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김홍선 오사카국제대학 인권교육 강사

*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 바꿈이 만난 얼굴들>은 많은 이들이 외면하고 잊어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연재입니다. 그가 누구든, 어디든,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사의 증인과 삶의 현장이 있는 곳이라면 바꿈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소망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이사&오민정 사진작가

오사카에서 만난 '밀로의 비너스'


살면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너무나 당연해서 고민의 여지도 없었던 것들, 국가, 국적, 국어, 이런 것들 말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히 부여 받았다 생각했는데 사실 이것들은 때로 기막히기도 하고 우연하기도 한 시간과 사건의 결과였다. 굴곡 많은 이 땅의 역사를 생각하자니 더욱 그렇다.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강제 연행 되었던 나의 할아버지가 일본을 탈출해 당신의 고향인 충청도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황해도가 고향인 나의 외조부모가 6.25 전쟁 때 이남으로 피난을 오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속한 집안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루어진 선대의 크고 작은 결정들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국가, 갖고 있는 국적, 쓰고 있는 언어를 하나로 동일하게 만들었다. 우연한 일이다.


지난 11월,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는 김홍선 선생을 만났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표현하거니와 영락없는 오사카 아줌마가 따로 없다. 쾌활하고 수다스럽고 웃음이 많다. 그러나 예의 그 웃음 가득한 얼굴로 풀어 놓는 이야기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재일교포 2세인 그의 가족사를 들어보면 이렇다.


"일제의 수탈로 생계가 어려웠던 부모님께서 1939년 4월, 일본 시모노세키로 건너오셨어요, 그 후 오사카에 자리 잡고 신발을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일본의 징용 명령이 떨어졌지요. 아버지께서는 나라를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강제 징용까지 하라고 하니 너무 화가 나서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숨어 다니셨어요. 징용을 시키려는 일본 경찰의 폭압이 점점 심해지자 아버지는 온 가족을 데리고 히로시마 현의 산골로 도망쳐버렸습니다.“



1945년 8월 5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일본이 패전을 맞이하자 생계를 위해, 일제의 강제 연행과 징용으로 인해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내쫓기듯 일본 땅을 벗어나게 된다. 해방의 기쁨은 잠시였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어렵사리 구해서 타고 간 귀국선은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했고(1945년 8월 24일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다수 타고 있던 귀국선 우키시마마루호가 교토 근교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원인 모를 폭발로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500명 이상의 한국인이 수몰되었다.) 한반도에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끝내 귀국선을 마련하지 못한 김홍선 선생의 가족들은 히로시마에서 조금 더 생활하다가 종전직후의 혼란한 상황이 나아지면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이 현재의 60만 재일교포의 시작과 맞닿아있다. 그리고 나와 김홍선 선생이 각각 태어난 국가가 달라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김홍선 선생은 1951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가 3살이 되던 해 온 가족이 오사카로 터전을 옮긴다.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파친코 가게에 화재가 나면서 히로시마에서의 생활기반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갈 곳이 없던 가족은 한인들이 모여 살던 부락에 자리를 잡았다.


"그 곳은 미군기지 건설공사에 인부로 일하던 교포들이 그대로 공사장 근처에 정착해 살게 된 부락이에요. 막노동꾼들이 합숙소로 쓰던 판잣집 같은 곳에 칸막이를 해놓고 여러 가구가 나눠 살았는데, 우리 가족도 한 칸을 얻어 살았습니다. 그때 살던 집근처에 건국학교라는 한국계 학교가 있었어요. 조국을 늘 그리워하던 아버지는 언젠가 가족과 함께 고향에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저희 형제들을 그 민족학교에 보냈어요. 한국어를 배우게 하려고요."


민족의식이 유별났던 그의 아버지는 곤궁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본학교보다 학비가 비싼 한국 학교로 아이들을 등교시켰다. 아버지의 교육철학에 따라 김홍선 선생 역시 건국소학교를 졸업하고 건국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김홍선 선생은 중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사고가 있었다.


"당시 큰 오빠가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기계 한 대를 장만해 밥그릇이나 젓가락을 만드는 일을 했었어요. 재일교포들이 주로 하는 막노동일 보다는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서였죠. 여름방학을 보내던 저도 가서 일을 돕게 됐지요. 기계가 찍어낸 플라스틱 제품을 빼내다 사고가 났어요. 기계에 양손이 끼어들어가 손가락이 모두 으스러졌지요.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생일이 지나지 않았을 때라 만으로 겨우 12살 때 벌어진 일이에요."


"겨우 12살이었잖아요" 하며 그가 웃었다. 뭘 몰랐다며 웃었다. 기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두 손을 다 집어넣는 어린애였다. 으스러진 손가락은 접합수술조차 할 수 없어 손목 아래로 모두 절단해야 했다. 가난한 살림에다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재일교포였기에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퇴원을 서둘렀다. 사고와 함께 찾아온 사춘기는 혹독했다.



"14살이 되던 해 외국인등록증을 만들러 구청에 가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엔 사진을 찍고 지문을 남겨야 하는 의무가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손가락이 없잖아요. 그게 너무 걱정이고 사람들의 시선도 무서웠어요. 다행히 구청 직원이 제 상태를 확인해주는 도장을 찍어줘서 일본에서 살 수 있는 등록증은 나왔지만 그때 제가 장애인이라는 것과 외국인, 한국 사람이라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고 후 학교를 그만 둔 그가 집에서 한 일이라고는 책읽기와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보기였다. 12살의 김홍선은 어느덧 18살이 되었다.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재택장애인이었던 그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낸 건 펜팔이었다.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영화잡지에 실린 펜팔모집 광고를 보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글씨 쓰기는 문제 되지 않았다. 글씨 쓰는 연습을 지독히 해온 것이다. 대화를 하는 중에 그가 직접 보여주겠다고 나섰다. 양 손목 사이에 낀 펜은 그 누구의 손가락 사이에서보다 정교하게 움직였다. 획수가 많은 한자도, 곡선이 많은 히라가나도, 자음과 모음의 간격이 까다로운 한글도 모두 반듯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시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일본사회에서 심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펜팔 편지를 안 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숨기고 가짜 일본 이름을 만들어서 편지를 주고받고 했어요. 그리고 손이 없는 사람은 더욱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그것도 숨겼어요. 그렇게 진짜 나를 숨기고 펜팔 친구를 만들었는데, 이렇게 가짜모습으로 친구를 갖고 있는 게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그래서 결심을 하고 고백했지요. 그 후 절반의 친구는 편지를 주지 않았지만 계속 편지를 주는 친구도 있었어요. 일본 사람 중에서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죠. 덕분에 세상에 나갈 용기도 생겼고, 제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을 맞는 계기도 생겼죠."


펜팔로 용기를 얻은 그는 오사카 문학학교에 등록했다. 1970년의 일이다. 비록 일주일에 한 번 듣는 문학 강좌였지만 중학교 1학년 이후 처음 나가기 시작한 학교였다. 그곳에서 재일교포 시인 김시종 선생을 만난다.  


"김시종 선생님이 밀로의 비너스엔 팔이 없는데 왜 우리는 아름답다 느끼느냐 물으셨어요. 왜일까요? 비너스에게 없는 팔과 손을 우리가 상상해서 보니까 아름다운거래요. 그때 저는 너무 놀랐어요. 양손이 없는 제 자신에게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살 때였는데, 우리의 상상력 덕분에 저도 손이 없는 그 모습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어요. 그때야 저도 이제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살아나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김시종 시인이 김홍선 선생에게 남긴 말은 "시인에게 마이너스란 없다"였다. 손이 없는 것은 마이너스의 의미가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으로 다채롭게 채워 나갈 공간이 생겼다는 것으로 느꼈다. 오사카 문학학교 이후 김홍선 선생의 삶을 보면 실로 그렇다.


1974년, 재일교포 3세들에게 한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해 11년을 꾸준히 했다. 이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일본어 강의를 맡았다. 1991년부터 시작한 이 강의는 2011년 3월까지 지속했고 2006년부터는 오사카국제대학에서 인권교육론을 담당하는 비상근 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저는 행복한 사람이에요. 저를 둘러싼 세 가지의 안 좋은 조건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덕분에 내가 원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찾아 살게 됐으니까요. 외국인으로 차별받으며 살아온 재일교포에, 중증 장애인에, 중학교도 못 나온 학력, 이런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제가 좋아하는 강의를 꾸준히 하고 있잖아요. 자기의 행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게 아니에요. 불행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행복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요. 남들 보기에 그까짓 게 뭐가 행복하냐고 해도 상관없어요. 무엇이든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된다고 전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행복을 말하는 그의 얼굴이 꽃잎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처음 사회생활을 했던 회사에서 받았던 노골적인 차별과 멸시, 한복을 입은 날이면 어김없이 달라붙던 불쾌한 시선들, 절단된 손을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던 어린 날의 기억들. 그가 말하는 행복은 불행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쳐본 선험자가 들려주는 아주 핍진한 진심이었다.


김홍선 선생이 재일교포 2세라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타고 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조부모 세대가 한반도 남쪽에 자리를 잡기로 결정한 탓에 지금 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민족이니까, 가혹한 삶에 대한 동정심으로, 역사적인 책임감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 마음이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연한 일이 아니라 우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훨씬 가볍고 자유로워진다. 당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 생각할 때 이해의 강박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로의 삶이 뒤바뀌거나 어쩌면 비슷해질 수 있었다는 우연의 가능성을 열어놨을 때 타인의 삶에 대한 오해 없는 상상이 가능해진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그의 시간을 차마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가 있던 자리에 나를 갖다 놓는 상상력은 마음껏 발휘했다. 김홍선 선생은 그렇게 만나야 한다. 밀로의 비너스를 만나듯이.








원문바로가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

티스토리 툴바