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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공익제보자를 높이 평가했지만, 

자신이 공익제보를 하겠다는 의지는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한 국책연구기관에 근무하는 A. 그는 국가 보건복지사업 연구원입니다. 

그는 조직의 관행적 공금횡령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A는 횡령에 가담한 동료에게 동참을 권유 받기도 했습니다. 


A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어땠을까요?


놀랍게도 감사팀은 관계자를 처벌하지 않고 공익제보를 한 A의 신분을 노출했습니다.

부당한 일을 알렸던 A는 대가로 피해를 받았습니다. 


공익제보는 우리사회를 위한 옳은 일이자 마땅히 칭찬받았어야 할 일이었지만 

동료와 가족들에게도 이해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공익제보자들에게 관심가지고 그들의 어려움을 지지해야 할 때입니다.


아름다운재단은 우리사회에서 

어쩌다 슈퍼맨이 된 공익제보자들을 위한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슈퍼맨' 바로가기 <

https://beautifulfund.org/sup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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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실건가요?

당신은 친구의 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 중입니다. 친구는 신나는 음악에 취해 점점 속력을 내더니, 제한속도를 넘겨 달렸습니다. 과속하던 친구는 횡단보도를 걷던 사람을 치고 말았습니다. 차에 치인 사람은 죽었습니다. 과속하지 않았다고 거짓 증언을 하면 친구는 감형을 받습니다. 친구는 내게 거짓증언을 부탁합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친구를 위해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사실대로 증언하겠습니까?

사실,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어떤 관계냐에 따라 얼마든지 진실은 왜곡될 수 있는 게 한국사회다.

2009년 PD수첩에도 소개된 '개인의 의리와 공익과의 딜레마 실험' 입니다. 전세계 유명CEO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미국, 스위스 등은 94%가 사실대로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26%에 불과했습니다. , 2017년 OECD 35개 국 중 한국의 부정부패인식지수는 29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불이익을 알면서도 왜곡된 진실에 맞서 공익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공익제보자라고 부릅니다. 아름다운재단은 우리 사회에서 어쩌다슈퍼맨이 된 공익제보자들을 위한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지키고자 했던 어쩌다 슈퍼맨들을 위해 여러분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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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으로 무려 100명의 환자가 C형 간염에 걸린 사실을 신고한 두 명의 간호조무사가 있습니다. 이 두 명의 공익제보자 덕분에 의료법이 개정되고 C형 간염의 체계적인 관리와 대책이 마련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간호조무사는 병원의 회유와 협박을 받고 신분이 노출돼 결국 권고사직을 당하였습니다.

사례2. 장애인 거주시설의 횡령과 폭행을 제보한 선생님이 있습니다. 이 제보로 시설은 폐쇄되었고, 관련자는 형사고발, 재단 임원은 해임었습니다 한 선생님의 용기로 장애인 인권침해가 막아졌습니다. 선생님은 해고되었고, 부당해고 판결로 복직되었지만 직장 내 따돌림, 근무 차별 등 보복 조치를 당했습니다.

어디선가 나타나 생명을 구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영웅이 있습니다. 바로 슈퍼맨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슈퍼맨이 있습니다. 물론 어떤 슈퍼맨은 자기도 원치않게 어쩌쩌다가 슈퍼맨이 되어버린 어쩌다 슈퍼맨도 있습니다. 그 슈퍼맨은 바로 공익제보자 입니다

하지만 어쩌다 슈퍼맨이 되어야 했던 그들에게 세상은 따듯하지 않았습니다. 왜 공익을 위한 일은 삶을 담보로 해야할까요? 당신이 전하는 응원 한 마디가 평범함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슈퍼맨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누구라도 불의를 맞닥뜨렸을 때, 주저없이 용기 낼 수 있는 세상

아름다운재단은 공익을 위한 선택이 삶을 담보로 하지 않도록 공익제보자와 공익활동가를 지원하는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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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오늘(10월 15일), 동물의 기본적 권리를 인정하고자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약 2천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날 선포된 세계동물권선언은 ‘생명으로서 모든 종이 동등한 기본적 권리를 가지며 인간은 동물의 한 종으로서 다른 동물을 멸종시키거나 비윤리적으로 착취하는 등 다른 동물의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 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약 40년이 지났습니다. 2017 대한민국에서 동물의 권리는 어느 정도일까요?


헌법에 동물권 과연 넣을 수 있을까? 






(사)동물보호단체 카라는 15일 국회 개헌발언대에서 “오늘은 내가 동물 대변인, 나의 목소리를 들어줘!” 라는 주제의 기자회견을 개최해 헌법에 동물권을 명시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더불어 민주당 김한정 국회의원은 이번 20대 국회에서 동불보호법 개정으로 동물권에 큰 진전이 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지난 1월 국회를 통과한 동물보호법은 ▲동물 학대 등에 대한 처벌 강화 ▲강아지 공장과 같은 비윤리적 사육에 대한 법적 규제 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한정 의원은 여전히 ‘동물복지법’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11월 개헌 논의가 본격화 되면 생명권 존중과 동물의 권리를 보장하는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오리 복장으로 나타난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기본권으로서 동물권을 강조했습니다. 기존의 기본권 논의가 남성 중심에서 여성, 아동, 노인 등으로 확산되어 온 만큼. 이제는 동물에게 미쳐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이미 40년 전에 세계동물권선언을 통해 동물의 권리를 강조한 만큼 이번 개헌 과정에는 동물권 명시와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못박아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정미 의원 역시 동물은 물건이 아니라는 점을 명시한 민법을 발의했지만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동불 대변인!



A4용지보다 작은 철창에 갇혀 매일매일 달걀을 낳지만 한 번도 내 아이들을 본 적은 없는 닭, 가로 60cm 세로 210cm로 몸을 좌우로 돌릴 수도 없는 좁은 쇠철창에 갇혀 임신과 출산만을 반복하는 돼지, 강아지공장에서 태어나 조금 자라면 버러지거나 불법 식용 농장에 끌려가는 개, 편견과 혐오에 괴롭힘 당하는 고양이, 하루 100km를 헤엄치지만 좁은 수족관에 갇혀 있는 고래, 마찬가지로 체험동물원에서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담하는 오랑우탄, 사람들의 욕심으로 10년 동안 갇혀서 쓸개즙 채취만을 위해 사육되는 곰, 동물실험의 90%를 차지하며 작년에 무려 287만 마리가 실험으로 쓰인 쥐, 밀렵과 로드킬에 희생된 고라니, 유해동물이라는 인간의 기준으로 인해 차별받는 비둘기 등...


녹색연합,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이, 바꿈세상을바꾸는꿈, 한국고양이보호협회, 핫핑크돌핀스, PNR, 동물의권리를옹호하는변호사들, 고등학생과 대학생 등은 각자 동물 대변인이 되어 헌법에 동물권 보호를 강조했습니다. 



왜 국가가 동물보호의 의무를 가져야할까요? 동물의 권리는 왜 보장되어야할까요? 개헌을 위한 동물권 행동은 그 답으로 세계 동물권 선언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답했습니다. “인간이 동물을 존중하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존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울러 동물의 권리를 존중하는 사회에 대한 지향은 비단 비인간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 동물을 포함,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된다고 강조하며 헌법에 동물권 포함을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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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꿈 청년네트워크 3기 '글쓰기모임'이 3번째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짝짝)

8월23일 저녁, 서울시청에서 진행된 이날 강의에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진격의 대학> 등
우리 시대 청년에 대해 많은 저서를 쓰신 사회학자입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굳은 날씨 때문인지 결석하신 분들도 많았지만,
금붕어도 산책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습기를 뚫고 
강의장에 모여주신 분들은 모두 열심히 집중해 주셨습니다.

오찬호 박사는 다른 때와 다르게, 이번 강의는 '앉아서' 진행하겠다고 말씀하셨어요.

다른 강의에서는 본인의 연구 내용을 토대로 한 '주장'과 자신의 시각이 있었지만
글쓰기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는데요.

사회를 관찰하는 비판적인 시각이 글쓰기를 대하는 
오 박사의 태도에서도 풍겨나오는 듯 했습니다.

이날 오찬호 박사가 나눠주신 글쓰기 '팁'(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지만)!


"잘 쓴 글이라는 '전형'에 갇히지 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아쉽게도 '글쓰기모임'이 준비하는 공개 강연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오는 9월부터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가기로 했기 때문인데요.

청년의 목소리를 담은 진솔한 글들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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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두(청년문화포럼)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e스포츠 종주국이다. e스포츠 흥행의 시작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등장하면서부터 한국은 ‘e스포츠 열풍’에 빠졌다. 물론 e스포츠의 열풍은 당시 IT 산업 육성을 목표로 하던 김대중 정부의 영향도 크게 한몫했지만 어찌 됐든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빼놓고 e스포츠를 논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게임의 역사는 스타크래프트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나뉜다는 이야기가 국민들 사이에서는 기정사실화되어 있으니 말이다. IT 산업의 발전과 동시에 성장해온 e스포츠 문화 덕분에 청소년들은 너도나도 눈치를 보지않고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채 ‘e스포츠 신드롬’을 불러왔으니 말이다.


스타크래프트로부터 시작된 e스포츠 열풍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지면서 ‘프로게이머’라는 새로운 직업까지 탄생하였고, 심지어 케이블 방송까지 진출하게 되자 일부 프로게이머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릴 정도로 영향력이 생겨났다. 이런 변화덕에 IMF 이후 우리나라는 1조 원이 넘는 산업 발전과 10만 명이 넘는 고용 창출까지 달성해내며 국가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이렇게 거침없이 성장해온 e스포츠 문화에도 암흑기는 존재했다. 야심 차게 등장했던 스타크래프트2의 부진과 함께 프로게이머들의 승부조작, 인성 논란, 정부의 과도한 게임 규제,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의 게임에 대한 인식 개선 불가 등의 여러 이유로 인기가 시들기 시작하던 e스포츠는 스타크래프트1의 종말과 함께 엄청난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기업들은 e스포츠에서 하나둘씩 발을 빼기 시작하였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프로게임단도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가고 있었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질 줄만 알았다.


다행히 리그오브레전드의 흥행과 함께 e스포츠는 다시 한 번 부활의 날갯짓을 펼칠 수 있었다. 한 번의 심각한 위기를 겪었던 e스포츠 문화는 더욱 견고하고 단단해진 채 세계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e스포츠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진 채 세계 대회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는 짜릿함을 느끼는 기쁨도 잠시, 그 행복마저도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 했다.


한국이 e스포츠를 대하는 소극적인 태도에 비해 중국은 매우 과감한 투자를 보이는 탓에 흐름이 서서히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기준, 중국의 e스포츠 이용자 수는 무려 1억 7,0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17년도에는 일부 고등직업학교 신규 학과 목록에 ‘e스포츠운동과관리’가 포함되었으며, 중국 국가체육총국은 ‘프로게이머등록제’를 도입하여 정식 종목으로 추진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중국 문화부에 따르면 17년도 기준 시장 규모가 약 8조 7,000억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하는 걸 보면 확실히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게 분명하다.


이는 e스포츠를 홀대하고 있는 한국과 비교하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이를 우려해온 수많은 학자들이 노력을 쏟아부으며 ‘e스포츠 정식 스포츠화’를 진행하려고 했으나 단순한 컴퓨터 오락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는 일부 국민들과 그러한 여론을 조성하고 있는 일부 정치인 탓에 그마저도 쉽사리 진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둑과 체스가 정식 스포츠로 인정되면서부터 e스포츠 종사자와 지지자들도 작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신체활동을 중요시하는 게 스포츠다’라는 게 국민 대다수의 인식인데 바둑이나 체스도 신체활동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e스포츠의 종주국을 자부하는 대한민국이 정작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쉽사리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정부의 과도한 게임 규제로 인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보인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내세우며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 일부 정치인들에게는 당연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국민들에게 여전히 ‘게임은 사회악’이라 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e스포츠가 정식 스포츠로 인정받게 된다면 그들의 목소리와 입지가 눈 녹듯 사라질 것이란 것은 불 보듯 뻔한 사실 아니겠는가. 이렇듯 우리나라 정부와 기성세대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탓에 오히려 민간에서 '게임에 대한 인식 개선'과 'e스포츠 정식 스포츠화' 그리고 '중국에 대한 소심한 반항'을 열심히 하는 중이다.


실제로 과거 MBC 게임 히어로 출신 선수였던 서경종 대표는 현재 '콩두컴퍼니'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프로게이머 출신 선수들의 노후 복지에 힘쓰며 e스포츠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아직까지도 스타크래프트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국민들 앞에서 멋진 경기를 펼칠 수 있는 것도 그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이다. 이외에도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e스포츠를 살리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민간의 노력을 절대 부정해서도, 외면해서도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 확실한 것은 항상 시대의 흐름을 알고 그에 맞게 움직이는 중국이 아무런 이유 없이 e스포츠를 스포츠화 시키며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는 게 절대 아닐 것이다. 이는 심척동자가 모두 아는 사실인데 정작 e스포츠 종주국을 외치고 있는 우리나라만 천하태평인 거 같다. 우리 정부는 심상치 않은 이러한 중국의 태도를 신중하고 침착하게 지켜봐야 한다. 중국으로 대한민국의 인재들을 떠나보내고 세계 대회에서 그들과 서로 맞대결을 펼치는 게 우리가 바라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결국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세계 대회에서 우리 민족끼리 서로 다른 나라의 국기를 흔들며 경쟁을 하는 모습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 소중한 자원인 대한민국의 유능한 선수들이 국내에서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으며 전 세계에 태극기를 휘날리는 그날을 기대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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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컴퓨터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2010년 새로운 10년을 맞이하면서 컴퓨터는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으로 소형화가 되어 대중들에게 1인1컴퓨터 시대를 열어주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 속에 컴퓨터는 여러 가지의 문제점이 재기되었는데 그 중 가장 화두가 되는 것이 ‘컴퓨터게임’이다.


보통 컴퓨터게임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탄생 전 후로 생각을 한다. 지금은 많이 없어져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90년대 유행했던 집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타할아버지가 주었던 팩게임, 돼지저금통을 갈라서 동전을 넣어서 했던 오락실게임이 인류의 첫 컴퓨터게임이자 컴퓨터 게임의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탄생하게 된 게임이 앞에서 언급한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흔히 PC방에서만 접할 수 있는 게임이 컴퓨터게임의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군의 탄생으로 게임을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커리큘럼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전국의 어린이, 청소년들이 게임에 열광하는 사회적 현상이 일어났다. 그 결과 게임의 인식은 점차 퇴폐되어 ‘중독’이라는 꼬리표를 수식어처럼 붙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청소년게임법이나 셧다운법 등등 게임의 중독을 막기위한 여러가지 법안들이 제안되고 통과되었다.


그러나 게임을 꼭 중독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않좋게만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것일까? 오히려 이러한 수식어는 오히려 게임이라는 명제에 대해서 열린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는 게임과 역사의 콜라보가 진행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예로 ‘삼국지 시리즈’ 게임이 있는데 ‘삼국지 시리즈’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실제 삼국지 스토리를 유저가 게임을 통해 삼국지의 역사를 경험 할 수 있는 방식의 게임이다. 즉 게임의 재미요소를 살려서 삼국지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게임의 새로운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시리즈’를 시작으로 게임은 지속적으로 역사 뿐 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노크를 시도 하였고 이러한 시도는 게임과 교육이 결합하기까지에 이르게 된다. 단편적인 예로 흔히 학습지 회사에서 활용하는 쉽고 재밌게 집에서 유아들에게 스스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보조하는 ‘유아용 자기개발 게임’이 있고 더 나아가 기억력 연상 통하여 이를 게임이라는 콘텐츠에 녹아내어 ‘노인 치매예방 게임‘이 있다.


위와 같은 사례를 봤을 때 무조건적으로 ‘게임은 좋지않다’라는 것은 한쪽의 색깔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게임을 한쪽 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봤을때 게임의 대한 값어치는 상상이상의 가치를 부여 할 수 있고 활용도 또한 무궁무진 할 것이다. 따라서 게임을 활용한 여러 플랫폼들을 구축하여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면 인류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할 것으로 보인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컴퓨터는 현대인에게 점점 더 땔래야 땔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그 안에서 게임은 가장 비약적이고 독보적으로 성장하였다. 미국의 심장전문의 로버트 엘리엇(Robert S. Eliot)의 저서인 "스트레스에서 건강으로 : 마음의 짐을 덜고 건강한 삶을 사는 법"에서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문구를 적었는데 어차피 안고가야 되는 것이라면 배척하기 보다는 그 활용도를 면밀히 파악해보고 더 유용하게 활용 하고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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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훈


이 질문은 많은 뉴스에서 딱히 뉴스 소재거리가 없을 때나오는 Best 3 안에 들어가는 항목이다. 폭력적인 게임이 살인, 폭행 등 각종 사회악을 만들어 내는 것에 주요인 이라고 하고 또한 게임 하는 것을 안 좋게 바라보는 시선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게임의 폭력성을 발표하는 내용을 뉴스 기사가 나올 때마다 무슨 이상한 실험 결과를 내밀고 심지어 한 한국의 방송 매체에서는 PC방의 전원을 내려 모든 컴퓨터가 꺼지게 해서 사람들을 화나게 해놓고 게임의 폭력성이라고 보여주는 사례까지 있을 정도로 게임과 폭력성의 관계는 현제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다. 그저 매체에서 게임은 나빠요 하지마세요 라고 하도 떠들어대니 아 나쁘겠네. 내 아이는 시키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떠들어봤자 증거를 내밀지 않으면 안 믿을 사람들이 넘쳐 나는 세상이니 일단 먼저 실질적인 데이터로 인증을 해보겠다.

위 사진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게임 판매량과 범죄율의 상관관계이다. 여기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게임 판매량은 점차적으로 증가했으나 범죄율은 오히려 낮아짐을 확인 할 수 있다. 폭력적인 게임 판매율과 범죄율의 차이 같은 사례들은 매년 생겨나는데 대표적인 예시로는 GTA 5 의 발매가 있다. GTA 시리즈는 ‘Grand Thief Auto'(차도둑) 이라는 이름답게 각종 범죄와 마약 등을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게임이다. 그리고 최신작으로는 GTA 5가 있는데 지금까지 대량 7000만장의 판매량을 올린 최고의 게임 중 하나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잔혹하고 매우 폭력적인 GTA 5를 무려 7000만이라는 사람이 사갔으니 잠재적인 범죄자는 7000만 명이 되는 것인가 라고 했을 때 맞다고 한다면 아마 이 지구에서 잠재적 범죄자가 아닌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좀더 대중적인 예시로는 오버워치가 있다. 망치를 휘두르고 총을 쏘고 활을 쏘며 칼로 베는 게임인 오버워치는 당연히 폭력적인 게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오버워치가 나왔고 인기를 끈다고 해서 갑자기 범죄율이 급상승 했나 라고 보았을 때 단연코 아니라는 대답이 나온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폭력적인 게임과 범죄와는 상관이 없다고 나오는 것이다.

이렇듯 최근까지도 이렇게 게임과 폭력적인 범죄자의 연관성은 거의 없다고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선은 좋지 않다. 당장에 부모님들이 걱정 하시는 건 자식들이 폭력적인 게임만을 하니깐 폭력적이 되어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까 라는 불 확신이다. 이런 걱정을 만드는 언론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와 이와 같은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고 있는 정부의 하위 기관들은 반성해야 한다.

폭럭적인 게임은 나쁜 게 아니다. 게임이란 많은 디렉터들과 많은 프로그래머들이 그 하나를 위해 노력해내 일구어낸 결실이고 사람들을 즐겁게 혹은 재밌게 만들어 주기 위함이 게임의 기본 목적이다. 같은 게임을 했어도 누구는 범죄자가 되고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해소해 자신의 삶의 밑거름이 되어 준다. 결론은 언제나 하나지만 다들 인정을 안 해주니 이렇게라도 써본다.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지 언제나 폭력적인 게임이 문제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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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연


대한민국 국민 8명 중 한 명은(5천만명 중 618만명) 4대중독 중 하나에 중독되어있다는 눈길을 끄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중독포럼 中). 여기서 말하는 4대중독에는 알코올, 도박, 마약과 함께 인터넷게임이 포함된다. 필자는 심각한 건강문제를 야기시키는 담배도 아닌, 성범죄자들 50%가 가진 성 중독도 아닌 인터넷게임이 왜 4대중독에 포함되어있는지 그 기준에 의구심이 든다.


중독은 substance abuse(물질중독)과 behavior addiction(행위중독)으로 나누어지는데 알코올과 마약은 물질중독에, 도박과 인터넷게임은 행위중독으로 포함된다. 그렇다면 도박과 인터넷이 비슷한 수준의 중독위험행위라는 것일까. 


연구에 따르면 알코올 중독자의 뇌와 게임 중독자의 뇌의 MRI 사진이 거의 비슷하다는 결과가 있다(Ko et al, 2008). 도파민과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 전달물질 시스템이 게임중독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이 신경전달물질 시스템들은 취미생활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도 활발하게 작용한다는 것.


과유불급(過猶不及). 무엇이든 지나치면 해가 된다. 이를테면 신진대사를 높이고 건강을 지켜주는 운동도 지나치면 운동중독의 위험이 있다. 그러나 운동중독자들 때문에 운동이 중독위험군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게임이 뇌 기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지나쳤을 때 ‘게임과몰입’의 위험이 있는 것이다. 소수 고위험군에 있는 게임중독자들 때문에 게임자체를 사회악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내가 게임을 하고 싶어서 그랬겠어? 게임 안에 사람들이 있잖아!’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유명한 패륜아들 짤 속 대화내용이다. 게임만 하는 아들에게 화가 난 엄마가 공유기를 뽑아버리자 엄마에게 위에 말을 하면서 화를 내고 TV를 던져버린다. EBS ‘달라졌어요-게임만하는 아들, 포기한 아빠’ 편에서 이 짤방만 보면 인터넷 중독에 빠진 패륜아들의 문제로 보이겠지만, 사실 방송 전체를 보면 이 가족에서 정상인은 아들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가부장적인 아빠와 매번 아들을 무시하는 엄마의 모습을 상담전문가는 지적한다. 부모의 무관심과 가족 간의 대화부족이 아들을 게임과몰입자로 만든건 아닐까


명확한 기준 없이 몇 개의 인터넷중독진단항목만으로 중독자로 단정된 많은 ‘중독자’들은 이 각박하고 단절된 사회에서 다른 소통구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시대가 더 변화하면 사람들은 게임이 아닌 다른 ‘것’을 찾게 될 것이고 새로운 제 3의 무언가가 또 중독물질로 규정될 것이다. (실제로 요즘 떠오르고 있는 것은 스마트폰 중독이다) 게임이 문제가 아니다. 대화 없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사회가 게임에 준 누명은 또 다른 것으로 옮겨갈 것이고 우리는 이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 누명 쓴 무언가를 또 질책하게 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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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이


어떤 또래 활동가가 그랬다. 단체에서 먹거리 운동을 하면서도 퇴근하면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환경권을 박탈당한 기분’이라고. 월급도 적고 시간도 없어 어디에서 온 지도 모르는 재료로 만든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는 환경운동가라니, 그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꼭 시민단체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88만원 세대’라는 별명을 달고 사회에 나온 청년들에겐 익숙한 풍경이다. 


내가 처음 환경권에 대해 생각한 순간은 밥솥 같은 원룸에서 여름을 버텼을 때이다. 서울에 처음 올라와 뭣도 모르고 하루 만에 계약한 방이었다. 대부분 불법으로 지어진 옥탑을 선택한 이유는 조금 더 싸고, 조금 더 넓었기 때문이었다. 내 한 몸 누이면 끝나는 3-4평짜리 방보다는 조금 더 사람 같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반지하를 택한 청년들 역시 소음과 매연에 시달린다. 우리는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이고, 부모세대인 건물주의 배가 부를수록 삼각김밥으로 배를 채우는 날들이 많아지는 청년세대이다.


환경권, 인간이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쾌적하고 좋은 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 좁은 의미의 건강과 주거에 대한 권리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데 주위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 개념으로 미래세대를 위한 권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청년들은, 미래세대는 환경권을 박탈당했다. 


매일 집을 나서기 전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해야 하지만 정부의 ‘미세먼지 특별 종합대책’에는 대기업의 석탄발전소 ‘건설’ 계획이 들어있다. 1982년부터 가동되어 2012년 수명이 끝난 경주의 월성원전1호기는 부지 지진계도 없지만 수명 연장되었다. 난 고향집에 내려갔다 겪은 지진, 그 순간의 불안을 잊지 못한다. 계란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다. 2003년부터 13년 째 반복되는 AI사태지만 제대로 된 방역시스템이나 공장식 축산에 대한 개선 의지는 없다. 


지난 4월, 지구별의 유일한 모래강이라 불리는 내성천을 다녀왔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강의 모래를 밟으며 수달의 흔적을 찾았고, 흰목물떼새의 알을 보았다. 그 뒤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내성천 상류의 영주댐은 시험 담수를 했고, 겨울에는 그렇게 갇혀있던 녹조와 구정물을 방류했다. 1급수 맑은 물로 낙동강을 희석시키던 내성천에 탁수가 흐르고, 모래톱 위로 풀이 자라는 육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영주댐이 담수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미래세대는 내성천을 거대한 풀밭으로 보고 자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미래세대에게 빚을 지며산다. 미래세대도 누려야할 자원을 끌어다 쓰며 산다. 내 고장의 발전을 위해서,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 누군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 권력과 돈 때문에 기득권을 가진 기성세대는 환경권이라는 것을 철저히 배제했다. 무관심과 생명을 경시하는 마음으로 한 선택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에는 몇 십 배의 시간과 노력, 비용이 필요하며 모두 청년세대를 포함한 미래세대가 짊어져야한다. 우리는 광우병 사태와 4대강 사업,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겪으며 자랐다. 우리는 환경권을 박탈당했지만 또 다른 미래세대를 위해 생명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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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호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부터 그 나름의 선택을 한다. 그리고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로 나가는 순간, 앞으로의 결정들이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하기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를 미친 듯이 엿보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남성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도 같을 것이다. 남성을 결정한 것은 당신이 아니지만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로 한 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당신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로 선택한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이 글은 나의 소중하고 특별한 계기들로 인해 페미니즘을 접한 그 순간의 이야기이다. 반대로 말하면, 계기 없이는 이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나의 찌질한 이야기이자, 어쩌면 당신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항상 이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친구 두 명이 있었다. 스물의 그들은 몰랐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나타나는 차별들에 점점 숨을 가빠했다. 여성의 역할을 요구했고 여성으로 살아가길 강요받았다. 그들이 느낀 주변의 눈빛은 이마트에 높이 쌓인 예쁘장한 인형들을 고를 때의 그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들은 상자 안에 담겨 비닐 시트지 너머의 자신들을 고르고 있는 행복해 하는 눈들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스물의 나에게 ‘너의 눈빛도 똑같다’고 말했다. 나는 듣기 싫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몸서리치게 노력한 스무 해 남짓한 나의 인생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세상을 삐딱하게도 바라보고 이런 저런 활동들도 해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의 눈빛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얘기해주었다.


모든 것에 지쳤을 때쯤 문득 그들이 나에게 왜 저런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내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해보기로 했다. 그들과 함께 길을 걸을 때면 사람들은 그들을 구석구석 훑어본 뒤 나를 쳐다본다. 묻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다니고 있는 나의 자격과 능력을. 그런 시선에 나도 그 사람을 쳐다보면 시선을 피한다. 나의 눈빛은 맞받아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훑어본 그 사람과 같은 눈빛이다.


주변은 나에게 물었다. 그들이 너와 연인 관계인지, 친구 관계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 주변은 그들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인형들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을 하나씩,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주변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들을 단지 나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나는 불편했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점점 깨달았다. 주변이 했던 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생각하고 했던 말들이었음을. 산더미 같이 쌓인 인형들을 웃으며 고르고 있는, 시트지에 뿌옇게 입김이 서릴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바라보던 사람이 나였음을. 그들은 항상 이런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숨을 가빠하며 시트지를 손으로 밀쳐내고 있었다. 묻어난 그 얼룩진 손자국 하나하나에 분노와 슬픔, 그리고 살고자 하는 욕망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입김으로 보이지 않게 덮어버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입김 위에 나의 숨을 포개지 않기로 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로 살기 선택한 순간은 이렇게 축축했다.


선택 이후의 세상은 상자로 가득했다. 집, 학교, 직장에는 모두 켜켜이 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모두 얼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저 얼룩은 아이와 야근에 시달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고, 저 얼룩은 오늘도 무사하길 바라며 막차 시간을 다급하게 확인하는 사람의 것이었고, 저 얼룩은 사람들의 시선에 지쳐 지하철에서 조용히 마스크를 꺼내 쓰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우리가 상자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순간들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상자가 아닌 당신 나름대로의 것으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본 그것의 어딘가에는 아픔과 분노가 묻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가족을 통해, 친구를 통해, 뉴스를 통해, 그 가슴 아픈 순간이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 그 얼룩들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와 같은 생물학적으로 남자, 특히 이성애자라면 우리는 젠더 위계에서 가장 최상위층을 차지하고 있는 권력자이다. 동시에 우리는 페미니즘이라는 빨간약을 삼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몸서리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해시태그 운동에 참여했는가. 아니면 스스로의 남성성에 괴로워하며 페미니스트의 자격과 의무를 이리저리 따져보았는가. 당신의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당신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데이비드 J. 커헤인(David J. Kahane)은 「남성 여성주의라는 모순 어법」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려 하는, 혹은 현재 하고 있는 남성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허식가(the poseur)이다. 그는 페미니즘 이론을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 실천하게 되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부장적 환경과 직장 상사나 친구와의 관계 등에서 갈등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성인 것과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며 단지 페미니스트로 인지되길 바랄 뿐이다. 따라서 자아성찰에 따른 고통은 없다.


두 번째는 내부자(the insider)이다. 그는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실천도 하며 책임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잘 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가부장제와 같은 페미니즘이 말하는 해악들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하지만 그가 이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신의 자부심으로 삼기 위함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고민이 자아성찰로 이어지지 않는다. 주변에서도 지지를 한다. 자신의 애인이, 동료가, 친구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변화한다는데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는가.


세 번째는 인본주의(humanism)자이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가부장제의 이익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부장제로부터 어떻게 억압을 받는지 잘 알고 있다. 인본주의자들이 집중하는 것은 바로 가부장제로부터의 억압 부분이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남성이 되길 바라며, 여성적 특성과 더욱 관계 맺기를 바라지만 초점은 남성들 간의 경쟁 약화,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 증가와 같은 남성들의 복지에 있다. 따라서 이들의 관심은 가부장제의 폐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네 번째는 자기 학대자(the self-flagellator)이다. 그는 상대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깊은 지식과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성차별적 충동, 과거에 현재에 대한 죄책감과 끊임없이 싸운다.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런 과도한 자기성찰은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발전적일 수 없다. 자기 비하에 몰입하면 할수록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에 머뭇거리게 되고,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자기 학대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본주의자 또는 내부자로 옅어지거나 아예 페미니즘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도 한다.


커헤인이 제시한 이 네 가지 유형이 전부인 것도, 남성 페미니스트가 반드시 이 네 가지 유형 중 하나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분류가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자기 성찰과 이론, 실천을 동시에, 적절한 수준으로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두려움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인 것 같다.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면 할수록 페미니즘이 비판하고 있는, 타파해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개안 직후 자연스럽게 가장 먼저 한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행동과 언어, 살아온 과정에 대한 재해석이었다. 태어나 처음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큰 것인지 느끼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책임을 물었다. 나는 자기 학대자였다. 당신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즘, 그 안과 밖의 어려움


나의 경우 이전까지의 나에 대한 재해석과 이로 인한 태생적 한계에 대한 내적 집중은 동시에 외적으로의 어려움을 가져왔다. 나의 주변 환경에서의 어려움은 페미니즘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페미니즘을 모르거나 이에 긍정적이지 않은 사람들, 혹은 모르는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해내는 사람들이다. 나는 여성인 친구가 많은 편인데, 이는 페이스북의 이성애자 연애 관련 페이지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 주제이다. ‘절대 이성 간에는 친구가 될 수 없으니 자신의 애인이 이성 친구와 자주 놀지 않게 관리하라’는 것이다. 나의 남성 친구들도 이 문제에 대해 궁금해 했다. 이것은 ‘이성은 잠재적 연애 대상’이라는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나타낸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성 페미니스트란 잠재적 연애 대상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습게도 이 관점은 국립국어원도 다르지 않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페미니스트’를 검색해보면, 페미니스트를 “「명사」 「1」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2」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하고 있는 자기성찰의 의도와 그 목적은 여자에게 호감을 얻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현실에서 실제로 여성과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보며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이 사람은 게이가 아닐까’하는 소수자 혐오이다. 남자가 여자와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게이만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하는 인식을 나타낸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소수자 혐오가 결합된 이 무지와 폭력의 끝은 우리의 말문을 막히게 한다. 이것이 페미니즘을 모르는 바깥에서의 문제라면 페미니즘 안쪽에서의 문제는 결이 다르지만 더 중요하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해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맨스플레인(mansplain)이다.


가부장제의 폐해에 대하여, 성적 차별에 대하여 아무리 공부를 하더라도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적 구조와 그것의 부분이자 재생하는 주체로서 나는, 이러한 관성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나의 페미니즘 지식과 실천 경험에 빗대어 자신감 있게 내딛은 것이 내가 가진 권력과 결합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페미니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또한 나는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을 말할 때 ‘이것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닌 남자에게도 가치 있는 일이다.’, ‘여성이 살기 좋은 세상이 우리도 살기 좋은 세상이다.’ 등과 같이 이것이 남성들을 차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운동이 결국 남성들의 이익과 복지 향상을 위한 것이라면 연대할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내려놓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온다는 것이다. 당신의 페미니스트 공동체와 그 연대는 어떠한가.


남자가 뱉어내는 페미니즘


고민의 연장으로 무엇보다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남성이 무섭다는, 남성혐오에 걸릴 것 같다고 고백하는 여성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슬픈 이유는 이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항해 우리 주변의 남성들이 단순히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죽음과 억울함의 대비는 우리 사회에서 남자답고자 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죽음


몰래 카메라가 있을까 화장실 여기저기를 살펴보는 여성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에 떠는 여성

테러를 당할까 이별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

아기를 출산하는 순간 해고되어 재취업되지 않는 경력단절 여성

자신의 꿈을 이루려 일과 육아를 모두 떠안다 과로로 떠난 여성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었다고 해고된 여성

허락 받지 못한 가짜 페미니즘을 하는 메갈리아

가임기여서 지도에 표시된 여성

여자라서 죽은 여성


억울함


남자만 군대 가서 억울한 남성

남자만 무거운 것을 들어서 억울한 남성

여자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비싼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운전하는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자신보다 똑똑한 것이 싫은 남성

여자가 직장 상사인 것이 싫은 남성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라 싫은 남성

성평등주의가 아닌 여성주의라 싫은 남성

‘나도 여자가 많은 집에서 태어난’ 남성

여성들이 자신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아서 싫은 남성

여성과 남성이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고 1인 시위하는 남성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닌 계급의 문제라며 조개 무덤을 쌓는 남성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억울한 남성


그리고 이 죽음에 대비한 나의 페미니즘 역사는 남자들의 억울함만큼의 보잘 것 없음을 자랑한다. 내가 페미니즘을 하고자 한 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하고자 한 이유,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유는 그저 ‘살아있고자’ 함이었다. 나는 죽음에 대비해 불편함과 억울함을 뱉어내듯이 ‘인간’을 뱉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더 나은 인간이기 위해,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기에 그들을 ‘보호’하고자 허겁지겁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가 가지고 있는 바로 그 권력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그것을 통해 보호하고자 함은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었다.


당신이 만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커헤인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윤리적으로 불완전하고 복합적인 존재로 기꺼이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둘은 비판에 대해 개방적일 것과 지속적으로 자아 성찰을 하라는 것이다. 셋은 남성 활동가들과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동시에 ‘한남’과 ‘유니콘’의 사이, 분노와 용서의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방에 앉아 울고만 있지 말자. 칭찬 받으려 하지 말자. 페미니즘으로 치장하지 말자. 분노와 용서 사이의 그 어딘가를 뚫고 나가자. 내가 만난 페미니즘은 무엇이 가장 옳은 길인지 알려주는 것이 아닌, 무엇이 옳지 않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한계를 넘기 위해 당신이 만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다섯 살, 아니 사실 태어날 때부터 내 존재와 생명을 위협하는 젠더폭력을 숱하게 겪어야 했다. 남존여비 가정에서 태어났고 여아낙태 위험과 부계폭력에 처해 변변찮은 도움구할 곳 하나 없이 버텨왔다. 5살적에는 납치와 강간미수, 8살 때는 바지와 속옷을 벗고 발기된 성기로 쫒아오던 아저씨도 있었다. 당구채로 어떤 날은 듀오백 의자로 흠씬 두들겨 맞으며 아버지의 가부장적 참교육을 버텨내던 날들, 아버지의 자해로 선혈이 낭자하던 내 방 침대. 이별 통보에 염산을 들고 숨어있겠다던 전 남자친구 그리고 한강 투신 협박. 


어둡고 지독한 이야기, 토해내는 처절한 언어, 사람들이 기피하는 부정적인 경험들로 내 삶의 역사는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스스로를 미친 듯이 분리하고 싶었다. 유쾌하지 않은 ‘비정상적’ 삶에서 탈출하여 유쾌한 나만의 '정상'범주를 꾸리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 피해경험은 사소한 것, 잊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래야 나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전까지 나의 피해경험은 내가 지독하게 운이 나빠서 우연하고도 특이하게 겪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오직 개인의 경험으로 덮어버릴 피해와 상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비슷한 경험들, 그로인해 삶을 이어가는 것 조차 힘들어하는 사람들, 혹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 앞에서 나의 착각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나의 역사였지만 오직 개인의 경험으로 덮어버릴 피해와 상처들이 아니었다. 강남역 사건이 터지고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며 두려움과 분노에 눈물을 훔치며 모이는 여성들은 그들 자체로 젠더피해의 산증인들이었다. 그 삶의 경험으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그 심정으로 거리에 나온 것이었다. 나와 같은 상처를 위로하며 곧 자신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발화하기를 막 시작했다. 강남역 사건이 페미니즘 계보에 중요한 지점이 되는 이유는 그것에 있다. 시대 여성들이 발언하기를 시작했다는 것. 그동안 삶에서 겪어온 젠더피해에 대해 우리는 묵인 “당했다.” 가해자는 자연적인 본능을 억눌러야하는 현자가 단순 실수를 저지른 것이 되는데 반해 피해자는 상황에 있어 조금의 흠결도 있어서는 안 되는 완전무결한 순결성을 지녀야만 비로소 시혜적인 피해자로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왜 여성의 피해사실과 그로인한 사회적 약자성을 젠더권력을 가진 남성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가? 왜 이 사회에서 젠더피해를 말하는 것은 유별나고 예민한 것이 되는가? 여성이기 때문에 거쳐야했던 이 지독한 일상이 많은 누군가들에게는 고백이 되고 충격이 되고 새삼스러운 일이 되고 균열이 되고 불쾌함이 된다. 과소산정 된 피해의 통계치는 그 숫자마저 지워지기 일쑤지만 그 단순 산정되는 숫자 너머에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존재한다. 강남역에 모인 여성들은 남성과 공존하는 일상생활에서는 쉽게 생각하고 발화할 수 없었던 서로의 젠더폭력 피해경험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피해경험을 말하지 않으려고 했던 피해자에 대한 스스로의 코르셋을 벗고 행동할 수 있었다. 


코르셋에 가둔 ‘약자의 권력’


앞서 말했듯 약자의 권리는 피해경험 자체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젠더사회 억압의 유지를 원하는 남성사회는 여성의 피해경험을 쉽게 부정하거나 무시한다.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피해경험을 무시하고 피해경험을 말하기 이전에 피해의 인지 자체를 못하도록 교란시킨다. 무력하고 나약한 약자의 이미지를 규정함으로써 자신들의 남성성을 자성해야 하는 젠더 가해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한다. 


1. 순결한 피해자 코르셋


‘몸가짐, 조신함’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순결함은 모두 성범죄 피해자에게 “원인제공자”의 낙인을 찍어 폭력의 책임을 전가하는 동시에 성범죄 가해자에게 가해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덜어내는 가해자중심 정서이다. 애초에 젠더권력자들이 정해놓은 완전무결한 기준에 합당하는 피해자는 있을 수 없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순결함은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한 터무니없는 장치일 뿐이다. (*꽃뱀논리가 대표적인데, 성범죄의 무고죄 판결이 여타의 다른 범죄와 유사한 2% 수준에 그침에도 젠더폭력의 피해자성을 어떻게든 인정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억압기제로 작용한다.)


피해자에게 원인을 귀결하는 정서에 성범죄 피해자는 스스로를 추스르고 폭력의 원인을 자신으로부터 검열하기에 이른다. 목소리를 내어 신고를 하더라도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가해의 상황이 심각한 것이 현실이다. 피해자는 사회의 부당한 시선과 프레이밍에 차선의 자기방어라도 하기 위해 피해사실 자체를 묵인한다. 밝혀지지 못한 폭력이 주변 곳곳에 산재해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순결함을 강요하는 사회적 정서는 결국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여성들 스스로 예방하고 방어하라는 것이 된다. 흉흉히 들려오는 범죄소식에 젠더약자들은 서로를 조심하자며 밤늦게 다니지 말자며 다독일 뿐이다. 심지어는 남성 애인들의 “어떤 옷을 입지 말라”, “어떤 화장을 해라”하는 말들. 폭력에는 특정 시간과 장소와 피해자의 옷차림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가해자의 강간의지 그 자체에 있을 뿐이다. 성범죄는 근절해야할 것이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조심하는 것인가? 잠재적 범죄자는 없다는데 왜 잠재적 범죄의 대상화가 되어 범죄의 책무를 발생도 전에 부담하고 있는가. 공공연한 젠더폭력과 피해경험은 가히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우리는 잠재적 피해자도 아닌 엄연한 젠더 피해자로 잠재적 범죄의 대상화가 된다. 순결한 피해자 코르셋은 모든 여성의 신체를 성적인 대상임을, 갈취될 수 있는 대상(물건)임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당장 생존의 위협을 받는 여성들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공론을 어떠한 문제의식 없이 내면화하기 쉽다. 일종의 가스라이팅(gaslighting)으로 스스로 현실적인 코르셋을 인지하지 못하고 판단력을 잃게 되어 자신을 지배하는 담론에 휘둘리게 된다. 


2. 순결한 모성애 코르셋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딸로 태어나 남성의 아내로 가정의 어머니로 만들어진다. 가부장사회의 생애주기를 거쳐 만들어진 모성애는 여성의 무한한 희생을 요구한다. 미혼 여성은 개인의 꿈, 욕망, 정체성과 상관없이 신체적인 특징을 꼬집혀 ‘가임기 여성’으로 몰살당한다. 


남성사회는 여성이라면 꼭 수행해야 마땅한 역할이라며, 철저히 무시하고 혐오하면서도 돌봄 노동을 강요한다. 여성의 노동을 아주 저렴하게 착취한다. 만들어진 모성애로 세뇌된 우리의 어머니들은 스스로가 착취를 당하는 것을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존재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돌봄 노동은 반드시 필요로 되는 존엄한 노동이다. 근대화의 과실이 자유시장의 범주에 있었던 남성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탄생과 죽음까지에 여성 돌봄 노동의 착취가 있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의 분담은 유한한 인간 존재를 위해 서로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도 폭력적인 남성성의 해체를 위해서도 분담되어야 할 의무이다.


주변에도 미혼모는 넘쳐나지만 미혼부는 보기 드문 것이 현실이다. 제대로 된 성교육도, 미혼부모가 되었을 때의 어떤 방침과 제대로 된 지원제도도 없는 사회에서 덜컥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책임은 대부분 여성에게 돌아간다. 미혼부에게 양육비를 요구하는 소송 자체가 많지 않은 것은 아이에 대한 일방적인 책임을 모성애라는 미명하에 여성이 조용히 떠안기 때문이다. 미혼부에게 양육비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모성애의 양심으로 지워버린다. 양육비를 요구해도 대부분의 미혼부가 지급할 경제력이 없는 것이 실상이긴 하나 많은 미혼모가 최저임금의 벌이로 지원 없이 혼자 아이를 키워나간다. 신체적 순결함에 위배된다는 미혼모에 대한 징벌적 시선을 모성애의 부담과 함께 떠안는다.


3. 친절한 페미니스트 코르셋


페미니즘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참으로도 다채로운 혐오와 코르셋이 펼쳐졌다. 페미니즘을 뜨거운 감자로 만든 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문제되어 왔던 유리천장이나 성범죄보다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고 믿었던 남성들의 인식을 재확인한 충격이 컸다. 분노하고 좌절한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친절함, 피해경험에 대한 상처를 부정당한 경험들, 세상으로부터의 단절감, 자기혐오가 이어졌다. 젠더폭력의 현실에는 그저 안주하던 자들이 내가 페미니즘을 말하기 시작하자 나의 태도를 뒷짐을 지고 지적하며 나의 생각과 언어를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언젠가 나는 평화를 말했고 또 언젠가 나는 계급 갈등도 지적했다. 그들과 희망을 가지고 공유했던 담론들이 페미니즘 앞에서 모두 무너졌다. 그들도 나의 입장에 어떤 충격과 상처를 받았을 수 있겠지만(사실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 대부분이라 짐작한다) 나로서는 나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참혹한 심정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면서 오랜 친구들과도 결별했다. 지독한 스토킹으로 힘들었던 시절(그 스토킹은 6년째 지속되고 있다) 정신적으로 많이 도와줬던 고마운 친구들인데, 친구들의 혐오발언을 견디지 못해 내가 스스로 뛰쳐나오게 되었다. 인연이 애석하지만 내가 미안할 것이 없듯 그들도 페미니즘을 알지 않고서야 영원히 미안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친구는 내가 정상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페미니즘)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고, 어떤 친구들은 당장의 부계폭력에 처한 내게 무턱대고 그래도 아버지를 미워해선 안 된다고 했다. 약자의 권리를 찾아가자는 이 글도 그들에게는 피해의식에, 망상에 찬 과격한 글이라고 읽힐 것 같다. 그들에게는 없는 피해가 내게는 있으니 구분되는 의식이 내게 투철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로서는 그렇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의 입맛에 맞는 페미니즘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새로 만나서 기쁘다는 위안은 하지 않겠다. 차별주의자일지라도 내게는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다. 마음 아픈 인간관계의 결별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도 나의 페미니즘은 더욱 필요한 것이다. 


4. 남성성 코르셋 


만들어진 여성성의 코르셋은 아주 정교하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나의 경험과 언어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공부하면서도 나의 무의식적인 코르셋과 남성성에 여전히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특히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나는 자아의 깊은 곳에 트라우마처럼 남성성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성성에 대한 트라우마는 나의 페미니즘 언어를 흐리게 하고 자꾸만 판단을 교란시키려고 한다. 약자의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해체해야 할 나의 마지막 코르셋은 바로 이 공포심일 것이다.


스스로의 권리를 찾아 외쳐야 한다. 


여성은 여느 남성과 같은 인간임에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여성성으로 규정되고 착취당하며 폭력에 처해 진다. 피해자의 발화를 억압하는 남성중심의 '정상'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은 끝없는 자기검열을 한다. 여성성의 '비정상'을 느끼고 자기혐오를 떨쳐내야 한다. 착취가 공공연하여 정당화되는 구조에서 독자적인 존재인 나를 분리해내는 과정이다. 


‘더럽혀진’, ‘발랑까진’ 피해자는 없다. 젠더피해를 밝히고 마땅히 권리를 찾아야할 약자성에 무력하고 나약한, 완벽한 순결성을 요구하는 시선은 약자성을 젠더권력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시혜적 약자성일 뿐이다. 약자성은 여성의 피해경험 자체에서 이미 발생한 것이지 가해자인 기득남성이 인정하느냐 마느냐 검증할 성질의 것이 절대 아니다. 시혜적 약자성은 근본적으로 약자성의 지속을 고질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억압이 깃들어 있으며 여성들의 권리 찾기를 교란시킨다. 우리의 피해경험을 지우고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는 시혜적 약자성에서 떨쳐나 스스로의 권리를, 약자의 권리를 찾아 외쳐야 한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먹고 살기 바빠서 죽으면 안 되는 세상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촛불집회, 5월9일 대선... 

지금 한국 사회는 새로운 미래와 행복한 삶을 향한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바꿈에서 이번에 이야기 할 내용은 ‘국민행복’과 ‘농촌’ 입니다.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뜬구름 같은 이야기 할 것 같다고요? 여기서 우리의 문제 지점은 출발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먹고 살기 바빠서 죽으면 안 되는 세상에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 동안 한국 사회는 오로지 경제성장의 패러다임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물론 놀라울 정도입니다. 흔한 레퍼토리가 있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계 최빈국에서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 가까이 접근했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불행할까요? 

헬조선과 흙수저론가 말해주는 극심한 양극화, 아이를 낳지 않고 높은 자살률이 나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장 패러다임이 가져온 가장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난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는 정말 언제까지 이렇게 먹고 살기 바빠 죽도록 살아야 할까요? 


‘국민총행복’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성장 패러다임이 가져다 준 가장 큰 그림자는 바로 3농(농업,농촌,농민)에 대한 차별과 희생에서 드러납니다. 식량 자급율은 크게 떨어지고 쌀은 남아돌고, 농가의 부채는 늘어나는 등 우리 농업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하나 둘 농촌을 떠나고 농촌은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농촌은 아픕니다. 


그러나 3농 문제를 방치하면 우리는 결코 더불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없습니다. 농촌도 사람이 사는 곳 입니다. 지금까지 농업 패러다임은 경쟁력주의 농정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기존 농업정책은 대한민국 산업성장의 뒤치다꺼리 하는 부수적 역할에 머물러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실패하고 실망감만 주었습니다.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합니다. 바로 ‘국민총행복’에 초점을 맞춘 농정정책입니다. 2011년 UN총회 결의에 따르면 “행복은 인간의 보편적 열망이며 목표. 그러나 국내총생산(GDP)은 그 성질상 그러한 목표를 반영하지 못한다.” 고 밝힌 바 있습니다. 국민총행복은 행복의 총량뿐 아니라 국민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농업은 다기능농업농정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다기능농업농정이란 농촌의 가치를 다원적 가치를 극대화 하여 국민총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의 농업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하고, 쇠퇴해 가는 농촌지역사회를 유지⦁발전 시키며, 고용기회를 창출하고, 국토환경을 보전하고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며, 인간 교육의 장으로서 농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주체인 농⦁어민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중앙집권적 설계농업과 간접지원 방식의 농정정책에서 벗어나야 


우리나라 농정 추진체계는 중앙에서 직접 설계해서 간접 지원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업은 각 지역의 특성이 중요합니다. 제주도에서 귤이 많고, 나주에서 배가 유명하듯 각 지역의 자연과 역사, 문화와 사회 경제적 특성까지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중앙의 설계는 각 지역에 대한 특성을 외면하기 일 수 입니다. 같은 시, 군 단위마저 특성이 다른데 중앙에서 일일이 다 설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농촌에 대한 지원 형식 역시 바뀌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직불제입니다. 많은 농업 선진국들이 농촌에 대한 직접적 지원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직접 지원이 농업의 사회적 기여(서비스) 개선과 안정화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경우 농업예산의 무려 80%를 직불제로 사용합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향후 농업예산 중 직불제 비중을 5년 내 50% 수준으로 확대하고, 이를 위해 농업 재정 전반에 대한 개편이 필요 합니다. 이를 통해 다기능농업 육성과 농가 경영을 안정화해야 합니다. 


또한 지역별 농업의 파트너인 농협에 대한 개혁 역시 필수적 입니다. 현재 농협중앙회를 연합회 체제로 전환하고, 품목농협을 집중 육성해 농촌을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국민총행복농정위원회 대통령직속기구 신설과 헌법 개정


농업・농촌 관련 이슈는 그 특성상 여러 부처에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통합 기획∙조정 부서가 필요합니다. 특히 정책 당국자와 농민과 농촌주민, 도시 소비자, 연구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협치가 중요함으로 대통령이 직접 책임지는 실질적 기획조정기구여야 합니다. 역할 역시 단순 자문기구가 아닌 농정에 대한 총괄기획∙조정과 타부처 관련정책 농촌영향평가 기능을 지닌 실행기구여야 합니다.


헌법 또한 개정해야 합니다. 현행 헌법 123조는 ‘농·어촌의 종합 개발과 중소기업의 보호·육성'에 관한 조항’ 입니다. ① 국가는 농업 및 어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농·어촌종합개발과 그 지원 등 필요한 계획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 ② 국가는 지역간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의무를 진다. ③ 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 ④ 국가는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의 개선에 노력하여 가격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한다. ⑤ 국가는 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하여야 하며, 그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한다.


그러나 현행 헌법에 농업∙농촌의 다원적 기능 발휘와 그 증진을 위한 정책수단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서 예를 든 스위스는 연방헌법 104조와 농업법으로 농업직불제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스위스의 식량자급률은 60%에 이르며, 농가소득안정, 친환경농업 장려, 농식품 안정적 공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헌법 역시 농업∙ 농촌 다원적 기능 발휘와 그 증진을 위한 직불제와 같은 정책수단을 명시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현행 농정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하며 그 방향은 국민총행복농정 추진이라는 것 입니다. 기존 경제성장제일주의, 경쟁력주의농정, 간접지원방식, 중앙집권 농정에서 벗어나 국민총행복으로의 패러다임 전환과 다기능농정, 농민기여 직접지원, 지방분권 자율농정을 통해 도농공생, 농민행복 그리고 더 나아가 국민행복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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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훈


2016년 11월 29일 법제처는, 학교에서 교육 목적의 동물해부실험은 동물 학대가 아니다 라는 결과를 밝혔다. 이유는 “동물실험의 원칙을 지키면서 실험을 한다면 이는 동물 상해 행위나 고의적 동물 살해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였다. 이어서, 동물보호법에서 동물실험은 인류의 복지 증진과 동물 생명의 존엄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생 시절 실험동물학을 배운 적이 있다. 실험동물에 대한 개론과 실습에 관한 수업인데, 개론에서는 실험동물의 정의, 종류, 필요성, 질병, 사육관리, 번식, 윤리, 3R, 외삽 등등 이것저것 많이도 배웠다. 간단히 말자하면, 동물실험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과 그것에 대한 관리를 위주로 배운 것을 기억한다. 중요한건 실습이었다. 실습 대상은 주로 마우스와 랫드다. 실습은 두 가지 파트인 경구투여와 장기적출을 위주로 진행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실습을 간단히 글로 설명하겠다.


첫 번째, 경구투여를 하는데 앞서 보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보정이란 말 그대로 잡는 방법을 말하는데, 꼬리를 새끼손가락으로 말아 잡고, 나머지 손가락으로 마우스의 등가죽을 잡아 고정시키는 것이다. 보정을 하는 이유는 경구투여를 잘 하기 위해서다. 즉, 주사기가 마우스의 식도를 안전하게 지나서 원하는 약물을 투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습을 하는 도중에는 식도가 찢기고 상처 입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두 번째, 장기적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추탈골을 해야 한다. 경추탈골은 마우스의 목을 손가락으로 고정시키고 꼬리를 잡아 당겨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마우스를 코르크 재질로 된 판에 핀셋으로 고정시키고 해부를 해서, 정맥으로부터 채혈을 한 뒤, 각 장기를 적출한다. 실습이 끝나면 마우스의 시체와 장기들은 하얀 봉투에 무심히 버려진다.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실습실 뒤편의 비글 사육장이다. 비글도 역시 실험동물이었다. 비글은 다른 말로 지랄견.. 흔히들 인생이 지루하면 키우라고 하는 견종이다. 지랄견이라 불리는 이유는, 본래 사냥개인 탓에 어마한 활동량과 무시한 성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비글을 실험동물로 사용하기 위해 케이지에 가두어 사육했고, 심지어 성대수술까지 한 상태였다.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그 당시를 떠올려보자면 그냥 전공과목이니까, 친구들이 신청했으니까 강의를 들었던 것 같았다. 무고한 생명을 해치고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생명을 다루는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피를 봐서 불쾌감을 느꼈을 뿐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이 말은, 무의식중에 동물이라는 생명을 도구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경험했던 일들에 맞는 용어가 있다. ‘조건화된 윤리적 맹목성’ 쥐가 먹이라는 보상을 받기 위해 버튼을 누르도록 조건화될 수 있듯이, 사람들 또한 직업적 보상을 받음으로써 동물 실험을 통해 제기되는 윤리적 문제들을 무시하도록 조건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학점이라는 보상을 얻기 위해 동물실험을 시작했으며, 실험이 계속 될수록 생명을 다루는 것에 무뎌졌었다. 때문에, 동물실험과 동물 생명의 존엄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돌아와 생각해보자. 동물실험에서의 상해·살해 행위가 정당화될까? 동물 생명의 존엄성을 고려했을까? 원칙만 지킨다면 도덕성과 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과연 초·중·고등학교에서 동물보호법이나 동물실험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지켜질까?


나의 대답은 ‘아니‘다.


만약에 이러한 시스템이 지속된다면 생명의 존엄성은 더욱 낮아지고 종차별주의는 개선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동물실험을 바라봐야 할 시각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는 동물보호 국민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반려동물 사육 가구 수 비율이▶17.4% (2010년) ▶17.9% (2012년) ▶21.8% (2015년) 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 후 방사 관련 정책에 86.3%가 찬성(2012년 조사 대비 15.4% 증가)하고 있다. 또한 동물보호센터를 통한 유기동물 입양에 대해 10명 중 9명이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통계를 보면 동물에 대한 관심과 의식이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실험동물을 대체할만한 여러 기술들도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인공 세포나 인공 피부를 사용하고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동물대체시험에 활용한다. 오가노이드라는 줄기세포나 장기세포에서 분리한 세포를 배양하거나 재조합해 만든 실험용 소형 장기도 개발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따른 국내 실험동물 현황을 보면 ▶183만 4천 마리(2012년) ▶196만 7천 마리(2013년) ▶241만 2천 마리(2014년) ▶250만 7천 마리(2015년)로 12년 이후 매년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또한 2015년 1월부터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어 수가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동물실험은 도덕의 문제이다. 마땅히 실험동물에 대한 현재의 처우가 개선되어야 하고 결과적으로는 사라져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동물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대체할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실험동물에 대한 처우는 제자리걸음이다. 아니 수치상 더 나빠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미루어 봤을 때, 동물실험 개선 방향에는 법적인 제도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7년 2월 4일, 우리나라에서도 동물실험 화장품 유통·판매가 전면 금지됐다. 이런 식으로 더 나아가 동물보호법을 강화하고 확장시킴으로써, 동물실험 대체 기술에 투자를 유도하고 개발하여 보편화해야한다. 더 이상 케이지에 갇혀 짖지 못하는 비글은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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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보라


책과 그림을 가까이한 어린 시절을 보냈었고, 지금은 출판업계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제 평범한 인생에 책과 그림은 특별한 경험을 선물해주고, 심심할 땐 놀아주고, 힘들 땐 아지트가 되어주는 친구입니다. 책의 경우 이 친구의 외적인 면을 더 좋아한다고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합니다. 손에 잡히는 느낌 하며, 책장을 한 장씩 넘길 때 나는 소리, 손가락 끝에 종이가 닿는 감촉이 참 좋습니다. 책마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손끝에 닿는 감촉이 다르다는 걸 눈치채신 분이 있나요? 종이 회사에서는 실제로 이런 것도 연구한다고 합니다. 책에 쓰이는 종이와 그림을 그리는 종이에는 가벼운 종이, 촉촉한 종이, 빳빳한 종이, 오돌토돌한 질감이 있는 종이, 물을 많이 먹어도 끄떡없는 종이 등 종류가 다양합니다. 현재 종이 종류는 1천 종이 넘는다고 하며, 여기에 색을 입히거나 코팅을 하는 등의 가공을 해서 더 다양한 종이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종이 덕분에 놀고먹은 시절을 보냈고, 보내고 있고, 앞으로도 보낼 것이기에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평범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희생된, 희생되고 있는, 앞으로도 희생될 나무를 위해 종이 사용량을 줄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종이가 귀한 것도 아닌데 왜 사용량을 줄여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 어디에서나 쉽게 쓰고 버리는 종이 때문에 지구가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을 아시나요? 


2015년 15개국의 연구자들이 실측 조사와 위성 사진을 분석하여 지구에 3조 400억 그루의 나무가 있다는 것을 추산하였습니다. 많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이 수는 인류 문명이 시작한 이래로 46%가 줄어든 수치입니다. 매년 150억 그루의 나무가 줄어들고 있다고 하는데, 이대로라면 우리가 쓸 수 있는 나무는 20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숲은 산소발생기이자, 분진을 흡수하는 공기청정기이기도 하며, 빗물을 모아두는 천연 댐입니다. 또한 수많은 동물의 집이고, 숲과 인접해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식재료와 일자리를 제공하는 자산이기도 합니다. 이런 숲이 파괴되는 대부분의 이유는 단연히 사람의 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원목의 42%가 종이의 원료인 펄프로 사용되고 있고, 대부분 러시아, 캐나다, 인도네시아 등의 원시림 나무로 만들고 있습니다. 원시림은 자연 상태 그대로인 몇백 년, 몇 천 년 된 숲을 말하는데, 이제 전 세계에 35%밖에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말 그대로 아낌없이 쓰다가는 수십 년 뒤에 초록색 지구별이 황토색 지구별로 전락할까 두렵습니다.


종이의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서 내가 언제 종이를 사용하고 얼마나 사용하는지 파악해보았습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에서 복사용지를 사용하는 것이 제일 많았고, 매일 마시는 커피를 담는 종이컵이 그다음을 이었습니다. 

 

먼저 사무실 복사용지를 줄이기 위해서 프린트물을 출력할 때 출력 실수를 줄이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면지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뒷면을 사용했습니다. 한 달만 지나도 출력해서 한 번만 보고 버리는 종이가 제법 많이 쌓이더군요. 일반 사무실에서도 사무용지의 45%가 출력한 그 날 버려진다고 합니다. 나무 입장에서는 ‘하루살이도 아니고 이러려고 종이 됐나’ 자괴감이 들지 않을까요? 사무용의 하얀 종이는 질이 좋은 종이에 속합니다. 전국에 이 사무용지만 따로 모아서 재생용지를 만들어 사용한다면 한 해에 수백만 그루는 베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복사지 중 10%만 재생용지로 바꿔도 해마다 27만 그루의 나무를 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40%의 기업이 복사용지와 사무용지의 80% 이상을 재생용지를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요가 많은 만큼 재생용지를 많이 만들기 때문에 일반용지보다 가격이 더 저렴하다고 합니다. 재생지는 만들 때도 일반 종이를 만들 때보다 에너지와 화학물질을 더 적게 씁니다. 또 강한 흰색이 아니므로 눈의 피로감도 적습니다. 여러모로 재생용지를 사용하는 편이 더 좋은 것 같지 않나요? 우리도 독일처럼 재생용지의 상용화가 잘 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종이컵을 줄이기 위해서 한 것은 마음에 드는 텀블러를 사기 위해 2~3군데의 매장을 순회했던 것입니다. 전에도 텀블러를 들고 다니려고 몇 번 시도했었는데, 마음에 드는 텀블러를 사니 비로소 습관으로 정착된 것 같습니다. 텀블러를 사용한 후 매일 2~3개의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2008년 3월 20일에는 커피전문점이나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사용한 일회용 컵을 가져오는 고객에게 50~100원을 돌려주던 보증금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또 2008년 6월 30일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의 시행규칙이 개정됨에 따라 일회용 종이컵이 규제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개정되기 전에는 학교, 병원, 기숙사 등 식품접객업이나 집단급식소(1회 50명 이상에게 식사 제공)에서는 일회용 종이컵을 사용할 수 없었는데 말이죠. 이 결과 일회용 종이컵과 합성수지재질의 일회용 컵 사용량이 증가한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겠죠. 2010년 우리나라 연간 종이컵 사용량은 150억 개였습니다. 그 후 현재는 정확한 통계를 환산해 내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이곳저곳에서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이컵이 재활용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종이컵 안쪽에 방수하는 가공을 하면서 재활용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2020년부터 커피숍에서 종이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거라고 합니다. 우리도 종이컵을 대신 할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이 외에도 휴지와 물티슈 사용량 줄이기. 손수건 사용하기, 종이 고지서 온라인으로 받기. 읽지 않는 월간지 해지하기. 노트, 메모지 충동구매하지 않기. 시장, 서점 갈 때 에코백이나 봉투 준비해 가기 등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종이를 아끼는 방법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잊어서 하지 못한 날도 있고, 주변에서 그렇게까지 하냐고 가벼운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종이를 사용할 때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거나 종이를 사용하지 말자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종이로부터 받는 고마움이나 즐거움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조금의 편리함을 내려놓으면 나무를 한 그루라도 덜 베게 되고, 숲에 사는 동물들의 집도 빼앗지 않아도 됩니다. 사실 종이 소비를 줄이는 것에 대한 제도와 인식이 부족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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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욜 (인권재단사람,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  


윤가브리엘은 에이즈환자다. 이름만 들어도 공포와 죽음을 떠오르게 하는 바로 그 질병의 당사자다, 그래서 우리 사회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던 익숙함 때문인지 몰라도 자신의 질병을 드러내는 것에 늘 주저한다. 하지만 윤가브리엘은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하늘을 듣는다」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옥탑방 열기」라는 독립 다큐멘터리에도 직접 출연하면서 에이즈환자에게 덧씌워진 낙인과 차별을 지우기 위해 오랜 시간 활동해왔다.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라는 단체를 2003년에 설립하면서 에이즈인권운동의 시작을 알렸고,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인권이 있냐”고 손사래 쳤던 많은 HIV감염인/에이즈환자들에게 희망을 준 인물이다. 그가 온 몸으로 경험한 차별의 사례들은 셀 수없이 많다. 최근에도 시력과 청력을 잃어 장애1급 판정을 받았는데 활동보조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나 같은 사람에게도 올 수 있는 장애인활동보조인이 있을까” 하는 자조 섞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에게 보이지 않지만 낙인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늘 확인하게 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국에서 에이즈라는 질병이 발병된 지 30년이 지났다. 삼지창을 든 악마의 모습으로 표현되곤 했던 HIV는 지금도 붉은 반점, 마른 몸의 환자, 곧 죽음을 앞두고 있는 모습, 불치병, 하늘의 천형, 문란한 성행위 등을 연상하게 한다.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만 들어가 봐도 질병 정보에 대해 자세히 얻을 수 있지만 사람들이 가진 막연한 편견은 질병 당사자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도 본인이 잘못해 감염되었으니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구호단체들이 모금을 위해 아프리카의 에이즈 고아를 광고영상에 등장시키는 것에는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스킨쉽하는 연예인의 모습 속에서 오히려 아이들이 불쌍하다.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뿐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우리는 에이즈라는 질병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당신은 윤가브리엘과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거나 식사를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기침을 하다 침이 튀었다고 치자. 감염될 확률이 있는가. 감염인의 혈액이 내 몸에 묻었다면? 감염인의 혈액을 가지고 있는 모기가 나를 물었다면? 무수히 따라오는 질문목록이 있지만 이 질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정답을 쉽게 맞힐 수 있다. 우선 일상생활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 감염되지 않는다. 김치찌개를 함께 먹어도 괜찮고, 물잔을 같이 써도 괜찮다. HIV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라 곤충을 통해 감염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의 무게와 달리 아주 약한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인체 밖에서는 바로 사멸해 버린다. 그래서 감염인의 혈액이 몸에 묻었다고 하더라도, 만졌다고 하더라도, 또 침이 튀었다고 하더라도 감염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키스를 해도 상관없고 콘돔을 사용한다면 감염인과 성관계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HIV에 감염될 가능성은 없다. 치료제를 복용하는 감염인의 경우는 보통 사람과 수명이 비슷할 정도로 위험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염인을 두려워하고, 이들이 경험하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일까.    


낙인의 흔적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2015 에이즈에 대한 지식·태도·신념 및 행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에이즈 낙인 점수는 67.2점(100점 만점, 점수 높을수록 낙인 심함)이었다. 점수 추이를 보면 2010년 64.2점, 2012년 64.8점, 2013년 63.1점으로, 2015년 점수가 근래 5년간 가장 높았다. 감염인을 격리해야 한다는 법조항이 1999년에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47%는 감염인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가 HIV감염인에 대한 공포와 감시, 통제에서 예방, 교육, 지원으로 관점이 전환되어야 하고, HIV감염인의 인권보장이 적절한 치료와 감염예방에 필수적인 요건이라고 언급했지만 설문에서 39.4%는 감염인의 자유를 제한해도 괜찮다고 응답했다. 감염인과 같은 물 잔을 사용하는 것이 두렵다고 70%의 응답자들이 ‘그렇다’에 체크했으며, 응답자의 71.7%가 같은 동네에 감염인이 있다면, 같이 어울려 잘 지내기 힘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 


절망스러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질병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에이즈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하는데 결과는 정반대다. 두려움과 거부감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고, 꽉 막힌 도로처럼 정체되어 있다. 낙인지수는 더 높아졌다. 그렇다면 질병에 대한 무지와 편견은 감염인 당사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엔에이즈는 2016년 처음으로 한국에서 감염인 낙인지표조사를 진행하였다. 설문과 인터뷰에 참여한 감염인들은 직접 차별 받은 경험보다 ‘내재적 낙인’ 지수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 내재적인 낙인은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기에 별다른 치유법 없이 마음이 곪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응답자의 64.4%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75.0%가 자신을 탓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36.5%가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했다. 또한 63.5%가 특정 종교단체으로부터, 74.0%가 언론의 보도행태로부터, 75%가 인터넷 등 미디어의 HIV/AIDS 관련 댓글을 통해 부정적 시선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했다. 감염인을 위축되게 만드는 사회적 낙인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이 연구 결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함께 살 길을 모색할 것인가 아니면 혐오로 배척할 것인가. 


2015년 HIV/AIDS 신고현황을 보면 10,000명 이상의 생존 감염인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고, 매해 천 명 이상의 신규 감염인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예산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차별 앞에 절망을 느낄 또 다른 윤가브리엘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병력에 의한 차별을 분명히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감염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차별은 더 공고해지고 있는 듯하다. 병원의 문턱은 더 높아져 진료거부/의료차별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고, 개인의 질병정보가 노출되어 어려움을 겪는 일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유엔에이즈는 에이즈로 인한 낙인과 차별을 방지하지 못하는 사회적, 법적 환경이 곧 에이즈 치료와 예방에 대한 보편적 접근을 가로막고 있고 인권과 성평등이 증진되어야 에이즈 예방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언론에서는 ‘소나무에이즈’라는 표현을 버젓이 사용하며 죽음을 연상케 하고 있고, 에이즈 혐오를 통해 인권을 깎아내리는 이들이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윤가브리엘에게 덧씌워진 낙인을 지워야 한다. 인권은 함께 살 길을 모색하기 위한 중요한 가치이고 실천이다.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권리로부터 배제될 이유가 없다. 인권은 상호의존성을 가지고 있기에 감염인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할 때 나의 인권 역시 무너질 수 있음을 이해하고 이제는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인권으로서 또 다른 윤가브리엘들과 만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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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리(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


이 글을 쓰기 전, “인권, 인권이 존재하기 위해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본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봤을 때, 인권은 늘 그 대상의 존재를 인식하는 여부와 함께 확장하고 변화하고 발전해왔다. (물론 이는 선결, 앞뒤의 문제가 아닌 동반자적인 입장이겠다.) 하지만 성소수자 인권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 왜 원하지 않는 것일까? 이를 위해 성소수자의 존재를 끊임없이 지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그렇고 내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대학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 속에 대학 사회가 있는 것이니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나는 내가 속해있고 접근성이 높은 대학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속해 있는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이하 큐브)는 2013년 차별금지법 제정과 대학 내의 성소수자 인권 또한 우리 사회의 인권지수와 무관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면서 2014년에 만들어진 연대체이다. 이곳은 2016.12.31 기준으로 전국 54개 대학, 59개모임이 모여있다. 이처럼 대학사회는 상대적으로 성소수자에 친화적이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일 수 있겠다. 하지만 성소수자모임이 많은 만큼, 어떤 경우에 따라 가시화가 되어 있다보니 그 만큼의 반동과 혐오, 탄압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서강대학교의 경우는 학내 성소수자모임인 ‘춤추는 Q’에서 신입학시즌에 게시한 성소수자 신입생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교수가 임의대로 철거한 사례가 있었다. 학내에서 게시를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행정정차를 다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해결하는 과정에서 교수는 ‘서강대 학우는 비성소수자들도 있는데, 성소수자 입학생만 축하하는 것이냐 그러면 안된다.’는 말과, 원래 지저분한 것을 잘 떼는 사람이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되기도 하였다. 이에 학생 사회에서 각 학생회가 규탄 서명을 내고 고소장을 접수 하는 등의 대응을 진행하기도 했다. 


보수 기독교 교단의 대학인 총신대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총신대의 경우, 퀴어문화축제에 본 대학모임인 깡충깡충을 색출해 내겠다는 이유로 축제 당일 학교본부와 교단 소속 목사를 퀴어문화축제 행사장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퀴어퍼레이드를 하는데 깡충깡충 구성원들의 신원노출을 우려해 대신 깃발을 들었던 사람을 학교에서 고소를 하기도 하였다. 기본적으로 반동성애 운동을 하는 기독교이기에 채플시간에 혐오발언은 물론 교수들의 혐오발언도 매우 심한 곳이기도 하다.


몇몇 사례일 뿐, 대학이라는 공간의 혐오는 어느때보다 짙고, 반동은 어느 때보다 심하다. 숭실대는 인권영화제에 성소수자 관련 영화를 상영한다는 이유로 대관거절, 고려대도 마찬가지며, 성소수자의 존재를 대학 사회에서 끊임없이 지우려하고 지움당하고 있다 하지만 작년 김보미 서울대 총학생회장, 고려대 동아리연합회장를 시작으로 연세대 총여학생회장, 카이스트 부총학생회장, 계원예대 총학생회장이 생겨났고, 뿐만 아니라 학생사회에서 끊임 없이 커밍아웃을 하고 학생 사회의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일까? 왜일까?


이런 대학사회 내 탄압 속에서도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하고 있으며, 선출직은 아니지만 커밍아웃을 한 채, 인권위원회라는 학생사회 내 기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내가 있는 학교는 그렇게 성소수자를 비롯한 혐오가 가시적으로 팽배한 공간은 아니다. 하지만 교수님들의 입에서 “동성애는 출산을 할 수 없기에 수용할 수 없다.”, “동성애는 죄다.” 라는 말들이 간간히 나오고 있는 공간이다. 내가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하고 활동을 결심하게 된 것 역시, 교수님들의 동성애 혐오적인 말들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여자/남자친구에 대한 물음은 물론, 이성애중심적인 발언이 나오고 그 과정에서 나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이 답답했다. 


또한 학내에서 각종 문제시 되는 인권침해적 상황, 그리고 발언들이 비일비재하지만 아무도 제약하거나 조정할 수 없었던 상황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인권위원회라는 기구도 없었고, 총학생회 역시 부재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이 상황에 있어 몹시 못마땅 하였고 이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모으고 정책과 상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오는 것은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있는가?”였다. 그래서 내가 인권을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당사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커밍아웃을 했고, 학생 대표자들의 인준을 통해 학생회를 할 수 있었다.


학생회를 하면서 학생 사회는 많이 변했다. 각 과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보다 가시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교육들을 각과가 자생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기존에 말하지 못하던, 소수자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장애인도 장애인권 소모임이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있고, 채식인들의 인권 역시 활발하게 교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로서 나의 커밍아웃은 완성되었다. 


나의 커밍아웃은 맨 처음에는 나의 야망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대학이라는 공간에 있으면서 쉽게 학생회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커밍아웃을 했던 것도 있다. 그리고 그냥 나를 숨기는 것 자체가 너무 이해가 가지않아서 말한 것도 있다. 내게 커밍아웃의 시작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나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소수자성을 무기삼아 치사하게 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커밍아웃은 학교 안에 다른 변화와 의미를 만들어 냈다. 커밍아웃은 단순히 나의 존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었다. 숨겨진 사람들, 존재들이 세상에 거는 대화였던 것이다. 소통이었다. 커밍아웃은.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끊임없이 내재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언어화를 하는 내부의 커밍아웃을 경험하고 그것을 밖에, 세상에 말하는 하는 커밍아웃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없다. 왜냐하면 오히려 나를 커밍아웃을 함으로서 세상으로부터 공격당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의 사회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커밍아웃을 하는 이유를 찾았다. 그것은 나의 존재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이고 우리 공동체에 던지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로 인해서 학교는 변했다. 교수님들의 문제적 발언을 문제제기 할 수 있는 창구가 만들어졌고, 학생회가 소수자를 위해 신경써야 하는 부분들을 인식하고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존재하였으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 나의 커밍아웃의 시작은 조금 별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인권을 함께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인권은 어느 하나, 누구 하나만의 것이 아니다, 정말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면서. 나는 나의 커밍아웃으로 만들고자 했던 학교를 만들 수 있었다. 


나의 존재로 세상에 끊임없이 말을 걸고 나를 증명해 보일 것이다. 나의 존재가 우리 모두에게 좋다. 좀 더 설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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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아림


언제부턴가 날씨를 전달 땐 오늘의 미세먼지는 나쁨입니다. 오늘은 초미세먼지로 인해.. 아니 도대체 미세먼지가 뭐라고 언제부턴가 뉴스에서 날씨를 전할 때 함께 전달하는 것 일까? 미세먼지는 ‘분간하지 어려울 정도로 작은 먼지’를 말한다. 보통 PM 10㎛이하의 먼지를 뜻하며 미세먼지 중에 입자의 크기가 더 작은 PM 2.5㎛이하의 먼지를 초미세먼지라고 한다. 이 미세먼지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너무나도 작은 입자로 장기간 미세먼지에 노출될 경우 기관지와 폐에 쌓인 미세먼지로 인해 천식, 호흡 곤란 등 호흡기질환과 심혈관 및 피부, 안구질환, 면역력 저하를 유발할 수 있고 조기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밖으로 나가 조깅을 하고, 운동을 하는 일들이 미세먼지로 인해 건강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이러한 미세먼지들은 자연적 원인과 인위적인 원인으로 구분되지만 인위적 발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고가 되고 있는데 대부분 연료 연소에 의해 이루어지며 보일러, 자동차, 발전시설 등의 배출물질이 주요발생원이고, 중국에서 발생하여 유입되는 미세먼지의 영향도 받는데 특히 수도권 지역(서울, 인천, 경기)의 미세먼지, 이산화질소 오염도는 OECD 국가 중 최하위로 선진국 주요도시에 비해 아주 열악한 실정이다. 기름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서 자동차는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으며, 발전소, 산업체, 생활오염원에서 발생하는 대기오염물질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 셈이다. 10년 전. 1995년 미세먼지에 대한 규제가 있었다면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외출을 할 수 있으며, 미세먼지 농도를 알려주는 어플이 뭔지도 모르는.. 남산타워는 언제든 볼 수 있고, 지금보다 더 맑고 깨끗한 하늘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이미 1995년 먼지오염의 최저기준을 현재의 PM 10㎛에서 PM 2.5㎛이하의 미세먼지로 기준강화를 주장하는 견해가 제기됐었다. 미국 환경처와 일리노이주 대기오염전문가들이 국립환경연구원에서 열린 한.미 시정장애관련 세미나에서 ‘’최근 미국 어린이들에 대한 조사결과 PM 2.5㎛에 의한 건강피해가 큰 것으로 나타났으며, ‘’현재 먼지기준으로 한국에서 채택하고 있는 PM 10㎛에서 보다 더 미세한 PM 2.5㎛를 측정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5년 1월에서야 초미세먼지에 대한 규제가 시행되어 현재 대기환경 기준은 24시간 평균 50㎍/㎥ 이하, 1년간 평균 25㎍/㎥ 이하로 규제하고 있다. 즉. 2015년 전에는 미세먼지에 의한 규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까 ‘2016 환경성과지수(EPI)’ 미국 예일대와 컬럼비아대의 공동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대기질 순위는 180국 중 173위로, WHO 산하 국제 암 연구소가 1급 발암요인으로 규정했고, 호흡기 질환과 심혈관 질환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PM2.5 수준 초미세먼지는 174위에 머물러 같은 순위인 중국과 함께 최하위 수준이다. 이산화질소(NO2) 노출 정도는 개선 노력이 없었다는 이유로 0점을 받아 꼴찌까지 했다.

물론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늦장 대응으로 인해 국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지만, 미세먼지에 대해서 우리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환경보호에 있어서는 정부기관 및 관리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국민들과 함께 시행해야 한다. 

10년 뒤. 우리는 마스크 없이 문 밖을 나가고, 밖에서 산책을 하며, 아이들과 뛰어 놀 수 있을까? 우리는 미세먼지가 없는 신선한 산소를 마시기 위해 산소통을 휴대하며, 안구보호를 위한 고글,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와 함께 밖을 나가야 하지 모른다. 

연일 지독한 스모그에 시달리는 베이징의 심각한 미세먼지를 알리기 위해 국제환경보호 기구인 ‘와일르에이드’에서 제작한 중국의 미래 베이징 주민들의 미세먼지를 걸러내기 위하여 코털이 길게 자란 노인, 아기, 심지어 강아지까지 길게 자란 코털을 달고 다니는 영상을 보인적이 있다. 

스모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바뀐 미래 인류의 모습을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상상한 것이라 하는데 어쩌면 미세먼지에 저항하는 인간이 진화해 콧털만이 아닌 온 몸에 털이 호모 사피엔스처럼 생기는 퇴화되는 미래인류의 모습이 되지 않을까?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박근혜 대통령(직무 정지, 대통령 직함 이하 생략)과 최순실에게도 인권이 있을까? 뻔한 질문이 밥상 위에 던져졌다. 정답보다 웃음이 먼저 터졌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던 탓이다.

세상은 나를 언론인이라 부른다. “인권 교육 매체로써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 향상과 인권 감수성 향상에 기여”(기자협회 인권보도준칙)할 책임이 있는 바로 그 언론이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이다. 때문에 나는 저 질문을 피해갈 도리가 없다. 하지만 답이 정해진 저 질문 앞에서 망설였듯, 나는 그리고 이 사회의 언론은 종종(사실 항상) 누구보다 앞서 인권을 모르는 척하고 짓밟는다.

“언론은 한 번 보도하면 끝이잖아요. 그 다음은 우리 몫이죠.” 

지난해 만난 한 취재원의 이야기가 한동안 잊고 지낸 죄책감을 끌어 올렸다. 피해자로서 꽤 여러 언론과 접촉했던 그였다. 나를 만나기에 앞서 그는 주류 언론 소속의 기자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했다. 인터뷰 일정이 잡혔지만, 해당 기자는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 기자가 올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나버린 상황이었다.

그 기자는 아마도 피해를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의 취재는 종종 이런 피해를 낳는다. 고백하건데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요즘 무척 주목받는 한 언론사에서 일했을 때였다. 프리랜서였던 나는, 담당 기자를 대신해 사례자(취재원)를 인터뷰했다. 그의 상황을 온전히 보도하지 못한다는 점을 사전에 충분히 설명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간절했던 그는 취재에 응했다. 후속 취재를 부탁한다는 말을 거듭하면서 말이다. 그의 도움으로 기사는 간신히 전파를 탔다. 문제는 그 뒤였다. 취재원이 처한 문제의 핵심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지만, 해당 언론사는 추가 보도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참이 지난 뒤, 그를 다시 만났다. 상황은 더 나빠져 있었고,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국회 앞에서 1인 시위 중이었다. 

언론 보도가 오히려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일은 사실 적지 않을 것이다. 특정 언론사만의 문제도 아니다. 나만해도 또다른 대형 언론사에서도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다. 중소기업 문제를 취재하고 있었다. 피해 기업주들은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취재진의 일정에 맞추려고, 오밤 중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 중 한 사장님의 사연은 취재진의 이해 부족으로 방송에서 누락됐다. 방송되지 않는다는 소식은 방송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야 통보됐다. 소송에서 이기기 전까지, 그 사장님은 대기업으로부터 또다른 피해를 겪어야 했다. 전파를 탄 사장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추가 피해가 이어졌고, 이 모든 것은 온전히 취재원의 몫이었다. 

좋은 뜻에서 시작됐던 취재도 이렇게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가해자는 물론이다). 그렇지 않은 기사들은 어떨까. 

사실 이 글은 지난해 여름 시작되었다. 박 아무개를 시작으로 남성 연예인을 가해자로 지목한 성범죄 사건이 연일 보도되던 지난해 6월 무렵 말이다. 타사 보도를 지켜보는데, 확정되지 않은 피의 사실이 마구잡이로 흘러나왔다. 피고소인(피의자)의 신분이 가감 없이 노출됐고, 혐의 역시 그대로 폭로됐다. 

언론들은 알면서도 인권을 무시하고 있었다. 더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피고소인(당시 피의자)의 인권을 무시한 결과가 고소인(당시 피해자)의 인권 침해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고소인들의 신상이 공개됐고 비난은 비등했다. 인권 침해의 한 가운데서 사건은 고소인과 피고소인의 지위가 뒤바뀌는 반전까지 거듭했다. 반년 가량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남겨진 것은 만신창이가 된 사건 관계자들 뿐이다. 하루 종일 떠들어대며, 사건 관계자들을 할퀴었던 언론들은 무척이나 무사하다. 

기자협회 인권보도준칙(2014년 12월 개정판)을 무시한 것이지만, 하루종일 떠들어대며 사건 관계자들을 할퀴었던 언론들은 무척이나 무사하다. 인권보도준칙에는 범죄 보도와 관련한 항목이 즐비한데, 헌법에 보장된 무죄 추정의 원칙과 공정한 재판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주지하고 있다. “수사 중인 사건을 다룰 때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범죄 행위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성폭행) 피해 상황을 설명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등 구체적인 규정 또한 명시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모든 것을 공개했다. ‘성범죄 피해 신고 = 공개될 수 있음’을 경고하듯이 말이다. 

이 시점에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보려 한다. 피의자 박근혜와 최순실에게는 인권이 없는 것일까. 해방 이래, 아니 단군 이래 최대 게이트를 벌인, 민주주의를 싸그리 무시해버린 이들의 인권까지 고려 대상인걸까. 물론 이들의 범죄는 위에 제시한 사례와 결이 다르다. 박근혜 대통령은 공인이며,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다. 자신에게 잠시 부여된 권한을 위법적으로 사용했고, 국민의 인권과 존엄을 짓밟았다. 대답을 망설였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박근혜와 최순실, 두 죄인에게도 인권은 있다고 말해야 한다. ‘언론의 인권 침해’라는 커다란 문제에 있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탐사 보도 전문 언론인 모임인 ICIJ의 보도 윤리에도 이러한 내용은 포함돼 있다. “피해를 최소화하라 - 공식적인 기소 전에 범죄 용의자의 신원을 지목하는 데에 신중하라.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가해자의 권리와 대중의 알권리에서 균형을 잡아라.” 공직자의 비위, 비리 사실을 보도함에 있어서도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점이 고려돼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우리 언론은 지금 괜찮은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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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영화 같은 삶을 꿈꾸지. 한 영화에선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결혼식을 하며 너무 예쁘게 웃더라. 성당에서 식을 올리고 야외에서 피로연을 하는데 하늘에서 퍼붓는 비바람에 드레스는 뒤집히고 모자는 날아가고 하객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야. 그럼에도 그 웃음은 지워지질 않더라고.’ 


누구에게나 꿈꾸는 로망 하나쯤 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결혼식을 원한 나는 좀 더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원했다. 마치 제대로 축복받기 위해 의욕이 넘쳤다 랄까. 성인이 되고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예산과 상대의 의견과 충돌하면서 나의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로망은 고이 접어 저 멀리 날려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꿈꾼 로망의 결혼식은 남들보다 성대하게 치르고 싶은 보여주기 식에 불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특별한 결혼식을 원한다.  그러나 어릴 적 휘황찬란한 결혼식과는 다른 결혼식을 하고 싶어졌다.

예로부터 한국의 전통혼례는 결혼당사자의 행사가 아닌 가족간,마을의 공동체 행사의 의미가 컸다. 결혼식 전에 신랑친구들이 신부집으로 향하며 “함 사세요”라고 소리치면 마을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구경하며 함께 즐겼다. 지금이라면 아마도 경찰이 출동할 것이다. 심지어 결혼식을 준비하는 주체도 결혼당사자가 아니었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기에 양가어른들끼리 만나 혼인약속을 하고는 그날 저녁 당사자에게 ‘너 결혼해라’라고 통보하기 일쑤였다. 하다못해 결혼 당사자끼리 얼굴도 모르고 혼례를 치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 때 그시절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결혼하는 것이 내 운명이겠거니 하며 꽃다운 나이에 시집,장가를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이다. 호랑이 담배태우던 옛날 이야기는 접어두고 지금의 우리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연지곤지찍고 결혼하는 시대가 지나가면서 서양식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고 결혼하는 시대가 왔다. 시대가 변했어도 예로부터 내려온 관습은 변하기 쉽지 않았다.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는 필수였고, 식장은 남들 눈이 신경쓰여 예산에 타격이 커도 더 고급진 곳으로 선택해야했고 양가 어른들은 서로 겨루듯이 하객석을 차지하기 바빴다. 결혼식 당일은 또 어떤가. 손님맞이하며 웃는 얼굴로 사진찍느라 얼굴에 경련이 난다. 그런 와중에 시댁부모님이 사돈의 팔촌이라며 생전 처음보는 어르신을 모시고 오면 아주 반가운 얼굴을 하며 웃어야만 했다. 이렇듯 나도 모르게 잠재되어있는 과시욕과 집안 어른들의 개입으로 눈 앞이 깜깜해진 적이 많을 것이다. 

이런 깜깜한 문제를 눈 앞에 둔 예비신랑,신부들이 시도한 결혼식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유행인 이른바 ‘스몰웨딩’. 말 그대로 작은결혼식이다. 하객,비용등을 최소화하고 결혼당사자가 직접 꾸미는 결혼식이다. 결혼당사자가 주체가 되어 직접 설계하는 결혼식이기에 남들 눈을 신경쓰는 허례허식을 내려놓을 수 있으며 집안 어른들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이득이 있다. 최근 유명 연예인커플이 스몰웨딩으로 결혼식을 올리며 화제가 되었는데 그중 가장 큰 화제거리는 착용한 웨딩드레스였다.


매 해 약 33만쌍의 가정이 탄생하는데 그 탄생과정에서 170만벌의 썩지 않는 합성섬유 웨딩드레스가 버려지고 450만송이의 꽃들과 1억5천만장의 청첩장, 엄청난 양의 음식물 쓰레기와 예식장 주변의 교통 혼잡으로 나온 CO2배출량은 493만톤이다. 493만톤의 CO2를 상쇄하려면 나무 4억3천만그루 이상이 필요하고 탄소배출거래 금액은 무려 약 580억원 이상이 소요된다. (출처-대지를위한바느질홈페이지)

화제가 된 드레스는 친환경의류 사회적기업이 만든 것으로 다른 웨딩드레스와 외형이 다르지 않은 드레스였으나 특이한 점은 의류소재가 옥수수섬유였다. 해마다 결혼식에 사용되는 웨딩드레스는 약 170만벌이다. 보통 드레스는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해 실크가 아닌 합성섬유로 제작되는데 이런 드레스는 썩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재활용하여 여러번 입는다 하더라도 썩지 않는 합성섬유는 결국 쓰레기처리에 골칫거리일 뿐이다. 이런 환경문제를 떨쳐버리고 싶어 옥수수,한지,쐐기풀로 생분해성 친환경섬유를 뽑아내고 그것으로 드레스를 만들었다. 마감처리도 표백,형광처리하지 않아 입은 사람의 피부건강에 좋고 땅에 묻으면 빠르게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환경문제가 없다는 큰 장점이 있다. 

인생의 2막이라 불리는 결혼의 과정 중 중요이벤트인 결혼식은 누구나 특별하고 멋지게 하고 싶을 것이다. 웨딩 컨설트회사를 만나 소개해주는 패키지 중 하나를 고르면 모든 것이 수월해 질 것이다. 그러나 요즘 몇 년 사이 결혼식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화려한 결혼식 보다 윤리적 소비와 실속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환경적 소비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소비자들이 많아지면서 친환경결혼식에 대한 정부지원이나 사회적 기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비부부들의 결혼비용절감을 위해 서울시내 공공기관에서 작은 결혼식장을 대여하는 곳이 많아졌다. 서울시청 지하에 위치한 시민청이나 야외공원,구청 등 실내,야외 소재지도 다양하고 대관료가 무료인 곳도 있어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위에 언급한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드레스를 만드는가 하면 부케와 부토니아(턱시도 단춧구멍에 꽂는 꽃)를 만들 때 뿌리를 자르지않고 포장해 결혼식이 끝난 후에 화분에 옮겨 심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듯 웨딩산업에 직면해 있는 환경적,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고 자연에 해가 되지 않으며 사람에게는 보다 유익한 프로젝트가 다양하다.

한번 보고 버려지는 청첩장의 처분에 대한 고민으로 종이는 재생용지를 사용하고 청접장을 액자형으로 디자인하여 재사용할 수 있게도 했다. 결혼식장을 데코할 때 필요한 꽃들은 하루이틀 살아있다가 시들어버리는데 이런 환경문제를 느껴 결혼식장데코에 ‘뿌리없는 꽃’을 사용하지 않는다. 뿌리없는 꽃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다육식물이나 꽃을 화분에 심어 데코에 활용하고 식이 끝난 후 하객들에게 나눠줘 추억으로 남길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웨딩드레스부터 청접장,부케,식장까지 다양하게 친환경결혼식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지자체,사회적기업이 있다.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예비부부가 윤리적 소비를 지향하고 친환경요소로 결혼식을 올려 건강한 결혼문화를 만들어 갈 수있다. 인생의 특별한 이벤트인 결혼식,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건강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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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임 권하는 사회

2017.02.08 15:17 사회

전병조(바꿈 청년네트워크)


2016년 10월, 통계청이 발표한 '7월 인구동향'이 크게 보도됐다. 1~8월 누적 출생아 수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고, 같은 해 연간 혼인 건수도 처음으로 30만 쌍을 밑돌 것으로 예상됐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2029년부터는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란 전망도 덧붙었다. 두 달 뒤 12월에는 행정자치부가 가임기 여성들의 분포를 도식화한 '출산지도'를 발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누리꾼들은 "여성이 아이 낳는 가축이냐"며 분노했고 행정자치부는 홈페이지가 마비되는 곤욕을 치렀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서 결혼과 출산이 줄어드는 건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탓할 것도 권할 것도 없다. 먹이 구하는 게 어려워진 생물 집단의 규모가 작아진다는 건 중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굶주림은 번식에 여러 제약을 낳는다. 먹이 구하기가 턱없이 힘든 겨울철을 번식기로 삼는 동물이 드문 것만 봐도 그렇다. 우선, 허기진 개체는 포식자의 공격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떨어진다. 번식기의 교미 경쟁도 버거워지고, 성공한다 치더라도 어린 새끼들의 미래는 배고픔 앞에서 훨씬 더 취약하다. 야생과 문명 사회는 과연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사실 인류가 굶주림을 벗어 던진 건 벌써 수십만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인류가 먹이를 구하는 데 활용한 '수단의 변천사'를 통찰해내는 디테일도 필요하다. 사냥과 채집에 필요한 육체는 거의 대부분의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어서, 비교적 평등한 조건의 준비물이었다. 기껏해야 돌도끼를 만들 수 있을 만한 창의력이 더 요구되는 정도면 충분했다. 인류의 조상들은 함께 사냥하고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는 먹이를 구하려면 농사지을 땅이 필요했다. 영주는 토지를 가진 채 태어났지만 그렇지 못한 농노들은 굶주렸다. 산업사회에서 새롭게 '먹이'의 지위를 획득한 것은 화폐였는데, 공장에서 만든 상품을 팔아야만 그것을 얻을 수 있었다. 누구나 공장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봉건제는 사라졌지만 대다수 노동자의 굶주림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017년의 한국 사회에서 '임신 가능한' 세대의 굶주림은 더욱 치열하다. 생산수단을 가지기는커녕, 지금은 착취를 누릴 수 있는 노동자가 되는 것마저 쉽지 않다. 어렵사리 일자리를 얻는다 해도 미래를 감히 약속받을 수는 없다. 인간은 '먹이 활동'을 향해오는 압박에 더욱 민감하고 정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많이 낳고 대충 돌보는' 개구리와는 달리, 인간은 '적게 낳고 열심히 돌보는' 번식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똑같이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더라도 개구리의 산란은 예전과 다를 바 없건만, 인간의 육아는 훨씬 더 고통스럽고 수고로워진다. 현대의 '먹이 불균형'은 새로운 형태의 굶주림이 되어 인간에게 짝짓기 압박으로 작용하게 되는 셈이다.

우리를 짝짓기 압박으로 몰아넣는 불균형은 또 있다. <털 없는 원숭이>로 유명한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좁은 도시에 빽빽하게 몰려든 현대인의 생활환경이 마치 그가 근무하고 있는 동물원의 그것과 몹시 비슷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야생에서의 동물들은 결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원 우리에서처럼 과밀한 환경에 놓인 동물들은 (번식이 아니라) 우월한 지위를 확인하기 위한 섹스를 하거나 파벌을 만들어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살하기도 한다. 

도시라는 좁은 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현대 인류도 마찬가지다. 지구 위를 걷는 인간들의 무려 절반이 콘크리트 정글에 모여 살아간다. '인간 관찰'의 집단 버전이랄 수 있을 <인간 동물원>에서 그는, 도시인이 겪는 여러 불행들이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의 상황을 빼닮아있다고 보았다. 부족을 넘어 '초부족(super-tribes)'을 이룬 도시에서는 ▲초지위(super-status)를 더욱 굳히려는 우두머리의 폭력이 극심해지고(무리의 고조된 공격성은 배출구를 필요로 한다. 가장 약한 개체는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초섹스(super-sex. 번식 외에 목적을 두는 9가지 섹스 형태)가 나타나며, ▲외집단(outer-groups. 다른 성별, 다른 인종, 다른 민족, 다른 국가 등)을 상정해 그것과 싸우며 무리의 결속을 꾀하거나, ▲성 정체성과 관련된 각인이 잘못 이루어지는 현상(성기가 아닌 신체부위, 특정 물체 등에 성적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경우)이 나타나기도 한다. 도시에서의 경쟁은 보다 치열하며, 그 결과 앞서 언급한 먹이의 불균형은 더욱 도드라진다. 간단히 말해, 현대인들은 사실상 '사회적 불임'을 선고받는 셈이다.

도시는, 전 세계 총생산의 80%를 담당한다. 인간에겐 치명적인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박민규는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주인공을 통해, "말이 풀을 뜯고 새가 하늘을 날 듯 인간은 '돈 돈'하는 존재인 거예요" 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를 이렇듯 '불균형들' 속으로 밀어 넣은 원동력이 어쩌면 인류 그 자신의 욕심이었던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해보게 된다. 자연을 더욱 쉽고 편리하게 이용하려던 노력이 농경의 발단으로, "수고하여야 네가 먹으리라"던 신의 저주로, 자연에 대한 세찬 광기를 띤 '가공'으로, 급기야는 편리와 파괴를 동시에 부추기는 기계의 발명과 산업화로 이어진 게 아닐까 하고. 한편으로는 이웃 부족과의 경쟁이 국가라는 권력을 낳고, 식민지를 약탈하게 하고, 시나브로 시작된 '쩐의 전쟁'을 거치는 사이 마침내 맹목적인 도시화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하고도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인간은, 생태계에서든 사회에서든, 약자를 더욱 착취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이어왔던 것만 같은 결론에 얼씬거려 보곤 한다. 그 욕심이 독점을 낳고, 후발 주자들을 꼬드기고, 복잡한 도시를 세우고, 끝도 없는 경쟁을 부채질해서, 마침내 부메랑처럼 그 자신으로 하여금 사회의 불임을 '잉태'하게 만든 게 아닐까? 그러니,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인 인간)'를 조상으로 둔 과오를 이제 와서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 저출산이 '문제'라는 오해에서 손을 떼시라.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가 표어이던 시절이 있었다. 집집이 적게 잡아도 예닐곱씩은 아이들이 있던 시절이었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막 움트던 1967년 그 해, 우리 국민 한 사람의 연간 소득은 고작 145달러였다. 지금은 국민소득이 2만 7천 달러가 넘었는데도 우리는 가난하다. 99%의 국민이 이 기막힌 역설을 참아낸다는 게 문제의 몸통이다.

요즘 표어는 "아빠! 하나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 갖고 싶어요" 란다. 그 때는 인구가 많아서 탈이고, 지금은 적다고 야단이다. 경제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만족스럽지 않은데 핑계는 이렇게나 변덕스럽다. '먹물'이라는 족속들은 참 편해서 좋겠다.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자 청년에게 n포세대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가져야 한다'의 우물에서 단 한 발짝도 기어 나와본 적이라곤 없는, 그래서 우리가 뭘 포기하기 전에 가져본 적도 없었던 걸 모르는, 꼰대들의 힐난에 그리 신경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또다시 출산 지표를 들먹이며 공포 마케팅을 일삼는다면 수고스럽더라도 또 가르쳐 주자. 우리는 개구리가 아니라고. 진짜 개구리는 당신네들이라고.

*** 참고문헌

1) 인간 동물원, 데즈먼드 모리스, 2003.

2)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2009.

3)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2015.

4) 인구쇼크, 앨런 와이즈먼, 2015.

5) [노컷뉴스] '저출산 비상'…10월 출생아 사상 최저치, 장규석 기자, 2016-12-22

6) 출산지도, 행정자치부 홈페이지, 2016-12-29

7)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연간지표 - 1인당 국내총생산(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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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 일상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24살 평범한 대학생이에요. 저는 집이 부산이라,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보통 하루에 두 번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요. 과일 한 쪽 들고 등교했다가 1,2교시를 마치고 친구들과 밥을 먹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거나 다른 활동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돌아오죠.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에는 늦게까지 뒷풀이를 하기도 해요. 아마 많은 대학생들과 직장인 여러분들이 저와 비슷한 생활패턴으로 살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채식을 하면서 제일 힘든 건 이런 제 생활패턴 때문이었어요. 만약 제가 함께 사는 가족이 있고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먹을 수 있다면, 또 시간적 여유가 있고 밥상의 온기를 나눌 사람들이 있다면 비교적 채식을 하기 쉬웠을 거에요. 그렇지만 밖에서 자주 사 먹는 생활패턴을 유지하면서 매번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찾는 건 정말 힘든 일이더라고요. 메뉴 선택 폭이 굉장히 한정되어있어서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적도 많았죠. 치킨 안 먹고 삼겹살을 안 먹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찾는 건 정말 힘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어떤 인간관계에서는 우리가 메뉴선택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래서 메뉴를 선택할 때는 별 말 없이 있다가, 막상 음식점에 가서 먹지 않는 저에게 질문 포화가 쏟아지기도 했어요.

저는 채식을 시작하기 전에도 원래 고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요. 삽겹살은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먹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채식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일주일만에 그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지 깨달았죠. 많은 음식이 육수로 만들어졌거나 육류 가공품(소시지 등)이었고, 고기를 메인으로 하지 않더라도 소량이나마 들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그 모든 선택지를 제거하고 나면 거의 사 먹을 게 없었죠. 특히 우리나라는 대부분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있는지 밝혀놓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육수를 마셨을 수도 있어요. 참 채식하기 힘든 나라에요.


채식을 하게 된 이유


처음 ‘채식’의 필요성을 깨닫고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는 2008년이에요. 당시 광우병 파동이 일면서, 먹거리 안전에 대한 불안이 극대화되었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국민 건강은 뒷전인 대한민국 CEO 대통령을 규탄하며 촛불을 들었어요. 저는 그 때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급식에 나오는 소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었고 급식 때 고기만 빼고 받았던 기억이 나요. 더 충격이었던 건, ‘PD수첩’이라는 방송에서 본 소들의 모습이었어요. 그 때까지 저는 소들이 목장에서 뛰어노는 걸 상상했던지, 좁은 틀 안에 갇혀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소들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죠. 그 이후 PD수첩은 보도의 사실 여부를 다투는 소송을 여러 차례 겪어야했지만, 그걸 계기로 ‘미국식 공장식 축산’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내가 먹는 고기는 대부분 저렇게 사육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그로부터 2년 후에는 구제역이 터졌어요. 수많은 돼지들이 산 채로 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장면, 그리고 그 돼지들이 마지막까지 살고 싶어 바둥거리며 소리지르는 장면을 봤어요. 그 때 돼지가 ‘고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걸, 생의 의지를 가진 생명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지금도 구글에 들어가서 ‘구제역’을 검색하면 나오는데, 여전히 그 장면은 머리에 선명해요. 정부는 그 이후에 돼지가 모두 사라졌고, 구제역이 해결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냈어요. 그런데 아직도 그 지역에 가보면 침출수와 가스냄새가 난다고 해요. 산 채로 묻힌 그 돼지들이 어디로 갔겠어요? 

2017년 12월 지금,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로 다시 온 나라가 들썩거려요. 수 만마리의 산란닭들이 생매장되고 있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것보다는 달걀을 싼 값에 못 먹는다는 것 때문에 더 짜증나 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열심히 방역을 해도, 제주도에서까지 AI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와요. 이렇게 몇 번이나 대규모 가축 전염병을 겪으면서, 우린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변화시켜왔을까요? 방역을 더 열심히 하고, 우리 지역 가축이 피해를 보지 않으면 되는 걸까요? 이 규칙적인 전염병 파동은 우연일까요?


공장식 축산, 출처 모를 고깃덩어리들


우리는 매일매일 돼지, 소, 닭들을 ‘고기’라는 형태로 만나요. 그런데 이 고기가 한 때 살아있는 생명이었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단지 이것이 어떤 살의 맛인지 어렴풋이 구별할 수 있을 뿐, 이 고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온 생명체였는지 생각하지는 않죠. 광우병 당시에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거졌고 사람들은 실태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실제 축사를 보거나 동물을 도축하는 장면을 본 사람은 극소수에요.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싼 가격에 먹는 걸 당연시 여기는 세상에서 살상에 대한 죄책감은 최대한 빨리 지워버려야 하는 무의미한 생각일 뿐이죠. 그 죄책감은 식용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식문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돼요.

가끔 식탁에 올라온 그을린 살덩어리를 가만히 쳐다보게 될 때가 있어요. 그 때 ‘이 고기가 살아생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을 때 많이 괴로워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떤 생명의 시체를 먹는 행위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런데 대부분 고기를 파는 음식점에 걸린 동물 마스코트들은 모두 하나같이 웃고 있어요.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가 보지 못한 끔직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하고, 고기 먹는 행위를 쉽게 정당화해요. 거기에 더해 갖가지 논리를 덧붙이죠. 인간은 옛날부터 육식을 해온 동물이다, 동물들(적어도 돼지, 닭 등)은 인간만큼 고통을 많이 느끼지 못할 것이다, 고기를 안 먹으면 단백질은 어떻게 섭취할 거냐….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허점 많은 논리들을 허겁지겁 소화하죠.

사육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라고 해요. 공장식 축산시스템 하에서 식용으로 길러지는 동물들은 그야말로 ‘생명’이 아니라 ‘상품’입니다. 동물들이 먹는 것, 움직이는 것, 행동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몸값’, 즉 상품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만 허용되죠. 축산업 관점에서는 가축이 병이 나거나 죽을 정도로 아프다 해도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까지만 약으로 버티며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각종 질병에 대한 ‘땜질’을 위해 항생제와 약물을 엄청나게 투입해요. 고미송, <채식주의를 넘어서>, p.88

닭들은 건강이 아니라 무게에 따라 값이 매겨지기 때문에 그들에게 먹이는 모이 역시 최대한 싼 값에 몸무게를 많이 불릴 수 있도록만 선택돼요. 동물에 대한 학대도 믿기 어려울 수준이지만, 우리가 싼 값에 먹는 고기들이 항생제와 호르몬 덩어리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공장식 축산의 실태가 많은 사람들을 채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 같아요. 공장식 축산시스템 하에서 생산되는 고기가 우리 몸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극심한 고통에 대한 감수성 또한 많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동물 해방>의 저자 피터 싱어는, 동물에게도 ‘쾌고감수능력’이 있다는 점을 들어, 인간이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동물에게 쾌고감수능력이 없다는 점이 소위 ‘과학적으로’ 증명된다면, 동물을 먹어도 되는 걸까요? 안락사를 통해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일 수 있다면 육식은 정당화되는 걸까요?


에코페미니즘을 만나다


제가 위와 같은 물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쯤, 에코페미니즘을 만났어요. 육식을 하는 일이 힘겹게 느껴져서 스스로 이유를 더 찾아야만 했을 시기였어요. 다른 생명을 먹지 않는 일을 위해 별다른 특별한 이유를 찾는다는 게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육식이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그저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 자주 들거든요. 그래서 언제나 저의 윤리적 감각을 깨워 줄, 육식이 자연스러운 세상에서도 꿋꿋이 채식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더 많아지기를 바랐어요. 그 때, 에코페미니즘을 만났어요.

에코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 논리가 사실상 인간 중심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해요. 예전에 남성들은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딱지를 붙이고, 동물과 다르지 않은 하등한 존재라고 여겼어요. 물론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비하 뿐 아니라, 동물에 대한 비하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여성들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더 많은 사회적 권리를 쟁취했고, 주류 남성들이 규정하는 ‘인간’ 범주 안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다면, 그 ‘사회적 경계’라는 것이 어디까지 유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동물이 인간과 다르다>는 논리는, <남성은 여성과 다르다>는 논리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결국 어떤 존재를 존중할 만한 존재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 그 존재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대상을 대할 ‘태도’를 택하고 그것을 설명할 논리와 근거를 찾아내는 것일 뿐, 그 논리와 지식이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랜 시간이 지나, 여성이 영혼이 있는 존재이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보면서 이 점을 더욱 뼈저리게 느낍니다. 피터 싱어처럼 ‘동물이 인간과 같이 동등하게 고통을 느끼는 존재’임을 합리적으로 밝히는 건 인간이 동물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줍니다. 그러나 이 점을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반려견,반려묘를 보면서 이미 이 사실을 알고있어요. 과학적인 근거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걸,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걸요. 다만 육식이 정상성이 되는 시스템은 이러한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라는 패배감에 굴복하도록 만들어요.


채식주의 실천하기


식물도 생명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물론 식물도 동물만큼 고귀하고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먹을 때 도덕적 책임감을 더 많이 느끼는지 솔직히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와 가까운 존재들부터 해방을 시켜나가는 것이 적절한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존중과 해방의 역사는 ‘나’, ‘우리’와 가까운 존재들부터 이루어져왔으니까요. 좁디좁은 우리에 갇힌 돼지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의 꼬리를 잘라먹고, 배터리 케이지 안에 닭들이 제대로 날개 한번 펴지 못하는 현실을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그 사람의 공감능력이 굳게 닫혀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할 거에요. “나 하나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서, 공장식 축산과 동물복지가 해결될까?” 그렇지만 인류가 육류소비를 줄이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이 많은 인구에게 고기를 먹이려면 더 싸고 잔혹한 방식으로 사육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고기 소비량을 줄이는 것은 공장식 축산을 탈피하는 가장 적절하고 빠른 길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동참을 권유한다면 더 효과적인 저항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할 수 있어요. “고기를 하나도 안 먹으면 뭘 먹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물론 쉽지 않지만, 할 수 있어요. 오히려 저는 집에서 반찬을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외식음식을 도전해보면서 채식 이전에는 몰랐던 맛을 더 많이 알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화가 많이 줄어들었고, 마음이 건강해졌어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음, 그 마음이 저를 더 강하고 건강하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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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지영 (바꿈 청년네트워크 ㅣ 마이티프로게임단 엔터테인먼트 대표)


한국의 e스포츠 문화적, 경제적 파급효과는 대단하다. 1990년 후반 온라인 게임의 인기로 인하여 e스포츠는 게임 산업에 활력을 일으키로 성장의 발판에 큰 기여를 했다. 스타크래프트1,2 , 리그 오브 레전드,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등 많은 게임 종목에서 한국은 단연 세계 최고 정상자리에 오르면서 한국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2016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세계 게임인의 축제 블리즈컨에서도 스타크래프트2,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 오버워치가 한국 선수들이 3종목에 1위를 석권했다. 또한 LOL 2016년 월드 챔피언십에서도 1위는 작년에 이어 또 한국팀이였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e스포츠 시장은 과거에 비해 점점 불안정하며 주체별로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이 정립 되어 있지 않고 e스포츠의 구성 주체들이 활성화에 대한 필요성은 모두 공감하지만 실질적으로 확대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반 스포츠에 비하여 e스포츠 리그에 대한 시청과 콘텐츠 소비에 대한 인식도가 낮고 스폰서이 유입 또한 e스포츠에 대한 투자 가치에 인식 부재가 크다.

 

이렇게 취약한 환경에서도 우리나라는 전세계 프로게이머들중 단연 많은 게임 종목에서 선수들이 최정상에 위치해 있지만 스타급 프로게이머들도 현재 해외 진출을 하며 많은 인재가 떠나는 상황이 발생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수 없을 만큼의 연봉과 복지를 보장받고 중국으로 이적을 하고 처음부터 중국 데뷔를 하는 프로게이머도 상당하다.

 

현재 중국 정부에서는 e스포츠를 정부 사업으로 보고 앞으로 확대 하기 위해서 기업 및 프로게임단에게 2만평의 부지와 금전적 지원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고 실제로 중국 기업들과의 미팅을 하며 e스포츠 트레이닝 센터의 정부지원 방침을 들었다. 현재 중국의 많은 기업에서는 한국 선수, 감독, 코치 영입에 열을 올리며 한국의 트레이닝 노하우와 시스템을 중국에 도입시키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그로 인해 프로게이머들이 해외진출을 하며 비자, 계약서, 수익, 팀내의 징계 등 문제들도 생기고 있다. 대부분 해외진출 어린 프로게이머 선수들들이 현재 관광비자로 출국을 하며 계약에 관한 문제들도 어디에 도움을 받을수 있는곳이 없고 체계도 잡혀 있는 않은 실정이다.

 

e스포츠 종주국으로서 한국은 내실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지원 및 정책 방안이 다소 부족한 상황이고 게임을 중독, 마약이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과 규제 등 새로운 산업적 활성화는 커녕 정부에서나 협회에서나 방관하는 부분이 안타깝다.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르면 한국은 더 이상 e스포츠 강국이 될 수 없다. 현재 국내의 e스포츠 산업의 실태의 파악하고 진단하여 앞으로의 수익 모델을 구축하고 e스포츠 종주국으로써의 위상과 산업이 활성화 될수있도록 선수 보호와 경기력 유지, 한국 e스포츠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도 법적, 제도적인 보완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e스포츠가 다른 스포츠와는 다르게 E(인터넷)스포츠이기 때문에 그것에 맞는 정식 교육제도와 정부의 정책 사업, 아마추어 육성 사업 등 e스포츠의 발전을 위한 체계와 구단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단, 미디어, 후원기업, 게임 제작사, 소비자들이 힘을 합쳐 적극적으로 정부의 기반 마련될수 있도록 제안이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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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혜진(바꿈 청년네트워크 / 청년문화포럼 활동가) 

얼마전 '서든어택2' 는 여성유저들에게 수많은 질타를 받으며 논란 속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그 논란의 중심에는 여성 캐릭터 '미야'와 '김지윤'이 있었다. 특정부위의 과도한 비율, 아슬아슬한 노출을 감행한 아이돌스타가 몸에 맞지도 않는 샷건을 들고 전장에 등장한다. 애교 있는 목소리로 적을 유혹하는 그녀들은 총에 맞아 쓰러질 때조차 특정부위가 클로즈업 되어 보란 듯이 엎어졌다. 12세 이용가라는 '클로저스' 속 레비아라는 여성캐릭터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3세의 연령에 성인의 체형을 가진 이 캐릭터는 온갖 아양을 부리면서 유저에게 복종할 것을 약속하고 어린아이처럼 행동했다. 잔 근육에 힘 있고 강한 목소리를 가진 남성캐릭터에 비하면 여성캐릭터들은 공교롭게도 무기 하나도 들기 어려운 가녀린 팔로 말도 안 되는 묘기를 부린다. 전장의 아이돌' 로 홍보되는 여성캐릭터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노출된 아이들은 게임 속 여성의 무분별한 노출에 여성의 몸, 여성의 존재 자체를 대상화해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일부 게임에서 논란되는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호흡되어 온 무자비한 생각들ㅡ 이를테면 여성의 성상품화, 성차별ㅡ에서 오는 비극의 극단적 예이자 우리가 외면한 현실이다. 게임유저의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핑계아래 게임 내 여성 캐릭터는 다소 비현실적인 섹스심볼로 창조되고 소비되어왔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천천히 변화하고 있다'

툼레이더의 '라라크로프트'가 그러했고, 오버워치의 '아나'가 그러했다. 죽음의 위기에서 늘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라라크로프트의 다소 부자연스러운 노출 의상은 급기야 게임의 완성도를 저하시켰고, 그녀는 창조되어진지 20년 만에 핫팬츠와 탱크톱을 버리고 몸에 맞는 옷을 입게 되었다. 서든어택2의 여성캐릭터 삭제와 동시에 오버워치에는 '아나'라는 캐릭터가 등장했다. 그녀는 여성 캐릭터로는 이례적으로 장애를 가진 60세 여성이다. 그녀의 흰 머리는 두건 사이로 세차게 튀어나와 거친 인상을 주기도 했다. 불필요한 노출을 최대한 줄여 캐릭터의 개성을 살려낸 오버워치는 실제로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랑을 받으며 출시이래로 부동의 1위를 지켜나가고 있다.

게임에서의 성차별이 전 지구적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을 위한 판타지 속 여성이 헐벗은채로 괴물과 씨름하는 다소 이질적인 광경에서 오는 여성들의 불편함이었다. 이러한 논란이 제기되면 급하게 제거되거나 수정되어버린 여성캐릭터들은 성 상품화되고 질타 받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미야'와 '김지윤' 같은 여성캐릭터에 여성유저들은 불쾌감뿐만아닌 동정심마저 갖는다. 누군가의 무지한 판타지 속에서 탄생된 그녀들의 억울한 죽음이 그것이다. 개발자들이 유저들의 분노가 시사하는바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제2의 '미야'와 '김지윤'은 또다시 벼랑끝에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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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공직자들이 자신의 자서전에 비밀기록을 쓰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외교 및 안보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일이다. 


그중 압권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퇴임 당시 고위 공직자들이 반드시 참고해야 할 비밀기록을 청와대에 단 한 건도 남기지 않고, 비밀기록 전체를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묶어 이관했다. 


비밀기록을 대통령지정기록물로 지정하여, 그 기록은 이명박 전 대통령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퇴임 2년 후 이 전 대통령은 자서전을 통해, 수많은 비밀기록을 폭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통령 재직 시 중국 원자바오 총리와 나눴던 대화, 북한 밀사와 나눴던 대화 등 내밀한 비밀기록을 공개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그 때문인지 책은 지금까지도 잘 팔리고 있다.


유사한 사례는 반복되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2015년 10월 출판 기념 기자회견에서 남북이 핫라인으로 수시로 직접 통화했다고 국가비밀을 누설했다. 


국정원은 이례적으로 서울중앙지법에 이 책에 대한 판매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고, 검찰에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하지만 국정원도 1급 비밀이던 2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전 세계 정보기관 중 최초일 것이다.


최근 송민순 전 장관이 회고록을 통해 2007년 당시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이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을 앞두고 북한의 의견을 물었다고 주장해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비밀 누설의 당사자였던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송민순 전 장관에 대해 비밀 누설이라고 지적했다는 점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현실이다.


시민들은 이런 사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시민의 ‘알 권리’는 정보공개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정부가 비밀·비공개 기록을 잘 관리하는 것도 포함한다. 특히 보안업무규정에서 정의하고 있는 비밀기록은 누설될 경우 대한민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되고 전쟁을 일으키며, 국가의 방위계획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이다. 이런 이유로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에게 재직 및 퇴직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지키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전직 공직자들의 비밀 누설 행위를 비판해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비밀 누설을 위법행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논쟁으로 확산시키고 그 결과 자신의 위상이 커지니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중대한 국가 문제를 다뤘으니 기록이 없다면 문제이고, 있다면 봐야 한다’면서 대통령지정기록물 열람을 주장했다. 


전·현직 공직자들이 비밀기록을 폭로하고, 이로 인해 정치적 논쟁이 발생하면 대통령지정기록물을 열람하자는 패턴이 지난 몇 년간 반복돼왔다. 아마 이번 건도 시민단체의 고발이 있었으니, 검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지정기록물에 대한 영장을 검토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 관련 기록이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겨 놓은 대통령기록물을 사회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개탄스럽다. 대통령기록물은 역사적 평가를 위해 보존하는 것이지, 이런 정치적 공방에 고인의 정신을 훼손하라고 남겨둔 것이 아니다. 전·현직 공직자들이 자서전을 통해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공직자들은 자서전을 집필할 때 관련 국가기관에 세심한 법률적 검토를 받아야 한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회고록 사태는 이런 절차들을 생략해 발생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자서전이나 회고록에 정치적 목적을 위해 비밀기록을 양념처럼 섞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자서전 등을 통한 무책임한 폭로와 정국전환, 대통령지정기록물 열람 논쟁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반복되는 명예훼손. 고인은 말이 없어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전·현직 고위 공직자들의 이런 일탈 행위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낭떠러지로 밀어낸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전진한 ‘바꿈’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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