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일요일 – 2차 숙의 토론회 3일차


07:58 아침식사

“사례비는 언제쯤 들어올까요?” 아침식사 도중 사례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시민 참여단 활동을 모두 마치면 나라에서 돈을 준다. 적지 않은 돈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금이다. 얼마나 삥을 뜯길까? 나는 대충 10% 정도를 예상했다. 내 월급에서 매달 그만큼 강탈해가니까. 그런데 이건 월급이 아니잖은가? 투 머치 토커 내 룸메이트는 14%를 가져간단다. 엥? 나는 뭘 그리 많이 가져가느냐고 되물었지만, 본인도 모른단다. 나는 약간 실망했다. 큰일이다!

실망감을 안고 터덜터덜 방에 올라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조금이라도 밀린 일기를 쓰기 위해. 몇 자 적고 그냥 침대에 벌렁 누웠다. 너무 졸리다! 8시 30분쯤 되자 어서 빨리 지하 1층 비전홀로 내려오라는 재촉 방송이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틈틈이 “청색 폴더 휴대전화를 습득하신 분은 1층 안내 데스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요원한 희망을 바라는 메시지가 객실을 굴러다녔다.


08:42 스트레칭

무대에 어제의 그 헬스 아저씨가 나와 있었다. 오늘은 허리를 곧추세워 의자에 바르게 앉는 법을 알려줬다. 그는 평소에 늘 이렇게만 앉으면 평생 허리 디스크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09:02 발표자와 질의응답

각 의제 발제자들이 나와 마지막으로 시민 참여단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이번엔 실시간 문답이 아니다. 참여단의 ‘질문’이 어젯밤 각 의제 발제자들에게 전달됐다. 즉, 분임 토의에서 모은 조별 질문과 그동안 익명의 시민 참여자들이 계성원 숙소 곳곳에 포스트잇으로 붙여 놓은 질문들 말이다. 대략 100개쯤 되는 질문이 어젯밤 11시에 발표자들 숙소로 전달됐고, 이들은 고작 몇 시간 동안 밤을 꼬박 새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다. 

각 발제자는 20분간 질문에 대한 답변을 발표 형식으로 시민에게 보고한다. PPT를 활용하든 아니면 그냥 구두로 발표하든 그것은 자유다. 순서는 의제1→의제3→의제4→의제2. 그동안 사회를 봤던 분이 잠시 내려가고 좀 더 연배가 있는 푸근한 인상의 여자 분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왜지?’ 아무튼 새 사회자가 자신을 소개하고 바로 의제1 발제자를 무대 위로 불렀다. 아래는 발표 순서대로 각 의제의 문답을 정리한 것이다.


의제1에 대한 참여단의 질문

1) 정시 확대 시 고교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근거가 있는지?→학종으로 인한 고교 교육 붕괴보다는 낫다.

2) 정시 비율의 상한선은 왜 45%인가?→그 이상도 가능하다. 다만, 현재 고교 내신 3등급 이하 학생이 전체 학생의 90%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려면 최소 45%까지는 정시가 확대되어야 한다.

3) 수능으로 도덕성을 평가할 수 있는가?→그럼 다른 시험은 평가 가능하냐?

4) 의제4와 방향성이 유사한데, 의제4와 공약을 합치면 어떤가?→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공론화위원회의 룰과 어긋난다.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가 다르다. 그래서 합칠 수 없다.

5) 정시, 즉 수능은 과거 회귀적이다.→탐구 영역 확대, 논술 도입(한국형 바칼로니아), 수능1과 수능2 분리, 수능 2회 시행 검토 등 수능 자체를 대대적으로 수술할 의사가 있다.

6) 학종이 그렇게 문제가 많으면 아예 일반 학종은 폐지하지?→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한다. 우리가 수능을 강조하듯 누군가는 학종의 가치를 주장한다. 제도가 아무리 밉다고 해서 함부로 그렇게 폐지할 수는 없다.

7) 학종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은?→학생부 위조·조작 시 처벌 대폭 강화, 비교과 항목+서류 비율 15% 이내로 제한, 원서 제출 시 대학 기부자 및 관계자 명단 필수 제출, 전형 결과에 대해 전형자 본인에게 정보 제공.


의제3

1) 대학 자율화에 대한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하다.→투명성 제고 노력, 사교육 배제 노력. 노력 중이다.

2) 대학별 자율을 보장함으로써 발생하게 될 공정성 논란은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블라인드 평가, 전형 기준 공개, 자체 감사, 이의신청 절차 도입.

3) 현행 유지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유지가 최선의 변화.


의제4

1) 왜 서울대 중심으로 자료를 준비했나?→외부에 공개된 자료가 서울대 자료뿐. 나머지 사립대는 정보를 꽁꽁 감춰.

2) 지금까지 네가 발표한 자료는 합격자의 비율뿐이다. 지원자에 관한 자료도 있는가? 만약 특목고 학생 100명과 일반고 학생 900명이 지원해서 특목고 학생 90명, 일반고 학생 10명이 합격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특목고 학생 10명, 일반고 학생 90명이 합격한 것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지원자 현황을 모르니까, 정말 서울 상위권 30개 대학이 특목고 학생만 합격시킨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일반고 학생들이 지원 자체를 하지 않아서 특목고 학생이 많이 합격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그 정보도 모른다. 대학이 공개를 안 한다.

3) 수시(학종) 강화 이후 사교육비가 증가됐다고 하지만 그건 우리나라 물가 상승률 영향 때문이지 않을까?→2007년부터 2017년까지 사교육비는 40% 증가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의 물가 상승률은 27%다. 수시(학종)가 사교육비 증가의 유일한 원인이라고는 말 못한다. 다만, 다양한 원인 중 하나일 수는 있다. 반대로, 수능이 도입된다고 해서 사교육비가 낮아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건 거짓이다. 하지만 오로지 수능 때문에 사교육비가 오른다는 말도 거짓이다.

4) 의제4의 제안을 30개 대학이 거부한다면?→그러니까 여러분의 압도적 지지가 필요하다. 더불어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최소한의 법적 효력을 기대할 수 있다.

의제2

1) 수능 절대평가가 사고육비 폭증을 멈출 수 있는가?→수능 과목 중 영어 과목이 절대평가로 도입되자 해당 과목의 사교육비 증가율이 대폭 줄었다. 나머지 과목도 절대평가로 전환되면 영어 과목의 길을 밟을 것이다.

2) 절대평가를 도입하고 학종을 확대하자는 의견은 의제2뿐이다. 왜 1:3의 구도인가? 그만큼 너네 의견이 현실성이 낮고 인기가 없다는 방증 아닌가?→설명하자면 복잡하다. 주최 측의 ‘야로’가 있었다.


발표자가 열심히 떠들어대는 동안 내 오른쪽 건너편에 앉은 젊은 남녀 몇 명은 허벅지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쉼 없이 자판을 두드렸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고 황홀해서 나는 넋을 놓고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마치 기관총을 퍼붓듯 멈추지 않고 자판을 눌렀다. 이 노트북 군단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랑 똑같은 명찰을 맨 것 같은데? 설마 이들도 시민 참여단인가! 

내가 모든 질문과 답변을 적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의제별 문답의 개수를 보면 각 의제의 발제자들이 어떤 태도로 시민 참여단 질의에 대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의제1과 의제4는 시민의 질의 내용을 충실히 모아 자기들의 역량 안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했다. 그게 보였다. 시민이 던진 ‘질문’의 원문 그대로를 거의 유지해 화면에 띄웠으며, 해당 질문에 관한 답변만 했다.

하지만 의제3은, 처음 보는 발표자가 등장해 10분 내내 PPT는 한 장도 넘기지 않으면서 자기 소개와 ‘시민 참여단이 의제3을 찍어야 하는 이유’에 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급기야 도중에 시민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지금 이 시간은 시민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지 너네 맘대로 떠드는 시간이 아닙니다요”라고 말했으나, 해당 발제자는 막무가내로 자기가 준비한 멘트를 읽어나갔다. 그는 고등학교 교사로 5년, 국립대학 교수로 5년, 사립 대학 교수로 10년을 재직한 뒤, 수능 출제 위원으로 일하다 현재는 한양대 입학처에서 처장으로 일하고 있다.

질의응답 발표에 대해선 사전에 정교한 룰을 만들지 않고, ‘각자의 방식대로 제한 시간 안에서 진행한다’고만 합의한 탓이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야유를 보냈고 의제3 발표자를 외면했다. 20분의 시간 중 10분을 그렇게 ‘자기네 표를 다른 의제로 넘기는 데에’ 충실히 사용하고, 두 번째 발표자가 올라왔다. 그 역시 PPT를 넘기며 말을 했다는 점만 다를 뿐, 꿋꿋하게 자기네 의제의 장점과 반복적으로 늘어놓았다. 그들은 모두 모 대학의 입학처장들이었다. 

의제2 발표자로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 나왔다. 한 명은 수학 교사, 한 명은 대학생이었다. 뉴페이스였고 진정성 있는 발표를 해 사람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대학생에게 이런 발표는 너무 큰 무대였을까. 제한시간 20분 만에 준비한 발표의 반도 마치지 못하고 엉성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처음엔 앳된 청년이 무대에 올라와 ‘와’ 하는 반응이었지만 갈수록 드러나는 발표 내공 탓으로 사람들에게 아무런 존재감도 남기지 못한 그렇고 그런 질의응답 발표가 되었다.


10:34 5차 분임 토의

쉬는 시간 없이 바로 분임 토의장에 모여 조별로 이야기를 나눴다. 바야흐로 분의 토의도 이제 막바지에 임박했다. 알량한 시민의식 때문이었을까? 근무시각을 15분 남긴 노동자가 일과의 절반을 농땡이 친 죄책감을 씻고자 마지막 15분간 열과 성을 다해 노동하는 것처럼, 나도 마지막 토의만큼은 좀 더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임하겠다는 다짐을 가슴에 새기고 가장 먼저 자리에 앉아 토의를 기다렸다. 

“저기… 제가 할 말이 있는데요. 지금 보니까, 대입 개편 공론회 자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개념이 없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절대평가가 뭔지 상대평가가 뭔지도 모르고, 우리가 뭘 결정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분들이요. 그리고 학종에 대해서 그저 나쁜 제도, 고쳐야 학 폐단, 이렇게만 알고 계시고, 그 구체적인 본질과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론회 토의에 참여하겠다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정말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우리 토의 방식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요. 그냥 돌아가면서 발표만 하는 거지, 거기에 대해 반문을 하거나 토론을 하거나 그런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대입 제도에 전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아이들의 미래 입시 제도를 결정한다는 것이…”

이 발언을 한 40대 여성은 학종을 준비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겨냥한 건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조에서는 ‘학종’에 대해선 매우 비판적인 여론이 지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EBS에서 방영한, 대놓고 학종을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왔다는 시민도 있었다. 나 역시 그런 비판에 동참했다. 아마 이런 분위기가, 즉 자신의 자녀의 대입 전략의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인 ‘학종’을 비판하는 여론이 무비판적으로 양산되고 그것에 대한 어떠한 반박도 이의 제기도 할 수 없는 토의의 구조 자체가 그녀로서는 무척이나 답답하고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당황한 모더레이터가 입을 열서 대답하려는 찰나, 문제 제기를 한 여성의 옆에 앉은 우리 조 최고령 노인이 말을 끊었다.


“모더레이터 양반, 내가 한 가지만 묻겠소. 이게 토론이요?”

“…”

3초간의 정적. 모더레이터는 아까보다 약간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평정심을 찾아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니 그냥 묻는 거요. 이게 토론이요?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돌아가면서 자기 할 말만 하고, 또 앞에서 질문 던지면 쪼르르 대답만 하는 게 무슨 놈의 토론은 토론이요? 발표지!”

토론: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각각 의견을 말하며 논의함.

발표: 어떤 사실이나 결과, 작품 따위를 세상에 널리 드러내어 알림.

아마 노인은 쌍방향적인 대화를 원했을 것이다. 나의 주장과 너의 주장이 엇갈려 서로 부딪치고 그 마찰 안에서 새로운 대안이 불쑥 튀어나와 논리와 사고의 영역을 확장하고 이렇게 넓어진 운동장에서 만인만색의 다채로운 의견이 뒤엉키고 뒤섞이는 진정한 토론!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경험 안에서의 토론이란, 자칫 누군가의 일방적인 독재로 치우치기 쉬우며, 따라서 대화에서 소외된 자들은 저마다의 공상에 빠져 이 지루하고 한심한 모임이 1분이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람과 동시에, 대체 수많은 입을 틀어막고 20분 째 혼자 떠들고 있는 저 독재자의 뇌 구조는 어떤 모양일지 상상하며 세상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시간이 흐르는 조금 슬픈 풍경이다.

주최 측이라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들은 운동장 사방의 문을 열어젖혀 말과 말이 포개지고 그중에서 참된 말이 바로 서는 정의로운 토론을 마음으로는 지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문을 굳게 잠그고 중립자의 단호한 통제 아래 시민의 의견을 청취만 하는 소극적인 토의 방식을 선택했다. 이것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방법도 아니고, 더 좋은 대입제도를 숙의하려는 고민의 결과도 아니었다. 그저 정해진 시간 안에 시민들이 분임 토의를 끝내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세운 숙의 일정을 충실히 소화하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 과정 안에서 시민들은 자신이 민주주의 정책 수립에 동참했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집으로 역시 ‘사고 없이’ 돌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모든 시민이 집에 돌아간 뒤 그들은 적막한 사무실에 앉아 2박 3일간 시민들이 쏟아낸 의미 있는 혹은 무의미한 의견들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며 문서화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내가 노인이 꿈꾸는 아름다운 시민 간 토론의 가치를 무시하거나 폄훼하지 않는 것처럼, ‘사고 없이’ 모든 일정이 조용히 끝나기만을 바라는 그들의 윤리 의식도 존중한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시민이 참여’해 어떤 갈등이나 우여곡절 없이 공론화 과정을 완수하고 정연한 논리에 의거한 ‘시민의 공지’를 모아 교육부에 건의한다는 공론화위원회의 절실한 소망을 지지한다. 나는 내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이 대입 제도 개편을 위한 공론화 과정이, 거대한 정치적 요식행위라고 생각했다. 쇼! 내용보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결론에 도달하든, 시민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의제는 강력한 동력을 얻어 대한민국 입시 제도의 영향력 있는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야 한다. 나는 이 2박 3일간의 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노인은 지난 2박 3일간 꽤나 오래 참은 것 같았다. 모더레이터의 침착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답답함과 속상함이 배가된 노인은 급기야 무언가를 메모지에 휘갈기더니, 추후 주최 측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며 모더레이터에게 “지금 이 의견은 당신의 의견이요? 아니면 주최 측의 방침이요?”라며 거듭 물었다. 모더레이터는 “주최 측 방침입니다, 어르신”이라고 답했다.

그는 첫 분임 토의 때 시민 참여단 위촉장에 김영란 위원장의 직인이 찍혀 있지 않다며 불평을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4개의 의제가 이미 준비된 마당에 그것들 안에서만 선택을 해야 한다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던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4개 의제 외에 다른 대안을 제시하면 그것이 공론화위원회로부터 2022학년도 수능 개편안으로 채택될 수 있느냐고 질문을 던진 사람이었다. 모더레이터 선생님도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왜 저렇게 될까?’ 노인의 주장이 합리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총 9명의 눈과 귀가 버젓이 열려 있는 가운데, (대체로 내가 보기에는) 다수의 의견과 방향을 달리하는 문제 제기를 저렇게 당당하고 진지하게 발언할 수 있는 소신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될까?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소신을 지키는 것은 내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는 귀를 활짝 열어 다수의 의견이 어디로 쏠리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내 자존감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나의 소신을 적극적으로 변형해 그 다수 의견 안에 안착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내게는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아니,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이런 ‘별절’을 잘 해낼 자신이 있다. ‘나의 생각은 여러분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를 쳐다보지 말아주세요. 저는 반대파가 아닙니다.’ 

그나저나 어린 친구들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묵묵히 사태를 지켜만 봤다. 오히려 열을 올리고 얼굴이 붉어진 것은 나를 포함한 30대 이상 연령층이었다.

40대 여성과 노인의 태클은, 숙의 토론회 방식에 대한 거대한 문제 제기였으나, 한편으론, ‘학종에 대한 지나친 여론의 맹목적인 비판’을 의식한 최후의 발언이었다고도 생각된다. 적어도 내가 느낀 바로는, 노인 역시 ‘학종 확대와 절대평가 전면 시행’을 주장하는 의제2를 지지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비판하는 대상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학종을 비난하는 사람들’이었고, 그 안에는 나를 포함한 조원들 서너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을 학부모라고 소개한 40대 여성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학종을 비난하잖아요!”라고 울먹이듯 말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나도 사실은 사실 마음이 좀 불편했다. 

결국, 의제 간 다툼의 국면은 개별 분의 토임 내부의 대립 국면에도 스며든 것이다. 우리가 <100분 토론> 식의 끝장 토론을 벌였다면, 어쩌면 많은 조에서는 ‘학종론자’ 대 ‘수능론자’의 흥미진진한 토론 대결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걸 못 봐서 너무 아쉽다. 나는 수능론자라고 나를 정체화했다. 둘 다 장점이 분명하고 단점은 더 분명하다. 이런 와중에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혹은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다’ 식의 태도는 틀린 태도는 아니지만 좋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부도, 교육부도, 대교협도, 교육위도 결정하지 못한 주제에 대해 0이든 1이든 간에 아무튼 일도양단을 하라고 나라가 모은 사람들이다. 여기서도 우유부단한 양비론을 펼치며 모든 의제에 좋은 점수를 준다면, 그건 사실상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시민 한 명은 하나의 명징한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모은 공지의 권위가 더 무거워진다.


11:56 2차 분의 토론 (마지막 토론)

마지막 토의다. 전체 숙의 과정에 대한 소감을 간략히 나눴다. 노인은 “패스!”를 외쳤다.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이 세상 모든 행사의 마지막에 나오는 그렇고 그런, 뻔하디 뻔한 적당히 감동적이고 적당히 우스우며 적당히 진지하고 적당히 유쾌한 그런 이야기들이 약간의 단어가 바뀌고 그 순서가 변형되고 길이가 조절된 채 공기 위를 오갔다. 

“이번 숙의에 참여하며 많은 걸 배우고 느꼈습니다. 이런 숙의 토론회라는 과정이, 세상의 문제와 원리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데에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답했는데, 모더레이터는 해머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경악하며 “너무 멋진 말씀”이라고 극찬했다. 각자의 발언이 끝날 때마다 따듯한 박수가 이어졌다.


14:01 

내게 마이크가 왔다. 어제 못다 한 조별 질의를 던질 기회를 준 것이다. 총 14개 조가 기회를 얻었다. 모더레이터가 내게 슬쩍 다가와 “우리 조는 의제 3에 대한 질문을 준비하기로 했어요. 어제 이야기 나눈 것들을 제가 정리했는데 이거(A4 용지) 보고 알아서 잘 좀 말해줘요.” ‘오! 나도 잘하면 카메라 한 카뜨 받을 수 있겠는데?’ 심장이 살며시 뛰기 시작했다. 아직 조원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우리 조 차례가 오면 시치미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발표하고 딱 앉아버려야지.’ 나는 마치 최후의 날 선택받은 마지막 신의 아들이 된 것처럼 A4 용지를 한손에 꽉 쥐고 질문 멘트를 수도 없이 반복해 연습했다. 다행히 실수 없이 매끄럽게 질문했다. 그래도 요란한 함성과 박수소리가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앵콜! 앵콜!”까지는 아니더라도 “우와!”라는 탄성은 나올 줄 알았는데.

우리 조와 마찬가지로 어제 질문의 기회를 얻지 못한 조들이 차례대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여자는 없지?’ 발표자들은 죄다 남자였다. 나를 포함해 총 14팀의 대표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중 여자는 두 명. 나머지는 모두 남자였다. 왜일까? 아무도 듣지 않는 조별 질의 발표가 이렇게 끝났다.


14:20 의제별 마무리 발표

이제 발제자가 시민 참여단을 향해 발언할 수 있는 기회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각 의제별 발제자에게 마무리 발표의 시간 10분씩이 주어졌다.


15:16 최종 설문

1차, 2차 설문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설문 역시 ‘한국 리서치’의 이사라는 이가 나와서 진행했다. 무려 1시간 동안 꼼꼼하게 진행됐다. ‘전체 숙의 과정에 대한 소감’, ‘추후 대입 제도 개편에서 반드시 다뤄야 할 것들’에 대해 서술할 수 있는 칸도 있었다. 조악한 필체로 내 의견을 멋대로 썼다. 나는 결국 1안과 4안을 지지했다(5점).  2안에 대해선 3점을 줬다. 지금 생각하면 1안과 4안 빼고는 모두 1점을 줬어야 했다. 설문이 진행된 비전홀 안에는 시민 참여자와 참관인, 어르신들을 도울 모더레이터 몇 명만 남고 모두 밖으로 쫓겨났다. 서른 문항 정도 되는 설문을 하기에는 1시간이 상당히 긴 시간일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꼼꼼하게 질문을 확인하고 답변을 고치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16:33 폐회사

벌써 폐회사라니. 김영란 위원장에 무대 위로 올라왔다. 역시 딱 한마디만 기억에 남는다. 

“이 뜨거웠던 여름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드아!”

당초 시민 참여단 모집 인원은 400명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포기하거나 불참하는 인원이 발생할 것을 대비해 넉넉하게 550명을 뽑았단다. 이런 공론화 프로그램을 시행하면, 세계적으로 대략 80%의 참가율을 보인다고 한다. 100명을 선발하면 80명만 남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공론화의 최종 참가율은 89%였다. 550명 중 490명이 남았다. 이들은 모두 정부로부터 사례금을 받을 것이다. 만약 사례금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절반? 30%? 아니지, 아예 550명 자체가 안 모였겠다. 시민 참여단 중 권역별 대표 9명이 위원장으로부터 직접 인증서를 받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의식을 끝으로, 2박 3일간의, 아니 1차 숙의 토론회가 열린 2018년 7월 14일부터 오늘 7월 29일까지 정확히 3주간의 일정이 종료됐다. 내일은 월요일이다.


17:04 귀가 버스 탑승

비전홀에서 나온 순간,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거룩한 실험에 동참한 자랑스럽고 당당한 시민들은 금세 평범한 개인으로 돌아갔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추잡하며 적당히 까칠한, 지극히 평범한 개인들… 그들은 은근히 서로의 어깨를 밀치고 앞 사람의 뒤꿈치를 발로 가격하고 가벼운 언쟁을 벌이며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는 버스에 오르기 위해 투쟁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소시민일 뿐이다.

사람들은 왜 버스 정류장에만 가면 강박적으로 변할까? 참혹하고 끔찍했던 1950년대 전란의 경험 때문일까, 아니면 어딜 가도 꽉 막히고 어느 버스를 타도 만원인 지옥 같은 한국의 대중교통사를 몸에 각인할 덕분일까. 전라도부터 강원도까지 전국 각지에서 온 시민 참여단을 다시 일상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수많은 버스가 동원되었고, 그 많은 버스를 한꺼번에 수용하기에는 계성원의 주차장을 턱없이 협소했다. 주최 측은 혼잡을 예방하기 위해 순차적으로 차를 배차해 시민들을 비전홀에 묶어뒀다. 우선 전라도, 경상도 등 아랫동네로 향하는 버스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슬쩍 나가서 보니, 20대의 앳된 스태프들이 정신없이 오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난리도 아니었다.

“남원 출발이요!”

“포항 대기, 대기!”

“아직 서울 보내지 마세요!”

“인원부터 확인해!”

미리 로비에서 대기를 타고 있던 나는 여자 스태프가 “서울역 나오세요!”라는 멘트를 날림과 동시에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주차장으로 달려가 ‘서울역 1호’ 버스 대기 줄에 1번으로 섰다. 나는 내가 시민 참여단으로 선정됐을 때보다 더 기뻤다. 

버스에 올라 지난 2박 3일간 내가 받은 것들을 살펴봤다. 

에코백

물병

볼펜

1차 숙의 토론회 안내서

1차 숙의 토론회 발표 자료집

2차 숙의 토론회 안내서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숙의자료집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시민참여단 2차 숙의토론회 <공론화 의제 발표 자료집>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숙의 근거자료

샌드위치

총 6끼의 식사

각종 다과

호두과자

호두과자 세트를 사주지 말고 그냥 돈으로 주지. 지난 1차 숙의 토론회, 그리고 이번 2차 숙의 토론회에는 돈이 얼마나 투입됐을까? 아래는 내 통밥으로 계산해본 시민 참여단 경비 내역. 시민 참여단에게 주는 ‘사례금 65만 원’을 빼곤 모두 내 상상이다.


※ 중도 포기자를 고려하면 시민 참여단 인원수는 총 490명이지만, 실제 550명이 전원 참석할 경우를 대비해 모든 항목을 준비했을 것이므로 모든 항목은 550명을 기준으로 계산

※ 단, 스태프 등 참여단 지원 인력을 100명 규모라고 생각하고 이를 시민단 숫자에 합산하였음(650명)

※ 의제 발제자 및 공론화위 운영 인건비는 제외

※ 기자단 지원 비용 및 사진 기사 비용 제외

※ 지극히 개인적으로 계산한 금액이므로 신뢰하면 안 됨


시민 참여자 사례금: 65만 원 곱하기 490명 = 318,500,000원

버스 대절(한 대당 100만 원으로 일괄 계산): 1차 20대, 2차 20대 = 40,000,000원

공간 임대

 1차: 서울 2000만 원, 부산 1000만 원, 광주 1000만 원, 대전 1000만 원 = 50,000,000원

 2차: 계성원 2박 3일간 7500만 원 = 75,000,000원

식대

 1차: 1식-도시락(1만 5000원 곱하기 650명) = 9,750,000원 

 2차: 6식(2박 3일)-계성원 식당(8000원 곱하기 6식 곱하기 650명) = 31,200,000원

자료집 출력비

 1차 숙의 토론회 안내서(16쪽, 사철제본)-250원 * 650부 = 162,500원 

 1차 숙의 토론회 발표 자료집(300여 쪽, 스프링제본)-1000원 * 650부 = 650,000원 

 2차 숙의 토론회 안내서(16쪽, 사철제본) * 650부 = 162,500원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숙의자료집(300여 쪽, 무선제본)-1000원 * 650부 = 650,000원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시민참여단 2차 숙의토론회 공론화 의제 발표 자료집(300여 쪽, 스프링제본)-1000원 * 650부 = 650,000원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 숙의 근거자료(400여 쪽, 무선제본)-1150원 * 650부 = 747,500원 

여행자 보험 가입

 1차 550명 곱하기 1만원 = 5,500,000원

 2차 500명 곱하기 2만원 = 11,000,000원

인건비

 스태프 30명 곱하기 30만원 = 9,000,000원

 모더레이터 50명 곱하기 50만원 = 25,000,000원

기타

 다과 세트(2회)-1500원 곱하기 1300개 = 1,950,000원

 간식 떡(2회)-3000원 곱하기 1300개 = 3,900,000원 

 다과 쿠키 및 차(1인당 2000원) 곱하기 650명 = 1,300,000원

 야식 샌드위치-10000원 곱하기 650개 = 6,500,000원

 에코백(1차, 2차 각 1장 제공)-2500원 곱하기 1300개 = 3,250,000원 

 기념 볼펜(1차, 2차 각 1장 제공)-500원 곱하기 1300개 = 650,000원

 생수-200원 곱하기 2000개 = 400,000원

 천안 호두과자 선물세트-1만원 곱하기 1000개 = 10,000,000 

이걸 550으로 나누면 ‘대입 제도 개편을 위한 공론화 위원회 시민 참여자 1인당 투입 경비’가 나온다. 물론 여기에 포함 안 된 수많은 항목이 있으므로, 실제 금액은 이 금액보다 훨씬 더 큰돈일 것이다.

총계 = 605,922,500원

나누기 550명 = 1,101,677원


1인당 약 110만원(생각보다 적네?). 그런데 내가 만약, 그냥 피서 왔다 생각하고 먹고 싸고 자기만 하고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낭비일까. 550명 중 자신의 몸값(?)을 충실히 해내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속으로 던지다 깜빡 졸았다. 

1등으로 버스에 올라 맨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지난 금요일 천안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을 때 앉았던 자리다. 40명 정도를 태울 수 있는 버스에 서너 자리만 빼고 꽉 찼다. 내 옆에는 체구가 큰 나보다 네댓 살 어려 보이는 남학생이 앉았다. 자리가 좁아 어깨가 살짝 닿았다. 나는 내 영역을 침범하는 그의 어깨가 몸서리치게 싫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대입 제도 개편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눴던 시민 참여단이었지만, 이제는 서울역까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가기 위해 각자의 공간을 사수하고, 필요하다면 상대의 공간에 내 팔을 밀어 넣어야만 하는 경쟁자가 됐다. 그는 내 팔걸이에까지 팔꿈치를 올려놓고 두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18:26 해산

다행히 버스는 1시간여 만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기사는 서울역 맞은편 남대문시장 방면 갓길에 차를 댔다. 뒤에 있던 시내버스 기사가 경적을 울리며 욕을 뱉었다. 기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한손에는 호두과자 세트를 들고 어깨에는 배낭을 맨 채 각자의 목적지를 찾아 급히 걸어갔다. 익숙한 얼굴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그들은 금세 인파에 휩쓸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 이 기록은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인간군상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무례한 관찰기이자, 결코 개선되지 않을 문제에 달린 불가능한 보기들 사이에서 방황한 한 시민의 설문 후기다. 끝.



-바꿈,세상을바꾸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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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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