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 토요일 – 2차 숙의 토론회 2일차


07:22 아침식사

잠을 자고 일어났지만 여전히 배가 불렀다. 그래도 아침식사를 거를 순 없지. 씻고 지하 2층에 내려갔다. 오늘 아침 메뉴는 우거지된장국. 룸메이트와 같이 먹었다. 게임회사에서 서버 관리를 담당하는 룸메이트 K는 나보다 다섯 살 많은 형인데, 말이 상당히 많다. 나는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에 적절히 질문함으로써 우리의 대화량을 성공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식사 후 부랴부랴 숙소로 돌아가 밀린 후기를 적고 이를 닦았다. 8시 40분에 비전홀에 모여 각 의제 발표를 들어야 한다. 6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잠자리는 편안했고 두터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을 정도로 에어컨은 강력했다. 


08:45 스트레칭

비전홀에 도착하니 무대에 건장한 남성이 서 있었다. 아침을 기분 좋게 시작하자며 주최 측이 마련한 몸 풀기 시간을 진행할 트레이너다. 코어 근육을 단련하는 요령을 배웠는데, 무엇이 어떻게 단련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빽빽한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워밍업 시간을 배치한 것은 무척 세심한 배려라 할 만하다. 

“여러분, 이것만 알면 죽기 전까지 척추 디스크에 걸리지 않습니다!”

트레이너는 마치 약장수 같은 말을 남기고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MC가 등장했다. 

“여러분, 잘 주무셨나요?”

“네!”

우리는 마치 말 잘 듣는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예쁘게 대답했다. 오늘 오전에는 본격적인 조별 토의를 하기 전 의제별 발제를 다시 듣는다. 한 의제당 20분의 시간이 배치되어 있고, 모든 발제가 끝나면 조별로 모여 각 의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힌다. 그럼 오전은 끝이다. 


발제 순서는 2→3→4→1. 이쯤에서 각 의제의 주요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의제1: 수능 상대평가 유지, 정시 비율 45%까지 확대, 학종 축소

의제2: 수능 절대평가, 학종 및 수시 현행 비율 유지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학종 비율 증가

의제3: 수능 상대평가 유지, 정시 비율 확대, 나머지는 현행 유지(구체적인 전형별 모집 비율은 대학 자율에 맡김)

의제4: 수능 상대평가 유지, 정비 확대 수시(학종) 축소(학종의 비율은 교과의 비율을 넘을 수 없음) 

※ 학종: 학생부종합전형, 교과: 학생부교과전형


‘대학이 학생에게 수능 최저 등급을 요구하는 것(수시의 경우)을 제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 역시 의제별 주장에 포함되었지만, 이번 토론회에서는 거의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굳이 정리하자면…


의제1: 수능 최저등급 현행 유지

의제2: 수능 최저등급 폐지

의제3: 수능 최저등급 현행 유지

의제4: 수능 최저등급 현행 유지


전체적으로 ‘의제2’와 ‘의제1·3·4’가 대립하는 구도다. 반대로 말하면 ‘의제1·3·4’ 간 차이점을 잘 보이지 않는다. 의제2는 유토피아를 말하고 나머지 의제는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 반대다. 현재 전체 대학 입시 전형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수시’다. 수능으로 대학을 가는 전형, 즉 정시의 비율은 2007년 참여정부 이후 급격하게 줄어들어 지난 2019학년도 대입 때 23.8%를 기록했고, 학종과 교과를 포함한 수시의 비율은 76.2%를 기록했다. 8:2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비율이다. 따라서 ‘절대평가 도입, 수시 강화를 통한 학교 교육 내실화, 학종 등 비교과 과목 평가를 통한 학생들의 자기 주도 학습 능력 제고 및 진로 탐색 유도’ 등 대체로 이상적인 비전을 제시한 의제2가 현행 대입 제도의 모습만을 생각한다면 가장 현실적이었다. 


나머지 3개 의제는 20%대까지 쪼그라든 정시를 최소 30%대, 최대 50% 선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들의 주장은 결국 다섯 개의 보기 중 하나의 정답을 찾아야 하는 객관식 시험지 안에 학생들의 꿈과 미래를 밀어 넣는 과거 회귀적 대안이었지만, 수시 위주의 현행 대입 제도를 정시 위주로 다시 개편하겠다는 점에서 대단히 개혁적이었다. 이것은 내가 자의적으로 해석한 ‘현재까지의’ 진영 논리다. 두 진영 간 가장 큰 차이는 학종에 대한 관점이다. ‘학종은 미래 교육을 선도할 가치 있는 대입 전형 방법이다.’ 이것이 의제2의 전제다. ‘학종은 학생 개인의 노력이 아닌 교사, 학교, 학부모, 컨설팅 업체 등 외부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하는 공정하지 못한 제도다.’ 이것이 의제 1·3·4의 공통된 의견이다. 물론 이러한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했을지라도 학종 축소에 대해서는 각 의제마다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의제2의 발제자가 나왔다. 그는 자신을 현직 교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학종이 도입된 후 교실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수능(정시)이 누구에게 유리한지 물었다. 강남 3구에 거주하는 부유층 학생들과 국제고·외고·과학고 등 일부 특목고 학생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또한 수능이 사교육비 증가의 원흉이라고 말했다. 수능 상대평가가 교육의 획일화를 야기하고 ‘잠자는 교실’을 만든다고 역설했다. 나는 의제2의 주장이 학생이 자신의 진로를 찾고 교실을 좀 더 즐겁게 만드는 데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교육의 본연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대안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이 이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관건은 속도다. 학종이 지닌 수많은 부작용과 절대평가의 근본적인 문제점(변별력 상실)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장치와 수단을 얼마나 빨리 정착시킬 것인가.


의제3의 발제자는 지난번 서울 1차 숙의 토론회(세종대)에서 봤던 사람이다. 성균관대 사범대 학장 안성진 교수다. 그는 1안과 3안과 4안이 상당 부분 내용이 비슷해, 그 안에서 자신들의 주장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의제1과 다릅니다. 의제1은 정시 비율을 일괄적으로 45%까지 늘리자고 합니다.” 의제3은 정시 비율을 확대하되 그 구체적인 비율은 대학 자율에 맡기자고 주장한다. 정시가 약간 확대되는 선에서 전체적으로 수시(교과와 학종)와 정시의 비율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제3은 현행 입시 제도와 가장 유사하다. 우선적으로 수시에서 교과와 학종으로 학생을 선발하고, 이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이 경쟁에 동참하지 않은 학생들은 다시 정시의 기회를 얻는다. 어느 한 전형을 과다하게 확대하면 이런 균형이 무너질 것이라는 의견이다. “안 바꾸는 게 바꾸는 거다.” 그는 희한한 말을 남기고 무대를 내려갔다. 


의제4 차례. 발제자는 우리교육연구소 이현 소장이다. 그는 10여 년 전 내가 수능을 준비할 때 EBS 사회탐구 영역 인기 강사였다. 영어의 김기훈, 수학의 삽자루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한 극강의 스피커였으며, 사탐 영역의 신 ‘손사탐’과 감히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유일한 강사였다. 다른 강사들과 다른 점은 뚜렷한 정치 성향을 여과없이 드러냄으로써 현실의 사회문제를 자신의 수업 영역에서 적절히 섞어 학생들의 관심과 재미를 유도했다는 점. 


그의 주장은 간단했다. “문제는 상위권 30개 대학입니다.” 마치 의제3을 겨냥한 말 같았다. 이제는 스타 강사 출신 교육 전문가가 된 이 달변가는 얼마 전까지 대형 입시 학원의 CEO였으며 지금은 우리교육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다. 공론화위에 참여해 의제 연구를 담당하기 위해 보유한 학원 주식을 모두 매각하고 대표 자리도 넘겨줬다고 한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상위권 대학들이 깜깜이 전형인 학종으로 자기들 입맛에 맞는 우수한 학생들을 싹쓸이로 가져갔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평가자의 주관성이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정성평가인 학종의 특성상 대학 입장에서는 좀 더 용이하게 자기들이 원하는 학생을 데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학종의 비율을 제한하고, 그 나머지를 수능으로 채울 수 있다면 상위권 대학이 우수한 학생을 독점하고, 반대로 우수한 학생들이 상위권 대학에만 몰리는 일이 경감될 거싱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수능 시험을 인류의 큰 죄악처럼 여기는 의제2 발제자들에게 강력하게 반발했다. 


“대입 제도는 누군가는 뽑고 누군가는 탈락시키는 선발 제도입니다. 학생들을 줄 세우지 않고, 점수를 매기지 않고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학생을 뽑습니까?”


수능이 학생들을 줄 세운다는 비판을 한 의제2 발제자를 겨냥한 말이다. 


마지막 의제1 발제자는 거창한 수식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난 1차 숙의 토론회 때 자기들의 교육비전과 문제의식 등에 대해선 충분히 전달이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오늘 20분 발제는 오로지 의제2가 주장한 ‘학종’에 대한 맹렬한 비판에만 집중했다. ‘수능은 1년에 한 번밖에 안 보지만 내신 성적을 관리하기 위해선 1년 10번의 시험을 봐야 한다.’ ‘학생부를 피평가자인 학생이 직접 써서 선생님한 갖다 바치고 있다.’ ‘네이버에 학생부 컨설팅이라고 검색하면 16개 업체가 나온다.’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학부모의 절절한 하소연, ‘학생들의 의견’이라는 제목이 붙은 출처가 불분명한 그래프(절대평가 지지 44%, 상대평가 지지 56%), 학종 때문에 오늘도 거짓말쟁이가 되었다는 어느 수험생 엄마의 카카오톡 메시지. 시민 참여자의 감정을 동요하는 다소 자극적인 자료를 다수 활용했다. 


의제 발표는 쉬는 시간 없이 멈추지 않고 진행되었다. 중간중간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 조 20대 남자 대학생은 자료집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그림을 꽤 잘 그렸다. 70대 고령의 할아버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말이 많이 내 룸메이트는 자꾸 두리번거리며 몸을 베베 꼬았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쓸데없는 글이나 적고 있다. 그에 반해 여자 참가단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수업을 경청했다. 역시 어디든 남자가 문제다.


10:57 2차 및 3차 분임 토의

분임 토의가 시작되었다. 의제 발표가 끝나고 시민들은 자신이 속한 조별 공간으로 우르르 흩어졌다. 내가 족한 xx조는 지하 2층 세미나실에서 토의를 진행한다. 앞으로 계속 이곳에 모일 것이란다. 

“어제 저녁은 별로였는데 오늘 아침은 좀 괜찮더라고요.”

“난 샐러드가 있어서 좋았어요.” 

“아, 집보다는 낫잖소!” 

그렇고 그런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우리는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이번 토의의 목표는 ‘질문 만들기’. 발제자들이 발표한 의제들에 대해서 조원들이 질문을 제시하면 그중에서 가장 표(스티커)를 많이 받은 질문을 우리 조의 ‘대표 질문’으로 정한다. 그런 식으로 의제별 대표 질문을 하나씩 만든다. 총 4개의 질문이 나오며, 여기에 ‘공통 질문’을 하나 더 추가해 총 5개의 질문을 만든다. 50개 조에서 총 250개의 질문이 나오는 셈이다. 이 250개의 질문을 이따 점심 식사 후 비전홀에 모여 각 의제 발표자에게 질의할 것이다. 발표자들은 즉석에서 시민 참여단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 조가 투표해 결정한 대표 질문은 아래와 같다.

의제1: 정시 비율을 45%까지 늘리면 학생들은 지금보다 더 학교 수업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의제2: 대입제도에 절대평가를 도입해 안정적으로 정착된 사례(국가)가 있는가?

의제3: 상류층을 위한 ‘음서제’라고도 불리는 ‘학종’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은?

의제4: 아이들의 창의성을 기르고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충실하게 들을 수 있는 수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마이크를 잡고 질문을 던질 조별 대표자를 뽑아여 한다. 조원들이 나를 추천했다. 내가 머뭇거리자, 모더레이터 옆에 앉은 말이 많은 내 룸메이트가 덥석 자기가 하겠다고 나선다. “이런 건 제일 멍청한 제가 해야지요.” 룸메이트는 너스레를 떨며 실실 웃었다. 나는 살짝 당황했으나, 겸허한 표정으로 그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사람들이 자지러지며 웃었다.   


14:52 의제별 대표자와 질의응답


1조부터 50조까지 시민 참여단 총원이 비전홀에 다시 모였다. 50개 조의 대표자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자기네 조가 호명되길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질문을 던지고 발표자가 답변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까마득하다. 그래서 각 조마다 추린 5개의 질문 중 한 개의 질문만 던지기로 정했다. 그렇게 되면 한 의제에 질문이 쏠릴 수 있으므로, 의제별로 균등하게 질문이 배분되도록 어떤 조가 어떤 의제에 질문을 던질지 공론화위원회 운영국이 질문을 적절히 배치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1조에서 의제1 발제자에게, 31조에서 의제2 발제자에게, 25조에서 의제3 발제자에게, 48조에서 의제4 발제자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의제2 발표자부터 시작해 역시 차례대로 4개 조의 대표자가 질문을 던진다. 그 다음에는 의제3부터 질문을 받고, 그 다음에는 의제4부터 질문을 받는다. 

이렇게 하면 모두 16개 조가 질문을 던지는 셈이고, 의제별로 4개씩 질문을 받는 셈이다. 다만 공통 질문에는 모든 발제자가 돌아가며 답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개별 질문과 공통 질문까지 합해 총 17개의 질문이 발표자에게 전달되면 한 바퀴가 굴러간 것이다. 모든 답변 시간은 2분. 시간이 넘어가면 사회자가 개입해 단호하게 끊는다. 한 바퀴가 굴러가는 데에 대략 1시간이 걸렸다. 10분간 쉬고 다시 한 바퀴를 더 돌았다. 모두 34개 조의 대표자가 발언했고, 각 의제는 8개의 개별 질문과 2개의 공통 질문을 받았다. 16개 조는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우리 조도 속해 있었다.

현장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돌아가며 각 조 대표자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불과 30분 전에 모든 조의 질문 내용이 정해져 종합 상황실에 전해졌으므로, 어느 조가 어느 발제자에게 질문을 던질지는 질의응답 도중 실시간으로 정해져 사회자와 각 조 대표자에게 전달됐다. 어수선한 와중에도 발제자들은 질문에 집중해 2분 안에 답변을 마쳤다. 

쉬는 시간에 잠시 나가 비전홀 밖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구경했다. 공론회위는 숙소 곳곳에 이렇게 참여단이 자율적으로 질문과 의견을 적어 붙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는데 벌써 수십 건의 의견이 포스트잇에 적혀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이를 ‘질문 주차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언성이 높아지더니 싸움이 일어났다. 자세한 전후 맥락을 모르지만, 아무튼 엄숙하고 따분한 일정 속에서 작은 파란이 일어난 것 같아 호기심이 동해 가만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싸움의 원인도 대결의 두 주체도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자리로 다시 돌아갔더니 마침 내 뒤에 ‘참관인’이라고 적힌 목걸이를 건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바로 어제 계성원 숙소에 난입한 ‘전교조’들의 행태를 곱씹으며, 해당 세력이 의제2를 지지한 찌라시 돌렸다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의제2 발제자는 심지어 이곳 현장에서 그런 찌라시를 참여단에게 돌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쉬는 시간이 다 끝나가는 데도 아직 자리에 돌아오지 않은 의제2 발제자를 겨냥해 “왜 이 분은 아직도 자리에 돌아오지 않으셨을까요?”라고 말하며 비아냥거렸다. 

그나저나 이 참관인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지? 이렇게 발제자를 비꼬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인가? 아까 싸움의 두 주체 중 한쪽 역시 ‘참관인’이라고 적힌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일종의 감시단일까?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참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내가 본 목걸이의 종류를 나열하면 이렇다.


시민 참여단

스태프

발표자

PRESS

참관인

지원단

검증위원

모더레이터


이들 말고도 더 있을 것이다. 이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시민참여단은 이들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등에 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한 것은 이런 무심함이 아니었다. 내 뒤에 앉은 ‘참관인’들은 의제2 발제자가 대답할 때마다 코웃음을 치며 ‘웃기고 있네’ 따위의 비아냥을 섞었다. 대체 왜 저러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은 마치 절대평가와 학종이 인류를 멸망시킬 핵폭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우선, 참관인이라는 중립적 입장을 취해야 할 사람들이 이번 대입 제도 개편을 위한 의제들에 대해 개인 의견을 외부로 (이렇게 부주의하고 서슴없이) 표출한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 방식 또한 무척 상스럽고 치졸하다는 점에 더욱 경악했다. 시민 참여단에 버젓이 앉아 있는데 그 뒤에서, 발제자가 발언할 때마다 초딩도 하지 않은 유치한 비난을 쏟아내는 참관인들의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  

각 조 대표자들은 벌벌 떨며, 미리 적은 메모지만 쳐다보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유창하고 매끄럽게, 두세 가지의 질문을 마치 하나의 질문인 것처럼 속이며,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한다는 듯, 긴장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며 질문을 던졌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비전문가들이 도출해낸 질문의 질과 양은 고만고만했기에 겹치는 질문도 많았고, 일견 의미 없어 보이는 질문도 많았다. 

마지막 조의 질문이 끝나자 진행자가 폐회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은 엉덩이를 의자에 떼고 식당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18:20 의제 상호토론

식사 후 다시 비전홀에 모였다. 무대에는 총 9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가운데 사회자 좌석을 중심으로 오른쪽 네 좌석, 왼쪽 네 좌석. 상호 토론 시간이다. 무려 110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4개의 의제 발표자들은 각 25분씩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자기의 의견을 부각하고 상대의 반박에 재반박할 기회를 얻는다. 

주도권을 쥔 발제자는 25분이라는 시간 안에서 최초 한 번씩 모든 상대 발제자(세 팀)에게 질문을 돌려야 하며, 질문을 받은 팀에서는 한 번 반박할 수 있고(1분) 발제자 역시 한 번 재반박할 수 있다. 질문을 받은 팀이 재재반박을 하고자 해도 주도권을 쥔 발제자가 거부하고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면 재재반박을 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모든 상대방에 대해 한 번씩 질문을 던진 후에는 자유롭게 남은 시간을 활용하면 된다. 한 팀에만 집중적으로 질문을 던질 수도 있고, 골고루 질문을 분배할 수도 있다. 토론회의 사회는 한국갈등학회 서정철 이사가 맡았다. 

자리 배치는 다음과 같다.


(시민 참여단이 보기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려대 입학처장 김재욱 교수(의제3)

부산대 전 입학처장 김현민 교수(의제3)

중부대 교육대학원 안선회 교수(의제1)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최은순 회장(의제1)

한국갈등학회 서정철 이사(사회)

누군지 기억이 안 남(의제1)

좋은교사운동본부 대표(의제1)

SK이노베이션 부장(이름은 기억이 안 남, 의제4)

우리교육연구소 이현 소장(의제4)

25분씩 네 차례, 여기에 중간 의사진행발언 시간까지 합쳐 총 110분간 진행된 이 토론회의 일거수일투족, 일구일언을 여기다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토론회를 보고 내가 느낀 각 의제에 대한 인상을 가볍게 정리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아래 토론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과 감상에 의거한 것이므로 신빙성은 극히 낮다.) 


의제1

“자!” “자!” “자!” 한 문장 안에서 그는 이 “자!”라는 감탄사를 서너 개 집어넣었다. 뭔가 이를 바득 갈고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선명히 내세울 때, 혹은 상대의 날카로운 지적을 비웃으며 만반의 반격을 가할 때, 우리는 이 “자!”라는 감탄사를 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질문을 받아도, 어떤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그는 “자!”라며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쏟아냈다. 


의제2

“PPT x쪽 좀 띄어주세요.” 매 질문에 PPT 자료를 띄어가며 열변을 토한 팀. 하지만 그 PPT를 켜느라 귀한 시간(1분)의 20%를 써버렸다. 의제2 토론자 중 한 사람은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한때 대한민국 수험생 사이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유명한 인기 강사였으나 지금은 교육 정상화를 위해 시민 단체(?)에 투신, 학종 확대 및 수능 폐지 및 절대평가 도입에 삶을 바쳤다고 소개했다. 강사 출신이라 그런지 말을 엄청나게 잘했다. 근데 그것밖에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의제3

가장 많은 실익을 얻은 팀. 전 부산대 입학처장과 현 고려대 입학처장이 한 팀을 이뤘다. 직책만으로 따지자면, 마치 어느 이익 집단의 당사자이자 충실한 대변인쯤으로 보이는 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쉬이 흥분하지 않고 난장판이 토론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실익을 챙겼다. 이들은 내 뒤에 앉은 참관인들로부터 “진짜 말 잘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의제4

대표 발제자이자, 사실상 의제4의 단독 입안자인 이현 선생이 주도했다. 그는 토론회가 시작한 후, 사회자가 각 토론자를 소개하고도 한참이 지나서 무대 위에 올라왔다. 왜 늦었을까? 배가 아팠나? 나의 이런 추측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는 일이 토론회 중간에 벌어졌다. 의제4가 주도권을 쥘 차례가 되었을 때 그가 마이크에 대고 이런 멘트를 날렸다. “사회자님, 혹시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사회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토론회를 참관한 뒤 내가 알게 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의제1에 대한 의제4의 반박: 현재 지방대의 입학생 정시 비율은 매우 낮다. 그런데 전국의 모든 대학에 대해 정시 비율을 45% 이상으로 올리라고 강제하면 지방대는 다 죽는다. → 의제1: 지방대도 올려야죠! 안 그럼 죽든가!

-의제2에 대한 의제4의 반박: 학종 확대 이후 사교육비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학종이 사교육비 부담을 경감시킨다는 주장이 거짓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다. → 의제2: 물가상승율을 고려하면 그리 의미 있는 증가율은 아니다.

-의제3에 대한 의제1의 반박: 대학에 자율성을 줬더니 학종 비율이 급증했네? → 의제3: 의도한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의제4에 대한 의제2의 반박: 학종이 확대되면서 특목고의 명문대 진학이 가속화되었다고 비판하는데, 만약 정시를 다시 확대해도 여전히 특목고 학생이 명문대를 휩쓸어버리면 그때 어떻게 할 것인가? → 정시로도 특목고가 명문대를 독식하면 인정해야지. 그 결과는 우리 사회가 수용해야 한다.

-의제2에 대한 의제4의 반박: 수능 절대평가를 시행할 경우 동점자가 다수 발생하는데, 이들에 대해 면접 등 정성평가로 변별하겠다고는 하지만, 대입 일정상(11월 수능 시행, 12월 성적 발표, 1~2월 모집, 3월 입학) 평가 자체가 불가능하다. → 답변 없음

-의제1과 의제4에 대한 의제3의 반박: 의제1은 ‘정시 비율 45% 이상 강제’, 의제4는 ‘대학의 학종 모집 비율이 교과 모집 비율보다 높게 정해질 수 없도록 제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시 제한 및 정시 확대 유도’를 주장하는데, 그런 식의 인위적인 조치를 대학에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느냐? 만약 의제1이나 의제4가 통과될지라도 그 주장이 실현되겠느냐? → 할 수 있다. (의제1 & 의제4)    


각 의제별 다툼은 마치 꼬리잡기 게임처럼 일방의 주장을 다른 일방이 꼬집고, 그 일방의 뒤통수를 또 다른 일방이 후려치고, 뒤통수를 후려친 일방이 잠시 숨을 고르자 맨 처음 꼬집힘을 당한 일방이 다리를 걸어버리는 형국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각 의제에는 서로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치명적이고 첨예한 대립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네가 살면 나는 죽는다. 


토론회는 재밌고 유익했다. 자기네 의제의 약점은 그 누구보다 본인들이 잘 알았다. 개별 발제와 질의응답 때까지만 해도 그 취약한 맨살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물론 상대적으로 그 맨살의 범위가 압도적으로 광활했던 의제2는 예외였다). 수많은 말과 숫자와 여백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교묘하고 영악하게 가렸다. 하지만 토론이 시작되자, 그들은 움츠렸던 날개를 펴고 발톱과 이빨로 격렬하게 서로를 물어뜯었다. 날개가 펴지자 연약한 맨살이 훤히 드러났다. 그래서 토론은 재밌고 유익하다.

어떤 발표자가 누구의 맨살을 할퀴고 깨물었는지, 기어코 피를 머금은 승자가 되었는지, 나는 솔직히 판단하지 못했다. 물론, 어떤 의제의 발표자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박수를 받고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어떤 의제의 발표자는 야유를 받거나 아예 청중의 머릿속에 자신의 이름조차 각인시키지 못했다. 그것이 의도한 것이건 아니건 간에, 그리고 그 의도가 관철되었건 아니건 간에, 자신의 순수한 내공으로 상대와 겨루는 토론은 이번 공론화 숙의 과정처럼 비전문가 투표자로부터 단기간에 표를 얻어야 하는 결전투표 방식에서는 대단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취할 수 있는 쇼맨십의 무대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매우 엄격하게 적용한 시간제한 룰과 토론 룰 덕분에 (이미 그 룰에 대해 사전에 4자가 합의하고 충분히 숙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의 큰 웃음을 자아낸 크고 작은 돌발 사고가 이어졌다. 돌발 사고의 자세한 내막을 여기에 옮기고 싶지는 않다. 그 ‘큰 웃음’을 글로 옮길 자신도 없고, 개인적으로는 그런 돌발 사고를 희화화해 옮김으로써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참여한 발표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지도 않다. 그들이 오늘 토론회에서 벌인 촌극은 550명이라는 청중 앞에서 실시간으로 벌이는 토론이라는 자리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토론의 일부일 뿐이지, 준비성 부족과 배려를 잊은 무례함이 빚은 추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근본에는 오랜 시간 불에 달궈진 뜨겁고 강렬한 믿음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20:50 4차 분임 토의

오늘의 공식적인 마지막 일정이다. 방금 진행된 상호 토론회를 참관하고 각 의제에 대해 느낀 점을 돌아가며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 의제를 시행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효과와 우려되는 한계점을 말하는 시간이다. 더불어 각 의제에 대해 묻고 싶은 것들을 다시 한번 도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의제1

기대효과: ‘정시 확대 45%’라는 가장 강력한 지향점, 학종으로 인한 문제점 신속히 해결 가능

단점: 수능이라는 구습으로 회귀 

질문: 수능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일반 학종 완전 폐지는 불가능한가?


의제2

기대효과: ‘학교다운 학교, 교실다운 교실, 공부다운 공부’ 가능

단점: 수능 동점자 발생 시 변별 불가, 학종 강화로 인해 교사 간 불신이 커질 수 있음

질문: 절대평가 도입에 대한 사회적 합의 및 준비가 미비할 경우 도입 시기를 이번 2022학년도 대입 과정이 아닌 더 뒤로 미뤄도 되는가?


의제3

기대효과: 대학 자율성이 확보되어 대입 제도를 탄력적 융통성 있게 운용 가능

단점: 모집 전형별 합격자의 출신 고교 및 출신 지역 등이 명명백백 공개되지 않는 이상 ‘전형별 합격자 비율 조정을 통해 대학이 입시 제도를 왜곡, 악용한다’는 비판을 불식시키지 못함

질문: 행위 주체와 이익 집단이 유일하게 일치하는 팀, 어떻게 생각해? 


의제4

기대효과: 대학 전횡을 예방하고, 지방대가 부담을 더 느끼는 방향으로 대입 제도를 개편할 수 있음

단점: 대학의 학종 모집 비율을 교과 모집 비율만큼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대학이 수용하고 지킬 것인가?

질문: 정시를 확대했음에도 여전히 특목고의 명문대 합격 비율이 높다면 승복할 것인지?


의제1,3,4에게 공통으로 궁금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현행의 부실한 교과 과정이 정상화되면, 그냥 ‘교과 전형’을 확대하면 어떨까?

학종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고 더 좋은 학종이 도입되면 수용할 수 있겠어?


21:59 특별 프로그램


주최 측(아마도 공론화위원회)이 시민 참여단을 대접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몇 군데에서 느낀다. 우선, 끊임없이 입에 먹을 것 넣어주기. 배가 고플 틈이 없다. 밥도 잘 나오고, 간식도 꾸준히 나오고, 로비에는 늘 쿠키가 마련되어 있다. 배고플 때 몰래 까먹으려고 했던 주전부리는 꺼내지도 못했다. 끼니마다 제일 적은 밥이 담긴 밥그릇을 고를 정도. 

바야흐로 2차 숙의 토론회의 절반을 한참 지나 둘째 날이 저물고 있다. 주최 측에서는 피곤하고 지친 시민들을 위해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배겨 참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지하 체육관을 개방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갈아입은 남자들이 종종걸음으로 지하로 체육관으로 내려갔다. 나도 슬쩍 내려가 몰래 훔쳐봤는데 간신히 풋살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규모였다. 농구 골대 한 쌍이 있었는데 농구를 하는 이는 없었다. 샌들이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왔다면 나도 뭐라도 했을 텐데! 

바로 윗층 명상실에서는 오늘 아침에 무대에 올라 우리에게 코어 트레이닝 스트레칭을 알려준 헬스 트레이너가 요가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미 서른 명 정도가 매트를 차지하고 앞자리에 앉아 있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오늘 특별 프로그램의 세 번째 선택지이자, 가장 많은 사람이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영화 상영 프로그램. 낮에 열띤 토론을 열린 비전홀에서 <신과 함께>가 상영됐다. 밤 10시에 정확히 상영을 시작했는데, 혹시나 자리가 없을까 걱정돼 헐레벌떡 뛰어갔는데, 웬걸, 자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 30분 정도 보다 지루해서 그냥 나왔다. 솔직히 너무 졸렸다. 그리고 주인공이 너무 착하기만 해서 짜증났다. 

세 가지 프로그램 중 뭐 하나 제대로 참여하진 않았지만, 아무튼 뭔가 문화적인 소스를 곁들이려는 주최 측의 노력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밤 11시가 좀 넘어 숙소에 들어가 대충 샤워를 하고 바로 누웠다. 잠이 쏟아졌다.


※ 이 기록은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인간군상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무례한 관찰기이자, 결코 개선되지 않을 문제에 달린 불가능한 보기들 사이에서 방황한 한 시민의 설문 후기다. 下편으로 계속..


-바꿈,세상을바꾸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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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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