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 정명진 마을스토리텔러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이기화 사진작가



용산역에서 새마을호를 타니 두 시간 남짓 걸렸다. 홍성에 와보기는 처음이었다. 고맙게도 홍성역에 차를 대고 기다리던 정명진 씨 덕분에 초행길의 아득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짧은 인사를 나눈 우리는 우선 밥부터 먹기로 했다. 


"소머리국밥 어때요?" 


그의 제안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역주민의 추천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동차 핸들을 홍성시장 쪽으로 틀었다.


장이 서지 않는 시장은 몹시 한산했다. 5일장 날이라면 어림없었을 시장통을 차를 타고 시원스레 통과했다. 몇몇 점포가 문을 연 듯 했는데 손님을 끌 좌판을 벌이거나 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장 입구부터 꽤 깊이 들어오는 내내 사람 구경이 힘들었다. 유명하다는 소고기국밥집에 들어서서야 점심식사 중인 몇몇이 보였다. 


소박하지만 맛깔스러운 밑반찬에 펄펄 끓는 국밥 뚝배기가 나왔다. 밥 한 공기를 척 말아 냅다 먹었다. 아침을 거른 탓에 허기졌던 터였다. 속을 얼추 채우니 생각나는 게 또 있었는데, 막걸리였다. 안 그래도 우리가 앉은 테이블 주위론 동네 어르신들의 반주(飯酒)자리가 한창이었다. 갓 썰어온 두툼한 수육에 딱 한모금만 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얘기해도 좋을 텐데요."  


내 목소리가 아니다. 정명진 씨 역시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어쩜 이렇게 생각이 하나같은 지. 우리는 먹지도 못 할 막걸리를 뚝배기를 비우는 내내 목 놓아 불렀다.


약속된 인터뷰 장소는 그의 집이었다. 살림집 안에 낯선 손님을 들이는 일이 번거로울 텐데도 흔쾌했다.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에 있는 그의 집에 들어섰을 때 적잖이 놀랐다. 우선 크기에 놀랐다. 필지만 598평이란다. 오래되었지만 정갈한 한옥집도 멋져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마당 앞쪽으로 나있는 잡초 무성한 밭이었다. 저 잡초 밭에서 토마토도 나고 호박도 난다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명색이 귀촌 6년차라던데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소개가 늦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정명진, 귀촌 6년차지만 농사는 짓지 않는다. 10년간 신문기자생활을 하다가 작년에 그만뒀다. 그중 반은 서울에 터를 잡고 통일뉴스 기자를 했고 반은 이곳 홍성에 와 홍성신문 기자생활을 했다. 그의 귀촌 행엔 아내의 역할이 컸다. 결혼 초부터 시골에 가서 살자했던 아내의 바람 따라 농촌생활이 가능한 지역신문사로 직장을 옮겼다. 


"아내가 결혼할 때부터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했는데 저는 그걸 아주 먼 미래로 생각하고 살았어요. 그러던 중에 귀농운동본부라는 사이트에서 홍성신문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채용공고를 보게 됐어요. 저도 마침 통일뉴스가 아닌 다른 언론사로 옮기려던 차여서 때도 맞았죠. 홍성신문은 군민들이 주주가 돼서 만들어진 신문이에요. 창간 당시 농민회, 전교조, 와이엠씨에이 등에 계신 분들이 주도해 만들어졌죠. 그때 제 생각이, 지역에 이렇게 좋은 신문이 있었네? 그러면 나는 지역에서 정론을 찾아도 되겠다 싶었어요. 저는 제 꿈인 기자를 계속 할 수 있고 아내는 시골에 살 수 있고 우리 둘이 모두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홍성에 왔죠." 


신문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열심히 일했던 그가 돌연 작년 9월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대신 두 아이의 등하교를 책임지고 읽고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아침마다 밭에 돋은 잡초를 한두 개씩(!) 뽑고 저녁마다는 사람 만나러 마실 나가는 일상을 얻었다. 그렇다고 언론에 대한 고민까지 두고 나온 것은 아니다.   


"홍성신문을 그만두고 나서는 마흔 될 때까지 어디에 속하지 않고 글만 쓰고 싶었어요. 프리랜서 기자가 돼서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 쓰려고 했죠. 여전히 제 고민과 관심은 언론과 미디어 쪽이고 앞으로 제가 미디어에 담고 싶은 것이 바로 농촌마을, 마을공동체 이야기에요. 지역신문도 다 담지 못했던 작고 아기자기한, 재밌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은 거죠."


아홉 살 호연이와 다섯 살 호승이, 두 아들을 둔 가장이다 보니 신문사를 섣불리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다행이 아내가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했고 그가 여기저기 써내는 원고료를 더하면 저축은 못해도 생계를 유지할 만큼은 됐다. 도시에 살 때만 해도 가장 걱정거리였던 집세부담도 덜었다. 비어있던 집을 전세 내어 살고 있는 중인데, 어마어마한 필지를 자랑하지만 전세금이 서울 원룸의 월세 보증금보다 적다.  


생활기반을 재정비한 그가 준비하고 있는 것은 미디어협동조합이다. 10년 간 썼던 기자직함 대신 '마을 스토리텔러'가 되어 홍동면에 있는 지역센터 마을활력소에 다닌다. 마을활력소에 사무실을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곳의 정식 직원은 아니란다.


"충청남도에서 올해 사회적경제 청년활동가 지원사업을 시작했어요. 사회적경제 분야에 취업 또는 창업을 할 사람이 그 지역에 있는 협력사업장을 택해 1년 동안 근무하는 건데요, 그 1년 동안 취업이나 창업을 준비할 수 있게 지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내년에 미디어협동조합 창업을 준비하느라 마을활력소에 있는 거죠." 

  

사실 그를 만나기로 하고 나 혼자 상상했던 그림들이 있다. 귀촌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들 말이다. 마당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농기구들, 사람의 손길이 보이는 논밭, 사람소리 왁자한 새참시간 같은 것들. 아마도 내가 생각했던 것들은 귀농인의 삶이었던 것 같다. 전형적이라 여겼던 농촌의 풍경을 제멋대로 그의 삶에 덧씌웠다. 귀농과 귀촌이 다를 거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무지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마을 스토리텔러도, 미디어협동조합도 낯설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 대한 약간의 낭만을 가지고 내려오는 젊은 친구들이 있어요. 근데, 특히 20대 친구들은 경험도 없고, 돈도 없어 땅을 살 수도 없는 처진데 이 친구들이 와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기란 불가능한 거죠. 물론 그게 실험적으로 되고 있는 곳도 있어요. 하지만 과연 농촌에 내려온 모든 젊은이들이 농사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키울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있어요. 요즘 제 관심은 농적인 가치, 그러니까 도시는 갑갑하고  농적인 가치는 좋은데 와서 농사짓기는 싫은 젊은 사람들이 와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가에 있어요. 왜냐면 제가 그렇거든요. 농사짓는 게 즐거워야 되는데 제가 해보니 아주 못할 짓이더라고요." 


삼십 대인 그보다 먼저 농촌에 내려온 선배세대들은 대개 농사를 지었다. 와서 땅도 사고 힘들지만 농사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는 아침마다 밭에 나가 풀 몇 개 뽑는 것으로 농사는 다 했다. 정명진은 나와 같은 이들이 생각하는 전형을 깨고 보다 다양하고 가능성 있는 농촌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점점 귀농에서 귀촌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농사로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농촌의 서비스로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와 같은 고민을 갖고 있는 몇몇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귀촌한 친구들 중에 도시에서 디자인 하다 온 친구, 라디오피디 했던 친구, 미디어 교육에 종사하던 친구, 영상 찍다가 온 친구. 이런 친구들하고 네트워크가 돼서 지역의 콘텐츠를 만들어 담아보겠다는 거죠. 또 하나 중요한 거는,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 지역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일인가를 고민하는 거예요. 그게 안 되면 일이 성립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지역의 홍보,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사회적 미션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미디어협동조합 창업을 준비하면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지역의 이야기를 발굴해 전하는 일이다. 그래서 ‘마을 스토리텔러’다. 예를 들어, 어느 마을에서 도시 사람들이 와서 구경도 하고 관광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마을 정자를 만들기로 하고 마을 어르신들이 손수 정자를 만들었다. 지역 신문에는 사진 한 장, 한 줄의 기사로 끝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정명진은 이 이야기를 동네 사람들이 왜 정자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어떤 마음으로 지었고 그 과정엔 무슨 일이 있었지? 등을 취재해 스토리를 만들고 전하는 일, 작은 이야기도 좋은 읽을거리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야기가 있으려면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의 작업은 마을 공동체가 살아 있을 때 가능하기도 하다. 그가 오가는 마을활력소에서 마을 공동체 활성화사업으로 하고 있는 마을 만들기 운동이 중요한 이유다.  


"아내가 둘째 호승이를 임신했을 때 제가 신문사 출근했다 퇴근하고 오니까 이러더라고요. ‘나 오늘 한 마디도 못했어. 사람 한 명이 안지나가고 차만 다녔어.’ 시골 마을은 왠지 공동체가 있을 것 같잖아요? 마을에 공동체가 없어요. 마을 만들기를 하는 이유가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에 하는 거거든요. 지금 여기도 보세요. 사람이 없잖아요. 사람이 있어야 공동체 활동도 하죠. 지금 일본은 ‘소멸 가능한 지자체’라는 말이 화두래요. 일본은 우리보다 10년 정도 빠르잖아요. 인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면 언젠간 이 지자체는 소멸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나라도 시작되는 건데, 우리도 시장 가봤잖아요. 할아버지들 밖에 없어요. 여기도 고령화가 20%가 넘는 초고령화 지역이에요." 


결국 사람이 계속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게 마을 만들기라는 건데, 그의 고민도 여기에 맞물린다. 이야기는 공동체에서 나오고 공동체는 지속 가능한 구조 속에서 만들어 진다. 농촌의 지속성은 그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을 때 가능하고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서 다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가 미디어협동조합을 만들어 담아내려는 ‘이야기’는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 계속 살만한 곳으로서의 농촌 마을 이야기를 담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모인 사람들이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무슨 워크샵이 있어서 서울에 갔다가 영등포역 건널목을 건너는데, 맞은편에서 한 150명쯤 되는 젊은 사람들이 우르르 건너오더라고요. 제가 서울에 살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영상을 찍어놓고 싶을 정도로 놀랐어요. 어떻게 젊은 사람들이 저렇게 많지? 여기는 노인이 많은 게 비정상이지만 도시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게 비정상으로 보였어요. 요즘 도시가 너무 살기 힘들어졌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저들끼리 더 경쟁을 하게 되고요. 특히 20대들. 주거 문제나 일자리 문제도 그렇고. 요즘 귀촌이 늘고 있어서 이 친구들 중 누구는 분명히 내려올 것 같은데 이들을 농촌에서 어떻게 먹고 살게 할 수 있을까가 제 고민이에요." 


그는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경제가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내려와 농사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렵기 때문에 마을기업,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농을 기반으로 한 경제로 마을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시켜야 청년들도 과감히 들어올 수 있을 거라 내다봤다. 농촌에 젊은이들이 모이면 도시 문제도 나아질 거라 덧붙였다.


"시골이 무너지면 사회적인 문제가 생기는 거잖아요. 도시문제는 농촌문제가 해결 안 되면 역시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도시에 모든 것이 집중되니까 문제가 생긴다고 보거든요. 여기 충남에 있는 학생들도 청년이 되면 대부분 다 도시로 가요. 다시 오는 경우가 몇 프로 안돼요. 그 친구들이 남아 있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해요. 농촌이 잘 살아서 인구가 분산되면 도시도, 농촌도 지금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귀촌해 6년 살아보니 좋다고 했다. 부러운 마음에 그래도 불편하거나 싫은 점이 있지 않겠느냐 짓궂게 물어보니 분명히 뭔가가 있겠지만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 꺼내든 말이 불안함이었다. 마흔이 되기 전 5년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신문사를 나왔지만 청년활동가 지원사업이 끝나는 내년부터는 당장 고정수입이 끊긴다. 올해의 준비기간이 끝나면 미디어협동조합으로 하다못해 무라도 썰어야 한다. 농촌 컨텐츠로 같이 하는 친구들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을지, 애가 딸린 30대 청년들이 먹고 살 수 있을지 불안하다 했다. 


어쩌면 농촌에 내려와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기댈 곳 없음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농사도 짓지 않고 직업도 없이, 나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는데 애환이 없을 리 없다. 소고기국밥을 먹을 때부터 나왔던 막걸리 타령은 인터뷰를 하는 내내 계속됐다. 정말 술이 고파서라기보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한정된 시간이 아쉬워서 그랬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아프고 쓰린 것들은 막걸리 타령에 흘려 넘겨버려야 했다. 


"여기서 계속 살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살고 있는 공간이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고, 농촌이라는 곳이 지속가능했으면 좋겠어요. 젊은 친구들도 더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제가 하려는 미디어협동조합도 그에 맞는 방식으로 풀어내려고 해요."


인터뷰는 호연, 호승이 하교 시간에 맞춰 끝났다. 아이들을 마중해 돌아오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참, 뭐가 될지 모르겠는 사람 같다고 말이다. 나쁜 표현은 아니다. 10년 간 기자를 했다니 그런 줄 알지 직업 없고 불안정한 지금 생활이 썩 어울린다. 역시 나쁜 마음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어폐가 있는 표현이 되지 않을까 고민 하던 중에 그가 블로그에 써놨던 소설가 김훈의 글귀가 떠올랐다. <신문사를 그만둔 지 50일이 지났다>라는 제목으로 쓰인 글 말미에 그는 이런 글을 인용해두었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그런데 노는 거, 그게 말이 쉽지 해보면 어렵다. 놀면서 돈 쓰고 돌아다니는 거는 노는 게 아니라 노동의 연장이다. 돈에 의지하지 않으면 못 노는 거는 돈 버는 노동세계와 연결돼 있어서 노는 게 아니다. 노는 거는 그 자리에 있는 세상하고 단 둘이 노는 거다."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김훈의 말을 따라보자면 그는 참 잘 놀고 있는 것 같다. 도시에서 바튼 숨을 쉬며 사느라 놀 줄도, 그렇다고 제대로 살줄도 몰랐던 나로서는 부러운 일이다. 그가 제 몸을 직접 부딪쳐 타진하고 있는 농촌생활이 지속가능하기를, 그러기 위해 부디 그가 세상과 좀 더 신나게 놀아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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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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