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 일상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24살 평범한 대학생이에요. 저는 집이 부산이라,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저는 보통 하루에 두 번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요. 과일 한 쪽 들고 등교했다가 1,2교시를 마치고 친구들과 밥을 먹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거나 다른 활동을 하다가 저녁을 먹고 돌아오죠.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에는 늦게까지 뒷풀이를 하기도 해요. 아마 많은 대학생들과 직장인 여러분들이 저와 비슷한 생활패턴으로 살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채식을 하면서 제일 힘든 건 이런 제 생활패턴 때문이었어요. 만약 제가 함께 사는 가족이 있고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먹을 수 있다면, 또 시간적 여유가 있고 밥상의 온기를 나눌 사람들이 있다면 비교적 채식을 하기 쉬웠을 거에요. 그렇지만 밖에서 자주 사 먹는 생활패턴을 유지하면서 매번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찾는 건 정말 힘든 일이더라고요. 메뉴 선택 폭이 굉장히 한정되어있어서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적도 많았죠. 치킨 안 먹고 삼겹살을 안 먹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찾는 건 정말 힘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어떤 인간관계에서는 우리가 메뉴선택권을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요? 그래서 메뉴를 선택할 때는 별 말 없이 있다가, 막상 음식점에 가서 먹지 않는 저에게 질문 포화가 쏟아지기도 했어요.

저는 채식을 시작하기 전에도 원래 고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어요. 삽겹살은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먹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채식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일주일만에 그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지 깨달았죠. 많은 음식이 육수로 만들어졌거나 육류 가공품(소시지 등)이었고, 고기를 메인으로 하지 않더라도 소량이나마 들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그 모든 선택지를 제거하고 나면 거의 사 먹을 게 없었죠. 특히 우리나라는 대부분 그 안에 무엇이 들어가있는지 밝혀놓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육수를 마셨을 수도 있어요. 참 채식하기 힘든 나라에요.


채식을 하게 된 이유


처음 ‘채식’의 필요성을 깨닫고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는 2008년이에요. 당시 광우병 파동이 일면서, 먹거리 안전에 대한 불안이 극대화되었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국민 건강은 뒷전인 대한민국 CEO 대통령을 규탄하며 촛불을 들었어요. 저는 그 때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급식에 나오는 소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었고 급식 때 고기만 빼고 받았던 기억이 나요. 더 충격이었던 건, ‘PD수첩’이라는 방송에서 본 소들의 모습이었어요. 그 때까지 저는 소들이 목장에서 뛰어노는 걸 상상했던지, 좁은 틀 안에 갇혀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소들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죠. 그 이후 PD수첩은 보도의 사실 여부를 다투는 소송을 여러 차례 겪어야했지만, 그걸 계기로 ‘미국식 공장식 축산’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내가 먹는 고기는 대부분 저렇게 사육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어요. 

그로부터 2년 후에는 구제역이 터졌어요. 수많은 돼지들이 산 채로 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장면, 그리고 그 돼지들이 마지막까지 살고 싶어 바둥거리며 소리지르는 장면을 봤어요. 그 때 돼지가 ‘고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걸, 생의 의지를 가진 생명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지금도 구글에 들어가서 ‘구제역’을 검색하면 나오는데, 여전히 그 장면은 머리에 선명해요. 정부는 그 이후에 돼지가 모두 사라졌고, 구제역이 해결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냈어요. 그런데 아직도 그 지역에 가보면 침출수와 가스냄새가 난다고 해요. 산 채로 묻힌 그 돼지들이 어디로 갔겠어요? 

2017년 12월 지금,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로 다시 온 나라가 들썩거려요. 수 만마리의 산란닭들이 생매장되고 있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사실 그것보다는 달걀을 싼 값에 못 먹는다는 것 때문에 더 짜증나 하는 것 같아요. 아무리 열심히 방역을 해도, 제주도에서까지 AI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와요. 이렇게 몇 번이나 대규모 가축 전염병을 겪으면서, 우린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변화시켜왔을까요? 방역을 더 열심히 하고, 우리 지역 가축이 피해를 보지 않으면 되는 걸까요? 이 규칙적인 전염병 파동은 우연일까요?


공장식 축산, 출처 모를 고깃덩어리들


우리는 매일매일 돼지, 소, 닭들을 ‘고기’라는 형태로 만나요. 그런데 이 고기가 한 때 살아있는 생명이었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단지 이것이 어떤 살의 맛인지 어렴풋이 구별할 수 있을 뿐, 이 고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온 생명체였는지 생각하지는 않죠. 광우병 당시에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불거졌고 사람들은 실태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실제 축사를 보거나 동물을 도축하는 장면을 본 사람은 극소수에요.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싼 가격에 먹는 걸 당연시 여기는 세상에서 살상에 대한 죄책감은 최대한 빨리 지워버려야 하는 무의미한 생각일 뿐이죠. 그 죄책감은 식용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식문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돼요.

가끔 식탁에 올라온 그을린 살덩어리를 가만히 쳐다보게 될 때가 있어요. 그 때 ‘이 고기가 살아생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을 때 많이 괴로워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어떤 생명의 시체를 먹는 행위가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런데 대부분 고기를 파는 음식점에 걸린 동물 마스코트들은 모두 하나같이 웃고 있어요.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가 보지 못한 끔직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하고, 고기 먹는 행위를 쉽게 정당화해요. 거기에 더해 갖가지 논리를 덧붙이죠. 인간은 옛날부터 육식을 해온 동물이다, 동물들(적어도 돼지, 닭 등)은 인간만큼 고통을 많이 느끼지 못할 것이다, 고기를 안 먹으면 단백질은 어떻게 섭취할 거냐….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허점 많은 논리들을 허겁지겁 소화하죠.

사육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라고 해요. 공장식 축산시스템 하에서 식용으로 길러지는 동물들은 그야말로 ‘생명’이 아니라 ‘상품’입니다. 동물들이 먹는 것, 움직이는 것, 행동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몸값’, 즉 상품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만 허용되죠. 축산업 관점에서는 가축이 병이 나거나 죽을 정도로 아프다 해도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까지만 약으로 버티며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각종 질병에 대한 ‘땜질’을 위해 항생제와 약물을 엄청나게 투입해요. 고미송, <채식주의를 넘어서>, p.88

닭들은 건강이 아니라 무게에 따라 값이 매겨지기 때문에 그들에게 먹이는 모이 역시 최대한 싼 값에 몸무게를 많이 불릴 수 있도록만 선택돼요. 동물에 대한 학대도 믿기 어려울 수준이지만, 우리가 싼 값에 먹는 고기들이 항생제와 호르몬 덩어리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공장식 축산의 실태가 많은 사람들을 채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 같아요. 공장식 축산시스템 하에서 생산되는 고기가 우리 몸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극심한 고통에 대한 감수성 또한 많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동물 해방>의 저자 피터 싱어는, 동물에게도 ‘쾌고감수능력’이 있다는 점을 들어, 인간이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동물에게 쾌고감수능력이 없다는 점이 소위 ‘과학적으로’ 증명된다면, 동물을 먹어도 되는 걸까요? 안락사를 통해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일 수 있다면 육식은 정당화되는 걸까요?


에코페미니즘을 만나다


제가 위와 같은 물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쯤, 에코페미니즘을 만났어요. 육식을 하는 일이 힘겹게 느껴져서 스스로 이유를 더 찾아야만 했을 시기였어요. 다른 생명을 먹지 않는 일을 위해 별다른 특별한 이유를 찾는다는 게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육식이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그저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 자주 들거든요. 그래서 언제나 저의 윤리적 감각을 깨워 줄, 육식이 자연스러운 세상에서도 꿋꿋이 채식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더 많아지기를 바랐어요. 그 때, 에코페미니즘을 만났어요.

에코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 논리가 사실상 인간 중심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해요. 예전에 남성들은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딱지를 붙이고, 동물과 다르지 않은 하등한 존재라고 여겼어요. 물론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비하 뿐 아니라, 동물에 대한 비하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여성들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더 많은 사회적 권리를 쟁취했고, 주류 남성들이 규정하는 ‘인간’ 범주 안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다면, 그 ‘사회적 경계’라는 것이 어디까지 유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동물이 인간과 다르다>는 논리는, <남성은 여성과 다르다>는 논리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결국 어떤 존재를 존중할 만한 존재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 그 존재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대상을 대할 ‘태도’를 택하고 그것을 설명할 논리와 근거를 찾아내는 것일 뿐, 그 논리와 지식이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랜 시간이 지나, 여성이 영혼이 있는 존재이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을 보면서 이 점을 더욱 뼈저리게 느낍니다. 피터 싱어처럼 ‘동물이 인간과 같이 동등하게 고통을 느끼는 존재’임을 합리적으로 밝히는 건 인간이 동물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줍니다. 그러나 이 점을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반려견,반려묘를 보면서 이미 이 사실을 알고있어요. 과학적인 근거는 아닐지라도 그들이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걸, 기쁨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걸요. 다만 육식이 정상성이 되는 시스템은 이러한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라는 패배감에 굴복하도록 만들어요.


채식주의 실천하기


식물도 생명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물론 식물도 동물만큼 고귀하고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죽이고, 무엇을 먹을 때 도덕적 책임감을 더 많이 느끼는지 솔직히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와 가까운 존재들부터 해방을 시켜나가는 것이 적절한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존중과 해방의 역사는 ‘나’, ‘우리’와 가까운 존재들부터 이루어져왔으니까요. 좁디좁은 우리에 갇힌 돼지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의 꼬리를 잘라먹고, 배터리 케이지 안에 닭들이 제대로 날개 한번 펴지 못하는 현실을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그 사람의 공감능력이 굳게 닫혀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할 거에요. “나 하나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서, 공장식 축산과 동물복지가 해결될까?” 그렇지만 인류가 육류소비를 줄이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이 많은 인구에게 고기를 먹이려면 더 싸고 잔혹한 방식으로 사육해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고기 소비량을 줄이는 것은 공장식 축산을 탈피하는 가장 적절하고 빠른 길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동참을 권유한다면 더 효과적인 저항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할 수 있어요. “고기를 하나도 안 먹으면 뭘 먹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물론 쉽지 않지만, 할 수 있어요. 오히려 저는 집에서 반찬을 만들기도 하고, 새로운 외식음식을 도전해보면서 채식 이전에는 몰랐던 맛을 더 많이 알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화가 많이 줄어들었고, 마음이 건강해졌어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음, 그 마음이 저를 더 강하고 건강하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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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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