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하(바꿈 청년네트워크)

현재 야권 최다선인 7선 이해찬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상황은 1987년 6월 항쟁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에 준해 당이 비상하게 대응해야 한다. 24시간 대기한다는 비상한 마음으로 현 국면을 타개해야 한다." 비장함이 전해진다.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1987년 6월 항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현재와 비슷한 상황이라면 30년 시차를 초월해 2016년 우리에게도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1987년 6월 항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먼저 기억할 대목은 1987년 6월 항쟁은 6월 한 달 사이에 발생한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1980년 광주의 비극 이후 도도히 성장한 민주화 운동의 절정이자 결실이었다.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눈 정권의 만행은 구전과 기록으로 퍼져나갔고, 광주의 진실을 접한 청년들은 시대적 아픔에 공명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84년 하반기 대학 총학생회가 부활했고, 1985년 2월 총선에서 관제야당 민한당이 몰락하고 김대중과 김영삼이 창당한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신민당은 1986년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명 서명운동을 추진했다. 정치적으로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선명야당이, 사회적으로는 재야와 청년을 중심으로 한 조직운동이, 전두환 정권과 각을 세우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민주화 운동의 성장과 확산을 경계한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1985년 민청련 의장 김근태는 남영동에 끌려가 전기고문을 당했고,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폭로되었다. 6월 항쟁이 있던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은 물고문 끝에 사망했다.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이 저지른 고문 범죄를 은폐하고 조작했다. 국민적 공분이 일었고, 양심적 종교인과 지식인 시국선언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전두환은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면서 정권을 연장하려는 꼼수를 획책했다. 대통령 직선제 도입이 담긴 헌법 개정 논의를 중단하고, 1988년 2월 자신이 정권을 이양한다는 내용의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1987년 5월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한 전두환의 호헌조치에 맞서 야당과 각계 운동단체는 해방 후 최대 규모 연합기구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국민운동본부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적 지도력을 확보하고,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 개최를 결정하고 준비했다. 6월 9일 국민대회 출정식에 참여했던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 총에 맞아 쓰러졌다.

엄청난 반발과 저항이 몰아쳤다. 6월 10일 전국 514곳에서 총 50여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한 번 폭발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전국적 규모의 집회가 계속됐다. 도로의 차들은 경적을 울렸고, 거리에는 넥타이 부대가 가세했다. 6월 26일 열린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 각지에서 180만 명이 참여했다. 6월 10일 이후 17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모두 2천1백45회에 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은 비상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은 후계자 노태우를 내세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훗날 밝혀졌지만 6∙29 선언은 국면전환을 위해 전두환이 기획하고, 노태우가 실행한 집권세력의 합동 공연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시민들은 6∙29 선언을 정권의 항복으로 받아들였고, 야당은 직선제 이후 전개될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과 분열의 길로 접어들었다. 6월 항쟁의 중심이었던 야당, 청년, 노동자, 시민은 구심을 잃었고 정국의 축은 급속히 재편됐다. 그렇게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가 진행됐다. 결과는 828만 표를 얻은 노태우의 승리였다. 김영삼은 633만 표, 김대중은 611만 표를 얻었다. 민주진영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선거를 마치고 나서야 정권 교체와 시대 교체의 사명을 걷어찬 과오가 보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지금은 2016년이다. 

2016년으로 돌아오자. 지난 11월 5일 토요일 광화문 광장에는 20만 시민이 들어찼다. 시민들은 최순실에게 막강한 권한이 위임되었고, 미르∙K재단의 각종 비리와 유착에 대통령이 관계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성난 민심은 대통령 퇴진과 하야를 외치며 거리를 밝혔다. 대통령 지지율은 조사 이래 최저인 5%로 추락했다. 최순실에게 도움 받은 것을 인정한 첫 번째 사과와 관계단절을 선언한 두 번째 사과가 있었으나 민심을 돌리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일했던 김병준 교수를 총리로 지명해 반전을 노렸으나 역부족이었다. 대통령이 부정과 비리에 연루 되었다는 혐의를 벗지 못함으로써 정치적 권위와 권능을 상실했다. 전국 각지 시민들은 물론이고 이재명, 박원순, 안철수 등 야당 소속 정치인들이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47명은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떼고, 2선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11월 12일 <민중총궐기>와 12일 이후 대응이 주목 받고 있다.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시민들의 의지가 확고하고, 명분과 이유 또한 확실하다.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범죄에 대한 책임과 최순실과의 관계가 맞물려 있다. 수사기관이 대통령을 직접 조사해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진실 규명에 편안한 조건에서 수사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는 하야, 국회와 헌법재판소를 통과해야 하는 탄핵, 2선 퇴진 후 거국내각 구성 등 어떤 방법이 구현되어도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시국은 점점 엄중해지고 있다. 이해찬 의원 말대로 1987년 6월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런데 앞에서 봤듯이 6월 항쟁은 불완전한, 절반의 시민혁명이었다. 2016년에도 집권세력은 대통령 거취와 무관하게 정국 전환을 시도할 것이고 상대의 실책과 균열을 유도할 것이다. 2016년에 1987년을 대입하려면, 성공과 실패를 분별해 실패를 줄이고 성공을 확대하는 경로를, 변화한 시대적 조건에 맞게 찾아야 한다. 
  
6월항쟁의 성과와 한계는 무엇인가?
  
1987년 6월 항쟁은 ① 정권의 폭력성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저항 ② 분노와 저항을 조직하여 표현할 수 있는 민주화 운동 그룹이 연합을 통해 일관된 메시지와 행동 전개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 ③ 넥타이 부대 등 중간층 시민들의 호응과 참여 덕분에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① 정권 폭력 규탄,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고 ② 대선 국면을 맞아 연합이 해체되며, 분열과 반목을 거듭했으며 ③ 넥타이 부대 등 민주화 운동의 주력이 아닌 시민들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추상적이고 강경한 이론과 구호에 치우침으로써 전두환이 설계한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보완하고 채워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2016년 한국의 시민들은 ①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 등이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축적하고 부정한 방법과 특혜를 활용해 결실을 누려온 것과 대통령의 공적인 권한을 사적으로 나눈 것에 강력한 분노를 공유하고 있으며 ② 최대 규모 연합은 존재하지 않지만, SNS를 통해 메시지와 행동을 조율한다. (#그런데 최순실은?) ③ 그리고 이런 국면을 주시하고 주도하는 사람들은 1987년 넥타이 부대에 해당하는 시민들이다. 수십만이 결의했던 운동 단체는 사라졌지만, 자신들의 손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사람들과 민주화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세대가 사회를 받치고 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보완하고 채워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11월 12일 <민중총궐기>까지 그리고 최소한 당일에는 시민들이 공유한 분노의 범위에서 이슈를 찾아내어 문제를 제기하자. 기업, 언론, 기타 모든 사회 문제를 11월 12일에 해소하려 애쓰지 말자. 정말 중요한 문제는 박근혜의 범죄를 가려내는 것과 합당한 징벌을 내리는 것이다.
  
둘째. 박근혜 이후 추진해야 하는 문제와 대안을 시민과 함께 작성하자. 특히 여성․청년․청소년의 참여와 권한을 대폭 확대하자. 과거와 다른 시민 네트워크의 실체는 이들 단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때 조직적 기반을 갖춘 단체 및 정당의 시스템과 역량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시민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광장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성취의 기억과 경험이다. 
  
셋째. 연대와 단합은 박근혜 대통령 하야로 인해 60일 안에 선거를 실시할 때, 다른 문제들과 함께 다루어질 수 있다. 연대와 단합을 자주 주장한다고 힘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경직된 메시지와 행동 통일은 활력과 긴장을 떨어뜨린다. 정당과 시민이, 문재인과 박원순이, 다른 의견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시대 과제를 새롭게 쓰는 것이다. 1987년 이후 30년의 과오를 청산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해방과 동시에 강제된 국민의 자리에서 많은 일을 했다. 1987년은 국민에서 시민으로 진화한 첫 관문이었다. 청년 학생의 헌신, 정치 거목과 사회 원로의 무게감이 관문을 통과하는 중심이 되었다. 그 후 30년이 지났다. 시민지성은 고비마다 참여와 투표, 행동으로 현대사의 방향을 잡아줬다. 정치적 리더십 구조와 시민을 중심에 둔 거리와 제도의 교감은 늘 확인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분노와 저항, 청산의 힘이 새누리당 지지자 전반을 향할 이유는 없다. 오늘의 파국에 대한 지지 집단의 회고와 성찰은 여론과 투표를 거쳐 반영될 것이며, 이명박과 박근혜를 안 찍었다고 우월한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보수는 극단적 변태를 마감하고 생존과 회복을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며, 2016년 시민혁명은 이러한 변화를 견인하거나 포용할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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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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