큼이나 6월 항쟁의 한계 내지는 미완성의 문제를 많이 지적하고, 특히 정권이 유지되었다는데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6월항쟁 이후에 성립된 ‘87년 체제’에 대해 긍정적 의미화 함께 극복을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87년 체제의 의의 그리고 한계의 극복


전민용 6월항쟁이 흔히 ‘죽 쒀서 개 준’ 결과가 되면서, 90년대에는 (과거로) 되돌아 간 듯한 상황이 전개됐다. 그래서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말도 있고, 앞서 박영민 씨가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말도 했지만, 민주주의도 과정으로 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로도 완성될 수가 없다. 깨어 있는 시민들에 의해서 시기마다 계속 고민하고, 판단하고 합의하고 이러한 과정을 끊임없이 유지해나가는 그런 형태, 그런 구조 자체가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87년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박영민 사실 막연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이렇게 했어야지. 왜 그렇게 못 했데’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이야기를 더 들어볼수록 그게 미완성 혹은 한계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과정으로서의 항쟁을 겪고 있다. 6월항쟁도 (한 시점에) 점찍고 ‘완성됐다’고 하기보다, 30년이 지났을 때 회고하는 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6월항쟁 때 했던 모든 것들을 87년의 완성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이걸 미완이라고 하는 건 2017년을 살고 있으니 미완이라고 얘기하는 거다. 87년 광장에 있던 사람에게 ‘두 발자국 밖에 못가는 건 미완이야’라고 하는 게 민주주의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책임은 분명 그것을 목격하고, 미래를 그리는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그 말씀이 맞다. 민주주의에는 종착역이 없다. 골(goal)이 없는 거다. 하지만 항쟁의 시대를 살았던 내 입장에서는 그 당시부터도 미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당시 국본에서 내건 지침을 보면 ‘노동자‧농민‧도시‧빈민’ 여기부터 나온다. ‘재분배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자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나온다. 그러니까 (7, 8월)노동자대투쟁의 주제들이 국본의 강령 속에 이미 있었던 거다. 구태여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 성격이나 의미 부여에 명확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국본이 그걸(강령)을 이루지 못한 거다. 또, 구호로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식으로 집약하다 보니 직선제 개헌만이 6월의 목표인양 축소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1997년 6월항쟁 10주년 사업을 할 때부터 직시를 했다. 87년체제의 극복이라는 이야기,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87년체제의 극복이 아닌 붕괴되는 모습을 명백히 봤다. 극복하기는커녕 그 체제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무슨 극복을 이야기하느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87년체제가 공고해야 한다’ 그런 의미는 아니다. 물론 극복해야겠지만, 붕괴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던가. ‘촛불’이 나서서 그 국면을 넘어섰지 않은가. 87년체제를 그나마 회복시킨 거라고 본다. 그것을 토대로 가야한다.


김정헌 전민용 원장이 앞서 이야기를 했는데 ‘모든 혁명은 항상 미완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완성인 혁명이 어디 있겠나. 김중배 선생도 잠깐 에로스효과를 말씀하셨는데, 68혁명을 감성혁명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많다.

사람 사는 사회에는 늘 기득권이 존재한다. 그걸 무너뜨린 게 그 당시 68학생 혁명이다.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김중배 선생께서 초반에 에로스효과라고 한 말씀이 87년체제가 극복했거나 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촛불혁명까지 계속해서 가고 있다….


김중배 감성이다. 허버트 마르쿠제나 조지 카치아피카스라는 사학자들은 전염효과라고 한다. 촛불집회도 그렇다. 감수성이 없으면 안 되니까,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지향하는 해방.


전민용 68혁명 때 구호가 ‘우리는 사랑할수록 더 많이 혁명한다’였다. 그때 여대생 기숙사에 남학생을 출입금지 시키는 게 굉장한 반감을 일으키면서 시위를 촉발했다고 한다.


김정헌 68전에는 독일 등지에서 젊은이들이 길에서 뽀뽀를 하면 늙은이들이 그냥 쫓아왔다. ‘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러고 있어’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68혁명에서 ‘저 꼰대들 밑에서 더 이상 못 살아’ 하면서 뒤집어엎었다. 주로 음악이나 그런 것들로… 우드스탁(음악 페스티벌)이나 이런 데 몇 만 명이 며칠 밤을 모여서 자기들 감성을 고양시킨 거다.

그게 밑바탕이 되었다는 것인데, 지난해 촛불집회에 계속 나가보니 그런 느낌이 왔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옆에 있는 사람과 이렇게까지 친절한 느낌을. 이게 에로스 효과다. 그냥 막 껴안아 주고 싶은…(웃음)


(2017년 6월 14일 저녁, 법무법인 지향 사무실에서 좌담회가 진행됐다. ⓒ바꿈)


박석운 6월항쟁을 미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절반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 정신은 다 계승이 되지만, 사실 6월항쟁이나 87항쟁(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은 그때 다 끝난 거다. 직선제 개헌까지 채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시민들이 군중이 되어서 관철을 시킨 거다. 

내 관점에서 절반의 승리밖에 되지 못한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권에서) 이른바 ‘일반 시민’과 노동자 간에 굉장히 입체적인 이간책을 썼다. 여론을 조작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륜 집단, 집단 이기주의 이런 식으로 몰아갔다. 또, 폭력성을 강조했다. 노동자와 노동운동, 그리고 일반시민들을 이간시키는 수법으로 6월항쟁의 성과가 확산되는 걸 차단한 거다.

두 번째는 대선 과정에서 사회운동, 정치 운동하는 진영에서 전략적인 실수를 했다. 당시에 나왔던 후보 단일화, 비판적 지지론, 독자 후보론… 이게 다 틀린 거였다. '권력 분점을 매개로 한 선거 연합'으로 갔어야 하는데, 당시는 나도 그런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불같이 일어나는 노동운동에 집중을 하느라 대선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민을 못했던 것도 있지만, 시민운동 내지는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고민들이 굉장히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인들 중심으로 이 문제를 접근함으로써 대사를 그르친 거다.

이와 함께 또 절반의 패배가 만든 것은 결과적으로 노태우, 군인 출신의 대통령의 집권과 3당 야합, DJP연합과 같은 야합과 같은 과정을 거쳤다. 중간에 故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실패를 잉태하게 된 과정이었다고 본다.

절반의 승리로 인해서 그 뒤에 일어났던 일이 노동운동 내지는 민중운동, 부문 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뒤에 또 경실련,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운동이 활성화되는 것, 30년간의 여러 사회운동의 기반을 만든 것이다. 

(노동자와 일반 시민 간) 이간질 관련해서는 6월항쟁 10주년 때부터, 당시 민교협 의장이자 현재 교육부총리 후보인 김상곤 교수 등과 함께 그런 이야기를 했다. 10주년 토론회에서 같이 이야기를 했던 것이, ‘87항쟁’으로 부르자는 것이었다. 87항쟁의 기본 개념은 6월민주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합해서 통합적으로 87항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거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대투쟁은 토대의 변화를 일으킨 효과가 있다고 본다.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노동조합수는 3배, 조합원 수는 2배 정도로 늘어나는 장족의 발전을 했다. 하지만 자본과 권력 쪽에서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또 집중적인 투쟁들이 진행되면서 표면적으로는 두 가지 양상이 나타났다. 하나는, 노동조합 운동이 조금 더 체계화돼서 95년에 가서는 민주노총이 만들어졌다. 한편으로는 그 과정을 통해서 일반 국민, 시민과 노동운동 내지는 노동조합, 조직된 노동자 사이에 문화적 차이, 이간질이 구조화되는 문제가 생겼다. 그런 구조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자폐적 현상도 일부 생기는, 일정 정도 한계도 드러났다. 

노동 운동이 여러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성을 지니면서 사회 진보에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다들 주목을 하지 않지만 이번 촛불대항쟁은 조직된 노동자들인 민주노총 대오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월항쟁과 연이은 노동자대투쟁, 즉 87항쟁을 통해 민주노조 운동이 등장하게 되고, 체계화됐지만 30년이 지난 사이에 새로운 모순,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것들이 등장했다. 과거에는 어용노조 대 민주노조였지만, 지금은 비정규 노동자의 권리찾기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87년 6월항쟁으로 생긴 정치적 숨 쉴 공간을 뚫고 누적된 노동 모순들이 폭발하면서 노동대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있었다면, 이번 촛불대항쟁의 성과로 생기는 정치적 공간에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가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내 희망까지 담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김중배 박석운 대표가 말씀하신 노동자와 시민 간의 이간질. 나는 글쎄… 대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넥타이 부대다. 그들이 노동자다. 이간질 속에도 그런 것(넥타이부대)이 있었다. 하지만 실은 국본을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노동자의 참여를 은근히 배제했다. 조직 속에 넣지 않았다. 그 내면에 백낙청 선생이 말하는 소위 ‘이면 헌법(분단상황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국민 기본권이 제약되는 상황)’이 있을 거다. 색깔론, 반공, 좌빨….

국본의 그때 의식이나 판단을 존중한다면, 그런 것이 이면헌법을 따른 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것(이면헌법)이 개입할 때 운동 자체의 추진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여러 통계를 보면 그때 학생들이 많이 잡혀갔지만, 7, 8월 노동자대투쟁 외에 (좁은 의미의) 6월항쟁 기간 중에 전국에서 체포된 시민을 분류하면 노동자들의 체포율이 높다. 87년항쟁론도 일리가 있지만, 노동자들도 도처에서 참여를 했다. (노동자와 일반 시민이 이간되었다고 하면) ‘넥타이부대’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나.


사회 이때까지의 말씀을 정리하면, 성과와 한계가 어쩔 수 없이 교차되는데 세 가지 측면이 지적됐다. 첫째, 정치적 민주화, 대통령 직선제를 시민의 힘으로 쟁취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한 문제. 둘째, 실질적인 또는 경제적 민주화문제는 6월항쟁에 이어 노동자 대투쟁을 촉발했다는 문제가 있다면, 그 자체가 이반의 현상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또 한가지는 앞서 말한 문화적 측면이다. 

사실 근대적 시민 또는 시민 문화의 부재, 껍데기만의 민주주의였는데, 시민항쟁을 통해 근대적 시민 문화가 탄생하고 시민 문화의 징조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 뒤에 그것들이 꽃피지 못하고, 계속 시도되는 상황에서 절반의 또는 미완의 지점들이 보였다는 것이다.

30년은 물리적으로 한 세대라는 의미도 있지만, 현실 속에서 30년을 맞이하는 2017년 다시 시민의 힘으로 동시에 87년체제를 통해 성립된 제도 틀안에서 , 반민주적인 권력을 교체하였다는 의미가 겹치기도 한다. 때문에 아무래도 6월항쟁과 촛불항쟁을 동시에 겪은 세대에서는 이 둘의 연속성이나 연관성을 항상 염두에 두게 되는 것 같다.


▪6월과 촛불항쟁, 그 연속성에 대하여


박영민 시민들이 만들어낸 항쟁이라는 점에서 유관할 수는 있지만, 이번 촛불에 대해서는 그 숫자와 헌정 최초 탄핵이라는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동안 얼마만큼 헌정이 잘 지켜졌던가. 우리가 헌법을 얼마나 준수하는 나라에서 살아왔던가. 파업이 제대로 되지도 못했고, 기본권이 지켜지지도 않았다. 한 번도 헌법 내에서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고 난 후 헌정 질서를 되찾아야 한다고 얘기하니까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나는 오히려 하나만 겪어 봐서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관대하다고 할 수도 있고 한데, 2017년 촛불에 대해 조금 더 까칠하게 보는 것 같다. 내가 경험한 이 역사에서는 아쉬움이 훨씬 더 많다.

(왼쪽부터 전민용 전 회장, 백승헌 변호사, 양길승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 박영민 활동가 ⓒ바꿈)


전민용 87년에 박종철, 이한열이 있었다면 이번 촛불의 가장 큰 동력은 세월호 참사와 쌓여 있던 사회경제적 모순이라고 본다. 그 희생이 사람들의 감성을 잡아두었다가, 계기를 만나 폭발을 한 것이다. 

87년에는 자기 과제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군사독재 정권의 타도가 시급했고 모두 다 쉽게 공감했다면, 이번에는 다양한 요구가 많이 나왔다. 대표적으로 페미니즘. 비정규직 이야기도 나왔고, 여러 차원에서 사회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주인 의식이 확장되고 있는 거다.

또 한편에서는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만났다. 합리적 보수층 역시 ‘이게 나라냐’ 이런 생각을 갖게 됐고, 그들이 같이 모여 광장을 형성한 것이다. 그리고 광장의 뜨거움과 제도의 냉철함이 만나 선출된 살아 있는 권력을 감옥에 보냈다. 이렇게 이중적인 부분들이 모여서 결과를 만들어 냈는데, 세계적으로도 유례없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 건 아닐까 생각한다.


김정헌 나는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즐거워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는데, 왜 이렇게 즐거울까…).

촛불집회에서, 가장 추운 날이었던 거 같다. 요즘 광화문하고 서촌 일대에 요즘 한복 입고 다니는 여학생들이 많은데, 그러려고 나온지는 모르겠지만 그날도 한복 입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그런데 옷이 너무 추워보였다.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멋진 아주머니 한 분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그 학생들에게 줬다. 백만이나 되는 시민들이 모였으니, 별 사람들이 다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장면들이…. 

나는 그 촛불집회에서 가장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 그럼 그 아이들이 30년 후까지 기억을 할 것이다. 그때 촛불시위 나도 나갔는데 하고. 자신이 인지가 떨어지더라도 부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30년 후에도 기억을 상기시키고 소환할 수 있다고 본다.

이 혁명이라는 건 완성이 없다.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전파되는, 같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이 이번 촛불은 아주 대단했다. 내가 죽은 다음 30년 후까지 계속될 것 같다. 온 몸으로 느꼈던 감성이 30년 후까지 살아있으리라 생각을 하고, 이번 촛불시민혁명은 감성혁명으로서 그야 말로 90%는 완성된 것이라고 본다.


박석운 광장에 LED 촛불이 많이 있었는데, 초반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이들 손잡고 나온 가족들이 많았는데, 애들이 LED 촛불을 갖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니까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마구 줬다. 개인적으로 그런 걸 많이 봤다.

또, 어떤 날은 광화문에 비가 좀 왔다. 내가 모자를 쓰니까 조금 오는 비는 견딜 만한데, 비를 맞고 있으니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가방에 있던 우산을 꺼내서 나한테 줬다. 촛불광장 속에서 공동체적 연대, 내지는 공동체가 만들어진 건 분명한 것 같다.


사회 그런 의미에서 다 동의하는 게, 87년 때 완성되지 못한 두세 가지 부분이 이번  촛불에서는 진일보했다는 것 같다.


박석운 87년과 촛불이 다른 점도 있다. 같은 점부터 이야기하자면, 평화시위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이를 테면 4월혁명 때는 총을 맞고 백 몇 십 명이 죽었다. 광주항쟁 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 87항쟁 때는, 사실 평화시위만은 아니었다. 투석하기도 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지 않으면, 우리도 돌 던지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면 평화시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평화로웠다.

87년보다 이번이 훨씬 평화로운 양상으로 진행이 될 수 있던 이유가 국회가 여소야대였다는 점도 있다. 결정적으로 그 차이가 있었다. 민심이 확인이 되면, 앞서 제도의 냉철함이라고 했는데,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꽉 막힌 것이 아니라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가 이번 촛불항쟁은 기본적으로 조직된 대오의 투쟁과 미조직 시민들의 합세가 상승작용을 해서 성공한 거다. 언론이나 이런 데서는 그런 걸 착목을 하지 않고, 그저 일반 시민들이 참여했다 어쨌다 하지만 그건 팩트가 아니다. 1~3차 촛불까지는 이른바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주최했다. 3차 촛불집회 때 가서야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1부를 하고, 박근혜퇴진범국민행동이 저녁시간을 맡는 걸로 확산이 됐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학생 등 이른바 조직된 대오들이 투쟁을 키운 거다. 키우는 과정에서 현실에 불만이 있는 미조직 시민들이 대거 가세했지만,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대규모 국민항쟁으로 번진 거다.

말하자면, 87년 당시에는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을 이간질해서, 확산이 저들 입장에서는 성공적으로 저지가 됐다. 하지만 이번에서는 거꾸로 조직대오가 주축이 됐고, 여기에 시민들일 가세하면서 이간질을 당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박근혜를 파면시켜 교도소로 보내고, 이재용도 구속시키고, 정권 교체까지 가는 성과를 냈다. 이 부분들이 종전과 달라진 그런 문제다. 

물론 항쟁의 승리가 어떻게 ‘촛불항쟁 시즌2’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지,  진화‧발전해 갈지가 과제다. 하지만 1차적으로 촛불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거의 유일한 성공한 항쟁이다. 1단계 항쟁은 성공은 한 것이다. 


사회 6월항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짧지 않았던 기간 진행된 촛불을 유지,강화시키는 가장 큰 동력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제도적으로 보면, 87년체제가 제대로 된 선거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진일보했지만, 선거를 통해서 성립된 정권이라는 이유로 그 정권이 반민주적 행태를 보일 때 제어해내지 못한 측면도 있다. 이번 촛불은 선거 시기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일상 시기에도 지켜져야 한다는 의미로 확장된 측면이 있다.

또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가장 크게 4월의거, 광주항쟁, 6월항쟁 그리고 이번 촛불시민혁명이 큰 획을 그었다고할 것이다.

당시로서는 성과와 한계가 항상 병존하였지만 긴 역사에서 본다면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조금씩 진보해 왔음이 분명하다. 이번 촛불에서 보여준 특징과 성과 중 하나는 반민주적이고 부패한 정권에서 권력을 박탈하는 과정을 제도 내에서 해결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단순시 대의제 안에서만 된 것이 아니라 직접 민주정과 대의제 사이의 결합을 통해서 했다는 점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승리 경험이라 생각이 든다.

이런 성과와 의미에도 불구하고 30년 전에 느꼈듯이, 이번 촛불항쟁 역시 상당 부분에 있어 여전히 미완이고 새로운 과제를 많이 던져줬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10년 간 어떤 부분에 집중할 것인지 미래 전망 혹은 미래 의지를 다져보았으면 한다. 


▪ 촛불 10년, 6월항쟁 40년…앞으로의 과제는


김중배 개헌, 분권, 또 새로운 산업 체계와 시대 변화에 따른 인권 문제 등 많이 있다. 이런 것들은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정권이 교체됐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를 바탕에서 이끌고 있는 소위 ‘기층 권력’은 전혀 교체되지 않았다.

이것을 문재인 정부에서 다 교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대도 걸지 않는다. 다만 거기에 갈 수 있는 토대, 바탕은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 유수한 경제학자들이 다 정부에 갔다고 한다. 6월항쟁 30주년 행사 때도 경제 민주화가 아닌, 경제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했다.(웃음) 

나는 사전에 준 질문지에 ‘촛불 30년 과제’라고 쓰여 있기에 이렇게 답을 적었다. ‘30년을 또 기다려?’(웃음) 그 뜻은 이 시대적 전환이, 정치경제학적, 사회경제학적 상황과 별개로 시대의 기능이 매우 가속도를 내며 변하고 있다. 나는 대전환기다, 문명적 전환기라고 본다. 

다들 알다시피 굉장히 많이 이야기되는, 유행가처럼 다들 4차 산업혁명 노래를 부른다. AI(인공지능)을 비롯한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직업이 없어지는가. 하지만 나 같은 아마추어가 보기에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게… 농업혁명 때 부족사회가 생기고, 시장이 생기고, 국가의 맹아가 생기고 (그 다음에) 산업국가가 생기고 근대 국가가 생겼다.

4산업혁명이 대격변인데, 여기에 맞는 시스템, 기술적 격변에 대응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구상이 전혀 없다. 그래야 산업혁명이 되는 건데…. 2차 산업혁명 때 대량 생산을 하다 보니까 근대 국가가 생기고 노동자 계급이 생기고 했는데, (지금은) 구체적인 구상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가야 하느냐.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다. 그것들을 일거에 다할 수는 없지만, 토대를 쌓아가야 되지 않나. 그래서 앞서 에로스효과를 의도적으로 꺼냈다. 왜냐. 나는 이번 촛불집회에서 제일 많이 따라다닌 곳이 중‧고등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이 중학생들이 ‘중학생 혁명당’ 이름을 딱 내걸었더라. 아, 얘들이 무슨  생각일까.

어떤 사람들은 그런다. 혁명이라는 것은 성취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내가 나서는 게 혁명이라고. 나서는 내가 혁명이다. 그 아이들에게 왜 더 관심을 가졌냐면, 지금 말씀드린 시스템과도 관계가 있다. 우리는 87년 체제를 말하지만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에 신자유주의의 본궤도가 깔렸다. 20년이 흘러서 세계적으로 회자되고, 우리도 그걸 느끼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인간형들이 팽배했다. 우리 주위에도 쫙 있다. 각자도생, 승자독식, 착취, 억압 같은… 그래서 인간들이 모래알 같이 됐다. 중학생들도 학원가기 바쁘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틀에 넣고 쥐어짜는 이 와중에, 저 애들이 어떻게 해서 혁명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다음 세대에 더 희망을 갖는다. 인간이라는 게 그렇게 쪼아대도 생명은 원천부터 사랑의 맹아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광장에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 아니겠나. 부모가 가라고 했겠나? 선생이 가라고 했겠나?

소위 일부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뉴-노말(New Normal)을 바탕으로, 예를 들어 박근혜가 정상이라고 말한 것들이 노말이었다. 독식하고 착취하고 하는 게 노말이었다. 박근혜만 전복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적인 문명이 비정상을 새로운 노말이라고 규정하는 이런 상태였는데, 그걸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

백낙청 선생이 ‘이면 헌법론’이라는 걸 말했다. 종북 좌파, 색깔론, 반공주의 같은 것들이 이면 헌법이다. 6월항쟁 때는 어버이연합도 없었는데, 박사모 집회에 가니까 판플렛을 나눠준다. 멸공진리교. 이게 이면 헌법이다. 뉴-노말로써 내면화된 소위 ‘내면 헌법’이 있지 않은가. 정부가 어떻게 하고, 정책을 어떻게 하더라도 내면 헌법이 증발되거나 승화해서 중학생혁명당처럼 에로스로 바뀔 수는 없을까.(웃음) 

(전민용 전 회장(왼쪽)과 백승헌 변호사 ⓒ바꿈)

김정헌 나는 지금 녹색당이다. 권력의 독과점부터… 특히 우리나라의 양당 제도에 의해서 끊임없이 여야로 편이 갈라져서 있는데, 이게 고쳐지면 조금 나은 삶이…. 예술가로서도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어야 그림이 되는데 이게 항상 뭔가 찌뿌둥한, 그런 느낌이다.

자신의 가치로 소수가 모였지만, 그것이 하나의 정당이나 대의활동을 할 수 있어야 기본적인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 텐데, 그걸 아직도 만들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 정권이 바뀌기는 했는데, 개헌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선거 제도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양당 제도에서의 권력 독과점 현상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촛불혁명을 계기로 그런 부분까지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촛불혁명을 만들어 준 최순실과 정유라를 잊지 말아야 한다.(웃음) 


박석운 누적된 민심 이반 상황에서 자멸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멸의 가장 적나라한 징후가 헌재에서 8:0으로 탄핵이 인용됐을 때, 박근혜 일당은 5(기각):3이나 4:4라고 예상했다는 것 아닌가. 계속 헛발질하면서 자멸을 한 측면이 있었다. 두 번째는 여소야대를 만들어내면서 제도적 해결의 가능성의 틈이 보였다는 점, 거기에 조직된 대오와 미조직 시민들이 합체를 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당장 눈앞에는 당면한 청산해야할 것이 많이 있다. 검찰 등 권력기관의 개혁이 첫째고, 둘째는 언론 개혁이다.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다른 모든 개혁을 만드는 개혁, 기본적 개혁으로서 중요하다. 그런데 검찰개혁은 될 것 같지만 언론개혁은 잘 안 보인다. 그래서 굉장히 걱정이다. 현재 갑갑한 국면이 벌어지는 주요한 배경이, 언론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것에서 기인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본다.

그 외에도 정치개혁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른바 연동형 비례대표제, 득표수와 의석수가 비례하게 만드는 것인데 일반 선거법 개정으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개헌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저들은 권력 구조 개헌을 중심으로 내각제니 이원집정부제니 요구하지만, 우리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안 하면 개헌은 없다. 이렇게 정리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외에 결선투표제, 18세 투표권 등도 정치개혁의 문제다. 

그 다음 문제가 이른바 노동개혁과 민생개혁이 있다. 노동기본권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것, 최저임금부터 시작해서 교원과 공무원의 노동조합 활동 보장,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금지 등 노동 개혁이 확실하게 되어야 한다. 민생 개혁은 최저임금 문제, 밥쌀 수입 중단, 철거 시 용역 폭력 문제도 있다. 그리고 재벌 개혁과 세월호 문제나 원자력발전소 같은 안전 사회 문제… 이런 것들이 당면 개혁에 속한다.

향후 10년, 20년을 이야기한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진보 정치. 지금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굉장히 위태롭다. 원인은 진보정치가 헤매고 있어서다. 문재인 정부의 교섭단체에 문재인정부보다 모두 우파들만 있다. (가만 두면 문재인 정부는 오른쪽으로) 끌려갈 일만 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개혁하게 하려면, 진보정치가 역할을 제대로, 대오를 갖추고 해야 한다. 어떤 경로로, 어떤 수단으로, 어떤 목표를 갈 지에 대해 감이 잘 안 잡히는, 실감이 안 나는…굉장히 괴로운 (상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피해갈 수가 없다. 이게 되어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개혁이 되지 않겠나 싶다. 또 하나는 분단 모순이다. 분단 적폐 청산인데, 평화와 자주 통일. 

그렇게 진보 정치와 평화 자주 통일, 이 두 부분이 중기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된다고 본다.


전민용 일단 헌법에 직접 민주주의 요소들이 들어가면 좋겠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세계사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4차 산업혁명, 기후 변화, 또 지역적‧국지적으로 벌어지는 갈등들에 대해서도 우리나라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대안을 가져야 한다.

대안적 사고를 하려면 새로운 가치와 방향에 대한 훨씬 더 유연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진보정치도 좁은 틀에서 현재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뿐만이 아니라, 2030 세대가 생각하는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들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깊어지고,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박영민 다른 이야기를 하지면, ‘민주주의’에서 민의 개념은 항상 달랐다고 생각한다. 범위가 확장되고, 깊이가 달라질 때도 있었다. ‘민’의 개념은 중립적이지 않고 항상 정치적인 맥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10년 후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가치가 발견돼서, ‘이것도 민주주의에 포함된다고?’ 하며 놀랄 수 있을 거다. 예를 들어, 30년 전에 동물권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을 했겠나. 그런 식으로 아직 발견되지 못한 가치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10년 후에는 더 많은, 더 넓은 ‘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다양한, 시각을 넓히려는 노력을 이 사회 전체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김중배 이미 뉴질랜드에서는 강에 인격을 부여했다. 히말라야 빙하도 그렇다. 자연에 대해서 존중하는, 인간과 동일시하는 걸 녹색당 같은 곳이 해야 한다. 반대로 지금부터는 ‘적색당’이 될 수 있는데, AI 시스템이 들어왔을 때 로봇에 과세를 해야 한다. 원천적으로 AI 로봇을 소유할 수 있는 건 막대한 자산가 밖에 없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니까 소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가치’라는 말에 여러 가지가 들어 있다. 이것들이 곧 온다.


사회 어떤 도전이 끝나면 비로소 새로운 도전을 알게 된다. 촛불 역시 우리가 해결할 많은 숙제를 남겨주었다. 말씀해주신 여러 과제들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논의할 시기가 지금이 아닌가 한다. 

산업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한국 사회가 패스트 팔로워(fast fallower)가지고는 안 된다. 새로운 자기 가치를 창출해 내야 하지 않겠냐고 한다. 한국 민주주의도 그 수준에 이른 게 아닌가. 우리가 발전해서라기보다는, 그런 과제가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긴 시간 귀한 말씀하여주셔서 감사하다. 모두 건강하셔서 10년 후, 또 30년 후 촛불과 6월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 나누길 소망한다. 


<끝>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지난 6월 8일 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을 빼곡히 채운 400명 가량의 관중들, 마당극의 창시자이자 창작판소리의 독보적 존재인 임진택이 나오더니 이제 막 새로 짠 판소리 <다산 정약용>을 창해나갈 두 명창을 소개한다. 

“작품의 1부 ‘풍운 속으로’를 맡을 송재영 명창은 전주 대사습에서 장원해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명창이고, 2부 ‘유배지에서’를 맡을 이재영 명창은 보성소리축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명창입니다. 두 재영씨가 다 대통령상을 받았는디, 대통령상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녀. 상 받을 때 대통령이 누구였느냐 이것이 문제여.” 엉뚱한 발언에 관중석에서 미묘한 웃음이 번진다. 

그러자 송재영 명창이 “나는 노무현 대통령 첫해에 받았소.” 당당하게 밝히는데, 이재영 명창은 답을 못하고 쭈뼛쭈뼛한다. “거봐, 답을 못하고 딴전 피잖여. 아무리 대통령상이라도 맘에 안 드는 대통령이면 거부를 했어야지. 안 그려?” 관중석에서 “그렇지” 하는 추임새가 저절로 튀어나오면서 폭소가 뒤따른다. 

지난 해 말 위암 수술을 받은 뒤 몸무게가 10여킬로그램이나 빠진 임명창은 아쉽게도 이번 공연에서 직접 창을 하지는 못하고 해설과 아니리(판소리에서 말로 이야기해 나가는 대목)만 맡았다. 하지만 ‘광대’ 임진택의 풍자와 기세, 재치와 해학은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이다. 송재영, 이재영 두 명창의 역량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다산 정약용 얘기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얘기임을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드러내며 대번에 판을 장악한다.    

예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나게 하는 힘

창작판소리 <다산 정약용>은 다산의 일대기를 통해 개혁정치와 애민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에 공감한 관객들의 연이은 추임새가 보여주듯, 이 작품은 200년 전 조선이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지난 2월 경기도 실학박물관에서의 초연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공연’이 열린지 사흘 뒤, 여운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임 명창을 만났다. 그는 “예술이 힘을 갖는 것은 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라며 예술의 본질에 대해 설명했다. 30년 전인 1987년에도 그랬노라며.

“6월항쟁 때 민중문예운동집단이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엄청나게 큰 한열이의 걸개그림이 길을 꽉 메우고, 그 걸개그림 앞에 이애주 교수가 맨발로 춤을 추면서 나가죠. 만약 걸개그림 없이, 이애주 교수의 썽풀이춤(분노의 살풀이춤) 없이 행진했다고 생각을 해봐요. 6월항쟁의 모습이 눈에 잘 보이지 않죠. 그 보이지 않는 항쟁의 어떤 기운, 역동성, 상징과 의미, 역사성...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드러내어 보이게 하는 힘, 그게 예술이에요. 

87년 6월, 그동안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시민들이 밖으로 다 나왔지요. 자기 안에 분노와 저항이 숨어있었더라도 자기도 몰랐고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뛰쳐나온 거지요. 그게 예술의 힘이에요. 예술적 충격으로, 잠재해있던 분노와 저항의 감성이 몸 밖으로 새어나오니까 자신도 모르게 거리로들 뛰쳐나온 거지요. 장르로서의 예술만이 아니라 한 마디의 구호, 표어, 한 마디의 외침과 한 번의 손짓, 몸짓, 무언의 표정과 눈빛까지도... 그런 데서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같이 동요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같이 동의하고 동참한단 말이에요. 그게 판이고 마당굿이지요.”

임 명창은 1987년 7월 9일 故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6월항쟁의 가장 상징적인, 절정의 순간으로 꼽았다. 하지만 정작 임 명창은 6월항쟁의 절정을 그 현장이 아닌 미국 땅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를 통해 지켜봐야 했다. 광주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밀항 탈출, 망명한 윤한봉씨가 미국에서 한청련(재미한국청년연합)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87년 긴박한 정세에서 미국에서도 문화적 대중집회가 필요하다며 긴급히 협조를 요청해 왔기 때문이다.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죽음에서 발단된 군부독재에 대한 항거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연세대생 이한열의 죽음을 보고 폭발한 것이 6월항쟁이라고 볼 수 있지요. 6월 초까지만 해도 그렇게 터져서 우리가 승리하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그런데 한 달 전쯤 LA 윤한봉 형 쪽에서 연락이 오기를 ‘미주에서도 집회를 열고 사람을 모아야 하니 임형이 와서 공연을 해달라’ 하더라고요. 

그 당시 내 창작판소리 <똥바다>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던 때니까… 사실 국내 상황이 급박한데 한국을 떠나도 되나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어요. 미국 비자 받기도 쉽지 않았고. 그런데 한청련 쪽에서 뉴욕 인근 스토니브룩(Stony Brook) 대학에 교섭해서 초청장이 온 거예요. 그 대학에 마침 한국학과가 신설되어 한국 전통예술에 대한 강연을 요청하는 형식이었지요. 묘한 것이, 내가 그 무렵 석계역(석관동·월계동 인접 전철역)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석계(石溪)를 번역하면 Stony Brook이라, ‘거참, 내가 사는 동네에서 초청이 왔네’ 하고 미국으로 떠났지요.(웃음)”

▲ 임진택 판소리 명창(ⓒ 바꿈)

팟캐스트가 없던 시절, 광대가 그 역할을 했다

정치 · 세태 비판이 자유롭지 못했던 군사독재 시절, 임 명창은 자신의 책무가 요즘으로 치면 김제동, 김어준, 정봉주 등 인기 팟캐스트가 하는 역할과 비슷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인기를 가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85년과 86년, 창작판소리 <똥바다>가 대학가를 휩쓸었어요. 80년대 초반 나보다 앞서 대학가를 휩쓸었던 공연은 공옥진 여사의 심청가 병신춤판으로, 학교 측 후원과 배려까지 곁들여져 인산인해를 이루었지요. 내가 그 공연을 보면서 절치부심해서 만든 작품이 바로 창작판소리 <똥바다>입니다. 

그때는 공연윤리위원회란 것이 있어서 정식 공연허가는 안 나왔고, 신촌 우리마당에서 초연하고 명동성당 마당에서 판을 키운 후 주로 전국의 대학 학생회 초청으로 순회공연을 했는데, 학교 측 후원과 배려는커녕 집안에 연금되거나 학교 경비원들로부터 출입금지 당하기도 해서 심지어는 담을 넘어 들어간 적도 있어요. 들어가 보면 학생들이 1천 명 넘게 모여 있는 데도 있고, 100명도 안 모인 곳도 있고, 빽빽거리는 마이크 스피커라도 준비된 곳이 있고 아무 음향도 준비 안 된 곳도 있는데, <똥바다> 공연을 시작하면 너무 재미있고 반응이 크니까 지나가던 학생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서 끝날 때면 수백 명, 수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어요. 판소리가 좋은 점이 뭐냐면 북 고수 하나만 데리고 가면 되니까… 이동도 간편하고, 몰래 숨어 들어가기도 쉽고, 도망칠 때도 간단하고. 

전국의 대학교 안 간 곳이 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의 공연입니다. 듬성하게 앉아도 수용인원 5천명이 넘는 그 큰 노천극장에 돗자리 대신 가마니 한 장 깔아놓고, 마이크 1대 겨우 세워놓고 <똥바다> 공연을 하는데, 나 자신이 무아지경이 돼서 공연을 끝내고 정신을 차려 본즉 그 야외 노천극장 산등성이까지 관중이 꽉 들어차 있는 거예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그 기록이 깨진 것이 87년 6월항쟁 직후 이애주 교수가 벌인 ‘바람맞이 춤판’입니다. 만 명도 넘는 관중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이틀 동안 북적댔으니까요. 그 기록은 90년대초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기획하고 문호근 선배가 연출한 <자, 우리 손을 잡자>에서 다시 갱신됩니다.”

85년과 86년, 임 명창의 공연을 계기(?)로 모인 학생들은 곧장 집회를 하러 나가기 일쑤였다. “집회에 나갈 사람을 모으는 데 이용당한 게 아니냐”고 묻자, 임 명창은 “좋은 뜻으로 나를 활용한 것”이라고 정정하면서 장난기 서린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 공연 끝나면, 학생회장이든 문화부장이든 나한테 정중하게 책정된 출연료를 내놓은 대학이 있는가하면, 학생들 시위가 바로 이어져서 학생회 간부들 모두 시위에 앞장서거나 자취를 감춰버리는 통에 출연료는커녕 나 자신도 피신하느라 바쁜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어느 대학이라고 이제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때 입 싹 씻은 학생회 간부들, 소위 386세대 다수가 지금 국회의원이고 청와대에 들어가 있는 거죠.(웃음) 그래서 내가 우스개소리로 이런 말을 합니다. ‘386세대는 80년대에 내 <똥바다> 거름을 먹고 자란 세대다.’(웃음)

이참에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요. 민예총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1985년 연극·미술·음악·춤·풍물·문학 등 예술장르만이  아니고 언론·출판 분야까지 합쳐서 만든 단체였지요. 황석영 선배가 바람 잡고, 동아투위 해직언론인 김종철 선배가 대표 역할을 맡아했는데, 6월항쟁의 씨앗이랄까 거름은 민중문화운동으로 뿌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제일 열정적이었고 행복했어요.”

▲ 임진택 판소리 명창(ⓒ 바꿈)

6월항쟁은 미주 교포 사회에서도 펼쳐졌다

대학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주에서 ‘활용 당하기’ 위해 급히 갔던 미국에서 그는 두 달 가까운 기간을 머물렀다. 윤한봉이 앞장선 미국 땅에서도 그렇게 6월항쟁의 판이 열렸다.

“나는 서울서 6월 10일 집회(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까지 보고 떠났어요. 그리고는 미국에서 로스앤젤레스를 시작으로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DC, 보스톤, 시카고, 댈러스 등 10여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교포들을 만났는데, 열기가 대단했지요. 지역마다 교포들이 수백 명씩 그렇게 많이 모인 건 몇 해 전 김대중 선생 망명 와서 연설한 이후 처음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이한열의 장례식 장면은 뉴욕에 있을 때 뉴스로 봤어요. 백만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형 걸개그림 앞세우고 맨발의 이애주 교수가 썽풀이춤 추며 걸어 나오는 모습에 한청련 식구들 모두 감격하는데, 사실 나는 걱정도 좀 됐지요. 이애주 교수는 나에겐 처형(妻兄)이니까… 내가 국내에 있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87년 이후 미주에서 교포들이 다시 수백 명 이상 운집한 사건은 87년 12월 ‘민중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백기완 선생을 몇 해 후 윤한봉 형이 초청해서 순회강연을 했을 때라고 들었어요. 그러던 윤한봉 형도 90년대에 귀국을 했으나 밀항탈출 이후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2007년 저 세상으로 먼저 갔고, 그 후 한청련도 조직적으로 분해가 됐다고 하는데 또 요즘엔 정치적 관심이 많이 줄어들어, 절창의 가객 장사익 형이 가야 교포들이 운집한다고 하더군요.(웃음)” 

광주를 빼고는 6월을 얘기할 수 없다

임 명창이 87년 미국까지 가서 윤한봉을 비롯한 재미교포들과 더불어 6월항쟁의 판을 키우게 된 계기는 단지 그의 명성과 인기뿐만이 아니었다. 그 역사와 유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부터 5.18 광주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87년 6월항쟁을 얘기하려면 80년 광주민중항쟁을 먼저 얘기해야 합니다. 6월항쟁은 ‘광주항쟁의 진상을 규명하라, 학살자를 처벌하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을 얘기하려면 1979년의 부마항쟁과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을 되돌아봐야 합니다.

80년대는 민주화운동가를 비롯한 지식인 대학생들에게는 광주에서의 학살과 민중항쟁에 대한 분노와 부채의식으로 점철된 시간이지요. 그런데 광주에서의 학살은 그 전해에 있은 부마항쟁과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79년 10월,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비호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의원직 박탈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대통령 박정희의 경호실장이던 차지철이 캄보디아(킬링필드) 사건을 예로 들며 집단학살을 감행하려는 기미를 보임에 이를 저지하려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차지철을 제압하고 박정희를 시해하는 거사를 일으킵니다. 

여기서 잠깐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김재규 씨에 대한 평가도 이제 역사적으로 점검될 필요가 있습니다. 김재규의 거사일이 1979년 10월 26일, 이 날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1909년 10월 26일로부터 꼭 70년이 되는 날이었지요. 그 상징성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각설하고, 박정희의 후계를 자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야욕으로 12.12 반란을 일으켜 군권을 장악하고, 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친위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리고는 반년 전 부산과 마산에서 자행하려던 집단학살의 표적을 전라남도 광주로 바꾸어 겨냥해서 무자비한 명령을 내려 공수단을 투입합니다. 광주에서 무조건 수 백명 아니 수천 명이라도 죽여서 본때를 보이면 아무도 겁나서 못 일어난다, 이게 전두환 생각이었겠지요. 하지만 사태는 전두환 생각대로 만만하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광주에서 엄청난 항쟁이 일어난 거지요. 누구라 할 것 없이 시민들 모두 들고 일어나, 심지어는 총까지 들고 싸워 도청을 탈환하는 혁명적 시공간, 해방구가 열린 거지요. 

사실 광주에서 지도자급 재야인사와 청년운동권 선배급은 계엄 확대 직전에 진행된 예비검속에 걸려 먼저 붙잡히거나, 그 전에 모두 피신하거나 했어요. 광주 청년운동권의 대표적인 선배급이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윤한봉 형과 녹두서점을 운영하던 김상윤 형인데, 두 사람 모두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 전남지역 대학생 책임자로 징역 15년~20년을 선고받고 옥살이하다 석방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해야 할까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예비검속 대상이 아니었던 후배 윤상원이 광주의 운명을 떠맡아 마지막 새벽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하게 되지요. 

막강한 병력으로 도청을 진압한 계엄당국이 광주항쟁의 조직도와 수괴를 조작하려 하는데 예비검속에 걸린 김상윤 형은 체포되어 있었으므로 알리바이가 확실해서 조작이 어려웠지만, 윤한봉 형은 잡히면 수괴로 몰릴 가능성이 높고 북한 간첩과 연계시킨다든가 조작돼서 처형당할 위험이 높다고 봤지요. 그래서 본인도 피신을 안 할 수 없게 되었고 주변에서도 적극 피신을 도운 겁니다.” 

故 윤한봉 선생은 항쟁이 열흘 만에 진압된 뒤 5.18광주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남아 1년 넘게 피신생활을 하다가, 지인들의 도움으로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는 극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임 명창은 자신을 미국으로 초청한 윤한봉 선생이 ‘당시 광주에서 죽음으로써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고 했다. 윤한봉 선생은 광주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 미국 땅에서 민족학교를 세우고 한청련을 조직하고, 재미한겨레동포연합을 결성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 재미동포의 권익을 위해 헌신했으며, 1989년에는 세계 각국의 민간단체와 협력하여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을 추진해내고, 이어 타민족 활동가들과 ‘반전·반핵을 위한 국제연대’를 조직하여 세계평화에 힘을 쏟았다.    

마당극을 비롯한 문화운동으로 유신체제를 뒤엎다

6월항쟁 때만이 아니라, 임진택 명창의 무대는 항상 그렇게 시대와 함께 호흡했다. 숨 막히는 70년대, 임진택이 창출한 마당극 공연과 창작판소리 <소리내력> 공연은 언제나 ‘역사의 현장’이자 ‘질곡의 타파’였다.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 사건 때 현상금 걸린 주모자 3명 중 유인태 형을 숨겨줬어요. 은닉죄라나, 당시 주모자 현상금이 200만 원이었는데 간첩 신고를 하면 1백만 원이었죠. 큰누나 집에 숨겨줬다가 나중에 들통이 나서 잡혀 들어갔는데, 나는 그냥 잡혀만 있었을 뿐 군법회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렇게 몇 달을 지내고 구속취소로 풀려났는데, 나중에 보니까 선배들이 은닉사실 말고는 내 이름을 끝까지 숨겨줬더라고.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을 공산주의로 몰아가려고 공작을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일본인 기자 두 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연계시키는 거였어요. 내가 했던 일 중에 1973년 12월말, 박형규 목사님이 주재하시던 서울제일교회에서 <청산별곡>이라는 마당극 공연을 하던 날(이 작품이 우리 연극사에서 최초의 마당극이라 할 수 있음), 일본인 기자들이 찾아와 원작자인 김지하 시인과 학생운동 주요인물인 유인태, 이철 형을 만난 일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그 연락책이었더라고. 민청학련이란 것이 침소봉대(針小棒大) 부풀려서 조작한 사건이라, 그 일을 들켰더라면 적어도 무기징역은 받았을 거야.(웃음)”

그의 공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이고 운동이었지만, 그의 공연이 만들어낸 주변 상황까지가 예술을 넘어서는 또 다른 시공간을 창출하곤 했다. 때문에 임 명창의 이야기처럼 70년대 사회운동 세력들이 다 잡혀가고 씨가 말랐을 때 탈춤과 마당극, 문인들과 언론인, 종교인을 비롯한 문화운동 세력이 들고 일어나 유신을 뒤엎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부마항쟁(79년 10월 16~20일)에서 10.26 사태로 이어지는 그 짧은 기간에 펼쳐진 임진택의 마당극(마당굿) 역시 그런 힘을 발휘했다.

“내 마당극 중 제일 기억나는 작품이 뭐냐면, 이화여대에서 공연한 <노비문서>가 있어요. 1979년 10월 이화여대 운동장에서 사흘 동안 공연을 했는데, 하루에 수천 명씩 한 1만 명은 넘게 왔어요. 관중이 스탠드에도 꽉 차고 운동장에도 꽉 차고 넘쳐서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느낌이었어요. 10.26 이전에 부마항쟁이 있었지만 서울에서는 일체의 집회가 안 됐는데, 이화여대가 일종의 성역이어서 유일하게 허가된 마당극에 사람들이 모인 거지요. 사흘 동안 집회를 대신 한 거죠. 교문 밖에는 수백 명 전경들이 투구를 쓰고 대기 중이고…

그리고 그게 10.26으로 이어져요. 그 광경을 목격한 어떤 선배 연출가 한 분이 하는 말이 ‘임형이 연출한 게 운동장 마당에서 펼쳐진 <노비문서> 뿐 아니라 밖에서 전경들이 탈을 쓰고 왔다갔다하는 것까지 연출한 거다’ 하는 거예요(웃음). 과연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봤죠. ‘전경들까지 탈을 쓰고 등장해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연극이다? 그렇다면 지금 벌어진 판을 마당극이라 말하기에는 개념 범위가 너무 좁다. 

그렇지, 이게 바로 마당굿이야.’ ‘마당굿’이란 용어는 백기완 선생님이 발굴해서 쓰신 표현인데, 누구를 보여주려고 만든 연극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이 다 참가해서 일구어가는 판을 일컫는 개념이라, 바로 그런 마당굿판이 집회현장 · 시위현장에 맞물려 실현된 거지요.”

촛불혁명! 임 명창은 박근혜를 탄핵시킨 촛불혁명 역시 그렇다고 말했다. 광장에 나온 모두가 참여하는 굿판! 임 명창은 “이명박 ‘쇠고기 파동’ 때는 사람들이 모였어도 좀 미진했지만, 이번 박근혜-최순실 타도 집회에서는 시민의 자율적 힘과 의지가 폭발적으로 모여 마당굿판이 성립된 것”이라 했다. 6월에서 광주로, 민청학련을 거쳐 촛불항쟁으로 역사 속을 종횡무진한 인터뷰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화제가 옮겨갔다.

▲ 임진택 판소리 명창(ⓒ 바꿈)

정치권, 30년 전 실패에 ‘마지막 책임’을 다하라

“촛불혁명을 두고 어떤 사람은 6월항쟁 이후 30년 만에 성공한 시민혁명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4.19 이후 도래한 시민민주혁명이라 말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기 직전 삼례와 원평 보은 등지에서 있었던 동학교도들의 취회야말로 촛불집회의 원형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각설하고, 최근 몇 달간 진행되어 왔던 촛불혁명과 그 결과로 이루어진 정권교체를 보면서 정말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 속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87년 6월항쟁으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면, 87년에 양김(김영삼, 김대중) 선생이 분열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기쁨이 30년 전에 누릴 기쁨이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30년 전 그 때 6월항쟁의 열정으로 민주진영이 단합하여 정권을 교체했다면 친일세력, 분단세력, 군사독재세력, 재벌독점세력의 적폐가 이처럼 쌓이는 걸 미리 막았을 테고, 굳이 수구세력과 손잡고 정권을 획득함으로써 개혁의 걸림돌을 자초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 오래 묵은 영호남 지역감정도 진즉에 깨끗이 씻어낼 수 있었을 테고, 엉뚱한 대통령이 나타나 우리 강과 땅을 다 망쳐놓는 일도 없었을 테고, 어처구니없는 대통령을 만나 민생과 민주주의를 이처럼 훼손하는 일도 없었을 터인데, 생각하면 참으로 아깝고 아쉬운 일이지요. 30년 앞설 수 있었던 적폐청산, 이제는 누가 책임지기도 어렵지만, 하지만 반성은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해야 할 일이 좀 남아 있어요.”

임 명창은 ‘마지막 책임’이 남아 있다며, 이번 대선 득표율 이야기를 꺼냈다. 6월항쟁 직후 그 해 12월 진행된 대통령 선거 당시, 백기완 선생의 선거운동본부에 단 한명의 특보로 참여했던 임진택의 경험이 녹아 있는 조언이었다. 당시 백본은 양김의 단일화를 이끌어 내려 애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6월항쟁의 열매는 노태우가 가져갔고, 이는 광주 학살세력의 정권연장을 합규적으로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에서 홍준표가 24%, 2등을 했어요. 이 표결 결과를 선거공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자칫 87년도가 재현될 수도 있었던 거지요. 만약에 바른정당이 새누리당에서 갈라져 나오지 않았다면, 유승민이 가져간 8%가 여기(홍준표)에 붙을 수 있어요. 그럼 32%죠. 그런데 문재인과 안철수 둘이 받은 표를 합쳐 보니 62%더라고요. 만약에 문 · 안 두 후보가 끝까지 팽팽하게 표를 나눠 가져갔다면 홍준표가 당선될 수도 있었다는 거죠. 정의당 표를 몽땅 이쪽으로 가져오지 않는다면 말이죠.”

36(노태우):28(김영삼):27(김대중):8(김종필).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득표율이 19대 대선 결과와 묘하게 겹쳤다. 87년 때 자리 잡힌 정치체제가 박근혜가 탄핵된 지금도 여전히 공고하단 의미일 것이다. 임 명창은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지만 이와 동시에 정치권의 개편이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큰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했다.

▲ 임진택 판소리 명창(ⓒ 바꿈)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가지고 갈 표가 어차피 40%였다면 안철수가 30%, 유승민이 10%, 홍준표가 10%, 정의당이 10% 득표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이고, 정계 개편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고 봐요. 수구보수 세력은 그 이기적 성격으로 볼 때10%의 지지로는 유지되기가 어렵지요. 지금 의원 수가 아무리 많아도 3년 안에 저절로 문 닫게 될 겁니다. 반면 진보정당은 두 자릿수 지지율을 확보하면 장래가 촉망되지요. 그런데도 이번 대선의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은 TV토론 등에서 안철수의 내공 부족이 드러난 이유도 있지만, 연대해야 할 이웃정당의 부각을 두려워하는 민주당의 전략선택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 결과 정책 중심의 바람직한 다당제의 실현은 멀어지고, 적대적 공생이라고까지야 이제 말할 수 없겠지만 상호 의존적인 양당체제로 도로 굳어지는 양상이 생겨난 겁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음 국회의원 선거까지 3년이 남았는데 그동안 어떻게든 협치를 해야지요. 그러면 협치의 대상을 어디까지로 하느냐?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자유한국당만 빼고 가능한 만큼 모든 당과 협치를 해 달라 이거예요. 바른정당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를 터인데, 박근혜 탄핵 시점으로 돌아가보면 굵은 선이 보입니다. 200명 넘는 국회의원들이 동의해서 박근혜를 탄핵시켰잖아요. 얼마나 큰 힘입니까? 

지금 당장 중요한 과제들부터, 과반수가 필요하면 과반수만큼, 2/3가 필요하면 2/3만큼 협치 범위를 신축성 있게 적용해서 바꿔나갈 것은 바꿔나가라 이 말입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해 80% 넘는 지지율이 나오는데, 이렇게 힘이 있을 때 자신과 경쟁할 수 있는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협치하라,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크는 것을 경계하지 말고 새누리당인지 자유한국당인지를 고사시키는 것을 전략으로 택하라. 그렇게 해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우파 정당이 세를 확보해야 민주당은 중도의 정당이 되는 거고, 그래야 정의당이 좌파의 대열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진보정당이 20%는 얻어야죠. 그렇게 되면 국민은 마음 놓고 정책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폭력적인 정치체제를 소멸시키는 것, 협치하고 연대하는 정치체제를 만들어서 정책에 따라 국민이 원하는 바가 정치에 반영되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큰 그림을 그려 달라 이겁니다.”

예술가의 예지, 시대감각을 믿어달라

임 명창은 예술가는 정면만이 아닌 왼쪽 오른쪽 측면에서 또는 뒤에서 보는, 거리와 여유를 가지고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 그 판에 몰두한 선수보다 훈수를 두는 이가 더 좋은 수를 잘 찾아내듯, 예술가의 역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40년 넘게 민주화운동의 복판을 지킨 문화운동가이자, 광대를 자처하는 예술가인 임진택 명창! 3시간 가까이 진행된 그와의 인터뷰를, 그의 내력을 가만히 곱씹어보자니 한 문장이 잔상을 남겼다.

“예술가의 예지랄까, 시대감각에 대해 존중하고 믿어 달라.”

임 명창의 이 말이, 예술가를 정치적인 잣대로 재단해 돈으로 그 정신을 사려 했던 ‘문화계 블랙리스트’에서부터 박근혜 정부의 몰락이 시작됐다는 것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전두환 때는 반상회에 공무원들이 반드시 참여해서 보고서를 쓰게 돼 있었어요. 저는 국립대 교수였으니까 공무원이잖아요, 가야죠. 근데 반상회에 별거 없잖아, 보고서를 쓰는 데 쓸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반상회 오늘의 주제는 '개똥을 치우자 였다. 개똥을 아무 데나 버리지 맙시다'였다' 이렇게 써냈어요. 그 다음 달 반상회 때도 '이달에도 또 개똥을 치우자고 했다. 아직도 안 치워서 문제다’라고. 나는 만날 그렇게 개똥만…(웃음). 한 마디로 개~똥 같은 세상이었지요."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은 '개똥을 치우자'는 반상회 보고서를 "출석부 내듯이" 내도 "아무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무원을 동네 반상회에 참석시켜 주민들의 동향을 보고토록 했다는 일화는 소름을 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박 이사장은 6월민주항쟁 이전에는 사회 전체가 그렇게 감시 체제로 돌아갔다며 또 다른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학교 버전. 6개월간 학생과장을 맡았던 1983년도의 일이었다. 그는 "학교에 경찰들이 상주(이른바 '프락치')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교수가 프락치였다"라고 이야기를 열었다.

"학교 출입하는 정보과 형사가 나한테 와서 '애들 뭐 하느냐, 어떻게 돼 가냐' 물어요. 처음에는 정보라는 게 없고, 그 사람도 직업이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애들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말고 가세요' 이런 형식적인 답을 했어요.

그런데 자꾸 꼬치꼬치 물어보니까 화가 나잖아요. 해서 '아니, 내가 당신 정보원이야? 어디 교수한테 와서 애들 정보를 내놓으라고 그래?' 그랬더니만 이 경찰이 화를 내더라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학생과장만 그러시냐'고. 그래서 내가 경찰서장한테 바로 전화를 했어요, 그 경찰을 앞에 앉혀놓고.(웃음) 그러니까 그 경찰이 놀라서 죄송하다고 하고는 다음부터는 내 근처에도 안 왔어요. 그렇게 전부가 다 통제 대상인거죠. 교수도 자기가 데리고 있는 정보원이고."

'개똥 치우기' 보고서가 사라졌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던, 독재자 전두환의 기세가 등등했던 1983년. 박진도 이사장은 학생처장 임기를 마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때가 1987년 4월. 분위기는 4년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본에 갔다 온 후에는 이미 전두환 정권이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호헌 선언을 했다는 얘기는 이미 그 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 이후로 사람들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반대 선언 같은 걸 하잖아요. 교수들도 4월 말에 호헌 철폐 선언을 했어요."

박 이사장은 새 학기가 시작하기까지 남은 기간을 서울의 길거리에서 살았다. "최루탄 가스를 많이 먹었다는 기억 밖에 없을 지경"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날을 묻자 박 이사장은 6월이 아닌, 7월의 어떤 날을 상기했다.

"이한열 열사가 죽고(7월 5일) 9일에 장례식을 했어요. 연세대에서 노제를 하고 서울시청 앞으로 오게 돼 있었는데, 장례 행렬이 연세대 신촌 로터리에서 시청 앞 로터리까지 꽉 찼어요. 100만 명은 넘을 거예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정치인이고 교수고, 내가 아는 사람은 다 나온 것 같아요.(웃음)

그게 굉장히 큰 사건인데, 그때 시청 앞에서 되게 혼났던 것 같은 기억이 나요. 마지막에 시청 앞에서 경찰들하고 붙었는데, 본의 아니게 시위대의 맨 앞줄에 있었어요. 경찰은 (사람들을) 해산을 시켜야 할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최루탄이 지랄탄, 사과탄… 종류도 많았어요. 나도 그때 최루탄 피해서 다녔는데, 포위돼서 갇혀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까 가방도 없어지고, 안경도 없어지고…."

"사회 구조 변화에 농촌이 대응을 못했다"

6월항쟁 중에 사라진 박 이사장의 안경과 가방 다음으로 '개똥 보고서'가 자취를 감췄다. 박 이사장이 평생 연구‧활동을 해온 농업 분야에서도 사라진 것이 있었다. 농협 조합장 간선제. 6월항쟁의 성과로 농민들은 농협의 조합장을 다시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농협 조합장 직선제가 1988년부터 시작됐어요. 그전에는 소위 '농협 임직원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 보통 임시조치법이라고 하는데 그걸 박정희가 1962년에 했거든요. 임시조치법으로 농협 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나머지 조합장들은 중앙회장이 임명하는, 위에서부터 쭉쭉 내려오는 임명제로 바뀌어 버렸어요.

사실 농협은 협동조합이라서 대통령이나 중앙회장이 임명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선 지금 사회 안정을 위해서 급하니까, 임시로 한다'는 뜻으로 임시조치법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던 거죠. 그게 87년까지 갔으니까 25년이에요. 임시가 아니죠. 박정희보다 더 오래 간 거지."

조합장 직선제는 '100만인 서명운동'(1983년)을 하는 등 농민들이 치열하게 싸워 쟁취한 결과물이었다. 사실 농민들은 군사 독재의 엄혹한 시절 내내 투쟁을 계속해 왔다. 71년 가톨릭농민회(가농)가, 82년에는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기농)가 조직됐고, 85년에는 전국 20여개 군에서 2만여 농민들이 '소몰이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농민운동이라는 게 굉장히 지역적이라 잘 조명되지 않아서 그렇지 농촌 현장에서의 대중운동이랄까 민주화운동의 동력은 다 농민운동이었어요.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서도 실제 조직을 구성할 때에 가농이나 기농의 활동가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그랬어요. 농민운동 진영이 대도시의 청년학생 진영과 함께 시군 단위에서 6월항쟁의 거점 역량으로 역할을 한 거죠."

87년이라는 시공간에서 실력과 위력을 발휘한 농민 운동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89년 2월에는 2만여 명에 달하는 농민들이 상경 집회를 열었고, 그 직후인 3월에는 전국 단위의 농민 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7년 이후 농촌의 상황은 계속 미끄러져 내렸다. 6월항쟁의 성과가 농촌만 빗겨간 걸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87년 이후에 한국 사회가 급속히 변했잖아요. 농업농촌이 그 이전보다 주변부로 밀려난 거죠. 87년의 성과를 떠나서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했는데 그 변화에 농촌이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고 봐야 해요."

▲ 박진도 이사장. ⓒ바꿈 

농협은 농촌‧농민에 무관심하다?

농업과 농촌이 사회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데 실패한 원인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농협의 책임은 빼놓기 어렵다. 박 이사장은 "농촌에서 농협이 굉장히 중요한 조직"이라면서 "농협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농업협동조합법(농협법)에 보면,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생산된 농산물의 판로를 확대하고 잘 유통하고 가공하고 해서 경쟁력을 높이고, 또 농민의 사회적인 지위 향상 등을 위해 노력을 하라'는 게 농협의 설립 목적이에요. 신용사업은 그런 사업을 뒷받침을 하는 거고요.

박정희 전에는 농업협동조합과 농민은행이 따로 있었는데, 박정희가 이걸 합쳤어요. 그러니까 농민 입장에서 보면 농협은 농산물의 생산, 유통, 가공, 소비 같은 본연의 일을 잘 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못해요."

과거 농협은 농민과 농촌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독재정권의 농업 정책을 현장에 시달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통일벼 보급, 미곡 수매 등 쌀 농정에 집중했는데, 그 결과 "쌀 농정이 파탄났다"고 박 이사장은 평가했다. 농협 안팎의 구조적인 원인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나라 농협은 종합농협이라 농민 조합원의 구성이 매우 다양해요. 어떤 조합원은 쌀농사를 주로 하고, 어떤 농민은 소를 주로 키우고, 어떤 조합원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주로 하지요. 게다가 그 경영규모도 매우 달라요. 논이나 밭 300평 이상 농사를 짓거나, 소와 같은 대동물 1마리 이상 키우면 다 농민자격이 있어요. 논농사 300평 짓는 농민이나 10만평 짓는 농민, 소 1마리 키우는 농민이나 500마리 키우는 농민이 모두 함께 조합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죠. 따라서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협동조합으로서 기능하기가 어렵죠. 여기에 비농민 준조합원을 포함해서 돈장사를 해서 수익의 대부분을 버는 구조에요. 이미 농사에 별 관심이 없는 고령농민들이 조합원의 대부분이고요. 

이런 구조에서는 조합장 직선을 한다 해도, 진정으로 농민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제대로 된 사람보다는 그야말로 ‘정치꾼’, 조합장이 뽑히기 쉬운 거죠."

이런 상황에서 조합장 직선제가 농협의 운영 방식을 민주화시키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질적인 부정부패 역시 그대로였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이를 빌미로 약 20년 만(2009년)에 농협중앙회장 선거를 대의원 간선제로 바꿔 버렸다.

"농협중앙회장을 다시 조합장 직선으로 뽑아야 하는데, 직선제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조합장이 10%도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맡겨봐야 사실은 큰 변화가 있을 게 없어요.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뭐냐면 '조합원의 총의가 반영된 조합장 직선제'라는 걸 하자. 지역 조합원들에게 지금 후보들 중에서 누구를 찍을지 묻는 미국의 선거인 제도처럼 그렇게 하자는 거예요."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

이토록 많은 농협의 문제들을 왜 지금껏 잘 몰랐던 걸까. 무지와 무관심을 반성하자니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다. 지금은 낯설기만 한, 아니 인기 없는 분야인 '농업' 연구에 박 이사장은 왜 40여년을 몰두했을까. 그는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고 답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70년에 우리나라는 농업의 비중이 국내총생산의 25%, 취업인구의 약 절반을 차지하던 농업 국가였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농업경제에 관심이 있었죠. 그런데 그 후에 우리나라가 급속히 공업화하고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경제학자들의 관심도 급격히 국제경제, 금융, 노동 등으로 급속히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이농하듯이 경제학자들도 자연스럽게 이농을 한 거죠."

'자연스럽게 이농'해 간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제자리를 지킨 이유가 따로 있어 보였다. 박 이사장은 "굽은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면서 본인 역시 "두 어 차례 이농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끝까지 버틴 이유는 고향(농업경제학)을 떠나지 못한 거죠. 굳이 따지자면 내가 시골출신이기도 하고, 친구들과 세상을 위해 각자 할 일을 나눌 때 내 몫으로 농업농촌분야가 주어진 것, 그리고 전봉준 장군을 존경한 것들이 이유가 되겠죠."

그는 결정적인 이유로 70년대 활동했던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의 활동을 꼽았다. 강원용 목사(경동교회)의 주도로 1965년 만들어진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당시 운동가 양성소로 꼽혔다.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중간집단이란 개념을 도입해서, 노동자, 농민, 여성, 교회 등의 현장 활동가들을 교육했는데,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이후 우리사회의 각 분야에서 사회혁신과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했어요. 그때 교육을 담당하던 간사들이 노동 분야에서는 신일령 전 이대총장,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농촌분야에서는 이우재 전 국회의원, 장상환 경상대 명예교수, 황한식 부산대 명예교수, 여성분야는 한명숙 전 총리가 큰 역할을 하셨죠.

나는 농촌분야의 자원봉사자로 간사들의 일을 도왔는데, 자원봉사라 해도 허드렛일만 한 건 아니고, 강의도 하고, 저 멀리 전남 보성까지 찾아가서 농촌현장지도를 하곤 했어요. 이때 농촌 중간집단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후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지도자가 됐죠."

박 이사장은 이때 만나 농민운동 지도자가 된 이들이 "고생만 했지 아직도 좋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어 미안하다"며 "그런 분들에게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농촌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만약 그때 우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소시민으로서 평범하고 행복한 생활을 했을 텐데,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감옥 가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산 것이 너무 미안해요. 정광훈이라고 해남의 전기기사이면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분이 계셨는데, 우리 교육을 받고 나서 투사가 되셨어요. 낙천적이고 정말 사람 좋은 분이었는데, 여러 차례 감옥도 가시고 넘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런 분들이 많아요."

'지역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해나간 연구와 활동들이 결국, 농업농촌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케 했다. 정부 정책의 변화만으로는 현실을 바꾸기 난망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지난 2004년 지역재단의 문을 열었다.

"93년도에 서울대에 있는 은사님이 농정연구포럼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걸 같이 도와드리다가 2000년 초에 다시 확대 개편해서 농정연구센터를 했어요. 중앙정부의 농정에 대한 연구를 주로 했는데… 틀렸네, 어쨌네, 이런 비판이죠. 그런데 농촌 현실이 바뀌지 않는 거예요. 왜 안 바뀔까 생각을 해보니 바뀔 이유가 없는 거죠. 중앙(정부)에서는 지금 좋은 데 바꿀 이유가 없잖아요. 지금 농민들을 잘 '다스리고' 있으니까요.

농민들은 자기네 힘으로 바꿔야 된다고 하는데 힘이 없어요. 2004년 한‧칠레 FTA할 때만도 농민들이 10만 명 씩 (서울로) 올라와서 데모도 하고, 사람이 죽기도 했어요. 그런데 (협정 체결) 하잖아요. 설사 정부가 정책을 바꿨다 해도 현장에서 그게 제대로 잘 되느냐? 안 되죠.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중앙에서 변화가 생긴다 하더라도 효과가 없는 거죠."

지역재단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지역을 바꿔서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문구를 창립 슬로건으로 걸고 출범했다. 해마다 '지역 리더'를 선정해 시상하고 있는데, 2000년대 초 만해도 생소하던 개념이 10여년이 지난 이제는 "상당히 전파가 됐다"고 박 이사장은 말했다.

"지역의 문제라는 건 경제 뿐 아니라, 교육도 있고, 노인, 환경 문제도 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나 조직을 '지역 리더'라고 명명한 거예요.

농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 (모범 사례) 모델은 굉장히 다양한 형태로 있어요. 예를 들어 남원자활센터라는 게 있어요.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일자리 사업을 하는데, 사업 형태가 여러 가지에요. 영농 사업도 하고, 자원 재활용이라고 해서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수거해서 돼지를 키우는 사업이라든지, 자기들이 만든 유기농 채소로 식당을 운영한다든지. 이게 여러 효과가 있는데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측면이 있고, 또 음식물 쓰레기 같은 것들은 일종의 환경 사업이죠."

'지역 리더'들의 사례는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지역재단의 초기 슬로건이 무슨 의미인지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농촌의 자원을 활용해 농촌다운 모습을 되찾는 것이 어째서 농촌뿐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로 이어진다는 걸까.

▲ 박진도 이사장. ⓒ바꿈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자

"성장주의라는 게 생산력 높이는 거잖아요. 농업 분야도 국제 경쟁력을 높여 수입농산물에 대항해야 한다(는 식이에요). 그런 경제 성장주의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어렵게 만들었어요. 소득은 열 배씩 높아졌는데 8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더라도 엄청나게 사회가 망가져 있거든요.

성장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야 한다. 행복으로 간다는 이야기는 소득, 물질 뿐 아니라 문화나 환경, 공동체, 교육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한다는 얘기에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농촌이 망가져서다. 성장주의로 대도시에 사람들이 몰려 사니, 일자리도 없고, 교통문제, 주택문제, 환경문제, 교육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지요.

우리는 그동안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역할을 너무 무시했지요. 그저 값싼 농산물이나 공급하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지만 농업농촌은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기능이 있어요. 건강한 먹거리, 지역사회의 균형발전과 일자리 창출,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환경 및 경관의 보전, 휴양 및 휴식 공간의 제공, 어린이를 위한 학습 공간 등은 국민행복을 위해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들이에요."

박 이사장은 농업과 농촌의 가치가 도시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량이 아닌 생태와 환경을 중시하는 농업으로, 아파트와 넓은 도로가 건설된 도시를 닮은 모습이 아닌 농촌의 풍광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농촌 문제를 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을 비롯한 광역시의 인구가 전체의 70% 가량 될 거예요. 광역시를 제외한 나머지가 30%인데, 이 지역은 농업 생산에 굉장히 의존하고 있는 지역이죠. 농업 생산에서부터 나와서 가게도 생기고, 농기계 상인도 생기고 다방도 술집도 병원도 생기는 거니까요.

더 큰 도시, 예를 들어 대전이나 광주, 대구 이런 지역들도 사실은 그 배후지(농촌)를 먹고 사는 거예요. 대전만 하더라도 그 주변 지역에 농업지역이 쇠퇴한다고 하면 같이 망하는 거예요. 농업이 GDP에서 2%도 안 되고, 농가 인구도 5%가 안 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회를 지탱하는 굉장히 중요한 뿌리에요."

물질이 아닌 행복을 중시하는, 도시와는 다른 농촌농업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박 이사장의 이야기는 87년 체제의 한계 극복, 다시 말해 2017년 촛불광장이 열어준 새 시대의 과제와도 맞물렸다.

"87년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사고 중심이 경제에 있거나 소득에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죠. 그때만 해도 우리가 고도성장을 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97년말 IMF 외환위기로 우리 사회는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IMF와 세계은행의 권고(강요?)를 받아들이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한국사회를 강타한 거죠. 재벌은 급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생기지 않고, 가계부채는 천문학적으로 늘고, 소득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해 서민 대중의 삶이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했어요. 극심한 경쟁으로 나만 살면 된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해졌지요. 청년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을 ‘헬’(지옥)이라고 욕하기 시작했어요. 살기 힘든데 국가든 가족이든 친구든 기될 곳이 없는 외톨이 사회는 지옥이나 다름없어요.

지금 우리는 저성장 시대에 살고 있어요. 저성장 시대에 가장 큰 문제는 옛날이 파이를 나눠먹는 시기였다면, 지금은 있는 파이를 서로 뺏어먹는, 싸움이 더 치열한 시기죠. 사회적 갈등 관계가 복잡해지고, 첨예해지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성장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격차사회에 살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박근혜의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거지요."

행복정책의 필요성, 국민은 이미 안다

박진도 이사장은 국민들의 관심사가 '행복'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박근혜 씨 역시도 알고 있었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국민행복시대를 공약으로 당선된 것이에요. 성장이 아니라 행복을. 그런데 실제로는 박정희식 성장주의를 답습했지요. 국민들이 사기당한 거지요. 

성장주의는 기본적으로 있는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하고 그게 넘쳐나서 그 국물로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한다는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 이론에 기초한 거예요. 이게 이제는 전혀 작동하지 않아요. 반면 행복정책은 ‘아직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맞춤형 정책을 해야 성공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도록 하고, 아픈 사람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고, 돈이 없어서 대학 못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좋은 먹거리와 환경으로 국민이 건강하도록 하는 게 국민행복정책이지요."

박 이사장은 '농민이 불행하면, 국민이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국민 행복을 위해서는 농민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자니 이번 19대 대선에서 농업‧농촌 문제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애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에서 터져 나온 국민들의 목소리가 30년 전과는 달리 다양해졌다는 점은 꽤 긍정적인 신호로 읽힌다. 과제는 많고, 갈 길은 멀지만 말이다.

김지혜 바꿈, 세상을바꾸는 꿈 활동가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촛불광장에 페미니스트가 있었음을 기억하라

 

바꿈 활동가 박영민 


인터뷰 전 날, 김금옥 센터장(여성미래센터)을 만났다. 어느 단체의 페미니즘 관련 행사, 그곳에서 촛불과 뉴페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계보가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지 않던 언니들과의 만남이 참으로 즐겁다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다음 날 오후 다시 만난 김금옥 센터장은 일단 차나 한 잔 마시자며 반겨주었다



집회를 함께 만들어 간, 집회에는 없는 사람들.

“610, 아마 거리에 있었는지, 지금 생각은 잘 안 나요. 아니면 학교에서 지금으로 하면 홍보물, 이거를 밀든지 뭘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6월 항쟁 때가 대학교 4학년 때였기 때문에 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전부 다 거리에, 가두시위가 있으면 나가고 하는데 우리는 또 다음날을 준비해야 하잖아요. 메시지 같은 걸. 그래서 아마 가두시위가 아니었으면 총학생회 사무실 어디선가 이벌식 타자기를 두드리고, 수동식 등사기를 밀고 (유인물을 찍고). 어떤 때는 그럴 시간이 없으면 철필로 써서 찍고 다음 날 거리에서 시민들한테 나눠줬거든요.”

인터뷰 연재 초기에 만났던 황인성 이사장(수원민주화계승사업회)의 말들이 생각이 났다. 민주헌법쟁취운동본부(이하 국본)의 상임집행위원으로 6월항쟁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전 날부터 미리 나와 있었던 상황, ‘007작전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암호를 전달하는 등의 행동들.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김금옥 센터장도 마찬가지였다. 6월민주항쟁의 주역이라 불렸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1기로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 환호하는 광장에 내가 있었나, 6.29때는 분명 있었는데, 환호하고 옆 사람 끌어안고. 610일날은 잘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왜냐면 집회를 준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은 늘 광장에서 함께 할 수만은 없거든요.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그걸 못 보거든요.

6월민주항쟁 때 학교에서 일을 하면서 전국에 비상상황, 그 때 계엄이 선포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잡혀가면 뭘 하고 옆에서 챙기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비상연락망 짜고 누가 다치면 병원가고, 누가 잡혀가면 변호사 연결해서 무료변론 해줘야 하잖아요. 이런 것들도 역할이 있었으니까 매번 광장에 거기 가서 있지는 못했어요. 우리는 막 그 광장에 가고 싶었죠.”

매일 매일 거리에 있던 삶이었고 그렇기에 그 날, 610일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에 순간 부끄러워졌다. 여전히 투쟁하는 삶을 살고 있는, 지난 30년 간 쉬지 않고 활동해온 그에게 적절치 못한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집회를 준비하느라 집회에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는 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었을 30년 전의 활동가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잡히지 않았다면 삼거리에 있는 공중전화박스, 거기에 달려있는 전화번호 책에 표시를 할 것. 그 표시를 확인하면 약속된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 면회를 가는 이들에게 질문을 부탁하고 답변을 전달받고. 그저 일상의 대화인 줄 아는 내용, 결국은 암호를 번역하고. 첩보영화 저리가라는 내용을 준비하고 달달 외웠을 이들을 생각하니 마냥 즐겁진 않았겠다고 하는, 철저히 준비할 만큼 무섭고 두려운 느낌도 있었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지역보다 더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김금옥 센터장이 있었던 전라북도는 당시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았던 광주의 기억을 어느 곳보다 절실히 간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웃 광주에서 계엄령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아직 그것을, 피해도 드러내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 여전히 군부가 있었던 거예요. 억압했던 사람이 정권을 연장했는데,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나오니까 거의 막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그런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그런 소문도 돌았던 거예요, 계엄이 선포 될 거라고.”

이번 촛불에서는 엉뚱한 집단이 계엄을 요구했지만 실제로 계엄의 공포를 느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87년의 성과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꼭 계엄령 때문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집회 속에 없는 집회를 만든 사람들은 존재했다.

여성단체에서 운동할 때도 3.8(세계여성의 날)때 우리 활동가들은 그걸(행사 전체를 ) 못 봐요. 활동가들은 죽어라 자기가 만들었던,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구현된 모습을 자기는 모른단 말이에요. 뭐 일하고 무선하고, 현장에서 뛰어다니느라.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백조의 발들이잖아요. 또 활동가들이 일하는 사진은 아무도 안 찍어, 다 환호하는 사진만 찍잖아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후원의 밤이나 3.8행사 때는 활동가들 일하는 걸 쫓아다니면서 찍어서 보내주기도 했어요.”

아마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 역시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저 무대를 세우는 데 얼마가 들었을까, 누가 세웠을까, 곳곳에 있는 스피커는 누가 가져다놨을까. 매주 진행되는 집회에서 식순은 누가 정리했을까, 발언은 누가 수집했을까.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행사에서 나타나는 질서정연함은 그저 시민의식의 발전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이 질문들의 답은 대부분 퇴진행동의 활동가들에게 있을 듯하다. 촛불이 더 높게, 더 활활 타오르도록 그 밑에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활동가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거리에 나가고 싶어 했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지금은 행사 때 마다 활동가들의 사진을 꼭 꼭 찍어준다고 한다. 당신도 분명 이 역사 안에 있었고, 우리가 그것을 기억한다고.



여성의 운동과 여성운동

학생운동을 하는 속에서 여학생들도 사회 진보적 의식화를 했는데 맨날 중요한 결정은 남학생들이 하고. 화염병 던질 때는 우리를 보호한다며 뒤로 빠져라, 돌멩이를 치마에 담아서 와라, 하는 식이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별 분업이 있는 거죠. 집에서 엄마가 하는 일은 여학생들이, 아빠가 하는 일은 남학생들이, 그런 게 아무도 어색하지 않은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쫙 역할 분담이 되는 거야. 그러나 그 중에 그게 불편한 사람들이 있겠죠? 저 같은 사람들?”

열심히 공부를 했다. 노동, 역사, 철학. 동기들과 스터디를 하고 의식화에 함께 뛰어들었다. 그러나 마주한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의 환경들은 사진에 찍히지 않는 활동가처럼 여성을 운동의 주체로 여기지 않고 줌-아웃(Zoom-Out)시키기 일쑤였다. 여성들은 분노했고, 목소리를 찾아 나섰다. 남학생회가 되어버린 총학생회 외에 총여학생회를 출범시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도 여학생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남학생회도 있냐, 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희는 총학생회 자체가 남학생회니까 (라고 했어요). 여학생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우리도 여기서 여성들이 주체로서 사회변혁의 학생운동을 참여하겠다, 하면서 여학생회 만드는 걸 한 거지.”

총여학생회를 만들고, 단과대별 여학생회까지 조직했다. 없는곳은 없는 대로, 있는 곳은 있는 대로 '선출범 후인식'으로 일단 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가능한 단과대 별로 여학생회를 만들고 출범에 성공했다. 경쟁자 없는 단선의 선거였지만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떤 여학우는 와서 항의한 적도 있어요. 자기는 여성으로서 곱게 대학 졸업하고, 자기 집은 먹고 살만도 하고, 그냥 시집 잘 가서 자기 편하게 살았으면 되는데 왜 나한테 이런 걸 알려줘서, 여성이 차별받고 살고 있는 걸 알려줘서, 힘들게 살게 하냐고. 왜냐면 그 때는 주체로 선다는 건 그런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어요. 우리(운동권)는 또 달랐지만 그런 사람들, 소위 일반 학우들 생각에는 싫잖아요, 예전에는 편했는데, 이런 걸 직면하고 나서 갑자기 나의 삶이 불행하고. 그렇다고 이 세상이 금방 바뀔 것 같진 않고 너무 힘들어.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이 모든 여성에게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 중엔 빨간 약을 먹어버린 네오처럼 더 이상 되돌아갈 출구도 없는 곳으로 들어와 버린 이들도 있었고, 때문에 한탄도 있었다.

그러면 차라리 몰랐던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푸념도 했지만 결국 이미 알아차려버린 걸 어떻게 할 거야,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같이 그런 사람이 모여서 또 활동을 했죠.”

재밌게도 푸념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여학생회는 활기를 띠었고, 5개 단과대로 시작했던 여학생회가 전 단과대에 생길 정도로 발전을 거듭했었다. 물론 여성들의 움직임은 비단 학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876월항쟁을 겪기 전부터 개별 사건마다 여성들은 목소리를 내어왔다.

“85년도에 25세 조기 정년제를 폐지하는 운동을 했어요. 너무 웃기죠, 놀랬죠. 25살 먹었으면 여자는 시집을 갈 나이기 때문에 퇴직하라는 거야. 그 사건으로 그 때 있었던 단체의 여성단위들이 모여서 대책위를 꾸려서 싸움을 했어요. 그러다가 87년도에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되고, 그 때 당시에 부정선거가 많으니까 공정선거 감시 운동을 한 거죠. 그래서 여성유권자 감시단, KBS시청거부 같은 것을 여성운동이 했었어요.

선거가 끝나고 그 대책위(25세 조기정년투쟁)가 우리도 여성문제를 여성들이 상시적으로 제기하면서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조직을 만들자, 상설기구를. 그래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을 만들게 되요, 872월에. 그래서 올해로 여연이 30년이 됐어요. 85년도 조기정년투쟁의 그 연대의 경험, 그리고 권인숙 성고문 사건 공동대응, 그리고 여성유권자공정선거감시운동 등의 운동의 경험들이 쌓여서 상설화된 게 여연의 역사에요.”

그는 여연의 역사, 그리고 여성운동을 하는 단체를 만들게 된 이야기를 하던 중 최근 촛불광장의 페미존(Femi-Zone)’의 발생과 조금은 유사한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자신의 생각 혹은 바른 말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구역설정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지금 젊은 세대가 말하는 안전공간이라는 또 다르겠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서, 페미존이라고 해서, 구역을 조성하면서 목소리를 내잖아요. 용기와 바른 말을 아무데서나 하는 게 아니라. 왜냐하면 안전하지 않으니까, 공격당하니까. 그래서 그런 걸 만들어서 그 목소리를 규합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 같아요. 그걸 대비해서 생각해보면 우리도 여성단체연합, 여성운동하는 곳, 여학생회 등 어쩌면 우리가 용기를 내서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 같아요. 여성운동조직은 그런 공간인 거예요. 우리는 거기서 거리낌이 없었던 거지.”


민주주의는 여성혐오와 함께 갈 수 없다.

더 이상 놀라고 강조하는 것도 무색하리만큼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현재의 뜨거운 키워드다. 그러나 또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운동을 30년 넘게 해온 김금옥 센터장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오랜 시간 페미니스트로 살아온 그의 앞에 신인류가 등장한 것이다.

김 센터장이 경험한 87년의 항쟁, 그 당시의 민주주의와 지금은 분명 다르다. 문제인식은 깊어졌고 사고의 폭은 넓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성숙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고 했던 주체들 중에는 일명 뉴 페미니스트(이하 뉴페미),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메르스 갤러리의 탄생 이후 등장한 2030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촛불 광장에 정권교체가 목표여서 나온 사람도 있고, 정말 이 시대를 바꿔야 된다, 가치를 바꿔야 한다, 세대를 교체해야 된다, 정말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된다, 더 근본적인 개혁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천차만별이 나온 거예요. 어쨌든 정권교체까지는 동의를 하니까 연대를 했고, 그리고 진짜 우리가 이 사회를 새롭게 바꾼다는 것에 대해 동의가 됐어요, 그래서 새로운 민주주의로 내용이 바뀌고 확장해야 된다고, 직접민주주의를 더 확대해야 된다고, 이게 다 맞았어요.

그런데 이 민주주의 내용에서 딱 걸린 거예요. 민주주의 안에는 성평등이라고 하는 것,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그런 평등이 있어야 그게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인데. 이 다양한 정체성과 주체들이 다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을 말하니까 이제 불편해진 거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하자 성평등 문제는, 일단 정권교체가 중요하지. 87년에는 그런 게 통했어요. 왜냐면 독재타도, 민주쟁취 그게 너무 큰 상황이라서 거기에 집중한 거예요. 그 안에 차이라든가, 어떤 다양성을 드러내가지고 그것이 가시화될 상황이 못 됐었어요. 물론 그 안에 그런 마음에 가지고, 그런 주체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게 들어날 수 있는 시대적, 사회 인식적, 주체들의 상황이나 정치적 맥락이 그랬던 것 같고.

그런데 이번 2016, 2017년 안에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나도 거기 갔어, 정권교체 외쳐, 소수자도 왔고 누구도 왔고 나도 깃발 들고 왔어, 나도 정권교체 세력이야.’ 그런데 갑자기 이제 성차별과 이런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니까 옛날 버릇이 나와서 또 지엽적인 말을 하지 말라, 그러면 또 이게 왜 지엽적이냐,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죠.”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페미존이 넓어지는 만큼 여성운동단체도 활발했다. 촛불광장이라는 것은 시민의 힘으로, 시민이 만든 만큼 누구도 배제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확실히 했다. 집회에서 수화통역을 할 것을 제안한다거나 여성혐오적, 소수자혐오적 발언에 문제제기를 한다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소위 시니어그룹의 페미니스트들 역시 발맞춰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에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헌정질서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집회였지만 우습게도 논란은 한 가수의 공연여부에서 비롯되었다.

“(DJ DOC 공연에 대해) ‘여성단체는 반대했다’. 다양한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이 노래를 무대에서 공연하지 않으면 안 오겠다는 사람은 없지만 이 노래가 불편해서 오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한다면 그 사람들은 오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런 말을 안 했으면 모르겠지만 이미 했는데. 우리가 어떤 자격으로 그 사람들을 못 오게 하냐 이거예요. 퇴진행동이 그동안 합의 해왔던 것에 비추어서도 이런 상황이면 공연을 진행하기 어려운 거지요. 그런데 '일부여성단체들이 반대해서 공연이 취소 됐다'는 기사들로 인해 난리가 났지. ‘니들이 뭔데 못 하게 하냐도 있고 잘했다도 있고.”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그의 말처럼 그 노래 공연이 없으면 안 오는 사람은 없지만 진행하면 안 오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다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지 않으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는 이 일은 ‘DOC 사건쯤으로 불리며 이번 촛불시위에서 꽤 굵직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여성운동을 하며 공격 받는 일은 흔했다고 한다. 이번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이 덜 비판적으로 산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하는 농담처럼 일베에서 소위 신상 털리기를 당하면 오히려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고. 그러나 이번 공격은 당혹스러웠다. 일베가 아닌 '촛불집회 참가자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이들'이라는 사람들에게 '친박페미'라는 말을 듣는 것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사과를 받기도 했었다.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를 함께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아주 많았던 것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하는 페미니스트

여성혐오와 민주주의는 양립 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 되었지만 여전히 함께 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꽤 많았던 이번 촛불이 탄생시킨 대통령은 다름 아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다. 성차별은 없애도록 노력하겠다, 소수자와 함께 하겠다는 선언도 아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

물론 선언만 하면 자동으로 페미니스트 자격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삐걱거림은 잦았다. ‘나중에사건이라든지 동성애 반대 발언이라든지, 왜 굳이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했을까, 그 진정성에 회의를 가질 수 있는 일들도 존재했다.

페미니스트, 그 개념을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모든 차별에 반대하고 그런 차별을 만드는 구조를 바꿔내기 위해서 실천을 해야 되잖아요, 실천까지 포함하는 건데. 본인이 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는지, 어떤 의미로 했는지, 대중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또 우리는 계속 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서 그 선언도 고맙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그랬으며 어떻게 할 거야. 그런데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으니까 이렇게 해야 페미니스트야’, 라고 요구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 것은 긍정인 것 같아요.”

인터뷰를 진행했던 날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았을 시기였다. 그러나 이미 여러 여성인사들이 내각구성 후보에 올랐고 그 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국가보훈처 처장으로 지목된 피우진 중령이었다. 선거운동 기간의 불협화음과 달리 내각의 성비를 적절히 맞춰나가겠다는 공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금옥 센터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말도 전했다. 피우진 중령이 보훈처장에 지목된 아주 기쁜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군대 내 동성애자 색출 작전이 있었고, 어느 대위에게는 징역 2년이 구형되었으니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상반된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문재인 대통령을 마냥 옹호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과, 촛불광장에서 그랬듯이 계속해서 우리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해야한다는 목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이 정부가 스스로가 촛불정권이라고 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되고, 그 촛불광장에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는 것, ‘87년체제라고 하는 한계를 넘어 더 큰 민주주의, 확장된 민주주의를 열은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기억해야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들의 목소리를 배제한다거나 후순위로 취급하는 것은 이 정권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각인시키면서 견인하는 책임을 같이 져야 하는 거예요."

김금옥 센터장은 힘의 균형이 깨져 있는 사회에서 결국 우리는 연대를 통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말은 전했다. 페미니스트들과 다른 운동과의 연대, 정부와 시민사회와의 연대, 제대로 된 젠더 거버넌스. 이게 나라냐는 물음에서 , 그러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토론과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가는 시대. 그 시대의 서막을 연 촛불광장은 따로, 또 같이를 실현할 수 있을까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여기 이 지점이 잊히지를 않아요. 화염병이 떨어지니까 이 방향으로 가는 차를 붙들고 휘발유 좀 달라고… 차 세워놓고 그 자리에서 빨대로 기름을 빼서 즉석으로 화염병을 만들기도 하고 그랬어요. 소주병도 구해오고."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은 6차선이 넘는 사거리의 한복판이었다. 놀라서 되물으니 "그러니까 여기"라며 김인봉 안양군포의왕 친환경급식시민행동 상임대표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도 기꺼이 차에서 기름을 내어 줄만큼 "군부독재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도가 굉장히 높았다"고 그는 1987년 6월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당시 집회가 열렸던 길을 김 대표를 따라 걸으며 30년 전을 그려보았다. 


"본백화점(현 본프라자)이 당시에 최고 좋은 건물이었어요. 여기가 제일 번화가였죠. 지금은 CGV인데 그때는 삼원극장이라는 유명한 극장이 있었어요. 바로 이쪽에 중앙시장이 있어서 사람이 지금도 많잖아요. 새로 지은 건물이 많지 않아서 거리 풍경이 당시와 다 비슷해요. 저기 높은 건물 옥상에서 유인물을 뿌렸죠. 그때 6월에는 여기에 2만 명가량이 모였어요. 완전 해방구가 된 거죠." 


87년 안양지역에서 가장 큰 시위가 열린 때는 6월 26일. 전국 각지에서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시위에 나선 국민평화대행진 날이었다. 인파는 안양로 중앙사거리에서부터 우체국사거리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에 이르는 6차선 도로를 가득 채웠다. 김 대표는 청년 노동자를 비롯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 주민들 대부분이 거리로 나섰다고 설명했다. 30년 전 그 길 위에 2017년 촛불집회의 풍경을 대입하며 한참을 더 걸었다.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경찰서까지 가서 거의 점령할 뻔 했어요. 경찰들은 서울에 진압한다고 다 가서 거의 비어 있었죠. 경찰서 담을 허물고, 담장 일부를 불에 그슬리고…."


경찰서는 시위대 말미가 서 있던 우체국사거리에서도 1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만큼을 일부러 걸어올 만큼 6월항쟁의 열기와 독재정권을 향한 분노가 뜨거웠으리라 생각하던 순간, 커다란 벽이 찬물을 끼얹었다. 안양경찰서는 이미 자리를 옮겼고, 그 터에서는 재건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장을 가린 커다란 벽과 천막 틈새로 아직 들어내지 못한 흔적을 간신히 구경하고 자리를 떴다. 


▲ 김인봉 대표가 재개발 공사가 진행 중인 안양경찰서 터를 살펴보고 있다. ⓒ바꿈


"대중 전체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6월항쟁 이후 어느덧 30년. 그는 변한 것이 없다고 했지만 경찰서는 사라졌고, 단관 극장은 멀티플렉스가 되었다. 본프라자는 더 이상 지역 최대의 백화점이 아니다. 그 시간 속에서 김인봉 대표 역시 조금은 변했으리라. 


"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마찬가지에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어릴 때는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고 왔어요. 그런데 운동을 하면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해야 많이 할 수도 있고 진리는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그렇다고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중 전체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로 생각이 많이 바뀐 거죠."


혼자 결정하고 실행했다던 김인봉 대표. 처음 체포된 일 역시 혼자 결단한 일이었고, 그 일은 1980년 4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군사교육 반대 유인물 배포 성대생 포고령 위반 검거')에 그대로 남았다. 대학에 입학한 지 겨우 한 달을 조금 넘긴 시점이었다.


"제가 되게 가난하게 살아서 고등학교도 못 갈 형편이었어요. 우리 엄마, 아버지가 일찍 이혼도 하고 어릴 때부터 혼자 살아서 대학 갈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런데 경북대에서 (1979년) 시위하는 걸 보면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대학교 가서 데모 한 번 하고 죽어야 겠다… 약자가 소리치는 건 정의라고 생각했어요."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이듬해,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데모 하려고 대학에 갔다'는 김 대표는 1980년대 계엄포고 위반 1호로 잡혀 들어갔다. 문제가 되었던 유인물에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 집체 교육(교련)을 거부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교련을 받았는데, 고등학생이 받은 건 군대를 면제해주지 않아요. 그런데 대학생은 교련하면 군대를 2개월씩 감해줘요. 그때는 대학에 가는 사람이 전체 몇 퍼센트가 안 됐잖아요. 여학생들은 반에서 한두 명 밖에 대학에 못 갔고, 내가 다닌 학교는 공업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전교생 1천 몇 백 명 중에서 (대학 진학자가) 몇 십 명이 안 됐어요. 학생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게 군사 문화라는 점에서도 문제인데, 거기에다 대학생에게만 혜택을 주는 불평등이 있었죠." 


그런 김 대표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84년 12월 말께 안산공단에 취업을 했다. 공업고등학교 출신, 용접이 특기였다. 하지만 자신의 삶만으로도 버거운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회 문제에) 당연히 관심 없죠. 어쨌든 그때는 살기가 좀 좋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전두환 때에 3저 호황이 왔잖아요. 박정희 정권 말기의 경제 위기가 극복되어 가고 있던 시점이 있었으니까, 억압된 사회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갖기는 지금도 다수라고하기 어려운데, 당시엔 더 그랬겠죠?"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이 가장 멀다' 


노동운동을 하던 당시 김 대표는 일은 안산에서, 거주는 안양에서 하고 있었다. 안양에는 직원이 댓 명에서 많아 봤자 스무 명 정도에 불과한 소규모 공장('마찌꼬바')들이 즐비했다.


"공장들이 수도권 규제 정책에 따라 이동해 나가는 때였어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이 인천에 많이 갔으니, 우리는 수도권 옆으로 가서 소위 서울 주변을 조직화하자는 관점으로 안양에 왔어요."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자고 했지만 '학출'(대학 출신)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갇히기 일쑤였다. 대중을 상대로 공장 벽에 낙서를 하고, 유인물을 쓰면서도 '신식민지 예속 국가 독점 자본주의 타도하자!'나 '제헌 의회 소집하자'와 같은 일상 언어와는 거리가 먼, 사회과학적 용어들을 빼곡히 적어 넣었다. 


"저는 다른 애들에 비해서 정말 가난뱅이 출신이어서 상대적으로 대중 정서에 가까운 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게(어려운 어휘를 쓴 구호 등) 말이 안 된다는 주의였기 때문에, 그런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나, 뭐가 중요한지를 모르는데…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해도 애들한테는 잘 안 통했죠. 제가 확산하지 못한 잘못도 있고요. 


이성중심주의가 강한 측면이 있어서 그랬던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문제를) 알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신영복 선생께서 예전에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데가 길이 가장 멀다'고 하셨어요. 아는 게 행동으로 옮겨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옮겨지는 시간이 필요한 거잖아요?" 


안산과 안양을 넘다들며 노동자와 함께 하는 법을 고민하던 김 대표는, 아쉽게도 1년여 만에 공장 생활을 접어야 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 허리디스크가 오는 등 몸이 많이 망가져 있었다. 경찰에 연행됐을 때 당한 폭력의 후유증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추측’이라고 단서를 달며 말했다. 


"5.18 나고 난 다음에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을 때 들어가자마자 밟더라고요. 군화발로 밟았어요. 한 30분 밟혔을 거예요. 아프지는 않았어요. 왜냐면 정신없이 맞았으니까. 그렇게 맞고 나니까 정신은 없었고, 몸이 쑤시는 거 밖에 없었는데 그때는 병이 안 났으니까…."


선택지가 없었다. 신체적으로 조금은 수월한 시민운동으로 방향을 틀어야 했다.


"한홍구 선생이 '청년학교'라고,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학교 같은 것을 서울에서 처음으로 했어요. 우리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안양지부에서도 청년학교를 했어요. 대중 조직 방안으로 교육 사업을 한 건데, 한국사나 철학, 경제 등을 가르쳤어요."


글을 읽지 못하는 성인들을 위한 문해학교를 열고,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약자들을 위한 모금활동도 진행했다. ‘진짜’ 생활정치를 실현하려 92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지방자치선거에도 출마했다. 엄청나게 달려왔지만 김 대표는 자신이 해온 일을 ‘실패’라고 말했다. 


"더 이상 할 힘을 못 만들어 냈어요. 지친 거지요. 조금만 더 힘을 냈으면 좋았겠지만, 온힘을 다해서 더 할 수 없었어요. 힘은 100을 다 내서 달리면 안 된다, 60으로 달리다가 열심히 할 때 80, 결정적일 때 100을 해야 한다. 120이나 200은 정말 죽을지 모를 때나 해야 한다는 게 이때 얻은 교훈이에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김 대표는, 조직 내부의 갈등과 분열 역시 못내 아쉬워했다.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중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에 내가 보고 판단하는 기준이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수학에서 방정식을 연립으로 세워서 푸는 것처럼, 세상은 연립으로 푸는 것보다 더 많은 함수가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편견으로, 한 가지 고정관념으로 재단을 해요. 지금도 민주 대 반민주,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는 반대를 해요. 통일 전선에 대해서는 존중을 하지만요. 


당시 민청련에는 좌파와 우파가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계속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찢어졌어요. 대중 조직 중에서 좌우가 같이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는데 찢어져 버려서 우리 때도 같이 하지 못했는데 뭘 할 수 있나…." 


"타인의 밥에 관심을…6월항쟁보다 더 감동" 


그렇다고 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시락도 제대로 챙겨 다니지 못할 만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김 대표의 눈에 학교 급식 문제가 들어왔다. 2000년대 중반, 그는 '무상 급식' 운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최초로 타인의 밥에 대해서 투표를 던진 사건이라고 생각을 해요. 아이를 키우는 건 국가의 의무이고, 또 학부모들이 다른 아이들의 밥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공통체성에 굉장히 주목을 했어요. 


우리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는 제가 학부모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했는데, 그때는 친환경 급식을 만들었어요. 이전과 같은 급식비로 친환경 급식률이 70~80%가 됐어요. 안양시장을 압박해서 안양시장이 결정을 한 건데, 그게 서울 성북구에서도 된 거죠. 이렇게 친환경 급식이 한 곳에서 물꼬를 트니까 모두가 그걸 따라하게 되는 거예요. 6월항쟁보다 더 감동을 받았어요. 하나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는 경험을 한 거죠." 


김 대표는 "경기도 급식을 좋게 만드는 데 안양의 역할이 크다"고 자평하면서도,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게 아쉬움을 표했다. 친환경 무상 급식 도입,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정책을 실행하는 것을 통해서 민주주의 훈련을 시키면 좋아요. 급식은 학교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모을 수 있어요. 학부모가 가장 예민한 문제니까요. 이걸 모티브로 해서 집에서도 먹어야 되는 게 있고, 학교 급식 만이 아니라 공공 급식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되는 것도 있죠." 


식생활을 통해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그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김 대표의 말에서 생활 속 민주주의에 대한 짙은 고민이 묻어났다. 묻고 싶었다. 30년 전 6월항쟁은 왜 정치적‧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데서 그쳤을까. 김 대표는 "시민이 여기까지 오는 과정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나부터도 시민 민주주의가 뭔지 몰랐어요. 활자로만 있었던 거예요. 민주주의, 주민, 주인이라는 게 그저 말인 거죠. 요새 보면 집을 짓는데 그 앞집에서 시끄럽다, 돈 내놔라, 보상하라고 그래요. 자기 집을 지었을 때 시끄러운 건 고려를 안 하는 거잖아요. 각자 도생의 시기에 자유와 민주는 그렇게 이해가 됐어요. 공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국가가 어떻게 돼야 한다는 생각이 비로소 생기고 있어요." 


▲ 화염병을 즉석 제조했던 곳을 가리키는 김인봉 대표. ⓒ바꿈


촛불집회, 비로소 시민이 태어났다 


민주주의와 주권이 글이 아니라 진정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6월로부터 30년 떨어진 지점에서 열린 촛불집회를 통해서였다. 김 대표는 이를 '시민의 탄생'이라고 칭했다.


"시민의 탄생이라고 계속 이야기를 해요. 그 전에는 시민이 없었어요. 주권이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 무슨 시민이에요. 시민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시민 사회라는 말의 시민이 그거잖아요.  


봉건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 시민 민주주의(civil democracy)에 대한 이해는 바로 주권과 시민의 의무, 이런 데 대한 이해에요. 우리는 비로소 시민 주권에 대한 눈을 떴어요. 이제야 시민 혁명을 정치적으로 이행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요. 그 전(1987년)에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했는데 사람들이 동의가 안 된 거죠."


학생운동이 확보한 공간이 6월항쟁을 열었듯, 6월항쟁이 시민혁명을 탄생시켰다. 이름만 있었던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드디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필요했던 시간 30년.  역사는 삐걱거렸고, 때로는 되돌아갔다. 이제 막 태어난 시민이 좌충우돌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이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진짜 시민으로 한 걸음 더 전진시켜야 될 것 같아요. 아마 곧바로 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가 촛불집회에서 시도를 해봤어요. 토론광장을 열었는데 대다수는 잘 안 됐어요. '각자 의견을 내봅시다'라고 했는데 그게 안 돼요. 집에서 촛불을 들어봅시다. 이런 게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이야기하는 시민은, 개개인의 멘탈이 강해져야 되는 거예요. 개별자로서 행동할 수 있어야 시민이죠. 촛불이 광장에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그에 의존하지 않아야 민주주의가 되는 거죠. 조금 더 자유롭게, 각각의 영역에서 액션이 일어나야 되는 거지 모여야만 액션이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예요."


나와 너의 운동이 별개로 존재하고 그걸 자신의 생활 속에서 행동하는, 그리고 그 운동을 서로 존중하며 공동체를 이룩하는 일. 김 대표는 2017 촛불의 남은 과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누적된 걸 확인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인터뷰의 말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했던 질문이 있다. 우리는 왜 87년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는 4.19혁명에 대해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노라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4.19혁명이나 6월항쟁이 임진왜란 같은 이야기일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타인을 통해서 (경험)한 적이 있는 것일 뿐이잖아요. 4.19나 5.18 때 사람들이 저항을 하고, 어떻게 전진해 왔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4.19를 다시 또 해야 할 거예요. 굳이 느낌이 안 오니까 (기억을) 안 해도 되겠냐고 말할 수는 있지만, 역사는 누적하지 않으면 전진이 안 돼요. 우리가 예전에 왜 이런 민주주의를 하게 됐는지, 전혀 이해가 없으니 민주주의가 안 되는 거죠. 누적된 걸 끊임없이 확인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만큼 나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발돋움할 자리를 되돌아보며 기억하는 일. 촛불광장에서 6월항쟁을 돌아보는 이유는 지난겨울 광장의 정신을 잊지 않고, 출발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김지혜 바꿈, 세상을바꾸는꿈 활동가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시대의 교사로서 지킨 '전태일 정신' 


바꿈 활동가 박영민

 

골목 깊숙이 들어있는 건물, ‘지난겨울, 그 광장의 촛불을 헛되이 말라!’라는 글귀가 써져있는 커다란 현수막.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전태일재단의 건물을 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짐작도 못할 시대의 청년이었던 전태일은 무슨 심경으로 스스로에게 불을 지폈을까. 여전히 저 건물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또 누구일까.


“이런 사진은 어디서(웃음), 민자당 분쇄!(웃음), 이게 89년에, 지금 박근혜 있는 곳에, 내가 박근혜 선배잖아요(웃음) 구속 선배”

 

이수호 이사장(전태일 재단)에게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찾은 예전 사진을 건네니 박근혜의 구속선배라며 미소를 지었다. 민주화운동부터 전교조 결성,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의 활동을 이어온 스스로를 ‘좌파운동의 정통’이라고 표현하며 농담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이수호 이사장. ⓒ바꿈 


“이중적인 아픔의 87년”

 

“(6월 10일 당시)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죠. 신일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그 때 고3을 맡아서 가르치고 있었어요. 그 때 민주화가 이제 막 진척되던 그럴 때여서 87년에 전두환이 호헌발표를 하고 그 뒤에 계속해서 저항이 벌어지고 그래서 매일 매일이 뒤숭숭하기도 하고 힘들고 했는데.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들하고 명동이나 그 당시에 신세계 앞, 그 쪽에서 주로 시위를 많이 했어요.”

 

“학생들을 그렇게 데리고 나갈 형편이 안됐죠. 교사가 나가는 것도 굉장히 힘들게, 몰래. 마음 맞는 선생님들이랑 했지. 그렇게 나서면 바로 학교에서 징계를 당하거나 교장한테 불려가서 혼이 나거나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웃음)”

 

신일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이수호 이사장은 학교 이야기로 6월 항쟁의 기억을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비단 남북만의 책임이 아닌 외세의 개입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해직된 선생님, ‘커밍아웃’하듯 시위에 참여했다는 선생님. 오늘 날의 촛불처럼 대중화되어있던 시위가 아니었던 만큼 각자의 위치,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특히 수업을 지루해 하는 학생들은, 쌤 얘기해주세요, 시사적인 문제, 요즘 뭐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하면 또 못 이기는 척 하고(웃음) 세상 돌아가는 얘기하고 그랬죠. 그 당시에 주로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그랬잖아요. 신일고등학교도 그런 전통이 또 있었어요. ‘전고협’, 전국고등학교협회 이런 식으로. 거기에 신일고등학교도 이제 관련이 있고. 그래서 고등학교 학생운동에 상당히 앞장서는 학생들도 있었고. 그래서 그런 학생들 보면 안타깝잖아요, 대학은 가야 되지 않겠니?(웃음), 하면 (학생들이) 지금 대학이 문제예요? 나라가 이런데?”

 

정작 본인은 학교에서 징계를 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위에 참여했지만 앞장서는 학생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니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하셨잖아요’ 라는 조금은 도발적인 질문에 ‘이중적인 아픔’이라는 말로 답을 이어갔다.

 

“(앞장섰던 학생 중에) 한 학생은 바로 노동현장으로 갔어요. 그냥 공장에 취직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그 노동운동, 운동의 삶으로, 운동의 정신으로 갔는데. 그 뒤에 다 헤어지고 나는 교육운동하느라 정신없고, 해직당하고 감옥가고, 그 학생들은 나름대로 그랬는데. 어느 날 자살을 했어요. 고등학교 제자죠. 그런 아픔도 있고. 그 때 같이 하던 다른 친구는 몇 년 그러다가 너무 힘드니까 그래서 공부해서 대학가고. 그러면서도 뭔가 좀 사회를 위해서 노동자를 위해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노무사 공부를 해서 힘든 노동자들 도와줘야 되겠다, 마음을 먹고. 지금도 노무사로서 노동자들을 도우면서 아주 잘 하고 있는 제자도 있죠. 그 때는 같이 고등학생으로, 학생운동을 하다가 결과가 그렇게 되더라구요, 우리 삶이 다 그런 거죠.

 

그런 개인, 개인의 삶이 전체적으로 합쳐지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한다거나 그 시대를 반영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삶은 또 각각 자기 삶에 있어서 힘들기도 하고 그런 거죠. 교사로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막 해서 정말, 뭐 (사회운동을) 할 수 있지만 그랬을 때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다 귀한 자식이고 자기 삶을, 해야 하는데 그걸 일치시키는 게 힘들잖아요. 참 힘들더라고 솔직히. 그래서 사실 비겁하게 아주 적극적으로 학생들한테 얘기를 못하는 그런 게 있죠. 그 당시도 이제 87년 그 무렵에 그런 이중적인 아픔이 있어요.”

 

학생들을 보다 민주적인 환경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결코 학생들과 같이 시위에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시대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 삶이 다 그런 거죠’라고 담담히 말했지만 제자의 죽음, 운동가로서 녹록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제자를 지켜보는 선생의 마음을 안타깝지 않게 표현할 길은 없어보였다.


 

▲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수호 이사장. ⓒ전교조 홍보영상 캡쳐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

 

수업과 시위를 병행하며 87년 6월을 보낸 이수호 이사장은 이후 교사들과 함께 본격적인 교육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이하 전교협)를 창립한 후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창립까지 6월항쟁 이후 참교육 실현을 위한 교육계의 열망은 뜨거웠다.

 

“우리가 처음 나서고 할 때는 교육문제, 학교의 심각한 문제. 학생들이 비교육적인 상황 속에서 당해야 하는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 이런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면서 한계에 부딪힌 거예요. 이런 것(교육적인 내용)만 가지고는 힘들다. 운동을 하는 주체, 운동을 하는 사람, 교사면 교사, 그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고민을 하고 그게 확실해야 운동이 지속되고 힘이 있다. 이러면서 교사의 문제로 자기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거죠.

 

세상에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은데 교육문제만 달랑 해결이 안 되잖아요, 개혁이라는 것이 사회전체가 각 분야가 동시에 움직여지는 거지, 다 썩어빠지는데 교육 하나만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회전체를 바꾸는데 어떤 관점이 필요한가, 하는 토론이 벌어진거죠. 그리고 그 때(전교협)는 회원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암만해도 교육법 하나를 못 고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아니구나, 이것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는 조직, 단체가 필요하구나, 그리고 교섭이나 이런 것들이 법적으로 보장된 단체가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노동조합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그러면 노동조합을 하자”

 

전교조 결성 이후 1,527명의 교사가 파면, 해임되는 등의 외부에 의한 억압도 있었지만 내부의 분쟁도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당시 노동조합, 노동자, 그리고 좌파라는 말에 대한 반감은 ‘빨갱이’에 대한 반감만큼이나 강력했다. 교사협의회에서 교직원노동조합으로 탈바꿈하자 탈퇴한 회원들도 많았다고.

 

“요즘 좌파라는 말을 홍 뭐시기 대선후보가, 당신 우파요 좌파요, 하는데(웃음), 아 그걸 나한테 물어봐요, 나 좌파요! 뭐가 잘못 됐소?(웃음)”

 

노동자로서 교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그는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이후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활동할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노조생활을 한 그의 역사를 보니 조금 의아한 지점도 있었다. 교육운동과 노동운동. 그 사이의 연결지점을 어디서 발견한 걸까.

 

“나는 항상 전교조 위원장이든 민주노총 위원장이든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든 내 교사로서의 한 역할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 교사는 스무평 교실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고 본업이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역할을 폭도 넓혀야 된다는 거예요.

 

스무평 교실에서 열심히 수업하고 있는데 뒷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어떤 술 취한 남자가 들어와서 애들 수업을 방해한다고 하면 교사가 앞에서 수업하면서 ‘야 그거 신경쓰지말고 이거나 열심히 해 내 할 일은 가르치는 일이야,’ 하는 게 교사의 역할은 아니잖아요. 저것도 처리해야 되잖아. 그러면 잠시 분필을 놓고 당신 여기 왜 들어왔어, 하고 끌어내는 것도 교사의 역할이고 그것도 교육이다, 라고 느끼고. 나는 천상 교사잖아요.”

 

“그리고 한 번 교사는 영원한 교사고. 지금 나이가 (정년을) 넘어서 학교에 근무는 못하지만(웃음) 뭐 특강이다, 교사 연수다 부르면 ‘아이 내가 뭐’ 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서(웃음), 얼른 가서 애들 만나보기도 하고. 이런 식이죠.”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교사 이수호는 참 여러 군데서 ‘수업을 방해하는 술 취한 사람’을 끌어냈다. 교육, 청소년, 장애,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갈등해결 등 하는 일도 소속 단체도 다양하고 꾸준했다.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사셨던 건가 싶을 만큼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곳이 많았는데 그는 자신의 공사다망한 삶의 원인을 의외의 것에서 찾았다.


“웬 늙은 선생이(웃음), 운동권도 아닌 사람이(웃음)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굉장히 성실하고 주변에 선망도 있는 사람이 같이 해주니까 얼마나 고마워요, 그러니까 그 때부터 내 역할은 항상 나이 많은 그런 것 때문에(웃음), 부위원장, 무슨 위원장, 나이 때문에(웃음) 그래가지고 맨 그런 역할만(웃음), 온갖 그런 위원장 다 했다니까요(웃음).”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일찍이 교사생활을 시작한 이수호 이사장은 대학을 졸업하고 온 동료 교사들보다 10살 정도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나이를 먹는 속도는 참으로 공평하여 처음부터 10살 많게 시작한 나이차는 결코 좁혀질 생각을 안 하고, 결국 어딜 가도 나이 많은 사람, 이것저것 책임지는 사람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민주노총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억압과 내부의 계파갈등으로 위기를 맞이한 노동운동을 살리기 위해 어떤 역할을 계속 맡아왔던 자신이 결국 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민주노총 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희망과 실망이 섞인 임기를 보냈다. 함께 운동했던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동운동이 귀족화 ‧ 권력화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우리나라 대표적 제조업으로서 조선업 이런 거잖아요. 조선업 대부분이 그 어마어마한 철판, 용접하는, 정교하고도 힘든 일이에요. 그걸 20-30년 한 사람이 연봉 6-7000만원 뭐 받는다고 그걸 무슨 귀족이고 어떻고 도둑놈처럼 (취급하는 건)그렇잖아요. 금융업이라든지 연구전문직이라든지 소위 말하는 전문직이라는 쪽은 연봉 1-2억 받아도,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거는 이제 뭔가 이게 기준과 기본이 잘못된 거잖아요.”

 

1987년은 6월항쟁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지만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2016년 겨울은 100만 명의 시민이 광장을 가득 메웠던 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광장에는 언제나 노동자들이 있었다. 지난 30년 간 노동자들은 귀족노조, 종북, 빨갱이 등 여러 부당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시위를 이어갔다.

 

“사실은 작년 촛불의 어떻게 보면 강력한 밑받침이 되고 그렇게 됐던 에너지 중의 하나는 1년 전에 있었던 백남기 농민 돌아가신 민중총궐기, 그 때는 얼마나 탄압을 받았어요. 경찰이고 뭐고. 물대포로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러면서도 저항을 했잖아요. 모든 욕을 먹어가면서도. 그런 것들이 깔려 있는 거거든요.

 

세월호, 백남기 등등의 사건들이 밑에 응축되어서 막 언젠가는 기회만 있으면 폭발하는 거잖아요. 그런 하나의 과정 밑에는 운동의 정신과 흐름, 희생이 담겨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에너지는 욕 얻어먹어가면서 운동하고 있는 농민이나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사람들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

 

언제나 운동을 해왔던 사람들의 노고를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라 작년 겨울의 광장을 우리가 다 같이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으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5월 10일을 문재인 대통령의 날로 기억하겠지만 누군가에게 5월 10일은 광화문에서 고공농성과 단식을 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6일 만에 땅으로 내려온 날로 기억될 테니 말이다.

 

거대한 파도가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잔해들은 억압에 가장 깊숙이 박혀있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푸념하는 나에게 이수호 이사장은 여기까지 온 것도 정말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만큼(정권이 교체된 만큼) 달라지겠죠. 난 그것도 대단하다고 봐요. 어쨌든 (정권)교체 자체도 의미가 있고. 헌법재판소 이정미 재판관이 그 차분하면서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파면선고를 했지만 사실 촛불이, 촛불 시민들이 파면선고를 내린 거죠. 그 얼마나 대단해요. 그 자체도 정말 역사에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고.

 

촛불, 민중, 국민의 큰 승리로 기록되고 또 그 만큼, 지금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졌잖아요. 다당제가 돼서 제일 위에서부터, 안철수 문재인, 심상정 그 옆에까지 가면 좌로 또 길어지고, 민중연합당도 있고. 이번에 출마를 못했지만 또 있고. 우로도 쭉 있고.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어진 거예요. 우리가 그걸 인정해야 해요. 그걸 선악으로 해서는 안 되잖아요. 그것도 대단하다고 봐야죠.”


 ▲ 이수호 이사장. ⓒ바꿈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 의식”

 

“사실 그 무렵,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이후에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이 막 일어난 그 사이에, 내가 그런(사회운동) 고민을 하면서 만났던 책이 전태일 평전이에요. 전태일하고 나하고 나이가 동갑이잖아요, 그러니까 더 절실히, 부채의식도 있고. 그 평전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겁거나 울컥하거나 이런 수준을 넘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을 하게 되고.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교육운동으로 이끄는 하나의 계기가 됐던 그런 거였는데. 그러면서 이제 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죠. 같이 있는 거죠, 같이.”

 

영원한 젊은이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인 전태일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본인도 얼마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차비를 모아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줬던 이야기, 국회도 찾아가고 시청도 찾아가고, 근로감독관도 찾아가고 심지어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 실패의 실패를 겪다 어렵사리 데모를 준비했지만 사전에 경찰에게 정보가 새어나가 결국 스스로를 불태우는 최후의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

 

당시 중간관리쯤이었던 미싱사로 일했던 전태일은 자기 밑에서 일하고 있던 13살, 14살의 어린 여공들의 삶을 보며 정말 마음 아파했었다고.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수호 이사장의 목소리에도 절절한 마음이 묻어있었다.

 

“얘(전태일)가 마음이 아파가지고. 일기에도 쓰여 있지만, 그걸 보면 마음이 아파서. 그게 인간이잖아요. 뭔가 좀 힘든 일 보고 하면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거야.

 

전태일은 자기의식, 자기를 바라보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그런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던 친구 같아요. 그러면서 나는 이 사회에서 어디 위치해야 하고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자기에 대한 책임이죠. 그리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자기를 바라보면 바로 남들이 보이잖아요. 관계 속에서의 자기. 그리고 연대의식,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이런 것들이 이제 발전을 하게 되잖아요. 자기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게 잘 안 돼요. 남들이 보이지도 않고. 그리고 항상 나보다 더 고통 받고 소외당하고 힘든 그런 약자를 생각하고, 이들과 끊임없는 소통과 연대. 이게 전태일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누구이고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나를 중심으로 시작되는 관계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전태일의 정신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수호 이사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전태일이 여공들에게 풀빵을 건넸던 것처럼 아주 작은 일도 분명 의미가 있고 또 그 작은 일을 통해 사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사람은 결코 혼자 잘 살 수 없고, 또 혼자만 희생해 세상을 구할 수도 없다고. 나와 사회 간의 균형잡기를 ‘전태일 정신’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말을 통해 참신한 교훈을 얻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30년 전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이 삶을 사시겠냐 물으니, 후회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대에 맞는 교사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 때 나에게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내가 교사로서 그 시대 상황에 맞게 나는 판단했다고 봐요. 물론 갈등도 했죠. 그 현장, 현실, 아이들. 그 삶과 내 삶을 어떻게든지 좀 알차게,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 되는데, 그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인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이 나를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이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지금 3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고.

 

또 내가 이 무지렁이가, 엄청 복을 받아가지고 아까 얘기한대로 내가 역할이 항상 무슨 회장, 사무처장, 위원장(웃음), 이런 게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 명 밖에 없는데(웃음), 그러니까 내가 그런 식으로 보면 참 복이 많은 거죠. 나는 지금 입이 100개가 있어도 할 말 없고. 다만 내가 잘난 척 하면서 그런 역할을 했는데 세상이 뭐가 달라졌나, 그렇게 내가 해서 잘 해놓은 게 뭐냐 할 때 부끄럽고 그냥 그럴 따름이죠.

 

이제는 책임지는 일이나 이런 거(대표) 안 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굉장히 어렵게 싸우는 친구들이 밑에서 남을 도와주는 일을 ‘같이 좀 합시다, 도와주세요’, 하면 외면할 수가 없어요. 와서 하자는데 어떻게 해야지. 나는 빚이 있는데. 빚을 갚아야지(웃음). 전태일재단도 그렇고. 그래서 뭐 남은 기간, 남은 힘이 있으면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삶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좀 지는 삶을 살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아주 뭐 자랑스럽고 그럴 것도 없지만 크게 뭐 자신이 부끄럽거나 그럴 것도 없고. 아, 한 교사가 그 시대가 주는 그런 역할을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면서 살았구나,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거죠.”

 

새로운 정권의 등장으로 매일 매일이 화제인 요즘. 촛불대선으로 세운 대통령의 행보가 많은 이들의 칭찬을 사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한 구석 어딘가에는 투쟁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법 밖으로 밀려난 전교조는 여전히 법 밖에 있고, 땅으로 내려온 노동자들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이수호 이사장이 전 삶을 통틀어 지키고자 했던 시대가 필요로 하는 교사의 역할만큼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시민의 역할도 선명해져 간다. 87년의 역사와 2017년의 역사로 쟁취한 힘에는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의 것도 분명 포함되어 있고 그러기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꼭 나눠야 한다는 것. 이제 우리는 지난겨울 광장에서 외쳐왔던 ‘이게 나라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지 않을까.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내란 수괴'로 잡혀갈 수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서 '안종범 수첩' 50여 권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실을 입증한 핵심 증거가 된 것처럼, 한 장의 메모가 불러올 후폭풍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상임집행위원 겸 편집실장을 맡았던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의 이야기다.


"6월항쟁에 앞장선 사실은 내란 혐의에 해당되는 행위를 한 거라고 볼 수도 있죠. 실패했으면 수괴 혐의로 감옥에 가는 거죠. 고등학교 동창 중에 하나가 경찰 정보계통에 있었는데 나에 대한 정보보고가 계속 올라오더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친구는 살아남은 것도 다행이라고 그래요.  


최근의 이야기인데, '지금도 경찰이나 다른 수사기관에 내 파일(정보보고)이 있느냐'고 물어봤어요. 파일이 존재한다는 건 계속 감시한다는 것이거든요.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파일이 한 번 생기면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래요. 겁나겠죠?(웃음) 그래서 1980년대 그때에는 우리가 메모도 안 하고, 기록을 안 남겼어요. 그게 다 증거가 되고 문제가 생기는 거니까."


6월민주항쟁이 아직 오지 않은 시절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서슬 퍼렜고, 옴짝만 해도 ‘내란 음모’였다. 사무실 앞에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현 국가정보원)부터 경찰, 치안본부에 이르기까지 각 정보기관에서 나온 요원이 적어도 셋이었다. <말>지를 통해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 실상인 '보도 지침'을 폭로했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주시민언론연합의 전신, 이하 언협)가 당시 정상모 이사장의 사무실이었다. 단행본으로 묶어낸 <보도지침>이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옆에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여전한 보도지침 


정상모 이사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MBC에서 해고를 당한 해직 언론인이다. 정보기관은 그가 해직당한 이후부터 그의 동태를 살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도지침' 보도 직후인 1986년 말, 언협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말>지 발행 때문에 일주일가량 구류를 살고 나온 상황에서 그는 87년 3월 20일, 또 다른 기사를 통해 독재 정권의 폭압을 고발한다.


"80년대에는 학원에 정보 수사 기관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사찰을 했어요. 학생들 동태를 감시하고 필요하면 잡아가고 그런 건데, 심지어 군 보안대원까지도 왔다 갔다 했어요. 많은 돈은 아니지만, 학교 측에서는 올 때마다 돈을 줬어요. 그냥 주면 교직원의 착복이 되잖아요. 근거를 남겨야 책임을 안 질 수가 있으니까 날짜별로 얼마를 누구한테 줬는지를 기록해 둔 거죠. 대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하다가 그걸 발견해서 우리한테 들고 왔어요. 그대로 실어버렸죠. 사실대로 실었는데, 저쪽에서 발끈했어요. 보안대가 제일 발끈했어요. 감히 우리를?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85년 구성된 재야 민주세력 결집체, 약칭 민통련)의 다른 사무실들은 다 폐쇄돼서 사무실도 없이 지내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언협은 닫았던 사무실을 오히려 다시 열고, <말>지뿐만 아니라 <말 소식>지(재판 과정, 석방 운동 등의 소식을 담은 별지)까지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저쪽에서 완전히 뚜껑이 열린 거죠.


해당 호 <말>지를 넘긴 그날 경찰이 바로 집으로 들이닥쳤어요. 나 한 명 잡으려고 전경 버스 한 대와 형사 2명, 전경들이 왔어요. 내가 버티며 난리를 폈어요. 군중들이 몰려들고 해서, '정보과장을 불러라. 그와 함께 가겠다. 전경 버스 당장 돌려보내라'고 외쳤죠. 이렇게 버스를 보내고 형사 2명이랑 다방으로 들어가서 솔직하게 다 말했죠. '곧 언협 총회가 예정돼 있는데, 사무국장인 내가 잡혀 들어가면 총회를 못 치른다. 상부에는 때 되면 들어갈 테니, 지금은 못 들어간다고 보고하라' 그랬죠. 그러니까 형사가 '오늘부터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국가보안법으로 수배가 됐어요." 


당장 연행될 상황에서는 벗어났지만, 경찰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제가 도망을 갔더니 경찰이 밤 10시만 되면 제 집에 전화를 해요. 내가 거꾸로 새벽 1시에 담당 형사 집에 전화를 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전화를 못 걸더라고."


"국민이 앞장서니 정치권이 겨우 끌려왔다" 



▲ 언협의 정 이사장 석방 관련 논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언협의 정 이사장 석방 관련 논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런 내용을 실은 <말>지 10호(87년 3월 20일)가 발행된 뒤, 정 이사장은 요주 인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한 수배자로 신분이 업그레이드 됐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앞줄에 섰다. 국본에서 언론과 문화단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임집행위원을 맡은 것이다. 국본에 참여했던 정 이사장에게 가장 또렷하게 기억되는 장면은 무엇일까? 그는 가장 많은 시민이 운집했던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떠올렸다.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였던 진관스님과 같이 최루탄을 맞으면서 시위를 하는데, 스님도 별 수 없더라고. 눈물 흘리고…."


눈물만 흘렸냐는 장난기 어린 질문에 정 이사장은 "콧물도 났죠"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는 30년 전 그날,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이 들썩였노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말>지 특집호를 내려고 기자들을 전부 지방으로 출장을 보냈어요. 그래서 서울보다도 지방이 훨씬 역동적이고, 거의 혁명적인 상황이 전개됐다는 걸 알게 됐죠. 서울만 막으면 된다고 (판단)해서 전투경찰이 서울로 집결하는 바람에 지방에는 병력이 별로 없었어요. 대전도 그렇고, 천안도 그렇고, 진주에서도 경찰이 손을 못 썼어요. 6월10일이 수뇌부 운동가 중심이었다면, 6.26은 범국민적인 항쟁이었어요." 


범국민적 항쟁이라는 표현에서 2017년 촛불집회가 떠올랐다. 정 이사장은 30년 전이나, 이번에나 "말리는 쪽이 정치권이었다"면서 "이번에도 국민이 앞장서니까 정치권이 겨우 끌려왔다"고 지적했다. 


"87년 6월 18일에 최루탄추방대회가 대규모로, 격렬하게 벌어졌어요. 상당히 위협적인 시위였죠. 제 기억에는 다음날인 19일인데, 성공회성당에 여성단체연합 사무실이 있었어요. 거기에 제가 아침 일찍 갔어요. 국본 상임집행위원들과 대표들하고, 당시 대변인이었던 인명진 목사도 기억이 나요. 당시 군부대 투입설이 막 나돌고 흉흉할 때인데 그 자리에서 '군 투입되면 우리는 내란 혐의로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다. 그래도 이판사판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 6.26을 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런데 정치권이 반대를 했어요. 전두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거죠. 24일에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전두환을 만났는데, 전두환이 '논의해 보자'고만 했어요. 논의해보자는 건 나중에 이유 하나 달아서 결렬시키면 되는 거예요. 사실상 결렬이죠.

  

그때 저는 국민운동신문 창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굴레방다리 근처에 사무실을 빌려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8면짜리 신문에 다른 기사는 다 만들어 놓고 1면 머리기사만 빼놓고 있었어요. 기사는 6.26이 결정된 것, 그리고 무산된 것 다 준비해 놓고요. 24일 밤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6.26 대행진을 한다고 최종 결정이 돼서 바로 머리기사 집어넣고 제작‧배포했어요." 


"빈사상태 빠진 '보수', 정신 차리면 더 세진다" 


정 이사장은 6.29 선언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단일화에 실패한 데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치권에 대한 감시를 늦추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때의 노태우와 같은 인물이 지금은 없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도 잘 보면 표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야권은 보수 흉내를 내려고 하고, 반대쪽은 진보 흉내를 내려고 해요. 박근혜도 대선 후보 시절에 경제민주화 하겠다고 했어요. 표가 되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들이에요. 정치적인 철학과 소신이 없이 표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거기서 바로 제2의 노태우가 나타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드 배치 찬성하겠다고 떠드는 것처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표변하는 세력들을 주시하라는 그의 경고는,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말도 안 되는 보수' 세력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지난 9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생시킨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가 24%라는 득표율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야기는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박근혜가 없어도 그런 사태는 또 생겨요. 제 2의 박근혜도 수두룩하게 많거든요. 또 다른 독재가 무수히 많고요. '보수' 세력이 지금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어마어마한 사태를 맞아서 빈사 상태에 빠진 것 같지만 이들이 정신을 차리면 오히려 단련 받은 셈이 돼서 더 강력한 '보수' 세력, 더 괴물인 '보수'가 나올 수가 있어요. 


선거법, 헌법, 제도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의 문제에요. 저 '보수' 세력을 가만히 두면 또다시 제2, 3의 국정농단 사태가 생길 수 있어요. 아주 더 세련되게 나타날 거예요."


정 이사장이 말하는 '보수 세력'은, 정치 분야는 물론 학계, 군, 검찰, 언론 등을 포함해 ‘종북 척결’을 국시로 내세운 기득권층이다. 그는 "너도 나도 떠들지만, 잘 보면 자칭 '보수'일 뿐"이라면서 "제대로 된 '보수'를 세우거나, 최소한 분화시켜서 이들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보수'의 집권 전략에 주목하라고 꼬집었다.


"'이 자칭 '보수'들은 자신들이 계속 권력을 잡기 위해서 대항세력, 경쟁세력을 무조건 빨갱이라고 낙인찍어요. 그리고 이게 또 먹혀 들어가죠. 크게 보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세뇌를 시킨 탓입니다." 


"언론이 제대로면 나라가 함부로 되지 않는다" 


너도 나도 '보수'를 참칭하는 세상에서, '보수' 언론들 역시 저들에게 보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동조했다. 해직 언론인 출신인 정 이사장은 진짜 보수를 세우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제일 중요한 게 언론이에요. 언론만 제대로 돼 있어도 나라가 절대 함부로 되지 않아요. 언론이 잘못 하는 거예요. 허위 보도를 하거나, 여론 조작을 하는 언론 때문에 나라가 힘들고 어려워지는 거죠. 언론의 위기는 나라와 민족의 위기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2017년 촛불 이후 언론개혁의 목소리가 높은 것처럼, 6월항쟁 직후에도 언론이 변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나왔다. 87년 말 MBC에서 노조가 구성됐고, 이듬해에는 KBS에서 노조가 출범했다. 국민주 모집을 통해 <한겨레신문>이 창간됐고, 89년에는 해직됐던 기자들이 MBC로 돌아갔다. 이때 정 이사장은 MBC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겨레>를 통한 언론 내부의 민주화 작업을, 그는 짊어졌다. 


"당시 언론 민주화가 중요한 과제였어요. 언론 개혁이죠. 그래서 <한겨레>에 가자마자 제가 한 역할이 기자평의회를 만드는 거였어요. 언론민주화의 일환으로 편집권 독립을 부르짖으면서, 제도적 장치로 편집위원장 직선제를 내세웠죠. 일부에서 ‘저게 완전히 한겨레신문을 말아먹으려 하는 거 아니냐’는 오해와 갈등이 생겨났어요. '언론민주화와 편집권 독립’이라는 제도적인 장치의 노력을 하는 게 다른 언론사에 확산될 것'이라고 설득을 했더니, 결국 받아들여졌어요." 


▲ 한겨레 기자평의회 의결사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언론사 내부 민주화와 함께, 정치‧경제 권력과의 유착 관계도 끊어내기 위한 작업이 진행됐다.  촌지 거부 운동.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눈총이 쏟아졌다. 정 이사장은 "기자들의 얼이 뒷받침돼야 편집권 독립이든 뭐든 하지, 정신도 없는 사람이 뭘 하겠냐"고 웃으면서 그때를 회고했다.


"촌지 거부 운동을 벌였어요. 특히 한겨레는 창간된 지 얼마 안 됐고, 또 최초의 진보 언론이다 보니 주목도 받고 영향력도 굉장히 가지고 있어서, 명절이 되니까 선물이 오기 시작하는데…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이만한 갈비 궤짝이 오고 선물이 막 들어와요. 집으로도 오고요.


우리가 윤리위원회랑 윤리강령을 만들었어요. 식사는 3만원까지, 선물 받은 건 전부 회사에 반납. 그걸 모아서 양로원이나 보육원에 가져다주고 기사를 썼어요. 선물 받은 건 무조건 윤리위원회에 신고하고, 반납 안 한 건 윤리규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거죠.


촌지의 경우에는, 대게 장관이나 이런 사람들이 무슨 행사를 앞두고, 보도자료 준답시고 프라자호텔 같은 데서 점심식사를 하자고 해요. 안 가도 보도자료는 보내줘요. 그러면 왜 가냐. 보도 자료를 각대봉투에 담아주는데, 그 안에 또 하나 봉투가 있어요. 20만 원 정도 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가는데, 저는 여러 사람 있는 데서 그 작은 봉투를 끄집어내요. '우리는 윤리 규정상 못 받게 돼 있는 데요.' 딱 빼서 주는 거죠. 다른 기자들이 볼 때, 미운 오리 새끼가 되는 거예요. '너만 잘났냐?' 하는." 


6월항쟁 이후 언론 민주화는 그렇게 진척되는 듯 했다. 하지만 2017년의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역사의 퇴보가, 민주주의의 역행이 가장 여실히 드러난 분야가 언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언론 윤리는 골방에 처박혔고, 기자는 '기레기'가 됐다.


그의 친정인 MBC는 단연 군계일학. 정 이사장은 30년 넘게 언론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MBC 이사회인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의 이사를 맡았던 시기(2009~2012년) 를 꼽았다. 방문진은 청와대와 여당이 각각 3인, 야당이 나머지 3인을 추천해 총 9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엄기영 사장이 있을 때(2010년)인데, 엄기영이 나중에 새누리당에 갈 정도로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를 쫓아내려고 여당 이사들끼리 만나서 별 모의를 다 한 거예요. 자기들이 추천한 이사를 받아주면, 사장 자리를 유지시켜준다는 둥 장난을 쳤는데 들통이 났어요. 


내가 이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했어요. ‘당신들끼리 밀실 야합해서 사장 허수아비로 만들고, 야합꾼이냐’, ‘나는 여기 왜 앉아있냐. 이사로서의 내 권한을 완전히 뺏어갔다!’ 이렇게 내가 소리를 치고 난리를 부렸어요. 하도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까 다들 도망가 버리더라고요. 나라고 방법이 있겠어요? 그래서 나도 나왔죠. 


회의실 밖에 나오니까 <연합뉴스> 기자가 눈이 왜 그러냐고 물어요. 되물었더니 ‘눈이 빨개요, 피가 나요.’ 내가 깜짝 놀라서 화장실에 가서 보니까, 하도 소리를 질러서 눈에 실핏줄이 터져서 피가 고여 있는 거예요. 영화에서만 봤지 눈에서 피가 난 건 나도 처음이에요. 눈에서 피가 났으니 망정이지, 뇌가 터졌으면 큰 일 나는 거죠. 


그렇게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여당 이사)는 도장 찍어' 이러면 되니까… 폭력을 쓸 수도 없고, 방법이 없잖아요. 김재철(당시 MBC 사장)이 <뉴스타파>의 최승호, 박성제 등 굉장히 많은 후배들 모가지를 잘라 내는데, 나도 해직기자로서 눈 뜨고 못 보겠더라고요."


▲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바꿈


그렇게 MBC는 자꾸 뒤로만 갔다. 정 이사장은 현재 MBC의 상황은 80년대보다도 후퇴했다고 말했다. 


"제가 해직을 당한 80년만 해도 보도국에서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일부는 울고 그랬죠. 당시 MBC가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데 가장 앞장 선 언론이었는데, 제작거부를 두고 투표를 하니까 1표 차이로 지기는 했지만, 비슷비슷하게 나왔어요. 유신정권의 억압을 워낙 당했기 때문에 내부에서도 청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막 일어난 거죠. 그런데 지금은 인적 구성이 더 악랄해졌어요.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을 해야 해요."


정 이사장의 이야기는 초지일관이었다. '진짜 보수를 세워야 한다'. 앞서 그가 말한 대로 업그레이드 된 '보수'가 장악한 MBC를 보자니, 제2의 박근혜, 최순실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빨갱이' 장사로 성공한 '가짜' 보수가 1/4의 표를 가져간, 동시에 광장 가득 타오른 촛불이 세 번째 민주정부를 출범시킨 2017년. 지금이 바로 그 ‘진짜 보수'를 찾을 적기가 아닐까. 


김지혜 바꿈, 세상을바꾸는꿈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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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인가 종로 3가인가. 아마 청계였을 거예요. 거기에서 중학교 때 친구를 만났어요. 최루탄 연기가 날리는 그 넓은 거리에서요. 그 친구는 대학에 가지 않았거든요. 80년대만 해도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굉장히 낮았어요. 중학교 때 공부를 조금 잘한다는 친구들은 전부 상고를 갔어요. 그 친구도 여상을 갔었는데, 그 뒤에 한 번도 못 만난 거예요, 7년 동안. 그런데 87년에 그때, 6월에 딱 만났어요. 얘가 파이프를 들고 있었던가, 각목을 들고 있었던가(웃음)."


그게 6월 10일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정연순 변호사(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는 아마 그 친구를 만나고 꽤 오래 뛰어다닌 걸로 봐서는 맞을 거라며 그날의 기억을 전했다. 지금이야 대단한 시위였던 것 같지만 20-30명 모여서 구호를 외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대였기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뛰어다녔다면 분명 6월 10일이었을 거라고. 우연도 참 기막힌 우연이다. 7년 만에 만난 친구를, 그것도 데모에서 최루탄을 맞아가며 서로를 알아봤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를 듣자니 웃음이 절로 났다. 

  

▲ 정연순 회장. ⓒ바꿈


"이게 세상의 진실이다, 하는 깨달음" 


"대학교 입학 전의 세상과 입학하던 그 해 봄에 만난 세상은 정말 흑과 백처럼 달랐어요. 백이었던 세상이 흑으로 돌변하는 듯한 충격을 대학교 1학년 때 받았죠.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를까 하는 것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서슬 퍼런' 독재체제였다. 서민 중의 서민이었던 부모님은 사회문제에 대해 입 한 번 뻥긋 하지 않으셨고, 어떤 데모가 있든 신문에 실려 있는 정보는 '서울대생 200명이 거리로 나가려고 했다'는 짧은 문장이 전부였다. 고등학생이 세상을 알기에는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지극히도 평범했던 그의 삶은 대학교에 들어가서 마주한 세상의 진실로 인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하고 그런 것 말고도 우리가 언제든 잡혀갈 수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항상 있었죠. 잡혀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고. 그 전에도 죽은 선배, 할복한 선배들 이야기라든지 그런 게 있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비장했는지, 뭐 비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일상의 생활이라는 게  항상 선택의 문제였어요. 학교에 가면 시위가 있었고, 그러면 수업을 들어갈까, 시위를 함께 해야 할까부터 누군가 잡혀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학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수업거부, 시험거부였는데 그러면 강의실에 앉아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하나하나 선택을 해야 하는 거죠."


말 그대로 선택인데, 다른 삶을 살 여지는 없었냐는 물음에 그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오히려 ‘박정희의 아이들’로 훈육되어 자라났기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아침마다 외웠어요. 새벽종이 울리니 새 아침을 만들자고요. 그 어린 시절에 스스로를 세뇌를 시켰던 아이가, '백'의 세상에 살다가 갑자기 '흑'의 세상으로 넘어가서 세상을 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사명감이 도탄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야 하는 엄청난 역사적 사명으로 바뀌게 되는 거죠. 


물론 죄책감도 있었죠. 저 사람은 죽었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요. 비록 학생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던 학생들도 그 감정을 피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런 것들을 느꼈던 사람이 80년대에 다른 삶을 산다고 하는 건… 글쎄, 지금 돌아가도 다른 삶을 살 수 있겠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박정희의 아이들'이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니. 묘한 기분과 함께 참, 역사란 뭘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뭐 그렇게 비장한 듯해도 다들 매일 술 먹고, 연애도 하고…그 와중에(웃음)."


"성숙한 민주주의, 법률가의 역할" 


목숨을 건 선택은 아니었지만 23차까지 진행된 이번 촛불집회 역시도 선택의 연속이었다. 서있는 것도, 앉아있는 것도 힘든 추운 겨울날, 그것도 꿀 같은 주말에 나는 안방을 지킬 것인가 광장에 나갈 것인가. 100만 명이나 모였다는데 이때야 말로 '나 하나쯤은'을 실천할 때가 아닌가.  


유혹이야 있었겠지만 30년 전이든 지금이든 여전히 광장을 택한 사람은 많았다. 정 변호사는 이번 촛불을 보며 모노톤의 6월항쟁에 다양한 색깔을 입힌,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발견했다. 


"87년의 항쟁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단선적인 거잖아요. ‘호헌철폐, 독재타도’라고 해서 소위 통치구조라고 하는 측면에서 전두환 정권의 정권연장 야욕에 대한 저항. 그걸 통해 (독재를) 뚫어보려는 그 의지라고 하는 것이 ‘민주화’ 이렇게 세 글자 하나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단일한 색깔이라고 할까. 단일한 전선의 단일한 목소리였던 거죠.    


이번에는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양한 목소리, 다양한 요구가 촛불광장에서 나왔을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정권의 연장 야욕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헌법상의 책임과 권한을 가진 대통령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어떤 의무를 지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주권자로서의 물음과 답변’이 있었던 것이죠. 이건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 중의 하나거든요."


시민들이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걸을 동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역시 함께 했다. 회장으로서의 평가를 물으니 ‘저는 잘했다고 생각을 하고(웃음)’라며 말을 이어갔다. 민변은 국정농단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70여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신설했고, 넉 달 동안 꾸준히 성명과 논평을 냈다. 초기에 스캔들처럼 소비되었던 거대한 사건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는 법률가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JTBC 최초 보도가 나간 후 3일 만에 50쪽 정도 분량의 의견서를 냈어요. ‘핵심은 뇌물죄다.’ 그게 무려 2시간 만에 조회 수가 1만 회를 달성했어요. 민변 홈페이지는 남들이 잘 안 찾아오는 섬과 같거든요(웃음). 회원들도 잘 안 읽어서 조회 수가 고작해야 2, 30회 정도에요. 그런데 그게 순식간에 1만 회가 넘더라고요. 2만7000회를 달성했어요, 거의 하루 만에."


치열한 프레임 싸움 속에서 본질은 무엇인지, 범죄행위, 헌정질서 위반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법률가로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번 탄핵 정국은 여러 주체들이 이끌어 갔죠. 100만 촛불 시민이 있었고, 국회, 특검, 헌법재판소도 있었지만, 민변도 그 창립 정신을 살려서 인권과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부분에서 적어도 못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민변의 '창립정신 지키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단체가 아니라 정치조직 아니냐는 숱한 오해도 있었다. 정치적, 사회적 이슈와 가까이 하다 보니 상당수 회원이 정치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민변은 87년 민주화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 힘으로 88년에 창립되었거든요. 지금까지 30년 동안 회원들이 민변이 지켜야 하는 가치를 지켜오는데 머뭇거리지 않았고, 가치에 대한 훼절이라고 할까, 말을 바꾸거나 한 적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민변이 가장 두드러지게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반민주적, 권위적 통치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예를 들면 참여정부 시기에도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제주강정해군기지 등 인권이나 평화, 어느 쪽으로든지 옳지 않다고 판단이 되는 부분에서는 비판을 하였던 태도가 있었기에 30년을 유지했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그렇지 않고 그때마다 편의에 따라서 활동을 해왔다면 국민들이 버렸겠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게 30년을 유지한 힘이기도 하고요." 


▲ 정연순 회장. ⓒ바꿈


"여성, 변호사" 


민변이 지난 30년 동안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워온 역사만큼 정 변호사 역시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다. 1994년에 변호사가 된 후 가정법률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 위안부 문제, 여성단체연합, 여성영화인 모임 등 부르는 곳을 마다하지 않고 다닌 대가(?)는 컸다. 


열심히 활동해온 대가 중 가장 컸던 것이 '민변 최초의 여성 회장'이 아닐까. 정연순 변호사를 검색하면 최초의 여성 회장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가 빼곡하게 나온다. 


"변호사 단체에서 여성이 회장이 된 것은 처음이거든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이런 것이 아니라 혹은 제가 잘나서 회장이 됐다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법조계의 진출이 어느 정도 이르렀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변호사들의 진출과 헌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거예요. 


여성 법조인들 중에 최초 법무부 장관이신 강금실 변호사, 최초 대법관이었던 김영란 판사가 있어요. 다 훌륭하신 분들이죠. 그러나 그건 그 개인의 노력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걸 밀어준 많은 여성들의, 여성변호사든 여성운동단체든 그런 여성들의 헌신과 노력이 쌓여서 한 사람을 수면 위로 밀어 올려 준 거거든요." 


지금까지의 업적이 최초의 여성회장으로 설명되는 것이 서운하지 않으시냐는 물음에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선 말을 전했다. 이것은 결코 자신의 업적,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일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 해 온 여성 변호사들과 여성운동가들의 자랑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진출과 헌신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상징을 가지고 있는 정 변호사도 돌이켜 보면 80년대가 항상 좋았고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지금의 영(young)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라고 할 거예요. 80년대는 그만큼 엄중하기도 했고, 또 아직 여성인권의 문제까지 눈을 돌리지는 못할 때였으니까…."


선배들이 보여줬던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문화조차 거스르기 어려웠던, 가두시위를 나갈 때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남성동지의 애인 역할을 수행하는 위장책을 맡거나 감옥에 있는 선배들이 '찍어서' 옥바라지를 맡기면 묵묵히 해내야 했던, 그런 일들이 여성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때는 민주화라고 하는 대의에서, 그 대의의 전선에서 이야기 되는 것 말고 내부의 어떤 문제제기라고 하는 것은 허용이 안 되는 분위기였거든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뭘 하나라도, 그게 사소한 것이든, 다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문제를 느낄 수가 없었죠.  


민주화가 되고 90년대로 넘어와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위 X세대라고 하는 세대가 등장하면서 사회의 지형이 흔들리죠. 이렇게 살았던 게 맞나? 민주화의 대의에 눌려져 있었던 성차별, 성폭력 문제가 결국 여성들 스스로의 성찰 속에서 터져 나왔죠. 그게 소위 '100인위원회 사건', 진보운동권내의 성폭력 성차별 폭로사건으로 터졌어요. 저는 그때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서 100인위 활동가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었어요. 그 과정 속에서 80년대 민주화가 갖고 있는 한계를 목도하게 되었죠.  


80년대를 살아남은 여성들은 그 속에서 완전한 남성화를 이루던지, 아니면 페미니즘의 정신을 가지고 주류에 들어가기를 거부해야 하는 삶을 선택해야 했어요. 결혼이 '적과의 동침'인데, 일상의 하나하나를 문제제기하자면 도저히 그 사람과는 같이 살 수는 없는(웃음), 그 속에서 조금씩 타협해 가며 무언가를 이뤄내야 하는 쉽지 않은 삶을 살아 왔던 것 같아요."


▲ 정연순 회장. ⓒ바꿈


"다시 민주주의" 


희망적이게도 역사는 정 변호사가 목도한 80년대의 한계에 멈춰 있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00인위원회 활동을 비롯해 당시의 문제를 지금이라도 해결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인식은 분명 나아지고 있다. 멈춰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더 많은 구호가 나오고, 더욱 다양해지는 것. 그가 이번 촛불에서 발견한 '성숙한 민주주의'의 일부가 아닐까.


"우리는 민주주의를 87년에 형식적으로 거쳤지만 사실 그것은 소위 87년 헌법이라고 하는, 기존의 헌법에서 통치구조만 조금 바꿨을 뿐이지 헌법에 적힌 ‘민주공화국’이라는 의미가 정말 뭔지, 기본권, 경제 질서, 지방자치, 교육자치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도 못했어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누구나 평등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것을 사실은 그 전에 다 알고 쟁취한 게 아니었어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87년 헌법을 쟁취하고서 그 헌법에 세세하게 적힌 구절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30년 간 깨달아 온 거죠, 조금씩 전진 후퇴를 반복하면서. 87년에 우리가 무엇을 쟁취했지? 하는 인식이 저는 이번 촛불에서 분명하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우리가 87년도에 쟁취한 것은 이거구나, 민주주의." 


오랜 기간이 걸린 깨달음이었다. 헌법에 그저 적혀진 문구를 외우는 것이 아닌, 몸으로 부딪혀 깨달음으로 얻은 민주주의. 그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소수자와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87년 헌법은 이제야 국민들에게 헌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이제는 헌법에 있는 규정 하나하나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 새로운 정부의 역할일 것이라고 전했다.  


"87년과 2017년의 간극. 그 사이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30년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다음 30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시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이렇게 (과거처럼) 퇴행적으로 돌아가지 않을, 그런 비가역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에 대한 청사진. 이런 것을 새로운 대통령이 제시해주면 좋겠다, 사실은 (그것이) 국민들을 굉장히 위로해주는 일이거든요."


정 변호사는 작년 봄, 2017년을 앞두고 마음이 비참했다고 한다. 이제 곧 6월 항쟁 30주년인데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은 87년이 아닌 77년인 것 같은 기분에 너무 후퇴했다는 공포가 압도했었다고. 그러나 이번 겨울을 지내면서 다시금 역사의 흐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어서 '그게 아니다, 우리는 한 단계가 나아갔다'라고 평가할 수 있어서 기뻤다는 그의 말을 통해 이미 그 청사진은 충분히 그려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음 정권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중에'가 아니라, 비록 하나하나의 촛불로만 기억되고 불리어질 것이나, 그 도도한 물결을 끝내 이루어낸 수많은 시민들에 의해 반드시 그려질 것이라고. 그것이 87년과 2017년을 잇는 힘이자 앞선 세대와 뒷 세대의 연대의 정신이라고.




박영민 바꿈, 세상을바꾸는꿈 활동가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6.10 국민규탄대회는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봉쇄됐으나 …(중략)… 하오 9시쯤 퇴계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생 1천여 명이 명동성당 안에 집결, 철야시위 농성에 들어갔다. …(중략)… (11일) 낮 12시40분쯤에는 신부와 수녀들이 학생들에게 줄 빵과 음료수를 사가지고 후문으로 들어가다가 음료수 병은 화염병으로 이용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병 음료수는 모두 경찰에 압수당했다."(6.10 집회 무산…3000여명 연행’/ <경향신문> 1987년 6월 11일자)


그날, 그곳에 정대화 교수(상지대 교양학부, 정치학)도 있었다. 화염병을 잘 던지고 데모 가서 구경하는 게 '주업무'였던 그는 서울시청 앞 행사가 무산되고 학생들이 명동으로 갔는데 그걸 멋모르고 따라들어 갔다가 명동성당에 며칠 있었다. 정 교수가 기억하는 30년 전은 당시 보도된 신문 기사 그대로였다. 


6월항쟁 당시 정 교수는 석사 과정을 마치고 석사논문을 쓸 생각도 없이 이리저리 놀러 다니던 30대 초반의 늦깎이 대학원생이었다. 하필이면 명동성당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는 정치학도였다. 


"명동성당 바로 맞은편에 로얄호텔이라고 있어요. 거기(나이트클럽)에 제가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아르바이트 할 때 우리 부서 부장이라는 사람이 가자고 해서 몇 번 갔다가 우연히 어떤 사람을 알게 됐는데, 친한 건 아니었고요. 거기서 아는 사람 명함을 하나 빌렸어요. (아르바이트 그만 두고) 이미 한 3년 지나버렸는데 순전히 경찰 저지선 뚫으려고 가서 부탁을 했어요. 경찰이 포위하고 있는 구역 안에 로얄호텔이 있었거든요. 경찰들도 업무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 거니까… 그리고 제가 일반 학생처럼은 안 보이게 굴었죠. 거기 갈 때는 직장인인 것처럼 흉내를 냈어요. 


경찰하고 얘기를 하고 (성당에) 들어가니까 처음에는 학생들이 탁 막더라고요. (대학원) 학생증을 보여줬죠. 사수대 아이들은 대체적으로자기들끼리 조직이 돼 있기 때문에 한 두세 번 정도 하니까 '저분은 학번이 엄청 높은 선배님이시다. 저 분이 오시면 막지 마라' 그래서 왔다 갔다 했어요. 그렇게 끝날 때 까지 있었어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명동성당을 들락날락하는 게 가능했던 정 교수는, 경찰 포위망 안팎을 드나들며 인근에서 열리는 모든 집회에 다 갔다. 50%는 구경, 30%는 연구 목적의 참여 관찰을 위해서였다. 나머지 20%는? "형편이 되면 (뭐든) 던지기 위해서"라며 웃었다.



▲ 정대화 교수. ⓒ바꿈 


"명동성당이 6월항쟁의 기폭제였다" 


정 교수는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이 "6월항쟁을 일으키는 원동력, 기폭제였다"고 설명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재야·운동권 수준에서 머물던 분노가, 명동성당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4.13호헌조치 직후에 야당은 당의 전열을 정비했어요(4/21 김영삼과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창당). 그런데도 동력이 잘 안 붙었어요. 동력을 붙인 게 국가가 국민을 속였다는 것(5월 18일,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되었다는 내용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이었어요. 이렇게 되니까 파장이 커졌죠. 그 파장이 최초로 나타난 게 6.10 대회였는데, 이게 원천 봉쇄돼 버린 거예요.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명동성당에 농성을 탁 튼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로 모였어요. 각 대학 총학생회는 모든 전략을 거기에 다 걸었어요. 성당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포위된 명동 주변, 예를 들어 을지로나 퇴계로, 종로에서 집회를 했죠. 그 거리들은 항상 화염병으로, 최루탄으로 가득 찼는데, 학생들이 몰려들고 거기서 취재가 진행됐죠. 외신기자들은 성당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안에서 취재하고 그게 해외로 보도되고, 해외로 보도된 건 다시 명동성당까지 들어오고…." 


10일 밤부터 15일까지 엿새 간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은 그렇게 일회적인 행사로 끝나서 좌절돼 버릴 듯 했던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6월항쟁으로 키웠다. 야당 정치인들이 움직였고, 국본은 다음 투쟁을 준비‧진행했다. 성당 농성 해제 사흘 뒤인 18일 열린 ‘최루탄 추방대회’에 전국 150만 명이 참여했고, 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때에는 무려 180만여 명(전국)이 거리로 나섰다. 결국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다.


지난 이야기를 하는 정 교수는 조금 신이 난 듯 보였다. 화염병 던지는 요령을 설명할 때의 표정에서는 '놀기 위해 데모에 나갔다'는 말이 그저 농담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정대화 교수의 연구실은 지금도 투쟁 현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송 관련 서류들과 검찰청에서 온 우편물 뭉텅이, 그리고 여러 장의 담요와 야전 침대가 연구실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연구실 문에는 '김문기를 반대한다!'는 문구가 적힌 새빨간 피켓이 부적처럼 붙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연구실에 놓인 건 김문기 전 상지대 총장 탓이다. 지난 2014년 8월 김문기는 상지대 총장으로 복귀했고, 같은 해 12월 정 교수를 파면했다. 정 교수는 이에 대응해 연구실을 점거(?)했다. 


"제가 여기서 안 나가고 6개월을 살았어요. 제가 여기서 사니까 총학생회장은 여기서 자고, 교수들은 이쪽에서 자고. 졸업생도 와서 잤어요. 야전침대까지 들어왔죠. 늘 사람들이 몇 명 있어서 (학교 측에서 방 빼기를) 포기했어요." 


▲ 각종 소송 자료. ⓒ바꿈


"김문기를 반대한다!" 


상지대에서 김문기 퇴진 운동이 다시 시작된 건 지난 2010년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김문기 측 구재단의 복귀를 결정했다. 그 후 상지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87년 체제의 불완전성과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역행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단면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모양새였다. 블랙리스트라도 있는 양 김문기에 반대하는 교수와 직원들이 파면됐고, 김문기는 새로운 교수와 직원들을 뽑아 그를 옹호하는 ‘족벌체제’(어용 단체)’를 구축했다. 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국정 역사교과서' 류의 김문기 우상화 교재가 수업에 사용되기도 했다. 


"2005년부터 13년 동안 해온 인성교육이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교수와 학생이 아주 자연스럽고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서 연애며, 집안일이며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소통이 목적인 수업이에요. 1학점짜리인데 반드시 이수를 해야 해요.


그런데 김문기가 총장이 다시 되고 나서 이걸 예비군 교육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500명, 1000 명씩 묶어놓고 자신이 뽑은 교수들한테 가르치라고 한 거예요. '김문기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어릴 때부터 신동의 끼가 있으셔서, 그 분은 항상 옳으셨다. 일찍이 가구 산업의 발전을 예측하셔서 40대에 거부를 이루시고, 사회봉사를 위해서 상지대를 설립하시고…' 이런 내용으로요." 


그 수업에 사용됐다는 책이 정 교수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김문기의 저서 <상지정신>. 책의 표지에 적힌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인성 결여로 인한 도덕적 경시가 사회적 문제로 크게 대두되는 현시대, 젊은이들의 인성교육의 바탕으로 삼아야할 필독서'. 실소가 터졌다. 


"학생들 반응을 좀 받아봤는데, 이런 거예요. '우씨, 이게 대학이야? 나 안 다녀.'"


구재단이 복귀한 다른 사학들에 비해 상지대에서의 투쟁이 더 치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처럼 학생들에게 직접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을까. 정 교수는 "상지대가 왜 열심히 싸웠는지는 잘 모르겠다"면서 "여러 이유가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1986년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이라는 게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상지대에서 김문기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은 유신시대인 지난 1975년 시작됐다. 학생들은 1985년 총학생회를 만들어 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1986년 10월 14일 상지대 캠퍼스에서 '가자, 북의 낙원으로' 등 북한을 찬양하는 문구가 적힌 유인물이 발견됐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학생 150명가량이 간첩으로 몰렸다. '상지대 용공조작 사건'이었다.


정 교수는 "총학생회의 농성을 깨트리기 위해 김문기가 한 것"이라고 말했다. 군부 독재 정권이 비판 세력의 입을 막기 위해 조작 간첩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상지대에서도 '용공'이 같은 목적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3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서 또다시 데칼코마니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그 사건이 "학생들에게는 그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지점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상지대에 설치된 천막농성장. ⓒ바꿈


"재벌·언론·종교·사학·토호…진보를 가로막는 5대 적" 


하지만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김문기가 돌아온 2010년 이래, 정 교수는 4차례의 단식과 삭발을 단행할 정도로 최전선에서 싸웠다. 대체 그에게 상지대는, 사학 민주화는 무슨 의미일까. 


"제가 짧게 취직도 해보고 국회 공무원도 해보고 이것저것 해봤어요. 하지만 내 평생 직업은 상지대 교수에요. 나는 상지대에 오자마자 1년도 안 돼서 법인 사무국장 맡아서 5년 동안 잘났다고 뛰어다니고, 그래서 상지대 민주화 초기에 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를 했어요. 2000년도 낙선운동도 그렇고, 국회를 가도 그렇고 상지대 교수로 갔어요. 상지대 교수가 본의 아니게 내 직업이 됐는데, 내 삶의 터전인 상지대가 무너지면 내가 무너지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무리한 일반화를 해버렸어요. 상지대가 무너지면 나도 무너진다. 그렇게 정리해버렸죠." 


상지대와 운명공동체가 되어버렸다는 정 교수. 단지 그런 개인적인 이유뿐이라기에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사학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묻자 다른 차원에서의 설명이 쏟아졌다. 


"정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지배구조. 예를 들어 재벌, 보수 기독교, 보수 언론, 사학, 그리고 지역 토호. 이게 한국 사회의 진보를 가로 막는 역사적 5적이에요. 이 힘이 거대해요.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기반이죠. 


사학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학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커요. 특히 우리나라 대학의 85% 이상이 사학이에요. 이 대학들이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정치에 굉장히 중요한 힘을 행사했어요. 돈도 많아요. 잘 뭉쳐져 있고요."


5적 가운데서도 정 교수는 특히 사학과 재벌을 강조했다. 단지 그가 사학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재벌도 반쪽, 사학도 반쪽이에요. 크기는 재벌이 크죠. 왜냐하면 이게 물질적 토대니까요. 그런데 민주화된 사학이 공룡 재벌과 같이 공존한다면 누가 바뀔까요? 재벌이 바뀔 수밖에 없어요. 교육이 잘 되면 사람이 바뀌니까요. 반대로 재벌 구조가 해체됐다고 하더라도, 교육이 무너지면 해체됐던 재벌 구조가 다시 만들어질 거예요. 그러면 재벌도 안 무너지는 거죠. 


그리고 지금 재벌도 우리의 인적 동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거잖아요.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힘? 그게 원동력이 아니잖아요. 그러려면 사실은 교육이 살아야 하고, 교육이 살려면 사학이 우선 바뀌어야 해요." 


단 한 번도 청산된 적 없던 기득권의 끈을 끊기 위해 사학을 비롯한 5적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었다. 그것과 6월항쟁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6월항쟁이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그 미완성의 상태가 지금의 상지대 사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상지대가 민주화되었는데 6월항쟁의 흐름이 끊기는 시점에서 다시 김문기 비리재단이 복귀하는 역사의 반동이 나타난 것이죠.  


이 상황을 보면서 저로서는 우리 사회의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역사적 반동의 시기에 개인적으로 상지대 민주화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는 것이 6월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올인한 셈입니다. 내가 작은 힘이지만 상지대를 지키면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장소에서 자기 분야를 지키지 않겠냐,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진지를 구축하는 하나의 방법론 아니겠냐.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바꿈


"선거에 문제가 생겨도 완전히 좌절하지 않아" 

 

상지대에서는 과연 사학비리의 질긴 끈을 끊어낼 수 있을까. 상지대 구성원들의 끈질긴 투쟁 결과, 김문기는 지난 2015년 7월 총장직에서 해임됐다. 2016년 10월에는 김문기가 선임한 구재단 이사들이 모두 물러나고 임시이사가 파견되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된 4월 초까지 상지대 구성원들은 김문기가 또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걱정을 놓지 못한 상태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이후에도 불안을 놓지 못하는 마음과 닮아 보였다. 


그래서 묻고 싶었다. 대선 이후에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번 쫓아낸 김문기가 연어처럼 다시 상지대로 돌아왔듯, 또다시 과거가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좋아하는 책의 구절과 역사 속 장면들을 꺼내 들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작품의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있어요.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나는 그걸 인생관으로 받아들였어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절대 없다. 안정과 변화가 동시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변화에는 세월이 필요하다.


프랑스혁명은 100년 간 지속됐어요. 100년 동안 프랑스혁명이 지속되면서 프랑스를 바꾼 거예요. 혁명의 목표도 없고, 혁명의 결과도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에는 대동법의 사례가 있어요. 모든 세금을 쌀로 바치자는 건데, 그렇게 세금을 걷으면 쉽잖아요. 그걸 도입하자고 율곡, 이황, 김육이 주장을 했어요. 당시 영의정들이 주장을 했는데도 완전히 도입하는 데까지 100년이 걸렸어요. 왜? 기득권의 저항 때문에요.


프랑스혁명과 대동법 도입 과정을 보면서,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변화를 바라는 자세로 계속해야 겠다. 또 여기는 사람 사는 곳이잖아요. 사람 사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긴 세월을 보면서 긴 호흡으로. 나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사회와 역사의 힘으로 이 과정을 만들어 나가는 게 필요하겠구나 싶어요." 


정 교수의 말을 듣고 있자니 2017년 촛불집회가 프랑스혁명이나 대동법 도입 과정처럼 6월항쟁의 연장선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긍정하며 말을 이어갔다.


"6월항쟁이 그때는 완성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미완성이에요. 6월항쟁의 미완된 부분이 그 이후에 낙선 운동으로, 효순이·미선이 촛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로, 그리고 이번 촛불로 나타난 것이죠. 시기가 다르고 양식이 다르지만, 촛불은 사실은 똑같이 독재정권을 타도한 거예요. 


6월항쟁 직후 양김이 분열하는 바람에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됐어요. 그런 상황이 과거에 있었기 때문에 촛불 직후 대선에서 그런 게 또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걱정할 건 없어요. 사회는 딱 있는 만큼만 해요. 지도자를 능가하는 국민도 없고, 국민을 능가하는 나라도 없어요. 촛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기 때문에 혹 선거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완전히 좌절하지 않아요. 항쟁과 혁명의 기억은 안 지워져요."


1975년부터 지속된 저항을 기억하며 길게 지켜봐왔기 때문일까. 상지대 구성원들도 드디어 한 조각 시름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지난달 24일, 정권 교체 이전 열린 마지막 사학분쟁조정위원회 회의에서 상지대 관련 사안은 단 하나도 결정되지 않았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김지혜 / 바꿈, 세상을바꾸는꿈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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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보통시민의 변화, 6월민주항쟁의 핵심" 


1987년 6월 10일. 그는 며칠 전부터 집을 나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사전에 가택연금을 한다거나 연행을 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당시 상임집행위원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 몸을 담고 있었던 황인성 수원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은 30년 전 일을 어제 일인 양 또렷이 기억했다.  
 
"오후 9시부터 10분간 텔레비전을 끄고 전등을 끄자고 했어요. 그게 얼마나 실천될까, 이게 아주 관심거리였어요. 그때 내가 이화동, 저쪽으로 내려가면 종로5가 사거린데, 이쪽쯤에 내가 서 있었어요. 이 근처에는 사무용 건물이 있었고, 저쪽 낙산에는 서민아파트들이 주욱 서 있었어요. 대개 못사는 사람들이 사는 서민아파트였는데, 내가 볼 때 여기저기 창문의 빛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반 가까이가 꺼지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뭐라고 해야 하나. 등골에 찬 기운이 쫙 흐르는 거야… ." 당시 국본이 배포한 '6.10 국민대회 행동요강'의 4항에는 ‘전 국민은 오후 9시에서 9시 10분까지 10분간 소등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 전당대회에 항의하고 민주쟁취의 의지를 표시할 수 있는 기도, 묵상, 독경 등의 행동을 한다’고 되어 있었다. 


"엄청난 감격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앞서 오후 6시 태극기 하강시간에 맞춰 시청 앞에서도 지나가는 택시나 버스가 일제히 경적을 울리고, 차안에 있는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손수건이나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서 '아, 이제 우리가 하나가 되고 있다. 숨죽이고 있던 국민들과 운동본부가...' 이런 걸 확인하면서 몸이 떨렸거든. 그런데 소등한다는 것은 몸이 거리에 있지 않고 집에 있지만 이런 큰 국민적 저항행동에 나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하는 걸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것도 한 가족 단위로.… ." 


87년의 재야, 종교, 야당 정치인 등의 민주인사들은 그간 비밀리에 준비해 온 국본을 5월 27일 결성대회를 통해 공개적으로 발족했다. 이 자리에서 6.10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 대회이후의 계획은 뚜렷하게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한 달 만에 저 사람들이(독재 정권) 자신의 의지를 꺾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당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국민의 호응이 있었고, 그럼으로 해서 국민적 분노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큰지 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국민의 호응도, 6.29선언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황 이사장의 말에 "그렇다면 예상하신 것은 무엇이냐"고 장난 섞인 질문을 던졌다.

 

 

 황인성 수원민주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김지혜 바꿈 활동가

 

 

그해 초에 발생한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살인 사건 당시 개최된 국민추도대회(2.7.)와 평화대행진(3.3.) 때보다 대회 규모가 분명 커져 있었다. 4.13 호헌조치에 대한 국민적 반대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참여한 시민들의 규모가 정부와 여당을 정치적으로 몰아붙이는 계기가 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대회를 기점으로 국민적 저항 행동이 지속적, 그리고 폭발적 양상으로 분출되어 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시위학생들을 연행하려는 경찰들에게 멀리서 야유를 보내는 식으로 시위를 응원하던 시민들이, 쫒기는 학생들을 자신의 가게에 숨겨주고, 결국에는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 함께 서게 되는 변화를 보면서 뭔가 '일을 내겠다'는 색다른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직적으로 거리투쟁에 나선 학생이나 재야단체 회원들, 정당원들과 달리 말없이 숨죽여 살아오던 보통시민들이 국민행동요강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손수건 흔들기, 차량경적 울리기, 전등 끄기 등), 탄압에 대한 공포를 뚫고 한 사람 한 사람 시민의 작지만 분명한 결단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가 느꼈던 희망과 세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기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80년 광주가 학생들로 하여금 뭔가 현실을 거부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게 하는 일종의 명령을 내리는 그런 것과 같은 거예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은 광주의 죽음에 대한 빚진 마음, 이런 게 엄청 강했던 것이고, 그걸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지만,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어요."


계속되는 군사독재정권, 죽어가는 학생들, 고문, 최루탄, 그리고 5.18 광주항쟁. 자신의 집안에서 불을 끄는 일조차 무서웠을 시절에 그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온 거리와 광장은 흡사 그에게 기적이 아니었을까. 


"가치가 중시되는 시대, 30년 간 깊어진 문제의식" 


2017년 촛불이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은 비폭력이라는 기조도 한 몫 했지만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구호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장애, 여성, 성소수자, 채식 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구호들. 자신의 처지와 연결시키면서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017년의 변화라고 하는 건 87년보다는 문제의식이 훨씬 깊고 넓죠. 왜냐. 87년은 눌려 있었으니 일차적 요구가 대통령직선제(정부선택권)와 민주헌법 쟁취로 모였잖아요, 그게 됐어요. 그대로 된 거야. 됐는데 이런 제도적 변화가 왔다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느냐, 아니에요.

87년에 우리가 직선제 개헌을 했다고는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게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계속 발전하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데, 2017년의 변화라고 하는 것,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간 변화 또한 더 큰 변화를 위한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하는 걸, 6월항쟁 이후 30년이 가르쳐 준 거라고 생각해요." 

 

 

황인성 수원민주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김지혜 바꿈 활동가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결국 당선자는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였다. 정치권은 분열됐고, 재야세력 내부에서도 상호불신이 커졌다. 대안이 되어야 할 재야운동에 내적으로 균열이 생겼고, 이후 정세에 통일적으로 대응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개헌 후 대선 날짜가 결정되자 국본 상집위원 내에서도 비판적 지지그룹,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 후보단일화 그룹 등이 순차적으로 빠져나갔다. 황 이사장의 표현에 따르면 ‘이래저래 정파적이지 못한’ 몇 사람만 국본에 남았고, '상처뿐인 국민운동본부'가 되어버렸다. 뿔뿔이 흩어진 대가는 컸다.  


사실상 군부정권의 연장이라는 참담한 대통령 선거결과였다. 그렇지만 투쟁의 성과인 국민기본권의 확대로 시민적 공간이 열리면서 새롭게 시민사회의 다양한 운동이 나타나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30년 전 쟁취한 현행 헌법의 틀 내에서 시민들은 멈춰있지 않고 가능한 틈새를 찾아 끊임없이 자기성장을 도모해 왔음을 이번 촛불광장에서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에 억압된 상황 속에서는 문제는 있지만 주요하게 부각되지 않은 ‘가치’, 가치가 중시되는 시대가 온 거에요. 여성이라고 하는 가치, 환경, 평화·통일, 그 다음에 경제정의와 같은 이런 시민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는 6월항쟁 이후 있었던 많은 문제들과 그것에 대항했던 시민들의 공동의 경험은 누적되었고, 우리는 그 크고 작은 승리의 경험을 학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7년의 6월이, 2002년의 효순·미선이가, 2008년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이, 2015년의 백남기가 없었다면 오늘의 촛불과 탄핵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정치권의 미진한 결정들, 결국 변화는 시민들의 손으로"


동의가 어렵지 않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자각한 대중의 힘, 피플파워(people power)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망라해 역사가 증명해 주는 사실이니 말이다. 다만 그에게 조금 더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1987년 6월을 바탕으로 성장된 시민의 힘으로 故김대중 전 대통령과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이게 나라냐'를 외쳐야만 했느냐는 것이었다. DJ정권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었고, 참여정부 당시 시민사회수석을 맡았던 그에게 역진한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을 조금은 묻고 싶었다. 


"헌재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가 기각되어 다시 국정에 복귀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노 대통령께서 몇몇 시민사회 단체인사들을 초치해 간담회를 가졌지요. 그날 저녁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는 우리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중요하다는 말을 했어요. 왜냐. 제대로 된 변화는 정부, 관료나 국회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시민사회라고 하는 국민, 국민과 동맹을 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게 뭔가 조금 통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양반(故노무현)한테…."  


그때(참여정부) 왜 그러셨어요, 후회되는 것은 없으셨나요, 하는 다음 질문들을 마음 속에 담아뒀지만 결국 묻지는 못했다. '그(청와대) 안에 있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과는 참 많이 다르더라'는 그의 말. '내가 지금까지 내려온 결정들이 모두 미진했던 것만은 분명한데 그게 과연 잘못된 선택이었기 때문일까 혹은 이 역사의 한계였을까'하는 그의 고민. 굳이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밝혀내야 하는 수많은 죽음들, 이미 자살로 종결되어 오로지 가해자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만 남아있거나 아예 관련 자료제출을 거부하는 국가기관의 현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는 속에서 진상규명위원회의 진로를 두고 발생한 동료들 간의 다툼. 어느 가치에 설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순간들,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을 바꿔도 전문성을 앞세운 관료조직의 관성과 이해관계가 변화를 은근히 가로막거나 정책을 변질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왜 그걸 못했어!, 못한 건 사실인데(웃음), 그럼 그때 어떻게 했어야 하지, 하고 생각해보면 참 답이 없는 것도 있어요." 


미진한 선택들이었다는 고백은, 결국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결코 저 위의 권력자가 아닌 내 옆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공고히 했다. 의미 있는 변화는 여의도(국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나라가 바로 서려면 국민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 되는 항쟁의 결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으로서 말이다.         


"그걸 이번에 뒤집어 놓은 건 누구냐, 투표라고 하는 종이 돌을 던져서 국민들이 바꿔놓은 거예요(지난 해 4.13총선). 이 보이지 않는 종이 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행사한 것도 흩어져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이었고, 삐뚤빼뚤 이래해야 하나 갈피를 못 잡는 국회의원들한테 퇴진은 말할 것도 없고 퇴진 안 한다고 하면 그 때는 할 수 없다, 탄핵이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선택해야한다, 이렇게 만든 건 광장에 나선 국민들이었다고.."


"잘 늙어가는 충실한 시민적 삶"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바꿔나가는 세상. 말이야 낭만적이지만 그게 쉽나, 생각해보니 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원동력을 갖고 있기에 30년, 40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켰는지, 30차도 채 안 되는 주말의 촛불집회도 매 주 참가하기 버거운 삶인데 말이다.  


"일단은 이게 뒤에 쫄쫄 따라간다고 생각했는데(웃음) 어쩌다보니 내가 제일 가운데 있고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선배들은 다 잡혀가고 내가 젤 앞에 있는 거야(웃음)."

 

 


황인성 수원민주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김지혜 바꿈 활동가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다음 질문을 던지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40년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현재와 같은 삶을 사실 것이냐 묻자, '지금처럼은 안 살 것 같다'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샤이'했던 고등학생 황인성은 기자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외교관이 되면 그도 연미복을 입고 파티나 다니는 것이 일인 줄 알았다고. 외교학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서울대에 안전하게 합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전혀 원치 않는 독어독문학과 원서를 써주셨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시위 같은 것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나 존경할 만한 친구들이 하나둘 군대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도시빈민 실태조사를 나갔다가 엄청난 빈부격차와 비인간적인 삶에 분노하면서 주저했던 마음도 잠시, 탁 하고 시작된 운동이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관념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분노라는 감정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처음부터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순간의 결단을 거쳐 어느새 여기에 와있는 것이라고. 매번 힘든 결단들을 해왔을 그의 젊은 날들이 고되게 느껴지는 찰나에 그가 해준 말에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


"청와대에서 나와서부터 인생관이 달라졌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뭔가 해야 되는 사람, 뭔가 앞장서서 고민을 하고 남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거나 가르쳐야 하거나. 약간 엘리트 의식이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 것들이 오히려 나를 옥죄어 왔다,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생각. 어떤 뭔가 내가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더 헌신적이고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이래야 한다는 거, 그건 조금 오만한 생각 같다,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아주 거대한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고루 발전해야 그 힘으로 뭐가 되는 거지. 어떤 특정 집단의 대단한 능력, 의지 이것 가지고 세상이 변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충실한 시민적 삶. 이런 것이 뭘까. 그런 걸 어떻게 할까. 그래서 우리가 21세기에 잘 늙어가는 사람이 되자(웃음), 시민으로서."


무려 4시간동안 나눈 이야기 속에서 무수한 말을 쏟아냈지만 결국 그의 메시지는 하나였다. '충실한 시민적 삶'. 독재정권의 부당함을 알릴 시간을 벌기위해 학생들이 건물옥상에 건 밧줄에 매달려 소리를 질렀던 시절부터 그의 표현대로 '삐까번쩍'한 2017년의 촛불집회까지, 지난 40년의 역사 속에서 고군분투한 그가 깨닫고 유지한 메시지였다.


1987년의 청년들이 6월민주항쟁으로 갚고자 했던 광주시민, 광주영령에 대한 빚. 지금의 청년이 용산에게, 세월호에게, 백남기 농민에게, 그리고 2017년 촛불에게 진 빚은 또 어떻게 갚아야 할까. 분명 그 답은 황 이사장의 삶처럼 돌고 돌더라도 결국은 ‘충실한 시민적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문 바로가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6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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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복을 입고 재판에 출석할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정에 사복을 입고 선다면, 그건 굳이 이야기하자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동료 변호사들의 덕이다. 이들이 한 일의 혜택을 박 전 대통령이 보게 됐다는 짓궂은 말에 이석태 변호사(전 4.16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는 웃으며 답했다.

"처음 문제를 제기 한 지 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지만, 민변 동료 변호사들이 재소자 인권 문제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것과 연관이 있어요. 서준식 선생이 1991년 발생한 강기훈 사건과 연관되어 다른 혐의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 미결수도 헌법상 무죄 추정이 적용되므로 사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거죠.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그 이후로 법무부에서 교정 규정을 바꾸어 지금처럼 재소자가 원하는 경우 사복 차림으로 공판정에 출석하게 된 거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변은,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옹호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들이 모인 법률가 단체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민변이 30년 전 6월 민주항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문호를 활짝 연 6월항쟁, 그 이듬해인 1988년 5월 창립된 민변은 사법 제도 민주화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 왔다. 민변의 창립 멤버인 이석태 변호사는 사무국장, 회장직을 역임했다. 


이석태 "6월항쟁은 내 삶의 큰 변화" 

때문에 이 변호사에게 6월항쟁은 "삶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온 사건"이다. 6월항쟁 직후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발전을 요구하는 사회적 흐름에 합류해 왔고, 민변과의 인연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2년간의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1985년 변호사가 되었다. 연수원 시절부터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연수원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연수원 생활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에 가 있었어요. 선배 변호사들을 돕고 하다 보니 연수원 수료 후 그 사무실 변호사가 됐죠." 

이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로펌은 당시 국내외 큰 기업이 고객인 곳이었다. 대학생 시절 "학생 운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신문> 기자였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서 놀았"던 이 변호사에게는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 모른다. 

"소송을 하면 대개 대리하는 당사자가 당시의 대기업일 수밖에 없는데, 제가 보기에는 법리적으로 노동자들의 주장이 옳은 경우가 많았어요. 제 생각이 사무실의 방향이랑 좀 어긋나 있던 거죠." 

이런 일 등으로 생각이 많던 때 6월항쟁이 터졌다. "당시 변호사들도 국민운동 본부 등에 직접 참여해 호헌 철폐 등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저는 보통의 변호사로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어요." 6.10 항쟁 당일에도 거리에 있었던 것 같다고 이 변호사는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제가 일하던 법률 사무소가 당시 남산 초입에 있는 도쿄호텔이라고 부르는 높은 건물 내에 있었어요. 그 건물 8층에 법률 사무소가 있었고, 그 사무소 내에 남대문 시장이 보이는 쪽으로 제 방이 있었죠. 거기서 보면 서울시청까지 보여요. 그 부근에서 매일 시위를 하니까 자연히 구경삼아 들락날락거리게 되고, 그러다가 광장으로 나가게 됐죠. 연세대에서 이한열 군 사망 사건이 터졌을 때(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에 피격돼, 7월 9일 사망)도 시위 대열에 합류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넥타이를 거의 안 매고 살지만, 그때는 늘 넥타이에 정장하고 있을 때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넥타이 부대라고…. 아무튼 자주 나갔어요."

기업을 대리하는 로펌이라면 눈치를 주지는 않았을까. "굳이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나가는 거죠. 당시 그 로펌은 엄금까지는 아니지만, 변호사가 근무 시간에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걸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죠. 그래도 변호사는 좀 자유로우니까요." 6월항쟁의 한 복판에 섰던 이 변호사는 그해 가을, 로펌에서 나왔다.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이 변호사는 민변 전신인 청년변호사회(청변)에 우연히 관여하게 됐다. 대학 동기들이 청변과 이 변호사의 연결고리였다. 

그 무렵 태동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대개 비슷했겠지만, 6월항쟁의 끝에 조직된 청변 또한 학생 운동권의 영향을 다소 받았던 것으로 이 변호사는 기억했다. 

"변호사로서 억울한 사람을 돕는다는 보편적인 측면 외에 변호사일 자체를 사회 운동으로 생각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변호사 부문운동이라고나 할까요. 사회 발전 과정에서 변호사가 기여할 바를 정하고, 그런 일을 다른 부문과 연관 지으면서 해 나가는 거죠. 처음에는 스터디 그룹 유사하게 10여 명의 변호사가 소규모로 같이 공부하면서 여러 방면의 논의를 했어요."

제대로 된 조직을 구성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되자, 당시 주요 시국 사건을 변호하는 선배 변호사들이 만든 단체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와 합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청변이 해소되고 민변이 됐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없는 젊은 변호사들이 선배들로부터 배우고, 또 그 열정을 바탕으로 조직에 활력이 생기게 된 거지요." 

그렇게 민변이 탄생했다. 민변이라는 이름은 조영래 변호사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베어스타운에서 창립모임을 가졌는데, 이름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때 50여 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무슨 협회라든가 하는 식으로 의론이 분분했죠. 대체로 좀 딱딱하고 경직된 이름이 많았는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하니까 뜻이 분명하고 부르기 쉽지 않습니까. 나중에 그 이름을 줄여서 민변으로 하게 된 거지요." 

지금 민변은 회원 수가 1000명이 넘지만, 출범 초기에는 51명에 불과했다. "그 중에 젊은 변호사들이 절반쯤 되려나. 당시에 제가 젊은 변호사 축에서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어서 간사 역할을 했는데, 민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서 일이 많았어요. 그 후 차츰 민변 회원 수가 늘어나면서 일을 분담하게 되었지만, 제 사무실 동료들 또한 민변 회원이어서 이래저래 민변 업무와 관련된 일을 계속하게 됐지요. 그러다보니 민변 회장도 했고, 그 전에는 사무국장도 했어요." 그는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고 하면 되겠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운동권들의 혜택을 보고 있다" 

6월항쟁의 결과 탄생한 민변은 법률 전문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된 영역을 꾸준히 넓혀왔다. 민변 변호사가 헌법 소원을 제기했던 미결수의 수의 착용 문제뿐만 아니라,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 역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재판을 다수 할 때라 법정이나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개선을 요구하게 된 거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 점차 여러 조건들이 나아지게 되었는데, 그 혜택을 우리가 변론한 사람들 외에 다른 피의자나 재소자들이 보게 된 거죠. 예를 들면 변호인 접견권의 보장, 텔레비전 시청이라든가 집필의 편이 등 모두 어느 날 거저 생긴 게 아니고, 일정한 투쟁을 통해 획득해 낸 거예요."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배제시키고자 했던 이들, 이른바 '운동권'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끝끝내 지켜낸 헌법적 가치가 오히려 이들을 단죄하려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권에 까지 이르러 이를 지켜내는 상황(헌법재판소는 탄핵 결정문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서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역설에서 6월항쟁 이후 지난 30년 동안 진척된 민주주의를 새삼 목격하게 된다. 

"불과 20년 전에는 피고인들이 재판정 가운데 서서 수갑이나 오랏줄에 묶여 재판을 받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사와 피고인들의 노력으로 피고인들의 손이나 팔에서 수갑과 오랏줄을 풀게 하고, 자리에 앉히고, 그리고 변호사 옆에 앉게 된 거죠. 말하자면 이게 다 역사가 있는 겁니다. 6월항쟁의 성과가 모든 면에 미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잘못된 구태를 지적하여 고치고, 형사소송법이 바뀌고 해서 지금처럼 어느 면에서는 미국 영화에서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 됐습니다."

이 변호사는 "예전에는 수사 기관에서 피의자가 조사를 받을 때 변호사가 참여를 하지 못했어요. 접견 시에도 교도관 등이 옆에서 듣는데 하기도 했죠"라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 변호사의 말에 박 전 대통령이 변호사와 함께 검찰 조사를 받고, 7시간 동안 조서를 검토했다는 뉴스가 곧바로 떠올랐다. 

"이런 잘못된 제도나 관행이 고쳐진지 불과 10년이 되지 않았어요. 조사가 끝난 후에야 변호사를 따로 만났고, 조사 때는 변호사가 입회를 할 수 없었어요. 조서의 도장도 본인이 혼자 내용을 보고 찍었습니다. 지금은 조사 자리에서 변호사가 다 보고 확인하지요."

이 변호사가 언급한 '변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은 지난 2007년 6월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법률에 명시됐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권리가 법률에 보장된 지 만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역시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 법률의 개정을 이끌어낸 대법원 판결(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을 담당한 김형태 변호사도 청변을 거쳐, 민변의 회원이다. 두 변호사는 함께 법무법인 덕수를 이끌고 있다.

"강기훈 사건, 더 나은 변호사가 실무를 담당했더라면…"

이 변호사는 매향리 미공군 사격장 소음 피해 소송, 동성동본 금혼 폐지와 호주제 폐지 헌법소원, 일본군 '위안부' 헌법 소원 사건 등 각종 사회적 관심이 큰 재판에도 참여했다. 6월항쟁이 "사법부의 독립에도 좋은 영향을 줬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라고 이 변호사는 설명했다.  

1987년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시민사회운동과의 결합 또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성과를 이야기하면서 이 변호사는 계속 "좋은 동료들과 해서 얻어낸 결과"라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저희가 6월항쟁 이후에 민변을 만들었어요. 또 중요한 사회적 의미가 있는 소송들은 변호사 혼자 할 수 없어요.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협력해야 하는데 그게 컸죠. 일례를 들면, 호주제 폐지문제는 초기에 변호사들이 기획했지만, 여성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계속 진행 해 나가면서 점점 더 많은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얻어서 된 거예요. 이들 시민사회 단체는 대개 6월항쟁의 산물이었죠." 

하지만 6월항쟁은 군사 독재 세력인 노태우 씨에게 대통령 자리를 또다시 내어 주며 미완의 혁명으로 종료됐다. 그 한계는 여기저기에 상흔으로 남았다. 이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30년의 변호사 활동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묻자, 그는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1991년)을 꼽았다. 6월항쟁 이후에도 교체해내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의 연장, 노태우 정권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강기훈 씨가 누명을 벗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4년. 지난 2015년 열린 재심 공판에서 대법원은 강기훈 씨에게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이 변호사는 20여 년 동안 변호인단의 일부로 강 씨의 변호를 맡았다.  

"글쎄… 결국 본인은 늦게나마 무죄를 받아서 다행이긴 한데요, 비록 노태우 정권 하라고 해도, 제가 조금 더 경험이 있고 주도면밀했더라면 초기 재판 당시 무죄를 받지 않았을까, 강기훈씨의 억울함을 좀 더 일찍 덜어드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제 역할이 당시 변론을 이끈 작고한 김창국 변호사님과 박연철 변호사님을 도와 실무적인 일을 하는데 있었지만요." 

이 변호사와 강기훈 씨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도, 이 사건을 조작해 낸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주임검사였던 신상규 씨와 검사 안종택 씨는 모두 검사장을 지냈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기춘 씨는 국회의원과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당연히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다. 국가와 당시 주임검사 신상규 씨, 강 씨의 필적을 감정한 김형영 씨 등을 대상으로 한 민사 소송만이 진행 중이다. 이 변호사는 "국가 책임, 김형영 씨 본인의 책임은 물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검사들 책임은 어떨지…"라고 말했다. 형사상 책임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묻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거짓을 만들어 내고, 책임지지 않는 김기춘과 같은 권력들은 그렇게 적폐로 쌓였다. 그리고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던 2014년, 세월호에 과적된 적폐는 결국 참사로 이어졌다. 

지난해 9월 박근혜 정부에 의해 강제 종료된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 위원장을 맡았던 이 변호사는 이 대형 비극을 어떻게 봤을까. 이 변호사는 일본에서 중고 배를 수입해온 때부터 해운 관련 규제 완화 그리고 구조 과정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제들을 단계별로 지적했다. 그리고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실 문제를 지적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사 당일 오전에 뭘 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오후에는 머리를 하고, 세월호가 이미 다 가라앉은 뒤인 오후 5시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갔습니다. 총체적으로 재난을 예방하고 참사 발생 시 구조해야 할 국가 재난 관련 기구가 부실한 겁니다.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 거고요."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이 변호사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다행히도 무너진 신뢰가 회복되는 모습이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서였다. "변호사로서 종종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과 협력해서 일을 해온 저는 대규모 집회 때는 사실 좀 걱정이 있어요. 저러다가 혹 폭행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대의에 손상이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보니 촛불집회 초기 시민들이 경찰 버스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서로 자제하고, 오히려 차벽에 꽃이나 재미난 내용이 들어 있는 스티커를 붙여 평화적인 집회를 유도하더니, 나중에는 스티커 등을 떼 말끔하게 하는 등, 저 스스로 이번 촛불 집회는 참여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고 공부가 됐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맨 앞에서 집회를 이끌었지요. 때문에 저는 이번 촛불 집회로 박근혜 정부 4년을 지나면서 어려움에 처했던 우리 사회의 민주적 시민 의식이 커다란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 변호사는 "만약 6월항쟁 같은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현재 진행형인 6월항쟁의 의미를 설명했다. "더 이상 독재로 회귀하거나 국민들의 민주적 바람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죠. 촛불은 보다 발전된 형태에요."

6월항쟁의 미래가 촛불집회로 나타났다면, 2017년 촛불집회는 어떤 모습으로 평가해야 할까. 촛불을 들고 나선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까. 난해한 질문에 이 변호사는 웃었다. 

"우선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을 겪으면서 기초가 손상된 사회 정의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가 하고 있는 일을 민주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해나가야 하겠지요. 그리고 공화국 헌법 1조, 국민 자신이 주권자라는 것을 늘 자각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정부가 잘못할 때에는 자기 스스로 먼저, 그리고 동료들과 연대해서 나서고 외쳐야 할 준비를 위해서 말이지요."

이 변호사의 답변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과 무척 흡사해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대를 강조한 이 변호사와 잘 어울리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의 사무실 입구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故 신영복 선생님께서 써 주신 문구 '함께 하는 삶'이 적혀 있었다.



 >>원문보기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6349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꽉 막힌 출근길. 사람으로 가득 실린 지하철은 버겁기만 하다. 모두가 서울로, 서울로 가는 지금 수도권 외곽에 사는 청년들의 삶은 고루하기만 하다. 집, 회사, 집, 회사 ... 반복에 지쳐가는 당신에게 과연 동네 무엇인가요? 지역은 어떤 곳인가요?

경기도 고양시. 인구 100만이 넘는 대규모 지자체이다. 그러나 많은 청년들에게는 서울로 출근하기 위해 잠깐 잠자는 공간에 불과하기도 하다. 날이 갈수록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사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청년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안타까움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번뜩이고 재치 넘치는 기획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다. 고양시의 사람공동체 '리드미(Read Me)'다. 이제 마을에서 터를 잡고 활동한 지 2년을 조금 넘긴 리드미의 신정현 대표를 만났다.

"서울권을 제외한 수도권에 살고있는 '청년'에게 마을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합니다.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고 먹고 사느라 너무 바쁘기도 하고요. 더구나 청년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만 정작 마을에는 만날 수 있는 청년을 찾기도 힘들고 청년을 만나더라도 함께 이야기를 누고 무언가를 해 볼 공유공간조차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모이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바쁜 일상에 지쳐있던 청년들이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였지만 처음 대면했던 그 날의 어색함은 잊을 수가 없었죠. 무언가 근사하고 대단한 일들을 해보자고 제안할 수도 있었지만 그 무엇을 하기 전에 우선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일이 목적이 되기보다 사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람이 목적인 리드미의 시작은 사람도서관이었던 샘이죠."


각자의 꿈, 각자의 바램,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모였어요.

신정현 대표를 만나러 간 날은 마침 리드미가 주최하는 ‘청년공동체의 밤’이 열리고 있었다. 청년공동체의 밤 이라고 명명된 송년회는 특별했다. 각자의 꿈을 발표하고 한 사람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테이블토크가 진행되었다. 2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에 모두가 경청하고 있었다. 이 날 리드미가 운영하는 마을공유공간 ‘더낮은마을공간 지하’에 필요한 물품을 기부 받는 행사도 있었다. A4용지부터 간판, 제습기까지. 지역 주민들은 청년들의 활동을 위해 선뜻 참여해주었다. 70평이 넘는 공간을 자세히 보니 다 기부 받은 물건들이었다. 

"지금 이 공간도 모두 기부 받았습니다.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요. 무언가 조화될 수 없는 가구들과 물품들이 모여 있음에도 신기할만큼 잘 어울리죠? 어쩌면 리드미가 너무나 다른 개성과 철학을 가진 청년들로 구성됐지만 기가 막히게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이런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하셨던 마을 어른이 이 공간을 무상으로 내어주셨어요. 그럼에도 인테리어를 위한 비용은 우리가 부담해야 했죠. 이 때 경기도에서 시행하는 ‘따복공간조성사업’에 지원했었는데 당시 경쟁률이 7:1이나 됐습니다. 당시 공간조성 사업 면접에서 "우리는 이 공간사업을 지원받지 못하면 모아둔 결혼자금을 다 털어서라도 공간을 만들어 낼 겁니다! 우리가 결혼을 포기하지 않고 마을활동을 해 나가게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던 게 잘 되서 이 공간의 인테리어 비용을 지원을 받게 되었어요. 여기에 투여되는 대부분의 노동도 청년들이 직접 한 겁니다. 그야말로 시민들의 후원과 행정의 지원, 청년들의 땀으로 만들어 낸 마을공간이 탄생한 것이죠." 

신정현 대표의 말에서는 뿌듯함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처음에 8명의 청년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 '리드미'는 어느덧 중학생부터 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28권의 사람책이 모여지고 마을 곳곳에서 27회의 사람도서관을 개최하였다. 더 풍성한 소통과 관계, 그리고 재미를 위해서 마을라디오, 청년농부학교, 청년인문학모임, 청년기본조례운듕, 청년공동체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즉 이제는 25명의 꿈이 리드미에서 이야기되고 사업으로 구현되고 지역사회와 어우러지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리드미라는 공동체는 25명의 멤버들이 활동하는 청년단체로 성장하었다. 

마을에서는 '모두가 선생이고 모두가 학생'

"리드미는 동네형누나언니오빠가 동생들을 챙기는 것을 가장 가치있게 생각해요. 그래서 올해 초 '꿈의학교 비밀기지‘라는 대안학교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25명의 청소년들이 자신들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자신들이 꿈꾸는 것을 해 보자는 것이죠. 이 공간에서는 모두가 학생이자 모두가 선생이 되는 게 원칙이었어요. 청소년들이 배우고 싶은 거, 알고싶은 거, 잘 할 수 있는 것 등을 공유하면서 다양한 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리드미의 콘셉트는 사람도서관이다. 신정현씨는 평범한 누군가에게도 삶의 특별한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특별한 '무엇'을 발견하는게 리드미의 역할이다. 리드미에서 각자의 이야기와 삶을 경청하면서 여러 이야기가 사업으로 현실화되었다. 청년학교 이외에도 리드미는 '마을라디오'를 만들어 마을 뉴스를 전하고, '청년새참'으로 청년들이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다. 

리드미는 내년에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사업을 진행하려고 한다. 이날 행사에서 나온 각자의 꿈들은 모두 각자의 꿈과 철학, 개성이 담겨있었다. '우리 모두가 뉴스의 제작자이면서 또 수요자가 되는 마을미디어를 만들겠다'라는 청년부터 '마을 주민들의 손으로 직접 제작하고 공유하는  마을영화제를 만들겠다'라는 청년까지... 그들의 도전의 출발점에는 ‘사람공동체 리드미’라는 든든한 비빌언덕이 있었다. 


그렇다면 신정현 대표는 어떻게 마을로 와서 청년활동가가 되었을까?

"2012년에 강정마을에 있었어요. 마을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주민들과 같이 제주해군기지를 반대하는 활동을 했어요. 평화로운 마을공동체를 지키는 것이 폭력적으로 해군기지를 세우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주평화십만송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해군기지반대를 위한 국민청원운동을 시작했어요. 그 활동과정에서 목과 팔에 깁스를 하고 다녀야 하는 고통도 겪었고 검찰로부터 10개월 구형도 받았어요. 제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활동을 한 거예요.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어요. 우리 편인 듯 보였던 정치인들도 표가 안된다고 판단하니 강정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져버리더라구요. 

패배감과 무력감이 가득할 때 눈 앞에 보인 게 바로 '마을'이었어요. 마을에서 이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될 거란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보니 막상 기댈 청년이 없는 거예요. 고양시 인구가 100만이니 30만명은 청년일 텐데 그 많은 청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 물음에서 시작했어요. 알고 보니 없는게 아니고 숨어있었어요. 극단적으로 개인화되어 버린 우리 사회에서 청년은 자기자신을 꽁꽁 숨겨 놓았던 것이죠. 나의 이야기를 오픈하는 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나의 삶의 이야기가 공감과 경청의 과정을 거쳐 치유와 회복의 단계로 가는 것을 본 뒤 더 많은 청년,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과정에서 사람책과 독자 사이에는 놀라운 신뢰가 쌓이는 게 보였어요. 단절되어 있던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가 공존하는 공동체가 되어가는 게 보였죠. 그게 얼마나 기쁘던지, 그렇게 리드미는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관계재’를 생산하는 청년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리드미의 콘셉트인 '사람도서관'의 출발은 덴마크와 영국에서 깨진 관계와 신뢰의 회복을 위한 비폭력평화프로젝트였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싸움에 너는 왜 가해자가 되었고 피해자가 되었는지 서로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과정이 사람도서관이었다. 신정현 대표는 청년이 없는 공동체의 현실과 청년에 초점을 맞춘 사람도서관을 진행한 셈이다. 

지난 7월부터 3개월간 리드미는 고양시 청년활동가들과 함께 고양시 청년 320여명을 대상으로 청년실태조사를 했다. 이 조사과정에서 고양시 청년들 중 85%는 '계층이동이 어렵다'고 밝혔으며 89%는 '나를 위한 법제도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만큼 청년들의 삶은 어렵고 변화의 목소리는 큰 셈이다, 그러나 현재 고양시에 청년 이름 단 조례는 단 하나도 없다. 당장 리드미가 운영하는 마을공유공간도 청년 스스로 노력을 통해 만들었다. 

“현재 고양시 청년활동가들의 핵심목표는 청년담당부서를 만들고 청년당사자가 청년 정책을 만드는데 참여하는 거예요. 이를 위해 내년 1호 조례안으로 청년기본조례를 고양시에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고양시에 존재하지 않던 청년생태계를 만들어 가고 싶어요. 이는 단순히 청년들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와 지역 그리고 고양시 전체 문제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신정현씨는 고양시가 청년들이 마음 놓고 꿈을 실천할 수 있는 지자체로 거듭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또한 공동체가 사회적 안전망을 건설해 먹고사는 문제에 바쁜 청년들의 대안공간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고도 밝혔다. 청년과 지역공동체를 연계해 활동하는 그의 말에는 늘 자신감이 묻어났다.

"사람이 돈이 없다고 밥을 못 먹고 결혼을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요. 우리 사회 점 조직. 즉 공동체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사람을 목적으로 하는 따뜻한 공동체요. 그곳에서 밥도 먹고 결혼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는 공간이 만들어주고 청년들이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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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는 청년을 응원합니다" 라는 주제로 다음 스토리펀딩을 진행중입니다.

7번째 스토리펀딩은 요즘 핫 한(?) 국회의원이죠.

김진태 의원이 제주도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하는

우도 청년에게까지 소환장을 보낸 이야기입니다.


김진태 의원의 소환장을 받은 청년은

정다운 메니페스토 청년협동조합의 정다운 부대표입니다.

정다운씨는 왜 김진태의원의 소환장을 받게되었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6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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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는 청년을 응원합니다" 라는 주제로 다음 스토리펀딩을 진행중입니다.

6번째 주인공은 빠흐띠의 권오현 대표입니다.


온라인 플랫폼 유행속에 그걸 진지하게 현실화 시키고 있는 청년.

IT 기술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청년 

각자 자기영역, 자기분야에서 자기만의 촛불을 들고 노력하는

권오현 대표의 스토리펀딩을 응원해주세요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6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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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순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

(너무나도 바쁜?) 인권활동가 정욜씨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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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순서는 '스스로 문제아를 선택한 모범생' 이라는 주제로

오늘 공작소 대표 신지혜씨가 그 주인공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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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순서는 '나는 어묵 팔면서 세상을 바꿔요'
그 주인공은 노점 활동가 김주노씨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4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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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순서는 '그의 기사, 지독하거나 혹은 살벌하거나'

국민TV를 대표하는 기자 김지혜씨 인터뷰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1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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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순서는 '포기 할 수 없는 연봉 70만원의 꿈'

청년들이 만든 '극단 99도'의 대표 홍승오씨 인터뷰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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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의식을 잃은 백남기씨가 317일간의 사투 끝에 결국 사망했다. 그동안 경찰의 과잉진압과 물대포 운용 지침을 지키지 않은 행위에 대한 비난 목소리가 높았고, 강신명 경찰청장이 살인미수로 고발당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은 침묵 중이다. 오히려 경찰은 유가족들과 대책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검을 시도하다 법원으로부터 영장 발부를 거부당했음에도 영장 재청구로 맞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05년 11월 15일 농민대회 과정에서 사망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유가족과 국민에게 사과한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시민이 사망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꼭 닮았지만, 정부의 대응은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인 26일, 황인성(64) 6월민주포럼 운영위원장을 만났다. 황 위원장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정국에서 복귀한 뒤 청와대 비서관으로 들어가 2005년 두 농민의 사망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 성명이 나올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근무했다.


▲ 참여정부 시민사회수석으로 근무한 황인성 6월민주포럼 운영위원장 황인성 위원장은 2005년 여의도 농민시위 과정에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사망할 당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 근무했다. ⓒ 박영민


"공권력에 의한 사망, 관심과 성의부터 보여야"


- 바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 2005년 전용철, 홍덕표씨가 여의도 시위에서 사망한 당시 시민사회수석으로 근무했다. 우선 시민사회수석실이 어떤 곳이었는지 말해 달라.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정국이 끝나고 업무에 복귀하면서 비서실을 재편했다. 기존의 정무수석실과 국민참여수석실을 없애고 시민사회수석실을 신설했다. 시민사회수석 산하에 시민사회비서관실, 사회조정 1비서관실, 사회조정 2비서관실, 사회조정 3비서관실과 치안비서관실 등 5개 비서관실을 두었다. 국회 및 정당 관련 업무는 정무팀으로 축소하여 비서실장실에 배속했다. 첫 시민사회수석으로는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으로 일하다 사표를 내고 청와대를 떠났던 문재인 변호사를 임명했고 내가 후임이었다."


- 시민사회수석실이 상당히 커진 것인데 왜 그런 재편이 있었나?

"알다시피 참여정부 초기에 원전 방폐장, 사패산 터널. 천성상 터널, 화물연대 파업 같은 사회적 갈등이 많았지 않나? 노 대통령은 공공갈등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해소하는 문제가 효율적인 정책 추진과 사회의 민주적 성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국회와 정당 관련 사안은 열린우리당이 자율적으로 대응하도록 축소했지만, 정책추진과 관련된 다양한 이해관계자 등의 요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정책추진 부처와의 원활한 소통과 조정을 지원해서 일종의 정책고객인 국민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일에는 비중을 크게 둔 것 같다."


-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2005년 11월 15일 여의도 농민시위 과정에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사망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었나?

"집회해산 과정에서 발생했던 사건으로 기억한다. 초기에는 피해발생의 전후 사정이나 직접적 원인과 책임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경찰, 농민단체와 야당 사이에 책임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정부 내에서는 경찰의 자체 진상조사가 있었고, 독립적 국가기관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가 진행됐다."


- 진상이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더라도 시위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다. 초기 대응이 중요했을 것 같은데?

"사람이 죽었으니까 청와대 비서실 내에서는 사망한 농민의 빈소에 조화를 보내고 조의를 표하는 문제가 논의됐다. 당시만 해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청와대에서 조화를 보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처리를 주문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공권력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인명이 훼손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에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노력은 진행하더라도 유족과 관계자들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조문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관심과 성의를 표하고 실질적 대화와 소통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 그래서 조화를 보냈나?

"내가 직접 갔다.(황인성 전 수석은 2005년 11월 29일, 고 전용철 씨의 빈소를 방문해 조문하고 유족과 대책위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그는 유감을 표하고 진상에 입각해 합당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다. - 기자 말) 당시 언론에서는 청와대 수석이 농민들에게 절을 했다고 굉장히 크게 보도했다."


"노 대통령 사과, 모두가 말렸다"


- 2005년 12월 26일 저녁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전원회의 결과를 공개하면서 전용철, 홍덕표씨 사망원인이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라면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바로 다음 날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참모들의 의견이었나?

"아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사과해야 한다는 말을 쉽게 꺼내기는 어렵다. 경찰의 진상조사가 진행 중이었고, 소관 부처가 있는데... 시민사회수석으로서도 진상을 숨기거나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엄정하게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 시점에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가지 않았다."


- 그렇다면 대통령 자신의 생각이었나?

"그렇다. (2005년 12월) 27일 아침에 대통령이 비서실장, 정책실장, 소관 수석인 나를 불러서 농민사망 사태에 대한 대통령 사과를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 참모들의 반응은 어땠나?

"다들 만류했다. 아직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고 각 부처에 직접적인 책임자들도 있었다. 경찰청도 있었고. 그런데 대통령이 먼저 사과하는 것은 너무 나가시는 것이라는 신중론이 다수였다."


- 만류에도 강행한 것인가?

"당시 대통령 입장에서는 따지려면 따져볼 만한 내용은 충분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검토할 부분은 있지만 공권력 행사는 엄중한 문제다.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할 공권력이 국민에게 피해를 준다는 건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문제다. 대통령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고 하셨다."


- 당시 경찰청의 입장은 어땠나? 반발이 있었을 것 같다. 

"경찰청을 담당하는 수석실이 시민사회수석실로 바뀐 데에는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이지만 가장 민생과 밀착해 있는 대민 부서이고, 각종 집회나 시위에 대응하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갈등을 올바로 관리하고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대통령의 사과성명 발표가 확정되자마자 경찰청장에게 전화로 대통령께서 곧 기자회견을 하실 예정이라고 알려주고 이후 대응문제를 고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경찰청장의 해임 요구에 "임기를 보장하기로 한 경찰청장을 해임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결국 12월 29일 스스로 사퇴했다.

"당시 경찰청장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자신이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할 정도로 진상이 명확히 규명되었다고 보지도 않았고, 경찰들의 사기를 생각할 때 대통령의 사과가 과도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기자회견 뒤에도 경찰내부에서 뒷말이 나왔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는 대통령의 사과가 공권력을 행사할 때 요구되는 정당성과 엄정성에 대해 공직사회의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의 대응, 지나치게 안일해"


▲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경찰의 부검영장 재신청이 이뤄진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백남기대책위와 시민들이 시신 탈취를 막기 위해 영결식장 입구와 연결 통로 위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 이희훈


- 전용철, 홍덕표씨가 사망한 지 정확하게 10년 뒤에 백남기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지고 결국 317일 만에 사망했다. 그렇지만 정부에서는 노무현 정부와 달리 사과가 없다. 어떻게 보고 있나?

"당시 청와대 내부의 논의과정을 지금과 비교해 보면 너무 안일하다. 공권력의 행사와 무관하게 사람이 죽었다면 누가 (정부의) 책임을 거론하겠나? 설령 진상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더라도 공권력의 행사 과정에 인명피해가 있었다면 같이 아파하고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기본이다."


- 만일 지금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어떻게 조언할 것인가?

"경찰은 물대포 사용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정당한 공권력 행사 과정이라고 항변하면서 죽음에 이른 건 본인(고 백남기씨-기자 말)이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를 밝히는 것은 그 과정대로 하더라도 유감을 표하고 공권력 행사에 과잉이나 불법이 없었는지는 자체조사해서 적절한 조치를 지시하는 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라면 그런 조언을 할 것 같다. 그런데 일 년 가까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가족이 원치 않는데도 시신까지 부검하려고 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민간단체가 행사하는 물리력과 공권력은 그 성질과 질, 양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다. 공권력 행사는 엄정하게 집행되도록 더 엄격하게 대처해야 한다."


-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바가 남다를 것 같다. 

"민주사회에서 기본적인 것은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언론결사의 자유다. 그래서 기본권이다. 기본권의 존중을 우선시 하면서 공권력이 행사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공권력이 우위에 있고, 이것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국민의 권리 행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잘못된 인식과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 그래야 갈등으로 인해 부딪쳐도 연성대치가 되지 강성대치로 나아가지 않는다. 강성 대치 상황에서는 예상치 못한 희생이 나온다. 연성대치 속에서 갈등조정의 길을 찾아야 한다."


지난 해 고 백남기씨가 물대포에 쓰러진 지 2일이 지난 11월 16일,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은 새누리당 초·재선 의원 모임에서 "미국에서는 (시위대가) 폴리스 라인을 벗어나면 경찰이 그대로 (시위대를) 패 버리지 않느냐. 그게 오히려 정당한 공권력으로 인정을 받기도 한다"며 경찰당국을 옹호했다. 2015년 12월 18일, 경찰은 백남기씨가 쓰러진 11월 14일의 민중총궐기가 오래 전부터 폭력 집회를 목적으로 치밀하게 기획, 모의한 것이라며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 대해 소요죄를 적용해 검찰로 송치했다. 여당과 경찰의 초기 대응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발생 42일 만에 국민에게 사과했지만, 고 백남기씨의 317일간의 사투 동안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국민의 인권은 공권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일까? 대국민 사과문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언급한 공권력의 행사에 관한 구절은 고 백남기씨의 사망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상식'이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공직사회 모두에게 다시 한번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 2005년 12월 27일. 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 중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 정명진 마을스토리텔러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이기화 사진작가



용산역에서 새마을호를 타니 두 시간 남짓 걸렸다. 홍성에 와보기는 처음이었다. 고맙게도 홍성역에 차를 대고 기다리던 정명진 씨 덕분에 초행길의 아득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짧은 인사를 나눈 우리는 우선 밥부터 먹기로 했다. 


"소머리국밥 어때요?" 


그의 제안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역주민의 추천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동차 핸들을 홍성시장 쪽으로 틀었다.


장이 서지 않는 시장은 몹시 한산했다. 5일장 날이라면 어림없었을 시장통을 차를 타고 시원스레 통과했다. 몇몇 점포가 문을 연 듯 했는데 손님을 끌 좌판을 벌이거나 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장 입구부터 꽤 깊이 들어오는 내내 사람 구경이 힘들었다. 유명하다는 소고기국밥집에 들어서서야 점심식사 중인 몇몇이 보였다. 


소박하지만 맛깔스러운 밑반찬에 펄펄 끓는 국밥 뚝배기가 나왔다. 밥 한 공기를 척 말아 냅다 먹었다. 아침을 거른 탓에 허기졌던 터였다. 속을 얼추 채우니 생각나는 게 또 있었는데, 막걸리였다. 안 그래도 우리가 앉은 테이블 주위론 동네 어르신들의 반주(飯酒)자리가 한창이었다. 갓 썰어온 두툼한 수육에 딱 한모금만 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얘기해도 좋을 텐데요."  


내 목소리가 아니다. 정명진 씨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쩜 이렇게 생각이 하나같은 지. 우리는 먹지도 못 할 막걸리를 뚝배기를 비우는 내내 목 놓아 불렀다.


약속된 인터뷰 장소는 그의 집이었다. 살림집 안에 낯선 손님을 들이는 일이 번거로울 텐데도 흔쾌했다.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에 있는 그의 집에 들어섰을 때 적잖이 놀랐다. 우선 크기에 놀랐다. 필지만 598평이란다. 오래되었지만 정갈한 한옥집도 멋져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마당 앞쪽으로 나있는 잡초 무성한 밭이었다. 저 잡초 밭에서 토마토도 나고 호박도 난다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명색이 귀촌 6년차라던데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소개가 늦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정명진, 귀촌 6년차지만 농사는 짓지 않는다. 10년간 신문기자생활을 하다가 작년에 그만뒀다. 그중 반은 서울에 터를 잡고 통일뉴스 기자를 했고 반은 이곳 홍성에 와 홍성신문 기자생활을 했다. 그의 귀촌 행엔 아내의 역할이 컸다. 결혼 초부터 시골에 가서 살자했던 아내의 바람 따라 농촌생활이 가능한 지역신문사로 직장을 옮겼다. 


"아내가 결혼할 때부터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저는 그걸 아주 먼 미래로 생각하고 살았어요. 그러던 중에 귀농운동본부라는 사이트에서 홍성신문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채용공고를 보게 됐어요. 저도 마침 통일뉴스가 아닌 다른 언론사로 옮기려던 차여서 때도 맞았죠. 홍성신문은 군민들이 주주가 돼서 만들어진 신문이에요. 창간 당시 농민회, 전교조, 와이엠씨에이 등에 계신 분들이 주도해 만들어졌죠. 그때 제 생각이, 지역에 이렇게 좋은 신문이 있었네? 그러면 나는 지역에서 정론을 찾아도 되겠다 싶었어요. 저는 제 꿈인 기자를 계속 할 수 있고 아내는 시골에 살 수 있고 우리 둘이 모두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홍성에 왔죠." 


신문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일했던 그가 돌연 작년 9월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대신 두 아이의 등하교를 책임지고 읽고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아침마다 밭에 돋은 잡초를 한두 개씩(!) 뽑고 저녁마다는 사람 만나러 마실 나가는 일상을 얻었다. 그렇다고 언론에 대한 고민까지 두고 나온 것은 아니다.   


"홍성신문을 그만두고 나서는 마흔 될 때까지 어디에 속하지 않고 글만 쓰고 싶었어요. 프리랜서 기자가 돼서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 쓰려고 했죠. 여전히 제 고민과 관심은 언론과 미디어 쪽이고 앞으로 제가 미디어에 담고 싶은 것이 바로 농촌마을, 마을공동체 이야기에요. 지역신문도 다 담지 못했던 작고 아기자기한, 재밌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은 거죠."


아홉 살 호연이와 다섯 살 호승이, 두 아들을 둔 가장이다 보니 신문사를 섣불리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다행이 아내가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그가 여기저기 써내는 원고료를 더하면 저축은 못해도 생계를 유지할 만큼은 됐다. 도시에 살 때만 해도 가장 걱정거리였던 집세부담도 덜었다. 비어있던 집을 전세 내어 살고 있는 중인데, 어마어마한 필지를 자랑하지만 전세금이 서울 원룸의 월세 보증금보다 적다.  


생활기반을 재정비한 그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미디어협동조합이다. 10년 간 썼던 기자직함 대신 '마을 스토리텔러'가 되어 홍동면에 있는 지역센터 마을활력소에 다닌다. 마을활력소에 사무실을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곳의 정식 직원은 아니란다.


"충청남도에서 올해 사회적경제 청년활동가 지원사업을 시작했어요. 사회적경제 분야에 취업 또는 창업을 할 사람이 그 지역에 있는 협력사업장을 택해 1년 동안 근무하는 건데요, 그 1년 동안 취업이나 창업을 준비할 수 있게 지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내년에 미디어협동조합 창업을 준비하느라 마을활력소에 있는 거죠." 

  

사실 그를 만나기로 하고 나 혼자 상상했던 그림들이 있다. 귀촌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들 말이다. 마당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농기구들, 사람의 손길이 보이는 논밭, 사람소리 왁자한 새참시간 같은 것들. 아마도 내가 생각했던 것들은 귀농인의 삶이었던 것 같다. 전형적이라 여겼던 농촌의 풍경을 제멋대로 그의 삶에 덧씌웠다. 귀농과 귀촌이 다를 거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무지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마을 스토리텔러도, 미디어협동조합도 낯설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 대한 약간의 낭만을 가지고 내려오는 젊은 친구들이 있어요. 근데, 특히 20대 친구들은 경험도 없고, 돈도 없어 땅을 살 수도 없는 처진데 이 친구들이 와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기란 불가능한 거죠. 물론 그게 실험적으로 되고 있는 곳도 있어요. 하지만 과연 농촌에 내려온 모든 젊은이들이 농사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키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있어요. 요즘 제 관심은 농적인 가치, 그러니까 도시는 갑갑하고  농적인 가치는 좋은데 와서 농사짓기는 싫은 젊은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에 있어요. 왜냐면 제가 그렇거든요. 농사짓는 게 즐거워야 되는데 제가 해보니 아주 못할 짓이더라고요." 


삼십 대인 그보다 먼저 농촌에 내려온 선배세대들은 대개 농사를 지었다. 와서 땅도 사고 힘들지만 농사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는 아침마다 밭에 나가 풀 몇 개 뽑는 것으로 농사는 다 했다. 정명진은 나와 같은 이들이 생각하는 전형을 깨고 보다 다양하고 가능성 있는 농촌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점점 귀농에서 귀촌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농사로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농촌의 서비스로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와 같은 고민을 갖고 있는 몇몇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귀촌한 친구들 중에 도시에서 디자인 하다 온 친구, 라디오피디 했던 친구, 미디어 교육에 종사하던 친구, 영상 찍다가 온 친구. 이런 친구들하고 네트워크가 돼서 지역의 콘텐츠를 만들어 담아보겠다는 거죠. 또 하나 중요한 거는,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 지역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일인가를 고민하는 거예요. 그게 안 되면 일이 성립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지역의 홍보,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사회적 미션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미디어협동조합 창업을 준비하면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지역의 이야기를 발굴해 전하는 일이다. 그래서 ‘마을 스토리텔러’다. 예를 들어, 어느 마을에서 도시 사람들이 와서 구경도 하고 관광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마을 정자를 만들기로 하고 마을 어르신들이 손수 정자를 만들었다. 지역 신문에는 사진 한 장, 한 줄의 기사로 끝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정명진은 이 이야기를 동네 사람들이 왜 정자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어떤 마음으로 지었고 그 과정엔 무슨 일이 있었지? 등을 취재해 스토리를 만들고 전하는 일, 작은 이야기도 좋은 읽을거리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야기가 있으려면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의 작업은 마을 공동체가 살아 있을 때 가능하기도 하다. 그가 오가는 마을활력소에서 마을 공동체 활성화사업으로 하고 있는 마을 만들기 운동이 중요한 이유다.  


"아내가 둘째 호승이를 임신했을 때 제가 신문사 출근했다 퇴근하고 오니까 이러더라고요. ‘나 오늘 한 마디도 못했어. 사람 한 명이 안지나가고 차만 다녔어.’ 시골 마을은 왠지 공동체가 있을 것 같잖아요? 마을에 공동체가 없어요. 마을 만들기를 하는 이유가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에 하는 거거든요. 지금 여기도 보세요. 사람이 없잖아요. 사람이 있어야 공동체 활동도 하죠. 지금 일본은 ‘소멸 가능한 지자체’라는 말이 화두래요. 일본은 우리보다 10년 정도 빠르잖아요. 인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 언젠간 이 지자체는 소멸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나라도 시작되는 건데, 우리도 시장 가봤잖아요. 할아버지들 밖에 없어요. 여기도 고령화가 20%가 넘는 초고령화 지역이에요." 


결국 사람이 계속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게 마을 만들기라는 건데, 그의 고민도 여기에 맞물린다. 이야기는 공동체에서 나오고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구조 속에서 만들어 진다. 농촌의 지속성은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을 때 가능하고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다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가 미디어협동조합을 만들어 담아내려는 ‘이야기’는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 계속 살만한 곳으로서의 농촌 마을 이야기를 담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모인 사람들이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무슨 워크샵이 있어서 서울에 갔다가 영등포역 건널목을 건너는데, 맞은편에서 한 150명쯤 되는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건너오더라고요. 제가 서울에 살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영상을 찍어놓고 싶을 정도로 놀랐어요. 어떻게 젊은 사람들이 저렇게 많지? 여기는 노인이 많은 게 비정상이지만 도시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게 비정상으로 보였어요. 요즘 도시가 너무 살기 힘들어졌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저들끼리 더 경쟁을 하게 되고요. 특히 20대들. 주거 문제나 일자리 문제도 그렇고. 요즘 귀촌이 늘고 있어서 이 친구들 중 누구는 분명히 내려올 것 같은데 이들을 농촌에서 어떻게 먹고 살게 할 수 있을까가 제 고민이에요." 


그는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가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내려와 농사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렵기 때문에 마을기업,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농을 기반으로 한 경제로 마을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시켜야 청년들도 과감히 들어올 수 있을 거라 내다봤다. 농촌에 젊은이들이 모이면 도시 문제도 나아질 거라 덧붙였다.


"시골이 무너지면 사회적인 문제가 생기는 거잖아요. 도시문제는 농촌문제가 해결 안 되면 역시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도시에 모든 것이 집중되니까 문제가 생긴다고 보거든요. 여기 충남에 있는 학생들도 청년이 되면 대부분 다 도시로 가요. 다시 오는 경우가 몇 프로 안돼요. 그 친구들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해요. 농촌이 잘 살아서 인구가 분산되면 도시도, 농촌도 지금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귀촌해 6년 살아보니 좋다고 했다. 부러운 마음에 그래도 불편하거나 싫은 점이 있지 않겠느냐 짓궂게 물어보니 분명히 뭔가가 있겠지만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 꺼내든 말이 불안함이었다. 마흔이 되기 전 5년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신문사를 나왔지만 청년활동가 지원사업이 끝나는 내년부터는 당장 고정수입이 끊긴다. 올해의 준비기간이 끝나면 미디어협동조합으로 하다못해 무라도 썰어야 한다. 농촌 컨텐츠로 같이 하는 친구들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지, 애가 딸린 30대 청년들이 먹고 살 수 있을지 불안하다 했다. 


어쩌면 농촌에 내려와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기댈 곳 없음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농사도 짓지 않고 직업도 없이, 나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는데 애환이 없을 리 없다. 소고기국밥을 먹을 때부터 나왔던 막걸리 타령은 인터뷰를 하는 내내 계속됐다. 정말 술이 고파서라기보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한정된 시간이 아쉬워서 그랬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아프고 쓰린 것들은 막걸리 타령에 흘려 넘겨버려야 했다. 


"여기서 계속 살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살고 있는 공간이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고, 농촌이라는 곳이 지속가능했으면 좋겠어요. 젊은 친구들도 더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제가 하려는 미디어협동조합도 그에 맞는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해요."


인터뷰는 호연, 호승이 하교 시간에 맞춰 끝났다. 아이들을 마중해 돌아오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참, 뭐가 될지 모르겠는 사람 같다고 말이다. 나쁜 표현은 아니다. 10년 간 기자를 했다니 그런 줄 알지 직업 없고 불안정한 지금 생활이 썩 어울린다. 역시 나쁜 마음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어폐가 있는 표현이 되지 않을까 고민 하던 중에 그가 블로그에 써놨던 소설가 김훈의 글귀가 떠올랐다. <신문사를 그만둔 지 50일이 지났다>라는 제목으로 쓰인 글 말미에 그는 이런 글을 인용해두었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그런데 노는 거, 그게 말이 쉽지 해보면 어렵다. 놀면서 돈 쓰고 돌아다니는 거는 노는 게 아니라 노동의 연장이다. 돈에 의지하지 않으면 못 노는 거는 돈 버는 노동세계와 연결돼 있어서 노는 게 아니다. 노는 거는 그 자리에 있는 세상하고 단 둘이 노는 거다."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김훈의 말을 따라보자면 그는 참 잘 놀고 있는 것 같다. 도시에서 바튼 숨을 쉬며 사느라 놀 줄도, 그렇다고 제대로 살줄도 몰랐던 나로서는 부러운 일이다. 그가 제 몸을 직접 부딪쳐 타진하고 있는 농촌생활이 지속가능하기를, 그러기 위해 부디 그가 세상과 좀 더 신나게 놀아주기를 바라본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진행 : 손우정(바꿈. 이사)



2016년 5월 3일. 한 사내가 양재동 서희빌딩 14층으로 들어섰다. 그의 이름은 홍명근. 이제 창립 1년을 맞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의 유일한 풀 상근 활동가다. 예전보다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인기가 사라지고 있는 이 때, 그는 왜 바꿈 활동가가 되었을까?


장맛비가 쏟아지던 7월 5일 나른한 오후, 바꿈 사무실에서 올해 31살의 유부남, 홍명근을 만났다. 두둥~



바꿈 와서 좋은 점은....“맛있는 걸 많이 먹는다”



- 간략하게 자기소개 부탁한다. 식곤증 때문에 피곤하니 30초 이내로 말하라. 

“올해 31살로 바꿈에서 상임하는 홍명근이다. 상임활동가가 된 지는 이제 2개월이 지났다. 그 전에 경실련에서 평화통일쪽 사업을 3년 반 정도 담당했다. 좀 더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고 싶어서 두 달 전에 바꿈에 왔다.”


- 흠. 30초도 안됐고, 별로 재미도 없다. 시민사회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대학교 다닐 때 솔직히 말해서 자기 소개서에 한 줄 채워 넣으려고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이사장의 종주를 따라간 적이 있다. 지리산에서 출발해서 백두산까지 걸어가는 게 목표였는데 휴전선에서 막히니까 설악산까지 가는 거다. 한 50일 동안 주구장창 걸었다. 힘들고, 뒤지겠고, 냄새 쩔고... 여름이라 거지처럼 걸었다. 그때 종주한 사람이 5명이었는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때 NGO활동을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지금, 내가, 바람’이라는 청년 정치참여 단체에서 회장을 해보기도 했고, 희망제작소 인턴도 했다. 그러다 4학년 2학기 때 경실련에서 평화통일쪽 일을 했다.”


- 박원순 시장이랑 친했다는 주장인데... 그럼 왜 서울시로 따라 들어가지 않았나? 

“응? 날? 왜 날 데리고 가나?”


- 흠. 그렇군. 3년 반을 일했던 경실련에서 옮겼다. 월급 많이 주는 쪽으로 옮겼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런 질문 하지 마라. 없어 보인다.”


- 지금의 근로조건에는 만족하나?

“맛있는 걸 많이 사줘서 좋다. 대충 만족한다.”


- ‘대충’?

“아따...넘어 가자”


- 좋다. 넘어가자. 바꿈에 온 진짜 이유가 뭔가?

“경실련에 있을 때는 기본 업무나 통일 관련 이슈를 확산시키는 일은 잘 했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네트워킹하는 건 미진했던 것 같다. 바꿈은 네트워킹과 연대 사업을 통해서 하나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의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론의 장으로서 역할 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에도, 나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 고운 자태로 청년코디모임을 진행하고 있는 홍명근 활동가. 청년 모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디에서 뭘 먹을까?’이다. 



- 지난 해 1기 바꿈 청년네트워크 평화통일분과 코디로 참여했다. 네트워킹의 목마름이 풀렸나?

“청년들이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데... 아니 아예 없다. 그런데 바꿈이 그걸 만들면서 우리 사회의 의제를 함께 이야기 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다.”


- 올해도 진행하는 것으로 아는데? 2기 바꿈청년네트워크 총괄 코디네이터를 맡지 않았나?

“그렇다. 올해는 지난 해 보다 청년 사업 규모가 늘었다. 지난 해는 4개 분과로 시작해 한권의 책을 내는 것이 목표였다면, 올해는 10개 분과를 조직하고 10개의 책을 내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벌써 12개 분과가 만들어졌다. 반응도 뜨겁다. 부담도 되지만 열심히 해볼라고...하하.”


- 2기 바꿈 청년네트워크에는 몇 명 정도가 모여 있나? 

“얼핏 50명? 작년에는 청년활동가, 준전문가들이 많이 모였는데, 올해는 분야에 관심 있거나 의욕이 있는 분들이 모였다. 전문성은 좀 부족할지 모르지만 참신하고 다양한 내용이 담길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시작은 50여 명이지만 계속 늘 것 같다.”



“풀 상근 활동가 한명...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운다”



- 예상대로 답변이 별로 재미없다. 자신이 남들보다 잘 한다고 생각하는 점은 뭔가?

“넘치는 에너지와 발랄함, 긍정적 마인드라고나 할까? 어떤 어려움과 문제점도 돌파해 내는 돌파력이 있다고 자부한다.”


- 그래 보인다. 그런데 바꿈에 와서 그 에너지와 발랄함이 많이 죽은 것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지금은 아닌데? 바꿈까지 출퇴근 시간이 왕복 4시간 걸린다. 너무 멀다. 흑흑. 평생을 강북에서 살고 활동하다보니 강남 터가 좀 안 맞는 것 같다. 강남 음식도 입에 잘 안 맞는다.”


- 좀 전에는 맛있는 걸 많이 먹어서 좋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비싼 것은 맛있다. 하하. 그런데 가성비가 좀 떨어지는 것 같다.”


- 흠. 바꿈 회원들이 자주 놀러 와서 맛있는 음식을 사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받아들이겠다. 지금 풀 상근하는 활동가가 한명인데, 외롭지는 않나?

“정신없이 바빠서 외로울 틈이 없다. 사무실에 왔다 가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상근활동가는 혼자지만 사실상 혼자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일은 좀 많다.”


- 백승헌 이사장님과 같은 사무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자주 와서 괴롭히지는 않나?

“방이 다르다. 가끔 찾아오실 때만 빼면 괜찮다.”


- 흠. 자주 찾아오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로 읽겠다. 2개월 간 바꿈에서 일하면서 느낀 점이 많을 것 같다. 가장 짜증나는 건 뭔가?

“회계할 때 비밀번호를 4번이나 입력해야 하는 것이 가장 짜증난다. 수수료도 많이 떼고. 회계 업무할 때 가장 힘들다.”


- 더 많을 것 같은데 역시 낙천적이다. 지금 바꿈에서 가장 해결하고 싶은 과제가 뭔가?

“CMS 회원이 너무 적다. 한 500명만 됐어도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것이 많을 것 같다. 바꿈 회원들이 조금씩 노력해 주시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 본인도 모르게 오마이뉴스 페이스북 페이지 메인 모델이 된 경실련 시절의 홍명근 간사. 지난 정부의 의혹을 해명하라며 방긋 웃고 있다. 



-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사실 다음은 없다), 마지막으로 바꿈 회원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CMS 회원 많이 늘려 주십시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꿈은 상임활동가가 나 한명이라 나 한명만 먹여 살리면 된다. 나 한 사람 먹여 살린다 생각하고 도와 달라. 결초보은의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다!!!”



바꿈 사무실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일하는 홍명근을 본 적 있는가? 온갖 잡무에 바꿈청년네트워크 조직화에 그는 늘 정신이 없다. 목소리도 하이톤이다. 특히 바쁠 때면 두 세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분주해 진다. 그러나 그는 어지간하면 지치는 법이 없다.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 탓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낙천적 성격에도, 돌파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 한계를 높여주고 그에게 무한 에너지를 불어 넣는 것은 바꿈 회원들의 역할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한 명만 먹여 살리면 된다.’ 그의 낙천적 성격이 바꿈 회원에게도 전염되어 무궁무진한 바꿈의 가능성을 현실화 시켜 보자!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 반올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이기화 사진작가


"전에 찍었던 사진들이에요."

  

그곳으로 가기 전 기화 작가가 사진 몇 장을 건넸다. 익숙한 것이 먼저 보였다. 낯익은 것을 먼저 발견하는 자연스러운 시선이었다. 오죽이나 눈에 익어서 시야를 가린 조형물과 멀찍한 거리 따위는 그 기업의 로고와 입구를 알아보는 데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야 보였다. 거북이 등을 닮은 비닐 천막과 거울 기둥에 비친 사람들이 말이다. 나는 그 모습을 내게 익숙한 것들을 다 알아본 후에야 겨우 보았다.


▲거울. ⓒ이기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차들이 꼬리를 무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과 겨울이 지나갔고 어느덧 여름이 봄의 뒤꿈치에 붙어 따라왔다. 작년 가을 강남 한복판 고층 빌딩 아래에 여섯 장의 파레트를 깔고 자리를 만들었다. 춥고 궂은 날엔 비닐을 둘렀고 볕이 강한 날은 파라솔 아래 둘러앉았다. 거리를 지나가는 수천 개의 발걸음을 머리맡에 이고 거리잠을 자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260여일이 지나고 있었다.


 

▲CCTV ⓒ이기화

 

사람들의 무관심한 발길보다 괴로운 것은 24시간 내내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저 ''이다. 저들을 향해 하루도 쉬지 않고 말을 걸고 있지만 지켜보는 자들은 답이 없다. 감시카메라는 진정성 있는 사과와 배제 없는 보상, 철저한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깨진 스티로폼을 새 것으로 바꾸는 것과 비오는 날 비닐을 두르는 것, 그늘을 만들 파라솔을 세우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농성장. ⓒ이기화


여기는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 꾸려놓은 작은 농성장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사람들이 있다. 20073,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하며 삼성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졌다. 삼성직업병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반올림'의 활동도 그와 함께 시작됐다. 올해로 벌써 9년째다



▲고무신. ⓒ이기화

 

아버지는 고무신 안에서 피어오른 꽃들을 살뜰히 보살핀다. 이 꽃을 보러 속초에서 서울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온다. 이 꽃들 중에 아버지의 딸 유미가 있기 때문이다. 9년 전 1명이었던 피해자 수가 222명으로 늘었고, 그중 76명이 사망했다. 모두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화사한 얼굴로 농성장을 둘러싸고 있는 76개의 고무신 꽃들이 실은 떠난 이들의 얼굴이었다. 안타까운 죽음을 꽃을 피워 기억하려는 반올림의 마음씀이 애달프다.


▲현수막. ⓒ이기화

  

201411, 삼성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조정위원회(조정위)를 통해 처음으로 '대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삼성, 반올림, 삼성직업병 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세 주체였다. 그리고 이듬해 조정위의 권고안이 나왔다. 삼성의 공익법인 설립을 통한 보상 및 재발방지대책 수립이었다. 그러나 삼성은 조정위의 권고안을 무시한 채 자체적인 보상위원회를 꾸려 일방적인 보상을 실시하려 나섰다. 그 과정에서 반올림은 배제됐고 피해자의 진심에 가닿는 사과도 물론 없었다. 반올림이 노숙농성장을 꾸린 이유다



▲황상기 씨. ⓒ이기화

 

"해결, 마무리, 합의, 최종타결." 

 

속보가 쏟아졌다. 9년 간 쌓인 피로가 단숨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저 이야기는 반올림의 목소리가 아니다. 올해 초 반올림은 삼성과 사과와 보상을 제외한 재발방지대책에만 합의했다. 반올림이 요구한 사과와 보상 문제는 삼성의 거부로 답보상태였지만 피해자가 더 늘어나는 상황을 막는 것이 중요했다. 쏟아져 나온 속보에서 2개의 의제 해결이 남았음을 알린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세상은 삼성직업병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곳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매일 밤 이어 말한다. 발전기를 돌려 겨우 밝히는 작은 불빛이지만 그 빛 아래로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과 함께 안전한 노동환경과 노동자의 인권에 대해 말한다.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사는 건강한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가끔 노래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함께 읽는다. 반올림이 마련한 좁은 자리를 굳이굳이 찾아 들어와 앉아주는 엉덩이들이 있어서, 그 몸들이 만들어내는 빽빽한 밀도가 든든해서 버틴다. 거리를 오가며 작은 눈인사로 아는 체 하는 시민들의 지지와 끼니때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오는 사람들의 정성으로 농성장의 하루하루가 쌓인다.


▲농성장부감. ⓒ이기화

 

내가 눈에 익은 것들만 알아보며 사는 사이 많은 노동자들의 건강한 삶이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낯선 풍경을 외면하는 사이 반올림은 직업병이라는 비극을 멈춰보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 농성장을 나와 집에 가는 길, 다시 돌아본다. 처음엔 쉬이 알아보지 못했던 그들의 자리가 보인다. 빌딩이 화려하게 들어선 강남 한 복판, 이곳에 세운 비닐천막은 분명 초라하다. 그러나 이 비닐 등껍질을 두른 반올림이 삼성이라는 태산을 등에 이고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이 지켜지는 세상으로 그들과 함께 가려고 온몸을 거리로 내던져 놓고 있다.


▲농성장2. ⓒ이기화


이 미련한 거북이들이 걷기를 멈추지 않는 한, 삼성직업병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유미 영정. ⓒ이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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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그는 왜 '난민'이 새겨진 방수 옷을 만들었나

['기억'을 기억하다] 차지량 현대미술작가

프레시안 2016.4.5.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우연히 찍었다던 사진 한 장을 전달 받았다. 광장에 모인 군중 사이 SF영화에서 봐봄직한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커다란 깃발을 휘날리며 뽀족이 서 있었다. 작년 겨울, 물대포가 할퀴고 간 자리에 다시 모인 사람들 틈에서였다. 생각 없이 받아 든 사진을 보면서 나는 안면근육을 있는 대로 다 써버렸다. 통쾌하다가도 문득 서글프고, 웃음을 터트리다가도 돌연 비장해지는 심정이 여과 없이 표정으로 드러난 것이다. 단지 범상치 않은 그의 옷차림 때문이 아니다. 그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깃발에 박혀있던 '난민'이란 글씨 때문이었다. 


한국난민의 등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 1조 1항을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광장을 채운 사람들의 사연을 생각하자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나는 그를 한번 찾아보면 좋겠다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사진 외에는 그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지만 서울에서 김 서방을 찾겠다는 각오는 있었다.


"1차 민중총궐기에서 물대포를 목격하고 그 옷을 떠올리게 됐어요. 방한용은 아니지만 방수용 옷이거든요. 방수기능을 갖고 있는 옷이 있는 사람으로서 마음이 동해 시위에 참여했어요. 갖고 있는 옷이 다섯 벌인데, 그걸 입을 사람이 있느냐고 온라인에 간단하게 물었고 의사를 보인 분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 거죠."



찾았다. 사진 속 주인공이자 '난민'이 새겨진 방수용 옷을 갖고 있는 사람, 차지량 작가였다.


그는 그 옷이 방수복이어서 입고 나갔다는 것 말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난민에 대한 의미심장한 대답을 기대했건만 옷이 잠수복 소재로 만들어 졌다는 말만 겨우 덧붙였다. 내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줬던 저 옷이 단순히 방수복에 그친단 말인가? 솔직히 실망할 뻔했다. '뻔'했다는 것이지 실망했다는 건 아니다. 찾고 보니 그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다수의 공연에 예술 감독으로 참여했고, 굴지의 예술 페스티벌에 선정 및 초청된 미디어 아트 작가였다. 그렇다고 이런 그의 유명세가 나의 실망감을 잠재웠다 생각하지는 말아주기를. 나를 홀린 그의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개인성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어떠세요? 잘 유지되고 존재하고 계신가요? 저는 그 부분을 얘기하고 싶어요. 개인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까운 것에 있을 수 있어요. 강남의 인구밀도 일 수도 있고, 주차관리원 아저씨의 성질머리일 수도 있는데 결국 이런 것들에 영향을 주는 것이 뭐냐는 거죠."


시스템, 정확히는 시스템 자체를 학습할 수밖에 없는 여러 사회구조가 문제였다. 그는 시스템 결정권자가 되어 본 적 없는 개인들이 이미 견고하게 세워진 구조에 흡수되어 버린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시스템과 개인에 대한 차지량 작가의 고민은 '세대독립클럽'(2010년), '일시적 기업'(2011년). 'new home'(2012년), '한국난민시리즈'(2015년) 로 이어진 관객 참여형 예술 프로젝트로 발현됐다.


"주로 했던 작업들이 다 제 삶과 관계되어 있어요. 2011년은 직장생활을 3,4년 정도 했던 친구들이 제 주변에 많았던 시기에요. 대부분 그 즈음이 기업문화에 물들어가는 시기잖아요. 그걸 보면서 기업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들과 거리가 먼 우리 세대가 어떻게 시스템의 질서를 학습하게 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고 그게 '일시적 기업'이라는 작업으로 이어졌어요. 'new home'은 도시계획에 관여하지 않은 세대가 도시의 주거공간에 내몰리는 상황에 치닫는 것을 보며 시작한 작업인데, 저 역시 너무 단단한 현재의 주거시스템에 무력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들이 많았거든요. 이렇게 내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내 삶의 유형들을 경험하며 시스템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일시적 기업'은 기업 시스템, 'new home'은 주거 시스템에 대한 차지량 작가의 실험 현장이었다. '일시적 기업'은 일반 기업의 그것처럼 정식 기업 채용공고를 통해 지원자를 모집하고 면접도 실시했다. 일시적 기업 지원자들이 면접에서 받은 질문 중 몇 개를 추려보면 이렇다. 임시직 퇴직 후 정규직 사원과 연락하고 지낸 경험은 있는가? 급여는 어떤 항목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는가? 이런 질문도 있다. 임시직이지만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 사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중, 회사노조가 파업을 결정했다. 참가 할 것인가? 근무시간에 개인적인 볼일로 인터넷을 하다 발각되고 경고조치를 받았다. 개인적인 볼일이 끝나지 않았다면 몰래 할 것인가? 


"'new home' 안에서는 이런 질문들이 있어요. 함께 살면 가족일까? 어떻게 바라봐야 가족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인터뷰를 참여자들이 하게 돼요. 이런 질문들에 답하면서 주거유형을 결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집에 대해, 가족에 대해 재정의를 하는 과정을 겪게 되죠. 일시적 기업에서는 내가 기업문화에 얼마나 흡수되어 있고 개인의 질서는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를 가늠해 보게 되는 질문들을 비디오 면접을 통해 제공했죠."



일시적 기업에 채용된 직원들이 수행해야 하는 업무는 대기업 테러였다. 무기라고 해야 형광물총과 물풍선이 전부였지만 실제로 기업 건물에 침투(!)해 총을 쏘고 폭탄을 던져야 했다.  대기업이 청년 세대 사이에서 점유하고 있는(특히 취업에 있어서) 위치를 생각하자면 이 테러는 자기부정이라도 해서 쥐어짜낸 용기로 할 수 있을까 말까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개인과 기업 시스템 사이에 균열을 내고 지원자 스스로의 질서를 더듬어 보는 면접은 '일시적 기업'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차지량 작가의 또 다른 프로젝트 'new home'은 주거공간이 필요한 사람들이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유형인 원룸, 빌라, 신도시 아파트에 일시적으로 거주하면서 벌이는 커뮤니케이션의 기록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완공 직전이거나 완공 후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거주지를 일시적으로 점유해 자기 영역을 만들 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다. 누울 자리를 위해 나눠 받은 돗자리도 예외는 아니다. 'new home' 참여자들은 하룻밤 몸을 뉘였던 돗자리마저 학으로 접어 창문 밖으로 날려 버린다. 청라 신도시 고층 아파트에서 진행 된 'new home'이 게 중 가장 압권인데, 이미 밑동을 삼켜버린 매립지 안갯속으로 돗자리 학들이 추락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비극적이다. 차지량 작가가 생각하는 이 스토리의 결론은 더 극단적이다. 둥지를 갖지 못해 집단적으로 내몰린 철새들, 그 철새로 대변되는 인간들의 집단자살이 그가 준비한 이야기의 끝이었다.

"저는 삶의 방법론들이 더 많아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삶의 방향이 정말 많아져야 하고 한 가지 질서가 아니어야 하는데 지금 시대의 방향과 질서는 한 가지로 너무 짙어지고 있는 거죠. 지금의 질서가 한쪽 방향으로 흐르고 있을 때 다른 쪽 방향에 대한 극단을 제안하면 그 둘의 사이를 넓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제가 하고 있는 극단적인 제안은 시스템을 전복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이 제안들을 통해 현실이 개정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각자가 다 상상하고 스스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중요성이 있어요."

차지량 작가의 '한국난민시리즈'의 탄생은 갑작스러운 게 아니었다. 주거와 일자리의 균형이 붕괴된 사회에서 삶의 지속이 가능할리 없고, 테러와 자멸을 선택하느니 이런 국가를 떠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국가 시스템에 대한 극단적 제안으로 장장 2년간 진행해 온 그의 최근 프로젝트 '한국난민시리즈'는 총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배경은 2024년, 국가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가상세계를 설정하고 참여자들의 난민 신청을 받았다. 난민 신청자들을 만나 난민증을 발급하는 과정이 '한국난민시리즈'의 첫 번째 에피소드 ‘한국난민판매’에 담겨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인 '한국난민대표'에서는 난민증을 발급 받은 100명의 사람들이 부산항에 모여 준비한 배를 타고 진짜 국가를 떠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난민들은 배에서 각자의 난민 신청 사유를 밝히기도 하고 그들의 대표도 뽑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난민들이 도착한 곳은 각자가 신청한 국가가 아니라 2014년의 대한민국이었다. 2024년 부산항을 출발한 배가 100여명의 난민을 싣고 2014년 부산항에 도착하면서 ‘한국난민대표’ 에피소드가 끝난다. 처음 이 에피소드를 만들 때만 해도 미래에서 온 난민들의 등장은 없었다고 한다. 다소 황당한 결론을 내면서까지 이야기의 흐름을 바꾼 이유가 있었다.

"'new home'과 마찬가지로 한국난민시리즈의 두 번째 에피소드를 그릴 때도 집단적인 침몰이 초안이었어요. 배를 하나 빌려 난민으로 등록된 사람들을 다 데리고 떠난 다음 가짜 구조요청을 하고 협상을 하는 게 원래 이야기의 끝이었죠. 그런데 첫 번째 에피소드를 하고 그다음 달에 세월호가 터졌어요. 개인적으로 세월호를 타보기도 했던 저한테는 너무 큰 충격이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사회구조의 잔인한 부분들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어요. 방송이 어떤 방식들로 오보되고 거기에 사람들은 어떤 영향을 받고 이런 것들이 제가 기초적으로 설계했던 하나의 오작동 코드였거든요. 그런데 그게 현실로 드러나니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세 번째 에피소드를 생각해 내는 과정이 오래 걸렸어요."

세월호를 겪고 원래의 초안대로 이야기를 끝낼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실질적인 대상과의 온전한 협상을 세 번째 에피소드의 목표로 잡았다. 미래에서 온 난민과의 협상을 위해 일반 관객과 국회의원을 초대했다. 관객은 국민대표, 국회의원은 협상대표자들이었다. 그렇게 '한국난민시리즈'의 세 번째 에피소드 '한국난민협상'은 2015년 4월 17일에 열렸다. 장소는 여의도가 보이는 한강이었다.

부산항을 거쳐 한강에 유입된 미래의 난민들은 빈약해 보이는 오리 튜브에 의지한 채 이렇게 말했다. 미래에서 온 우리는 미래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불균형에 대한 극단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결정권자들은 이것들을 개정하고 우리 난민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2015년의 한국,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바로 그 옷, 사진 한 장으로 차지량을 찾아 나서게 만든 그 난민 복장이 이 에피소드에서 등장한다. 잠수복 소재로 만들었다는 난민 협상 수트였다. 2015년 한국의 대표자들과 협상이 결렬되면 언제고 물 위에 떠다녀야만 하는 운명을 직감하고 있는 옷이었다. 방수라는 옷의 기능이 함의하고 있는 시간과 사연만 따져 봐도 이 수트가 한 편의 에피소드에 쓰인 소품 정도로 그 운명을 다 할 것 같지는 않다. 2015년 물대포를 쏘아대는 대한민국 광장에 다시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비단 방수기능 때문만이 아니다. 차치량의 '한국난민시리즈'의 모든 현장은 종료됐지만 이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예민한 감각이 환영(幻影) 정도로 남아 있던 한국난민의 존재를 "있음"으로 각인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이 사회의 시스템을 마주할 때마다 난민의 삶을 떠올리게 돼버렸다. 시스템의 균형이 무너질수록 우리도 난민이 되리라는 공포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이 불균형을 바로세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형태의 미술이 익숙하지 않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게 요즘의 애플리케이션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현장이라는 게 모든 삶의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이 부분을 경험하는 것이 삶에 있어서 여러 태도를 확장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잖아요. 저는 제 작업이 그 부분들로 기능한다면 좋겠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제 작업을 함께 한 관객들이 다른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는 개인, 시스템에 상상력을 제안할 수 있는 개인으로 확장 된다면 좋기를 희망하는 거죠."


한국난민의 탄생을 알린 것도 그이지만 막을 방법도 그에게서 찾았다. 고착된 시스템에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 넣는 개인과 지금과는 다른 시스템을 제안하는 개인들이 많아지는 것. 그리고 그 개인들이 만들어 가는 유연한 사회 시스템의 존재에서다. 


'한국난민시리즈'의 세 번째 에피소드 ‘한국난민협상’의 제목은 '멈출 수 있는 미래의 환영'이다.(쉽게 한국난민판매, 대표, 협상으로 부르고 있지만 실은 큰 제목들이 따로 있었다. 한국난민판매는 '뉴미디어를 장착한 체념이 광장을 가로지른다' 한국난민대표는 '대표의 균형이 개인을 살린다'이다) 차지량 작가가 '한국난민시리즈' 마지막에 이르러 '멈출 수 있'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도 그가 벌인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에게로 그리고 사회로 확장된 상상력에 기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극단으로 치닫는 이 불균형한 사회를 멈출 수 있다는데, 차지량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보는 일, 마다 할 이유가 없다. 


* 한국난민협상 자리에 초청한 국회의원들은 왔는지, 그래서 협상은 잘 됐는지에 대한 결과는 이 글에서 밝히지 않겠다. 차지량 작가가 '한국난민시리즈'의 영화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결론은 영화를 통해 확인해도 좋을 것 같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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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최유진 더불어민주당 뉴파티위원회 위원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54.5세 국회의원은 '헬조선' 못 바꾼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서른>에 나오는 주인공 수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학원가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읊조린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수인이 이미 겪어본 아이들의 미래는 이렇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은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다니기가 버거울 것이다. 졸업 후에도 빠듯한 살림살이가 이어질 것이고, 고수익 보장이라는 말에 속아 다단계 조직에 발을 들여 놓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살갑게 지내던 누군가를 그 지옥에 불러들여야 할 때도 있고, 나를 대신한 그이가 불어난 빚과 망가진 인간관계에 시달리다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십년간 자취방을 여섯 번이나 옮겨 다니게 될 테지만 제대로 된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십 대의 젊은 소설가가 그려놓은 대한민국 청년의 삶이 이렇다. 교육, 주거, 취업, 인간관계까지 한 편의 짧은 소설에 청년의 삶 면면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고 여기, 소설이 채 말하지 않은 청년 이야기를 풀어 놓는 이가 있다. 최유진 위원이다. 김애란의 소설에 그의 이야기를 더하면 대한민국 청년의 서글픈 초상이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더불어민주당 뉴파티위원회 위원으로 있는 그가 집중해서 활동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소설에는 쓰이지 않은 청년정치이기 때문이다.


"아이들한테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고 희망이 있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너무 미안하고... 또 한편으론 화도 나요. 사람이 어떤 기회를 얻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 발전도 하는 거고 새로운 모습도 보여줄 수 있는 건데, 지금 청년세대는 삶에 대한 새로운 기회조차 못 잡고 있는 게 현실이죠."



<서른>을 쓴 소설가와 최유진 위원은 아마도 일면식이 없을 테지만 그 둘이 공유하고 있는 감수성이 퍽 닮았다. 문학의 언어와 정치의 언어가 갖는 온도차는 있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당사자들의 비슷한 체험이 문학과 정치라는 각자의 그릇에 담겨 있는 셈이다.


"청년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로 취급받고 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에요. 헬조선, 흙수저, 노답사회 이런 표현 자체가 청년들이 불공정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끊긴 상태인 거죠. 정당별로 청년 정책들을 내놓고 있지만 실제 청년들이 가져갈 수 있는 파이를 나눠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청년들도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한국 정치에서는 그런 시스템이 없어요. 캐나다에서 40대 총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0대, 20대부터 정치적 경험을 쌓게 하고 사람을 길러내는 인재 육성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우리 정치권처럼 선거철 보여주기 식으로 청년을 호명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죠."


우리나라 총 인구 중 20,30대의 비율은 30%다. 그러나 20,30대의 당사자성을 갖고 있는 19대 국회의원은 단 4명뿐이다. 쉽게 말해 20,30대 연령의 국회의원 수가 겨우 4명이라는 거다. (그나마도 20대 국회의원의 수는 0명이다) 19대 국회의원의 평균연령이 54.5세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현재 국회가 세대의 다양성을 대변하는데 얼마나 허술한지 알 수 있다. 청년정치가 부재한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노인관련 법안은 청년에게 혜택을 주는 법안의 4배에 달하고, 현행 정치자금법에서는 청년세대를 위한 예산의 정도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청년들의 투표율이 낮다고 하는데, 지역정치, 지역구 선거 자체가 현재 청년들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아요. 대부분의 청년들은 자기가 나고 자란 지역을 떠나 원룸에서 살고 고시원에서 살아요.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착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걸 아는 정치인들은 공보물을 원룸촌, 고시촌 이런 곳엔 보내지 않아요. 청년 투표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거죠.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엘리트 위주의 정치로 일관해 오던 기득권 정치가 바뀌지 않고 제론토크라시, 노인 정치가 계속된다면 인구절벽을 앞둔 한국은 더 이상 성장하거나 발전하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어요. 청년을 포함해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이 정치에 뛰어들어 변화의 에너지를 만들어야 미래를 꿈꿀 수 있죠."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문학은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문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부정한 힘을 알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다.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면 이런 과정을 타고 흐를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다르다. 정치는 유용하며 직접적이다. 정치가 발휘되는 방향에 따라 당장 우리의 일상생활부터 달라지기 마련이다. 최유진 위원은 왜 우리 삶을 바꿔 줄 희망의 씨앗을 정치에서 찾고 있을까?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하고 조형물 작품을 냈던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오히려 앞에 것, 유용하지 않은 예술을 써먹으며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말이다.


"대학 1학년 때 하반신이 마비가 되는 사고가 있었어요. 전쟁기념관에 있는 기념탑을 만들다 떨어졌는데 마비의 원인을 찾지 못해서 두 달을 천장만 보고 있었거든요. 그때 누구나 장애가 생길 수 있고 누구든지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어요. 그리고 평생 누워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제야 이 사회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없는 곳인지 알게 됐어요."


제주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최 위원은 서울에 있는 예술고에 입학했다. 제주도에서 왔다는 이유로 이름 대신 '제주도'로 불렸고 같은 이유로 왕따와 구타를 당했다. 해녀의 숨비소리를 들으며 맨발로 뛰놀던 아름다운 추억이 주류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청소년기의 상처와 대학에서의 사고는 미술가의 길을 걸으려 했던 그를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극도의 입시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은 새로운 친구를 환영할 수 없었고 하반신 마비의 환자와 더불어 살아갈 여유가 이 사회엔 없었다.


원인 모를 하반신 마비는 척추신경에 박혀 있던 작은 뼛조각이 문제였다. 치료 후 두 다리로 땅을 다시 디뎠을 때 그에게 아낄 몸 같은 건 없었다. 다양한 사회문제에 몸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학내에서는 등록금 투쟁에 앞장섰고 서울대 일제잔재청산위원회를 조직해 친일 인명사전도 만들었다. 진보정당에 들어가 사회진보 운동도 열심히 했다. 2009년엔 다큐 <오체투지 다이어리> 공동 연출도 맡았다. 그가 스물아홉 살이었던 해였다.


"오체투지는 신체의 다섯 군데를 바닥에 닿게 하는 가장 낮고 겸손한 수행이에요. 2008년, 사회적 약자들이 더욱 열악한 조건에 내몰리고 민주주의의 후퇴가 우려되던 상황이었는데, 문규현, 정종훈 신부님과 수경스님이 사람과 생명, 평화의 길을 찾는 순례를 떠난다기에 카메라 촬영법을 급히 배워 수행단에 합류했어요. 순례를 기록하기 위해 참여하긴 했지만 당시 제 개인적으로 자기반성도 필요했고 새로운 시작점을 찾아야 했을 시기라 저 역시 수행한다는 심정으로 동행했어요."


이십대 초부터 다양한 정치사회운동에 참여해오며 나름 잔뼈가 굵어졌을 시기에 관성적으로 사회문제를 보고 접근하려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고 있던 진보운동은 점점 힘들어졌고 스스로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때 최 위원이 선택한 것이 오체투지 순례길이다. 고생스러웠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단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느라 빚도 좀 생겼다.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작품이 제2회 DMZ다큐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의미를 남겼다. 상금도 받았는데 빚 갚는데 고스란히 쓰였다고 한다. 


상도 상이지만 그에게 <오체투지 다이어리>가 남긴 의미는 사실 따로 있다. 약자의 외침을 대신해 고행하는 수행자들 곁에 소박하게, 더러는 아프게 살아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들이 울고 웃으며 풀어놓는 사는 이야기를 가까이 들으며 최 위원은 저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사회와 저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정치야말로 좋은 사회와 좋은 정치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치에 있어서 당사자들의 직접참여는 최 위원이 인터뷰 내내 강조하던 내용이기도 하다.


"제가 작업해오던 공공 설치 미술은 다른 미술보다는 생활에 밀접한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예술을 통해 절박한 현실을 직접 바꾸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죠. 정치는 직접적이에요.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가 정치에 달려 있고, 우리가 처한 답답한 현실을 우리 손으로 직접 풀 수 있는 수단이 정치이기 때문에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어요. 청년뿐만 아니라 다양한 당사자들이 정당 안으로 들어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김애란의 <서른>을 읽는다. 


도시에 어둠이 내리면 아파트마다 회사 로고를 본뜬 네온등에 불을 밝힌다. 손잡이도 없는 작은 창 너머로 세기의 문장(紋章)처럼 박혀있는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수인은 그가 살고 있는 이 방이 공간이나 장소가 아닌 어디론가 계속 이동 중인 물체처럼 느껴진다. 창밖의 세계와는 같은 시공을 공유할 수 없는 채로, 묵직한 가속도를 내며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우주선처럼 말이다. 


"청년정치는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미래가치를 스스로 찾고,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죠. 끊임없이 경쟁만을 쫓기듯 하게 만드는 불공정한 룰을 깨고 다수의 청년들을 패배자로 만드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면 해요. 그런 움직임 속에서 제 역할이 있다면, 많은 청년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진입로는 만드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송곳이 낸 작은 구멍이 나중에 큰 물길을 트듯이 제가 그 작은 구멍을 내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청년들이 허공에서 보내는 타전은 땅에 채 닿기도 전에 희미해지고, 그들이 타고 있는 우주선은 방향을 잃은 채 자꾸만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다. 청년이 정치적 약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청년들의 고독한 우주선은 더 많이, 더 멀리, 더 빨리 지구를 떠나게 될 것이다. 청년정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최유진 위원이지만 그의 열정만으로는 저 많은 우주선을 다시 지구로 회귀시키는 건 아마도 불가능 할 것이다. 


최유진 위원에게 청년문제의 모든 짐을 지워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청년 정치인이 귀한 이 시대에 그가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희망이 있다는 말로 대신하고도 싶지만 아무래도 희망이란 단어는 익숙하지 않아 차마 못쓰겠다. 그러나 그도 말했듯 작은 구멍을 낸다고 했다. 최유진 위원이 낸 구멍이 비록 송곳만큼의 크기라도 그것은 메시지가 수신되고 발신되는 소통의 창구가 될 것이고, 그 길을 따라 청년들의 우주선이 다시금 지구별에 착륙하는 날도 올지 모르겠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애쓰고 있는 아이들이 결국 서른 살 수인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서늘한 예감은 허공에 날려 버린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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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가야금 싱어송라이터 정민아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 & 오민정 사진작가

"삼풍 무너져도 정부 책임 생각 안 했죠"


가을밤이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낯을 익히다 어느덧 불콰해진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던 밤이 있었다. 사랑방을 자처하며 오합지졸들을 끌어 모은 집주인은 묵혀둔 동치미 독 헐 듯 냉장고를 헐어 자꾸만 음식을 내왔고 밤도 좋고 술도 좋고 인심도 좋은 시간이었다. 막차 시간이 코앞이라는 사실 말고는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시간을 재고 있던 내가 적당한 때를 보고 일어서자 집주인이 덜컥 팔을 잡아끌었다. 진짜 보고 가야 할 사람이 아직 안 왔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시냐는 물음에 사랑방 주인장이 답했다. "일단 한번 만나봐."


나는 그날 막차를 놓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사랑방 자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놀고도 흥이 가시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홀로 낄낄거렸다. 악기가 사람을 닮은 것인지, 사람이 악기를 닮은 것인지 여운을 길게 남기는 것이 나타난 사람이나 그가 들고 온 악기나 꼭 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녀가 배웅가라며 불러 준 천안도 삼거리를 제멋대로 흥얼거리며 아주 그냥 취해버렸다. 다음 날 두통을 부르던 숙취는 없었다. 그 밤엔 술이 아니라 사람에 취했던 것이다.


정민아, 가을밤에 만났던 그녀를 한 계절을 보내고 다시 만났다. 25현의 가야금을 연주하는 싱어송라이터, 국악기를 들고 홍대 앞 라이브클럽에서 공연하는 '희귀한' 뮤지션, 국악으로 포크와 재즈,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고, 4개의 정규앨범과 다수의 프로젝트 음반을 낸 전업가수. 정민아를 소개하려면 이것저것 화려한 수식들이 많다. 심지어 그녀는 팬 카페와 페이스북 팬 페이지도 보유한 스타였다. (비록 팬 카페주인과 페이지 주인이 본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소개보다도 첫 대면과 동시에 속이 뻥 뚫리는 그녀의 호쾌함이 무엇보다 사람을 홀린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덤으로 봐도 좋고 망설임 없는 그녀의 행보는 일단 한번 만나보라던 사랑방 주인장의 자신감을 단연 인정하게 하는 대목이다.



"제가 그 전에는 대한민국의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별 생각 없이 나갔던 광우병 촛불 집회에서 완전히 바뀌었어요. 그 당시에 수많은 경찰들이 거리를 메우고 길을 못 건너게 하는 거예요.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권력에 의해 한 순간에, 아무 때나 바스라질 수 있는 자유 안에서 살았던 거지요. 그저 길을 건너려고 하는 사람을 권력이 저렇게 탄압할 수 있다는 것을 한 순간에 알게 되면서 제 생각과 삶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용산 참사, 이랜드 노조, 이주노동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폭력을 겪고 있는 여성들, 세월호 참사. 우리 사회의 이면을 앓고 있는 곳이라면 부르면 무조건, 부르지 않아도 찾아서 다녔다. 한 덩치 하는 가야금을 이고 지고 가야 하는 것은 그녀에게 결코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꿔보리라는 포부는 없다. 음악이 상처를 치유할 것이라는 낙관도 없다. 음악이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힘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해야 한다고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몰랐던 것을 알게 됐으니까 다시 돌아갈 수가 없단다. 


"저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정부 책임이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당시 제가 봤던 어떤 보도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냥 사고가 났구나 하는 정도로 알고 무심히 넘겼던 거예요.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반드시 미래에 되돌아온다'. 이건 되게 명백한 진실 같아요. 세월호 참사를 그때의 저처럼 단순한 사고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 사건이 결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말을 해줘야 해요. 제 음악과 활동들은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길 봐달라고 하는 외침이기도 하지만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우리가 지켜보고 있겠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지난해 5월 홍대역과 합정역 사이에서 예술인 100팀의 버스킹(거리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는 행위)이 있었다. 1인 시위의 기준이 되는 20미터씩을 사이에 두고 인간 띠처럼 이어 진행한 공연이었다. '세월호를 지켜보는 작은 음악가들의 선언'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릴레이 1인 시위를 기획한 것도 그녀였다. 세월호 참사 500일에 맞춰 15인의 음악인이 함께 만든 '다시, 봄' 이라는 프로젝트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 유쾌하게 그리고 더 없이 진지하게 인터뷰를 진행하는 중에 그녀의 눈망울이 유독 커다란 이유를 알게 됐다. 바라보고 있는 것도, 담아낼 것도 많은 사람이었다. 이쯤에서 그녀의 음악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음악에 문외한이자 겨우 그녀의 말을 받아쓰는 게 일인 내가 음악을 말하겠다는 게 무척 우습지만, 음악이라 써놓고 정민아의 일상이라 읽으면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가 작사 작곡하는 모든 노래가 생활밀착형이다. 



"국악고를 거쳐 음대에 입학하면서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엔 계급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좀 더 우월하게 살 것이다, 국립국악원 같은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 좋은 학벌의 집안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 살겠다고 생각했죠. 정작 부유하게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부유한 미래를 꿈꾸는 철딱서니였어요. 그런데 이런 황당한 생각이 깨지게 된 게 생계를 위해 전화상담원 일을 하게 된 경험이었어요. 금방 그만두겠다던 그 일을 4년 반 정도 하게 됐는데 그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삶을 보게 됐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직업을 갖고 그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깨우쳤죠."


세상물정 모르던 철없는 음대생은 '국립'이 붙는 탄탄한 직장을 얻는데 족히 7번은 실패하고 당장 급한 생계부터 해결하고자 전화상담원 일을 시작했다. 엄마의 빚을 떠안고 살던 은미를 만난 곳이다. 집나간 엄마를 대신해 은미가 빚을 갚으며 집안 살림을 꾸리고 있을 때 은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은미는 3일장을 끝내고 돌아와 다시 전화기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민아는 은미의 허락을 받고 곡을 만들었다. '은미 이야기'다. 1집 <상사몽>을 발표하고 전화상담원을 그만둔 정민아는 광화문역 7번 출구 앞에서 매일 아침 주먹밥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1집이 1만 장이나 팔리는 성과에 힘입어 과감히 퇴직을 결단했지만 보릿고개는 금방 찾아왔다. 주먹밥 장사를 시작한 첫날 2000원짜리 주먹밥이 36개나 팔렸다. 그 후 단 하루도 첫날보다 많이 팔아본 적이 없다. 쫄딱 망했지만 노래 한곡이 남아 3집 앨범에 실렸다. 곡 이름은 '주먹밥'.



정민아는 중학교 2학년 때 동네의 작은 교습소에서 가야금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가야금을 타면서도 락키드였던 그녀는 홍대 라이브 클럽을 들락거리며 록, 재즈, 헤비메탈 등의 라이브 공연에 흠뻑 빠져 살았다. 그런 그녀가 클럽 공연에 서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야금을 들고 무대에 서기까지 실용음악학원에서 화성과 기타, 피아노 등을 배웠다. 작곡의 기본을 익히고 밴드들이 하는 앙상블 수업에 가야금을 갖고 들어가 장르가 다른 음악과 접목도 해봤다. 정민아의 음악은 그렇게 다져지기 시작했다.

 

"저는 제가 상위 1%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1%가 아니라, 음악가로 먹고 살 수 있는 정도가 된다면 상위 1%라고 생각하거든요. 풍족하지는 않지만 이제 전화상담원을 하거나 주먹밥을 판다거나 하지 않아도 공연하고 음반팔고 하는 정도로 먹고 살 수는 있어요. 되게 감사한 일이에요."


상위 1%치고는 참 소박한 생활을 하는 중이지만 그 덕에 4집 앨범까지 나올 수 있었다. 4집 앨범을 준비하며 그녀 스스로 가사를 주우러 다녔다고 하는데, 팔도의 도서관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이십여 년 전 서른세 살이던 엄마와 손을 잡고 찾아갔던 수리산 한증막도 다시 갔다 왔다. 서울 수원 전주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그녀가 주워담은 순간은 다름 아닌 사람의 순간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 바라 본 사람들의 작고 외로운 순간순간들을 곡으로 담아냈다.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나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것이 사람이라고 담백하게 노래해 주는 이, 젊은 엄마의 외로움을 알아봐준 이, 작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충분히 아름답다 말해주는 이, 가난한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봐 주는 이가 있다는 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정민아의 음악이 전하는 진심이었다.



"만약 운이 좋아서 악단시험에 붙었다면 이런 세상을 몰랐겠죠. 이제는 세상이 이상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 이상해요. 저번에 세월호 미사에서 신부님이 하신 말씀이 중에 세월호 이전과 이후에 뭐가 변화됐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그냥 그 이전과 이후에 변화된 삶을 사는 거라고. 제가 광우병 집회에 나가 일순간에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처럼 그 이전과 이후는 절대 같지가 않잖아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이제 그냥 제 이야기로만 노래를 만들 수 없어진 거예요.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 스스로가 그렇게 변화됐으니까. 화상입기 전과 후의 삶이 다른 것처럼."


그녀를 만나면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웃음도 많고 입담도 좋지만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그 품이 넉넉해서 한 자리 차지하고 들어앉아서 사는 얘기 풀어놓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언제고 오래 머물러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이냐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모르죠'와 '무계획'이었다. 그런 건 없단다. 그럼 당장 할 일은 무엇이냐 물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콘서트'란다. 


정말 못 말린다. 아니 말리지 않고 싶다. 삶에 대한 거창한 계획을 늘여놓지 않은 그녀가, 하루하루 필요한 곳에 가서 자리하겠다는 정민아의 즉흥이 너무 미더워서 그렇다. 누군가 내게 정민아를 어디서 만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가보시라, 그곳에 그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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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김홍선 오사카국제대학 인권교육 강사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오사카에서 만난 '밀로의 비너스'


살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너무나 당연해서 고민의 여지도 없었던 것들, 국가, 국적, 국어, 이런 것들 말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히 부여 받았다 생각했는데 사실 이것들은 때로 기막히기도 하고 우연하기도 한 시간과 사건의 결과였다. 굴곡 많은 이 땅의 역사를 생각하자니 더욱 그렇다.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강제 연행 되었던 나의 할아버지가 일본을 탈출해 당신의 고향인 충청도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황해도가 고향인 나의 외조부모가 6.25 전쟁 때 이남으로 피난을 오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속한 집안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루어진 선대의 크고 작은 결정들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국가, 갖고 있는 국적, 쓰고 있는 언어를 하나로 동일하게 만들었다. 우연한 일이다.


지난 11월,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김홍선 선생을 만났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표현하거니와 영락없는 오사카 아줌마가 따로 없다. 쾌활하고 수다스럽고 웃음이 많다. 그러나 예의 그 웃음 가득한 얼굴로 풀어 놓는 이야기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재일교포 2세인 그의 가족사를 들어보면 이렇다.


"일제의 수탈로 생계가 어려웠던 부모님께서 1939년 4월, 일본 시모노세키로 건너오셨어요, 그 후 오사카에 자리 잡고 신발을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일본의 징용 명령이 떨어졌지요. 아버지께서는 나라를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강제 징용까지 하라고 하니 너무 화가 나서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숨어 다니셨어요. 징용을 시키려는 일본 경찰의 폭압이 점점 심해지자 아버지는 온 가족을 데리고 히로시마 현의 산골로 도망쳐버렸습니다.“



1945년 8월 5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일본이 패전을 맞이하자 생계를 위해, 일제의 강제 연행과 징용으로 인해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내쫓기듯 일본 땅을 벗어나게 된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어렵사리 구해서 타고 간 귀국선은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했고(1945년 8월 24일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다수 타고 있던 귀국선 우키시마마루호가 교토 근교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500명 이상의 한국인이 수몰되었다.) 한반도에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끝내 귀국선을 마련하지 못한 김홍선 선생의 가족들은 히로시마에서 조금 더 생활하다가 종전직후의 혼란한 상황이 나아지면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이 현재의 60만 재일교포의 시작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나와 김홍선 선생이 각각 태어난 국가가 달라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김홍선 선생은 1951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가 3살이 되던 해 온 가족이 오사카로 터전을 옮긴다.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파친코 가게에 화재가 나면서 히로시마에서의 생활기반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갈 곳이 없던 가족은 한인들이 모여 살던 부락에 자리를 잡았다.


"그 곳은 미군기지 건설공사에 인부로 일하던 교포들이 그대로 공사장 근처에 정착해 살게 된 부락이에요. 막노동꾼들이 합숙소로 쓰던 판잣집 같은 곳에 칸막이를 해놓고 여러 가구가 나눠 살았는데, 우리 가족도 한 칸을 얻어 살았습니다. 그때 살던 집근처에 건국학교라는 한국계 학교가 있었어요. 조국을 늘 그리워하던 아버지는 언젠가 가족과 함께 고향에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저희 형제들을 그 민족학교에 보냈어요. 한국어를 배우게 하려고요."


민족의식이 유별났던 그의 아버지는 곤궁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본학교보다 학비가 비싼 한국 학교로 아이들을 등교시켰다. 아버지의 교육철학에 따라 김홍선 선생 역시 건국소학교를 졸업하고 건국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김홍선 선생은 중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사고가 있었다.


"당시 큰 오빠가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기계 한 대를 장만해 밥그릇이나 젓가락을 만드는 일을 했었어요. 재일교포들이 주로 하는 막노동일 보다는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서였죠. 여름방학을 보내던 저도 가서 일을 돕게 됐지요. 기계가 찍어낸 플라스틱 제품을 빼내다 사고가 났어요. 기계에 양손이 끼어들어가 손가락이 모두 으스러졌지요.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생일이 지나지 않았을 때라 만으로 겨우 12살 때 벌어진 일이에요."


"겨우 12살이었잖아요" 하며 그가 웃었다. 뭘 몰랐다며 웃었다. 기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두 손을 다 집어넣는 어린애였다. 으스러진 손가락은 접합수술조차 할 수 없어 손목 아래로 모두 절단해야 했다. 가난한 살림에다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재일교포였기에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퇴원을 서둘렀다. 사고와 함께 찾아온 사춘기는 혹독했다.



"14살이 되던 해 외국인등록증을 만들러 구청에 가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엔 사진을 찍고 지문을 남겨야 하는 의무가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손가락이 없잖아요. 그게 너무 걱정이고 사람들의 시선도 무서웠어요. 다행히 구청 직원이 제 상태를 확인해주는 도장을 찍어줘서 일본에서 살 수 있는 등록증은 나왔지만 그때 제가 장애인이라는 것과 외국인, 한국 사람이라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고 후 학교를 그만 둔 그가 집에서 한 일이라고는 책읽기와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보기였다. 12살의 김홍선은 어느덧 18살이 되었다.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재택장애인이었던 그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낸 건 펜팔이었다.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영화잡지에 실린 펜팔모집 광고를 보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글씨 쓰기는 문제 되지 않았다. 글씨 쓰는 연습을 지독히 해온 것이다. 대화를 하는 중에 그가 직접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양 손목 사이에 낀 펜은 그 누구의 손가락 사이에서보다 정교하게 움직였다. 획수가 많은 한자도, 곡선이 많은 히라가나도, 자음과 모음의 간격이 까다로운 한글도 모두 반듯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시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일본사회에서 심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펜팔 편지를 안 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숨기고 가짜 일본 이름을 만들어서 편지를 주고받고 했어요. 그리고 손이 없는 사람은 더욱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그것도 숨겼어요. 그렇게 진짜 나를 숨기고 펜팔 친구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가짜모습으로 친구를 갖고 있는 게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그래서 결심을 하고 고백했지요. 그 후 절반의 친구는 편지를 주지 않았지만 계속 편지를 주는 친구도 있었어요. 일본 사람 중에서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죠. 덕분에 세상에 나갈 용기도 생겼고, 제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을 맞는 계기도 생겼죠."


펜팔로 용기를 얻은 그는 오사카 문학학교에 등록했다. 1970년의 일이다. 비록 일주일에 한 번 듣는 문학 강좌였지만 중학교 1학년 이후 처음 나가기 시작한 학교였다. 그곳에서 재일교포 시인 김시종 선생을 만난다.  


"김시종 선생님이 밀로의 비너스엔 팔이 없는데 왜 우리는 아름답다 느끼느냐 물으셨어요. 왜일까요? 비너스에게 없는 팔과 손을 우리가 상상해서 보니까 아름다운거래요. 그때 저는 너무 놀랐어요. 양손이 없는 제 자신에게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 때였는데, 우리의 상상력 덕분에 저도 손이 없는 그 모습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어요. 그때야 저도 이제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살아나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김시종 시인이 김홍선 선생에게 남긴 말은 "시인에게 마이너스란 없다"였다. 손이 없는 것은 마이너스의 의미가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으로 다채롭게 채워 나갈 공간이 생겼다는 것으로 느꼈다. 오사카 문학학교 이후 김홍선 선생의 삶을 보면 실로 그렇다.


1974년, 재일교포 3세들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 11년을 꾸준히 했다. 이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어 강의를 맡았다. 1991년부터 시작한 이 강의는 2011년 3월까지 지속했고 2006년부터는 오사카국제대학에서 인권교육론을 담당하는 비상근 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저를 둘러싼 세 가지의 안 좋은 조건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덕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찾아 살게 됐으니까요. 외국인으로 차별받으며 살아온 재일교포에, 중증 장애인에, 중학교도 못 나온 학력, 이런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가 좋아하는 강의를 꾸준히 하고 있잖아요. 자기의 행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게 아니에요. 불행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행복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요. 남들 보기에 그까짓 게 뭐가 행복하냐고 해도 상관없어요. 무엇이든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된다고 전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행복을 말하는 그의 얼굴이 꽃잎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처음 사회생활을 했던 회사에서 받았던 노골적인 차별과 멸시, 한복을 입은 날이면 어김없이 달라붙던 불쾌한 시선들, 절단된 손을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던 어린 날의 기억들. 그가 말하는 행복은 불행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쳐본 선험자가 들려주는 아주 핍진한 진심이었다.


김홍선 선생이 재일교포 2세라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타고 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조부모 세대가 한반도 남쪽에 자리를 잡기로 결정한 탓에 지금 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민족이니까, 가혹한 삶에 대한 동정심으로, 역사적인 책임감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훨씬 가볍고 자유로워진다. 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 생각할 때 이해의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로의 삶이 뒤바뀌거나 어쩌면 비슷해질 수 있었다는 우연의 가능성을 열어놨을 때 타인의 삶에 대한 오해 없는 상상이 가능해진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그의 시간을 차마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가 있던 자리에 나를 갖다 놓는 상상력은 마음껏 발휘했다. 김홍선 선생은 그렇게 만나야 한다. 밀로의 비너스를 만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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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김진 변호사,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세월호 특위, 이번이 끝이 아닙니다"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원고 송부를 차일피일 미루다 더는 밀려날 구석이 없어서, 이제는 정말 써보겠다 마음을 다잡았다. 여전히 자신은 없다. 실은 지난 주말 안에 탈고하겠다고 끙끙 싸매고 앉아 있었다. 세월호 특조위, 세월호 특별법, 세월호 시행령안, 검색어를 바꿔가며 지독하게 시간을 물고 늘어졌지만 겨우겨우 몇 자 쓰다만 것이 다였다. 그 밤, 광화문 광장에서 농민 한 분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캡사이신이 섞인 물거품이 광장을 뒤덮을 때 나는 마른 발을 비벼대며 백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하루를 살면 꼭 하루만큼의 죄가 불어나는 시간이 차마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제가 든 생각은 이걸 내가 못한다고 할 주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못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 제안이 왜 저한테까지 왔나 알아보니 정말 선뜻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나서지 못한) 그 사람들이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사안 자체가 너무 무거우니까요. 이 일이 제게 온 이유가 있겠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석태 위원장님을 만나러 갔죠."

세월호와 광화문을 양쪽에 두고 무력함에 신열을 앓을 때 번뜩 그의 말이 떠올랐다. 야당추천인사로 임명되어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있는 김진 변호사였다. 그는 세월호 특조위 비상임위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 이 일 못 하겠다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주로 맡고 있는 노동문제도 산적해 있고 개인적으로 박사논문도 써야 하는 바쁜 시기였지만 세월호는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월호 특조위가 꾸려질 때 부담감 때문에 다들 고사하는 분위기였는데, 유족분들이 이석태 위원장님께 유족대표를 부탁하시면서 막 우시더래요. 그때 이석태 위원장님이 드신 생각이, 대체 왜 이분들이 미안해하고 울어야 하지? 라는 거였대요. 특조위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이 저랑 비슷한 거죠."

못한다고 할 주제도 아니라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더듬더듬 지금의 글을 쓴다. 김진 변호사의 진심을 따라 쓰기로 했다. 무능을 탓하기 전에 아픔을 보고, 누구나 피하고 싶은 무게를 끌어안은 것, 매일매일 세월호를 본인의 눈앞으로, 사람들의 눈앞으로 불러 오는 것. 어렵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는 애도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뿐,

김진 변호사도 알고 있었다. 특조위를 바라보는 날선 시선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600만 명의 서명으로 지난해 11월 7월 제정된 세월호 특별법과 12월에 꾸려진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국민들의 기대와 성원을 한 몸에 받으며 출발했다. 그러나 법이 제정 된지 일 년이 넘은 상황이고 특조위의 활동도 곧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특조위의 권한을 대폭 축소한 시행령안과 올 7월까지 한 푼도 지급되지 않은 예산(그나마 뒤늦게 책정 된 예산은 특조위가 신청한 예산의 3분의 1수준이다), 주요 보직의 늦은 임명과 정부여당의 비협조, 특조위에 우호적이지 않은 주류 언론들, 세어보자면 손가락이 모자란 걸림돌을 넘어가며 지금까지 왔지만 여전히 넘어서야 할 것들이 많고 그 사이 국민들 사이에 쌓이고 있는 오해를 풀 길도 당장은 막막하다.

"이 법이 정말 피와 눈물로 만든 법인데 위원회가 1년 동안 너무 무력한 모습을 보이니까 유족들의 실망과 원망도 받고 있어요. 정말 면목이 없고 부끄러워요. 정부여당이 방해를 한다는 얘기도 많이 있는데, 그건 주어진 조건이니까 거기서 사실은 위원들이 많은 일을 했어야 했죠...지난 1년 동안 위원회를 쥐고 흔들었던 절차적이고 의무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업무는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는 특조위가 갖고 있는 환경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특조위는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유족추천, 야당추천 위원)과, 이들과는 달리 정부여당과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위원(여당추천 위원)이 함께 모여 있다. 모두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모이거나 그 반대의 비율로 구성되었던 대개의 상황들과 사뭇 다른 것이다.

"다수의 위원들이 야당추천, 유족추천 인사들이다 보니 위원회 내부를 보면 저희가 다수인 것 같아 보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예산도 안 줘, 직원도 못 뽑아, 자료도 안 보여줘, 이런 식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다수인 당신들이 뭐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위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에는 무력한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지요. 정말 황당한 상황이 있는데, 위원회에 진상규명국장이라는 자리가 있어요. 별정직 중에서는 제일 높은 직급이고 제일 중요한 직급인데 아직까지 청와대에서 인사검증을 안 해줘서 채용을 못했어요. 정부여당의 계산대로 따지자면 올 1월 1일부터 위원들의 임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12월 31일로 법적인 1차 활동기간이 끝나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제일 중요한 국장자리를 임명을 안 해줘요."

이런 상황에서 오는 12월 14일부터 16일에는 세월호 참사 특조위의 첫 번째 청문회가 예정되어 있다. 그가 처음 특조위 활동에 뛰어들었을 때, 해경청장, 사회지방청장까지는 책임을 묻겠다, 적어도 진실에 한 발짝이라도 다가설 것이라는 낙관이 있었다고 했다. '멍청한 낙관' 이었다고 그가 말했다. 정작 위원회에 들어와 보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벽은 견고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진실을 찾아 들어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많은 분들이 물어보세요. 세월호 청문회에서 무엇을 밝힐 수 있겠냐고. 소박하지만 큰 목표가 있는데, 2014년 4월 16일, 그때 과연 우리 사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큰 그림을 그려 내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책임 질 사람이 있으면 책임을 물어야 될 것이고 밝혀져야 될 의혹이 있다면 밝혀야 할 것이고, 만약 밝히지 못한 게 있다면 왜, 무엇 때문에 밝히지 못했는가 까지 남기는 것, 그리고 진상규명국장을 임용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다 남기는 것이 위원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만약 그것이 저의 임기나 또 이 정부 안에서 해결할 시간이 부족하다면,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의지가 있는 정부가 탄생했을 때 반드시 2기 위원회를 해야 한다는 것까지 남기는 것이 위원회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제가 유가족 분들께도 말씀드리는 것은, 이번 위원회가 끝이 아니다, 이번 청문회도 정말 중요하지만 계속 이어질 전체 청문회 그림 속에서 봐 달라고 하고 있어요."

세금도둑으로 몰리는 모욕과 활동제약 속에서도 김진 변호사는 늘 약속된 특조위 회의에 나가 싸우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 고개를 숙인다. 한심스럽다는 손가락질을 받아 내더라도 위원회를 지키고 위원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진척 없는 특조위 활동을 그만두라는 주변 권유도 있었지만, 위원회에서 유가족들의 외로움을 만날수록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만 든단다. 

특조위 활동을 하며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지난한 싸움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얼굴에 날 생채기가 두렵고 수족의 안녕을 바랐다면 아마 이 자리에 그가 서있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그가 바라는 날은 그의 몸이 꺾어지고 분질러져, 세월호가 품은 진실의 꽃병에 꽂아지는 날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그는 바스러지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이나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김진 변호사 덕분이다.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난 진작 포기하고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졸작의 원고는 여기서 끝나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특조위의 역할도 계속 될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을 기억하며, 진실에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끝내지 않겠다는 그에게, 마침표가 없는 시 한편을 응원과 신뢰의 마음을 대신해 전한다.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꽃 아 다 오 



덧) 
김진 변호사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며칠 후 진상규명국장이 1년 만에 내정되었다는 보도(한겨레, 11월 14일자)가 있었다. 원고에 인용된 시는 최승자의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에서 부분 발췌하였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4.11총선에서 10만3811표 얻었어요"


"아이고, 뭐 이렇게 빨간 책을 들고 다니시나?" 

얼마 전 만난 친구가 내 손에 들린 책을 보고 풉~ 하고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빨갛다고? 내가 들고 있던 책은 누가 봐도 초록 일색인 표지에 심지어 낱낱의 책장도 연둣빛을 은근하게 머금고 있었다. 거기에 큼지막하게 적힌 책 제목도 이랬다. '행복하려면, 녹색'. 빨갛다는 친구의 농담이 다소 과격했다. 그래도 이 친구, 알아봐 준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친구는 거기까지였다. 나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눈치껏, 대충, 어렴풋이 그쪽이겠거니. <행복하려면, 녹색>(하승수, 서형원 지음, 이매진)은 하승수 위원장을 만나기로 하고 빈 머리로 갈 수 없어 뽑아든 책이었다. 그가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는데 나도 녹색당에 대한 풍문은 그만 주워듣자 싶어 급한 대로 찾아 읽던 차였다. 

2012년 3월 4일 창당해 그해 4월 11일 총선에 뛰어든 녹색당, 결과는 참담했다. 0.48%의 정당득표율을 얻었다. 두 명의 지역구 후보는 모두 낙선했고 비례대표를 통한 원내진입도 실패했다.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득표율이 2%에 미달하면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정당법에 따라 총선 다음날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곡절을 겪었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4.11 총선에서 10만3811표를 얻었어요." 

비례대표 의원 당선을 위한 득표율인 3%에는 한참 모자란 수였다며 뒤통수를 긁던 하승수 위원장이 당시 득표수를 정확하게 읊었다. 지역구 당선의원이 압도적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와 지역기반으로 세워진 거대 양당제로 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구조에서 녹색당과 같은 소수정당의 생명은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녹색당을 지지한 10만3811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선거가 집어삼킨 사표가 아니라 녹색당을 함께 가꾸려는 사람들의 소중한 손길이었다. 10만3811표를 곱씹는 담담한 그의 목소리엔 녹색당에 대한 미더움이 묻어났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정당등록 취소 위헌소송을 통해 녹색당을 지켜냈다.

"정당 활동은 노동 강도도 세고 엔지오 활동보다 몇 배는 더 힘들더라고요. 저는 사실 국가, 지구차원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지역 풀뿌리 정치에 관심을 두고 내 동네, 내 지역에서 정치를 바꿔보자 했었는데, 제가 좀 늦게 깨달았다고 할까요. 그 사건 이후로 국가 정치, 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사건, 2011년 3월 11일에 터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였다. 녹색당이 창당 된 2012년 전에도 한국에서 녹색당을 만들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5개 시도에서 각각 1000명 이상의 당원을 모집해야 정당을 만들 수 있는 정당법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졌고 이후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녹색당 창당에 뛰어 들었다. 하승수 위원장도 그랬다. 

"저는 환경운동보다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인데 후쿠시마 사고는 굉장히 큰 충격이었어요. 후쿠시마도 로컬푸드운동이 있던 곳이고 생협도 있는 지역인데 한 순간에 지역 사람들이 몇 십년간 쌓아온 것들이 무너져버렸잖아요.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단순히 하나의 사고가 아니라, 내가 사는 이 세상이 더 이상 유지되고 지속 가능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피부로 느끼게 된 사건이었어요. 지금까지 나는 내가 사는 사회를 좀 더 나은 사회로 바꾸려고 노력해오며 살았는데, 그나마 이정도의 사회도 유지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아무리 지역 풀뿌리 운동과 시민운동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구나, 한순간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든 거죠." 

정당 운영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던 그가 창당에 뛰어들 만큼 시대적 절박함이 있었다고 했다. 국가, 지구차원의 정치로 개입하지 않고서는 원전사고와 같은 참사를 막아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왜 녹색당일까. 우리나라 정치지형에서 군소정당의 정치참여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변호사로, 대학교수로, 다년간의 시민운동가로 살아왔던 그가 모를 리 없다.  

"녹색당은 국가가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기업은 매출증대가 목표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국가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국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좋은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지요. 국가가 경제성장을 목표로 삼는 순간 국민들의 삶의 질이나 환경, 인권, 먹을거리, 이런 것들은 뒤로 밀리게 되어 있어요. 경쟁에 뒤처지는 사람은 배제되고 그러면서 사람 사이의 차별이 생기고 소외가 나타나잖아요. 경제성장이 아니라 좋은 사회를, 좋은 삶을 만드는 게 국가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녹색당이 유일하게 하고 있어요." 

그도 한때는 체제 내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잡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정도로 삶을 계획했었다. 제도권에 들어가 양심적으로 살아볼까 싶었다. 그래서 사법시험을 보고 변호사가 됐다. 2006년부터는 국립대 교수직도 맡았었다. 그러나 하승수 위원장은 변호사도, 교수직도 스스로 그만뒀다. 변호사 생활은 시민운동에 대한 열망으로 이어갈 수 없었고 대학에선 행복하지 않은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그가 선택한 곳은 늘 시민과 함께 하는 운동현장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치다. 선거 때마다 50% 내외를 겨우 오가는 투표율이 보여주듯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가 만연한 사회에서 정치, 그것도 탈핵과 탈성장이라는 녹색 정치를 들고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다. 녹색 정치는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이었다.

"누군가와 나를ㅁ 비교하고, 내가 누군가와 비교당하고 이런 것들이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요인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비교하다보면 자기다운 삶을 찾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거꾸로 사회는 비교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동체와 그렇지 않은 공동체가 뭐가 다를까 비교해 보고, 대한민국 사회보다 좀 더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회와 서로 비교해 보고. 이런 비교를 하다보면 상상력이 나오잖아요. 지금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많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다른 사회가 가능하다는 꿈이나 상상력을 가져야 이 사회가 좀 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승수 위원장은 내년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그의 출마는 당선을 위한 출마는 아니라고 했다. 녹색당의 가치와 정책을 알리려는데 집중하는 모양이다. 더불어 녹색당은 내년 총선에 나설 비례대표 후보를 내는데 벌써부터 담금질을 하고 있다. 녹색당이 낼 비례대표는 당원들이 추천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밟게 되고 순번 역시 당원투표로 정해진다. 그리고 모든 과정은 공개 된다. 

녹색당은 녹색이다. 어설픈 농담이 들어설 틈이 없는, 꽉 찬 녹색이다. 생태적 지혜와 사회정의, 직접·참여·풀뿌리 민주주의, 비폭력 평화, 지속가능성, 다양성 옹호, 지구적 행동과 국제연대를 강령으로 삼은 정당, 녹색당. 이 정당 강령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녹색당이라는 작은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푸릇푸릇하고 보드라운 싹으로 움터 올라 거친 바닥을 덮고, 그 위를 많은 사람들이 맨발로 걸어 볼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아, 물론 알고 있다. 현 정치권이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하는 비례대표제의 전면 확대와 정치개혁 없이는 어쩌면 꽤나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승수 위원장의 말에 따르면 녹색당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 100년 가는 정당이 되겠다고 했다. 유럽을 비롯해 지구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각국 녹색당도 창당 이후 초반엔 어려웠다. 그렇다고 정치적 시민권을 얻어 원내에 진입하고 국회의원을 배출하는데 100년까지는 안 걸렸다. 이 땅에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자. 그리고 무작정 녹색을 떠올려보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녹색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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