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진(바꿈 회원)


일곱 살, 봄의 어느 날이었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 댁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엄마, 동생과 함께 서울역에 갔었다. 그날 일곱 살 나에겐 단 두 가지의 기억만이 강렬하게 남았다. 하나는 어마어마하게 사람이 붐비던 정신없는 서울역 광장의 모습과 또 하나는 세상 처음 느껴보는 매움(?)이었다. 


공중전화 박스에서 할머니에게 전화를 하는 엄마의 치마를 붙잡고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코와 입을 막아보아도 처음 맡아보는 그 매움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고  틀어막은 손 사이로 잠깐이라도 숨을 쉴라 치면 매운 공기가 더 들어와 숨쉬기가 힘들었다. 빨리 집에 가든, 기차를 타든 어디로든 나를 데려가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그 맵디 매운 맛, 눈물콧물 쏙 빼던 그때 그 경험은 내 인생 처음이자 그 후로 다시 맡아볼 수 없었던 최루탄 냄새였다. 


일곱 살 기억 속의 1987.


나에게 1987년의 기억은 그렇다. 그리고 그 후 책, 기사, 자료와 사람으로부터 더해지고, 더해진 1987. 하지만 이 더해짐은 곧 흩어지고 그러다가 다시 쌓이고 흩어지고를 반복했다. 민주주의 역사의 한 획, ‘1987=386’(지금은 586) 이 정도로 자리 잡고 있던 1987년 6월 항쟁. 


최근 인기영화 <1987>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단순히 영화 후반부에서 이한열로 분하는 강동원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저런 시절의 세상을 지나와서 3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과 ‘그날’은 언제 오나? 하는 답답한 마음에 더 울었다. 


6월민주포럼과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서 함께 엮은 <인터뷰:87년 6월에서 촛불까지>는 87년 6월 항쟁을 겪어낸 당사자들의 인터뷰와 책 후반 6인의 토론을 담고 있다. 사회 각계의 선생님이자 선배인 13명의 인터뷰는 1987년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 한 자락과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누구나 평등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는 것을 사실은 그전에 다 알고 쟁취한 게 아니었어요.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87년 헌법을 쟁취하고서 그 헌법에 세세하게 적힌 구절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30년 간 깨달아 온 거죠, 조금씩 전진 후퇴를 반복하면서. 87년에 우리가 무엇을 쟁취했지? 하는 인식이 저는 이번 촛불에서 분명하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 우리가 87년에도 쟁취한 것은 이거구나, 민주주의.” (40쪽)


정연순 변호사(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 모임)의 말이 굉장히 와 닿았다. 민주주의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이 30년이 걸렸다. 그런데도 우린 아직 민주주의의 완성을 맛보지 못했다. 완성이 있을까마는. 


지난 겨울, 추운 한파 속에서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치켜들고 외쳤던 건 ‘민주주의’다.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하나하나 깨닫고 완성해 가고자 30년을 보냈는데 다시 후퇴에, 후퇴를 반복하는 껍데기 민주주의를 국민들은 참을 수가 없었다. 87년 6월 항쟁에서 얻은 민주주의가 촛불을 통해 전진하였다면 우리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는 이미 그 의미가 30년 전보다는 더욱 명확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에 돌아와서 일상을 민주화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오늘에 이른 거지요. 민주주의라는 것이 구호가 되어버려서 내용적으로 민주화하는 과정을 우리 속으로, 우리들 모임에서도 실현하지 못한 것이 점점 굳어버린 거예요. 그때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이 민주화였다는 것을, 우리가 몸으로 구현했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 절절히 느끼죠.” (134쪽)


양길승 이사장(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은 지난 30년에 대한 회상을 하며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비판지점을 이야기했다. 우리 몸으로 구현했어야 했다는 말에서는 마치 저 끝 새끼발가락의 신경 하나까지도 곤두세워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정연순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양길승 이사장도 ‘과정’을 이야기했다. 1987년 6월 항쟁 그날도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삶이었다. 지난 겨울 촛불집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우린 정권을 바꿨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한 정부가 ‘민주주의’를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의 과정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뷰 중에 정대화 교수(상지대학교 총장직무대행)의 말이 생각난다. “사회는 딱 있는 만큼만 해요. 지도자를 능가하는 국민도 없고, 국민을 능가하는 나라도 없어요.” (87쪽) 이것이 바로 87년 6월에서 촛불까지 우리가 경험하고 배운 민주주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Posted by 바꿈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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